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넷째 날의 창조: 광명체들의 미세조정
1) 미세조정된 광명체들의 법칙
넷째 날의 창조 톨레도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מְאֹרֹת בִּרְקִיעַ הַשָּׁמַיִם לְהַבְדִּיל בֵּין הַיֹּום וּבֵין הַלָּיְלָה וְהָיוּ לְאֹתֹת וּלְמֹועֲדִים וּלְיָמִים וְשָׁנִים׃)고 명령하셨다(1:14). 여기서 궁창에 ‘광명(מְאֹרֹת: 메오르트)이 있어’에서 ‘있다’는 동사는 미완료동사 ‘예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을 직해하면, 그것들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이미 있었다’는 뜻으로 완료동사 ‘하우‘(הָיוּ)를 사용했는데 두 문장의 동사를 연결해서 해석해보면, 하나님이 이미 ‘메오르트(광명체들)를 준비해두셨다가 그것들이 궁창에서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징조와 계절과 날자와 해를 이루는 발광체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모세는 1:15에서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그 동사들을 반복 사용하여 그런 사실을 다시 강조한다. 하나님은 궁창에 광명체들의 자리를 잡아주시면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기 위하여 빛을 비추는 운행 법칙을 정밀하게 미세조정해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넷째 날 광명체들을 궁창에서 미세조정하시기 전에 그것들을 언제 어디서 만드셨는지는 모세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땅에서 눈을 들어 ‘하늘의 궁창’에서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광명체들을 보았다. 모세는 그때 처음으로 지구에 빛을 비추기 위해 큰 광명인 해가 떴다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광경과 밤이 오면서 초생달과 무수히 많은 별들이 뜨고 지는 장면까지 환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모세가 본 환상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실제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나, 모세가 보고 이해하고 기록한 광명체들의 운행 법칙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전승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근본주의자들은 왜 히브리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는 그런 사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역된 번역성경의 문자들을 읽고 쓸데없이 과학과 싸우면서 창조 6일 하루 24시간설과 우주연대 6,000년설을 주장하고 있는가? 그들은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과학도 모르는 무지의 종교로 비난받게 만들고, 기독교를 배척하게 만들고 있다. 모세가 보았던 환상을 생각하면서 이 구절을 읽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문자대로’ 읽고 ‘문자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창조 톨레도트의 ‘욤’(하루)의 길이 문제이다. 문자적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태양의 빛에 의한 낮과 밤의 24시간 하루는 창조의 첫 날에 빛이 있게 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해석의 오류이다. 문자적으로 그런 해석이 가능할 수는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보면, 첫날의 빛 ‘오르’와 넷째 날 땅에 비친 ‘메오르트’의 빛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어불성설인 것으로 판명된다. 그 해석의 오류는 첫날과 셋째 날까지 낮의 빛은 앞에서 말했듯이 사도 요한이 그의 책에서 서술한 대로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창조를 진행하시기 위해 빛으로 임재하신 것이라고 이해를 바꾸면 된다. 첫날 낮의 ‘오르’는 주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생명의 빛이고, 넷째 날의 빛은 물질적 ‘메오르트’(광명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셋째 날까지의 낮들은 주 하나님이 모세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창조 과정의 단위라고 이해가 바꿔진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은 나머지 3일 동안에도 임재하여 창조를 계속하셨다.
둘째는 문자적 근본주의자들이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약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우주론’이다. 젊은 우주론은 영국교회 주교 제임스 어셔의 해석을 근거로 한다. 그것은 하루 24시간 6일과 창조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아담 자손들의 족보를 따라 연수를 계산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 기원전 4004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젊은 우주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우주는 약 138억 년 전 빅뱅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이라는 ‘오랜 우주론’을 과학적 상식으로 알기 때문이다. ‘젊은 우주론’과 ‘오랜 우주론’은 천동설과 지동설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두 우주관의 차이와 어느 것이 과학적 사실인지를 알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무에서 빅뱅으로 천지 만물의 창조를 시작하셨으며 창조 톨레도트는 창조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모세가 서술한 것이다. 모세의 서술은 근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당시 고대 히브리인의 지식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문제의 해답은 저절로 나타난다.
2)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대한 재인식: 옛 하늘과 옛 땅
넷째 날 창조 톨레도트에서 1:16-18은 모세가 그의 설명을 덧붙여놓은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모세가 서술한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와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는 각각 해와 달이고, 그밖에 더 작은 광명체인 별들도 있게 하셨다고 서술했다. 더 작은 병들은 달이 없는 밤에만 비치는 광명체들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광명체들이 땅에 빛을 비추게 하시고,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게 하셨다. 여기에서 ‘주관하다’는 뜻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멤쉐레트’(לְמֶמְשֶׁלֶת)는 왕의 통치권 또는 소유권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땅의 하루가 24시간으로 조정된 땅의 생태계가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제까지의 창조 톨레도트를 잘 이해하면, 이 땅에 임재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넷째 날 지구의 생태계를 조성하시기 위해 태양계의 운행을 미세 조정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때까지 하나님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요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다만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흑암을 밤이라 부르셨을 뿐이다. 밤과 낮을 묶어 하루라고 부른 것은 모세이다. 당시 모세의 상황을 되돌아 보면, 모세에게 낮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환상을 단위별로 듣고 보면서 그것들을 기록하는 시간이었고, 밤은 그런 일을 끝내고 잠자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 톨레도트의 이해는 기독교에서 창조 6일의 하루가 첫날부터 24시간이라는 설과 우주 나이가 약 6,000년이라는 근본주의적 주장들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지시한다. 이와 함께 모세가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겨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인 ‘라키아’ 우주관도 재인식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땅에서 관측하면, 모든 광명체는 대기권인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주선이 탐사해서 얻은 관측자료들이 ‘라키아’의 실체를 ‘없음’으로 확인해주었다. 그런 관측자료를 본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가 실제로는 대기권이고, 모세가 ‘라키아’를 오해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주와 지구의 나이 6,000년이라는 ‘젊은 우주론’은 이제 그만 폐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땅은 아담을 심판하시면서 하나님이 저주하셨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니, “이전 것”(הָרִאשֹׁנֹות:하리쇼노트)이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사 65:17)이라고 선포했다. 그 ‘이전 것’이 바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남아 있는 최초에 창조된 하늘과 땅(창1:1)이다. 그런 사실은 ‘하리쇼노트’에서 정관사 ‘하’(הָ)를 뺀 ‘리쇼노트’라는 말이 창세기 첫 마디에 나오는 ‘베레쉬트’(בְּרֵאשִׁית)에서 전치사 ‘뻬’(בְּ)를 뺀 ‘레쉬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며, 따라서 처음 하늘과 땅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문헌적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모세의 이해를 따르고 있었던 고대 히브리인들은 물론 그 자손들인 유대인들까지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그런 뜻으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문자주의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에 남아 있는 과제는 이제 ‘옛 하늘’과 ‘옛 땅’이 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리니 이전 것들을 버리라고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구에 임재하셔서 생태계의 창조 사역과 사람을 만드셨고, 저주하신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려고 오신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탄했다(요1:5). 그래서일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시 주어졌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라는 계시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을 주셨다고 증언했다(벧후3:12-13). 요한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고 증언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 만들어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더 이상 기억하거나 마음에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