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320

코민테른 극동부와 한인 공산주의자들

(1) 코민테른: 국제공산당 조직 러시아에서 공산당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1919년 3월에 국제공산당(통칭: 코민테른, Communist International)을 창설했다. 코민테른은 이름 그대로 공산주의를 세계에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였다. 코민테른이 레닌에 의하여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었다는 것은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다는 의미였으며, 제2인터내셔널 슈트가르트 회의에서 레닌을 지지했던 그룹들이 대부분 여기에 참여했다. 이로 인하여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고 코민테른이 제3인터내셔널로 불리게 되었다. 코민테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다 레닌의 저작물과 앞에서 언급한 슈트가르트 결의안(볼셰비키 강령이라고도 함) 등..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한 신민회

1919년 3.1독립만세사건은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 인사였다. 일제의 정보기록에 의하면 이 운동은 국내에서 단독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중국 ‘상해(上海)의 거류민’과 연결되는 통로를 갖고 있었으며, 2월 8일 동경의 한국인 YMCA에서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동경 유학생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받은 것이다. 이 당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독립청년당은 9명의 실행위원 중 7명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었다. 국내에서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 지역 대한국민의회는 3월 하순에 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명단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3.1독립..

공산주의의 한민족 사회 유입과정

1) 유물론 철학 및 계몽사상의 유입 가 편찬한 『세계철학사』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의 철학사상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한국의 철학은 처음에 원시적인 하늘(天) 숭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존재자를 두 개의 대립하는 원소(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봉건제 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유교가 15-16세기 신유교 발생기까지 한국 철학사상을 지배했으나, 주희(朱熹)의 신유교 학설이 이식되면서 여러 가지 유물론 철학도 발생했다. 한국의 독창적 유물론 철학이 17세기 조선시대에 실학파(實學派)의 등장으로 탄생하였으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반봉건제 부르주아 철학이 침투해..

상해한인교회와 독립운동

상해한인교회가 시작된 것은 1914년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망국의 한을 품고 상해로 건너간 이들은 최재학(崔在學) 외 약 30명이었다. 이들이 영국 조계지에 있는 미해군 YMCA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예배처소를 마련하게 되었고 김종상(金種商)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일제가 이에 대해 미해군에 항의를 하고 김종삼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1915년 미국 선교사 피취(Fitch, 費啓澒)의 도움으로 중국인 YMCA 식당을 빌려서 예배장소를 옮겼다. 마침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선우혁(鮮于赫)이 망명해오자 그가 예배 인도자를 맡게 되었다. 1917년 교회는 임원을 새로 선출했는데, 금릉대학에 유학을 왔던 여운형(呂運亨:1..

신민회 망명자들의 분열

신민회 발기인들을 중심으로 망명의 진행과 망명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차 망명자들: 안창호, 이갑, 유동열 등은 중국 청도에 도착하여 청도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논의하던 중에 유동열 등이 이종호가 가지고 있는 약 3,000달러의 자금으로 청도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자는 안을 제안하여 다수가 찬성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청도를 조차지로 관리하고 있던 독일 총독의 불허로 이 제안은 폐기되었다. 결국 당초 계획대로 중러의 접경지역인 밀산(密山)에 토지를 사서 신한민촌을 만들고,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농업경영을 병행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한 다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세부계획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

신민회의 망명과 ‘105인 사건’

(1) 항일 사건들과 신민회의 망명회의, 그리고 제1차 망명 일제는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가 주관하던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재무 담당 양기탁이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양기탁은 1909년 3월에 그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회의(제1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일제의 강력한 무단통치에 의해 국내에서 활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므로 신민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면서 기회가 왔을 때에 독립전쟁을 수행하려는 계획이었다. 그해 5월에는 양기탁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설립자이자 반일적인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일제 초기 한민족 독립운동과 사상적 동향-신민회의 발기

1910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조국을 잃은 한민족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특히 만주 지방), 러시아 극동지역, 미국 및 일본 등 곳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망국의 한을 품은 한민족의 국권회복 운동은 세계 각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일본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한민족의 근거지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염원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한민족은 누구나 독립운동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과 만주에는 한민족 이주자들이 많았고, 독립운동가들도 망명하여 살고 있었다. 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먼저 이곳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병이었거나 무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제가 국내에서 이들의 반일활동을 철저히 봉쇄..

초기 러시아 정교회와 공산주의의 유입

1) 러시아 한민족 사회의 형성과 정교회의 선교 만주와 한반도에 인접해 있는 러시아 극동 연해주 지역은 불을 사용하지 못하고 동굴에 살던 고대 인류의 유적까지 발굴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 기록에 의하면,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로 이어지는 고대 한민족이 다른 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은 발해가 멸망된 이후 중국 영토였으나, 러시아가 1860년에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것이다. 러시아는 1870년대에는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까지 지배하였다. 그런데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이후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이곳으로 새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이주민들은 함경도 지방에서 계속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로 인한 흉년을 피해 들어온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였지만 아무도..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에 대한 비판

오파린의 이론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과학적 무신론의 승리와 함께 세계의 지배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아직까지 그런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과학적 무신론의 존립 근거지인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사태가 일어났을 뿐이다. 이와 같이 오파린의 이론의 대략적인 개념은 자연에서 무기물이 무기화합물이 되고, 이것이 다시 유기화합물로 변화되고, 이것들 가운데서 단백질 덩어리가 어느 순간에 원시 생명체로 “변증법적 비약”을 했으며, 이후 단계적으로 진화를 해서 오늘날과 같은 생물계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제 오파린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유레이와 밀러의 유기물 생성 실험에 대한 비판 서방에서 오파린의 유기물 생성 이론에 대한 실험으로서는 앞에서 말한..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실험과 평가

1.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중요한 실험이나 저작 ① 1953년 시카고 대학원에서 유레이(Harold C. Urey, 1893-1981) 교수는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 가설을 설명하고 이를 검증하는 실험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박사과정 학생인 밀러(Stanley L. Miller, 1930-2007)는 산소가 없는 환원성 대기를 가정하고, 수소, 메탄, 암모니아와 수증기를 혼합한 무기화합물을 고압전기를 방전하는 장치에 넣고 6일간 가열하다가 급냉시켰다. 여기서 그는 아미노산을 얻었는데, 이는 아미노산이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있으며 점차 더 복잡한 유기화합물인 단백질로 변화했을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실험은 유레이-밀러 실험으로 유명해졌며, 마치 오파린의 가설이 사실로 입증된 것처럼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