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25.01.25. 오전 8:00
이제는 다 풀린 질문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깊이 들여다보면 정자의 움직임부터 난자의 성숙까지 생명의 탄생은 제대로 밝혀진 부분이 거의 없는 신비의 과정이다. 정자는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하고 난자는 한 번의 만남을 위해 준비를 갖춘다. 이 작은 존재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단순한 과학 연구를 넘어 생명 탄생의 비밀을 품은 특별한 여정이다.
○ 하나가 되기 위한 정자의 여정
'꿈틀대며 헤엄쳐 제일 먼저 난자에 도착한다. 수정이 이뤄지면 새 생명이 탄생한다.' 이것이 우리가 수업 시간에 배우는 정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정자 연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움직이는 방식을 포함해 밝혀지지 않았거나 지금도 연구 중인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난자를 만나기 위한 정자의 여정을 따라가 봤다.이곳에 난자의 바깥 막인 투명대를 녹이는 효소 새 생명을 만들 유전물질이 들어있다. 그 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세포 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가 들어있는 중편과 약 50마이크로미터 길이의 편모가 이어진다. 정자는 이 편모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과 일치하는 내용은 여기까지다.
우선 정자는 편모를 좌우로 흔들며 헤엄치지 않는다. 편모를 빙글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2023년 11월 29일 가브리엘 코르키디 멕시코 국립자치대 세포공학 및 생촉매학과 연구원이 참여한 국제 공동연구팀은 국제학술지 '세포과학저널(Journal of Cell Science)'에 '정자는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doi: 10.1242/jcs.261306)
일반적인 현미경으로 볼 때 정자는 편모를 흔들며 헤엄치는 것 같지만 이는 정자의 움직임을 평면적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시에 가깝다. 코르키디 연구팀은 정자의 움직임을 3차원으로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사용해 정자의 운동을 관찰했다.
그 결과 정자의 편모는 한쪽 방향으로만 회전했다. 그런데 편모가 한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면 앞으로 직선 운동을 하는 대신 원형으로 같은 곳을 빙빙 돌게 된다. 이를 상쇄하는 것이 정자의 머리 움직임이었다.
연구팀은 편모를 한쪽 방향으로 회전하는 동시에 머리도 계속 움직여 나아가는 방향을 조금씩 바꿔서 일직선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조절한다고 밝혔다. 이때 정자의 머리 회전 방향은 머리에서 꼬리 쪽으로 볼 때 반시계 방향이었다. 머리의 세밀한 움직임이 정자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당시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으나 이후 논문을 뒷받침하는 증거 자료가 미비하다는 비판이 나왔고 결국 논문은 1년 후 게재가 철회됐다. 연구팀은 이후 증거 자료를 더 수집해 다시 내용을 발표했다.
두 번째로 정자가 움직여야 하는 생식기관 내부 환경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우선 정자는 물에서 헤엄치지 않는다. 사정돼 여성 생식기관으로 들어온 정자가 난자를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은 크게 질 내부, 자궁 내부, 나팔관의 세 단계다. 가장 먼저 정자가 돌파해야하는 구간은 질 내부다.
정자들은 이곳을 거슬러 올라 자궁 경부를 거쳐 자궁 내로 들어간다. 그런데 질 내부는 물이 아니라 끈적거리는 체액으로 덮여 있다. 이 체액의 점도는 물보다 최대 100배 정도의 점도를 가진다. 이 점도면 덜 끈적거리는 종류의 헤어젤과 비슷하다.
모든 정자가 제대로 앞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정으로 질 내에 안착한 1억 5000만 마리의 정자 대부분은 형태가 이상한 '비정상 정자'이기 때문이다. 비정상 정자는 현미경으로 관찰했을 때 형태가 정상적이지 않다. 머리나 꼬리가 이상하게 생겼거나 없는 경우 혹은 머리나 꼬리가 2개 이상인 경우도 있다. 이런 정자들은 제대로 헤엄치지 못하고 헤매기 일쑤다.
