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핵산(RNA)-펩타이드 세계라는, 생물발생 이전 그럴듯한 시나리오’.
지난달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한 논문의 제목이다. ‘그럴듯한 시나리오’라는 표현이 엄격한 증명을 거친 재현성 있는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 논문이 아니라 이를 소개하는 과학 기사의 제목 같다.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은 논문이기에 ‘네이처’ 같은 까다로운 학술지가 이런 제목을 쓰게 허용했는지 읽어봤는데 그 내용의 심오함에 깜짝 놀랐다.
대학원 시절 RNA를 전공한 필자는 생명의 기원 이론 가운데 가장 유력한 ‘RNA 세계’ 가설의 매력과 한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논문의 저자들은 놀라운 지적 상상력으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험에 성공했다. 생명의 기원인 RNA 세계와 오늘날 DNA-RNA-단백질 세계를 이어주는 ‘RNA-펩타이드 세계’의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다만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라 상당한 화학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워 차마 과학카페로 소개하지 못했다. 그런데 학술지 ‘우주생물학’ 6월호에 RNA 세계 가설의 또 다른 한계를 극복한 것 같다는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이 역시 놀라운 내용이지만 앞의 결과와 달리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고 생명의 기원 시나리오에서도 먼저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이 논문을 소개하면서 내게 지적 충격을 안겨준 앞의 논문을 살짝 언급하겠다.
1980년대 등장한 RNA 세계 가설은 생명의 기원이 DNA냐 단백질이냐를 두고 일어난 오랜 논쟁을 끝내며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가설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DNA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 정보를 지니고 있고 DNA를 복제하려면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단백질)가 있어야 하므로 둘이 동시에 진화하지 않는 이상 오늘날 DNA-(RNA-)단백질 세계가 나올 수 없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딜레마의 생명의 기원 버전인 셈이다.
그런데 1980년대 초 RNA 자체가 단백질 효소의 도움 없이 RNA 가닥을 자르고 붙이는 반응을 촉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생명의 기원 분야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 여러 정황상 DNA가 RNA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자 1986년 미국 하버드대의 월터 길버트 교수는 초기 지구에서 자기 복제 능력이 있는 RNA 가닥으로 이뤄진 분자 생명체가 등장한 것이 생명의 기원이라는 RNA 세계 가설을 제안했다.
RNA 세계는 DNA냐 단백질이냐라는 논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 대단히 매력적인 가설임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라 실망스럽다. 결정적인 단계의 도약을 설명하지 못한다. 먼저 개별 RNA 벽돌(염기, 리보스(당), 인산기로 이뤄진 단위로 뉴클레오타이드라고 부른다)에서 뉴클레오타이드 수십~수백 개로 이뤄진 RNA 가닥이 만들어질 수 있었느냐는 물음이다. 물론 복제 기능이 있는 RNA 가닥이 이 일을 하지만 애초에 이런 가닥을 ‘누군가가’ 만들어야 하는데 분자 생명체조차 없는 초기 지구에서 불가능한 설정이다.
화학의 관점에서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고 있는 미국 응용분자진화재단 연구자들은 43~44억 년 전 초기 지구의 환경을 재현해 RNA 벽돌이 스스로 반응해 최대 염기 300개에 이르는 RNA 가닥을 만들 수 있음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이들은 활발한 화산활동과 소행성 충돌로 현무암이 흔했을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현무암을 갈아(표면적을 넓게 하려고) RNA 벽돌을 담은 용액에 넣어줬다. 그 결과 현무암 표면에서 반응이 일어나 RNA 가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수개월이 지나자 길이가 수백 염기에 이르렀다.
물론 가닥을 이루는 네 염기(아데닌, 우라실, 구아닌, 시토신)의 서열은 임의적이라 여기서 촉매 기능을 하는 서열을 지닌 RNA 가닥이 만들어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44억 년 전 지구의 현무암이 지천에 깔린 상태에서 이런 가닥들이 수천만~수억 년에 걸쳐 끊임없이 만들어지다 보면 이 가운데 자기 복제 능력이 있는 RNA 가닥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튼 초기 지구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RNA 가닥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인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그러나 RNA 세계 가설의 가장 결정적인 한계는 RNA가 자신의 기능을 DNA와 단백질로 넘기는 과정을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전 정보(염기 서열)는 DNA에게, 복제 반응 촉매 활성은 단백질에게 넘기고 자신은 중간 단계를 매개하며 ‘DNA-RNA-단백질 세계’로 진화했을 텐데 이 과정을 화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 루드비히막스밀리안대 화학자들은 단백질을 만드는 번역 과정에 관여하는 운반RNA와 리보솜RNA에 존재하는 특이한 염기에 주목했다. 오늘날 생명의 기원인 RNA 분자 생명체는 없어졌지만, 운반RNA와 리보솜RNA는 화학반응에 관여하는 역할을 물려받은 후손(또는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 분자에서 발견되는 몇몇 염기는 단백질을 이루는 벽돌인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형태다. 따라서 어쩌면 운반RNA와 리보솜RNA의 초기 단순한 형태에서 아미노산을 이어주는 반응이 일어났고 이게 진화하면서 오늘날 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연구자들은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화학반응을 통해 아미노산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은 RNA 분자 둘을 설계했다. 아미노산 주개(donor)와 받개(acceptor)로, 역할의 관점에서 각각 운반RNA와 리보솜RNA에 해당한다. 놀랍게도 두 분자 사이에 반응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받개의 아미노산이 여러 개 길이로 이어졌다. 펩타이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자체도 놀라운 발견이지만 역으로 운반RNA나 리보솜RNA에 왜 특이한 염기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과거 RNA-펩타이드 세계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이번 두 발견으로 RNA 세계 가설의 공백이 꽤 메워지면서 점점 더 그럴듯해지고 있다. 중력파 가설이 100년 만에 관측에 성공하며 지난 201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듯이 RNA 가설 또한 머지않아 노벨화학상을 받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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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kangsukk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