뇌세포가 없는 세균도 항생제로 인한 항균작용 등의 경험을 기억해두었다가 후대에 전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래시카 하시 미국 텍사스대 미생물학과 교수 연구팀은 사람의 장 속에 살면서 장염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세균인 대장균(학명 Escherichia coli)이 세포 속 철분을 통해 군집을 이루는 행동 양식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달한다는 연구 결과를 21일(현지시간)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대장균은 떼를 지어 군집을 형성하는 특성이 있다. 이를 스워밍(swarming)이라고 부른다. 스워밍을 통해 대장균이 가지고 있던 독성이 강해진다. 이처럼 수백만마리에 이르는 대장균이 군집을 이룰 경우 건강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연구팀은 선행연구를 통해 이전에 떼를 지었던 경험이 있는 대장균들이 다시 스워밍을 할 때 이전보다 더 효과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바 있다. 이는 일종의 학습된 기억으로 생긴 행동이지만 연구팀은 박테리아에게는 기억을 관장하는 뉴런, 시냅스, 신경계가 없다는 데 주목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대장균이 세포 속 철 성분을 통해 일종의 기억을 저장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아냈다. 연구팀이 스워밍 활동을 하는 대장균 약 1만마리 이상을 관찰한 결과, 철분을 적게 보유한 대장균일수록 다른 대장균들과 군집을 빠르게 형성했다. 독성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세포에 포함된 철분이 많을수록 군집 형성이 늦었다. 철분이 고르게 분포된 대장균은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강했다.
연구팀은 이에 대해 "철분이 낮을 때는 주변 환경에서 철분을 찾기 위해 빠르게 무리를 형성해야한다는 기억이 남은 것"이라며 "컴퓨터가 정보를 쌓아두는 방식으로 철분에 따라 특정 반응을 저장해두었다가 어떤 자극이 오면 그에 따라 즉각 스워밍 행동을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대장균은 다른 박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세포 분열을 하며 번식하는데, 대장균을 이루는 세포 속 철 성분은 세포 분열로 생성된 후손 대장균에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는 세포 분열이 거듭해서 일어난 '4세대' 대장균까지 전달되어 모체 대장균의 행동 양식을 이어받았다. 7세대에 이르러야 체내에 저장된 기억이 소멸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제1저자인 수비크 바타차야 박사는 대장균 속 철분이 핵심 역할을 하는 데 대해 "지구 대기권에 산소가 부족했던 시기, 박테리아들은 철분에 의존해 세포 분열을 거듭했다"며 "이를 통해 세포 속 철분이 박테리아 진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번 연구 결과를 통해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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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건희 기자wiss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