더 놀라운 건 비정상 정자의 비율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정상 정자의 비율이 4% 이상인 경우 정상 범위로 판단해요." 12월 4일 차병원 기초의학연구소에서 만난 윤숙영 기초의학연구팀장이 설명했다.
정상적인 정액 표본에서도 비정상 정자의 비율이 최대 96%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왜 이렇게 비정상 정자가 많은 걸까? 윤팀장은 "정자가 워낙 많은 양으로 만들어지는 게 일차적 원인일 것"이라 설명했다.
정자는 정소에서 1초에 1500개, 매일 수백만 개가 만들어진다. 활발한 세포분열과 생산 과정 중에 정자의 '품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비정상 정자가 많아도 괜찮은 걸까.
"결국 1억 5000만 마리 중에 하나만 수정에 성공하면 되는 거니까요." 윤 팀장의 답이다. 실제로 난자를 향해 제대로 헤엄치는 정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 셈이다.
이곳이 정자들의 1차 난관이다. "자궁 경부까지 대부분의 정자들이 걸러집니다. 정자들이 복잡한 주름 사이에서 자궁 내로 들어가는 길을 찾기 쉽지 않거든요." 윤 팀장의 말이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동물들의 정자들은 '뭉친다'. 2022년 9월 치콴 텅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A&T 주립대 교수팀은 '세포 및 발달 생물학 프론티어(Frontiers in Cell and Developmental Biology)'에 뭉쳐서 움직이는 정자에게 어떤 이점이 있는지 황소 정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doi: 10.3389/fcell.2022.961623)
정자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려면 먼저 정자가 움직일 트랙을 만들어줘야 한다. 연구팀은 자궁 내부처럼 점도를 재현한 유체를 만들었다. 이 유체를 주사기와 연결된 유체 칩에 집어넣은 후 여기에 채취한 소의 정자를 풀어줬다.
이제 주사기를 조금씩 누르면 유체의 흐름이 생긴다. 연구팀은 주사기를 누르는 정도를 달리해 유체가 흐르는 속력을 조절하면서 정자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 결과 무리 지은 정자의 이점 세 가지가 발견됐다.
첫 번째 유체의 흐름이 없는 경우 정자 무리는 단독으로 움직일 때보다 일정한 방향으로 더 잘 움직였다. 길을 잃지 않고 꾸준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쉬웠다는 얘기다.
두 번째 유체가 느리게 흐를때는 무리 지은 정자가 훨씬 정렬을 잘했다. 마지막으로 유체가 좀 더 빠르게 흐를 때는 떠내려가는 정자가 적었다.
대개 난자를 향한 정자들의 레이스는 1억 5000만 마리가 벌이는 경쟁으로 그려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도와가며 완주하는 마라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물론 그사이에 할 일이 있다. 정자가 난자와 만난다고 해서 수정이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자는 여성의 생식기관 내를 움직이는 동안 성숙하면서 수정 능력을 얻어야만 한다. 이 단계를 '수정능력 획득(capacitation)'이라 부른다.
"체외 수정을 해보면 알 수 있어요. 수정능력을 획득하지 않은 정자는 난자 옆에 놔둬도 난자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수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윤 팀장과 함께 만난 엄진희 차병원 난임연구실장이 설명했다.
정자가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난구세포(cumulus cell)를 뚫고 난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더해 정자의 머리를 둘러싼 첨체의 구조도 불안정해지면서 내부에서 난자의 바깥 세포막인 '투명대'를 녹이는 다양한 소화 효소가 나온다. 수정능력 획득을 거친 정자만 난구세포를 뚫고 난자의 투명대를 녹여 난자와 만날 수 있다.
수정능력을 획득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단백질은 '캣스퍼(CatSper)'다. 캣스퍼는 정자의 세포막에서 칼슘 이온을 운반하는 채널 역할을 한다. 2024년 1월 티모 스트륑커 독일 뮌스터대 생식의학 및 남성학 센터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연구팀은 2300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정자의 운동성과 캣스퍼 단백질의 관계를 조사했다. (doi: 10.1172/JCI173564)
그 결과 캣스퍼 단백질이 없는 경우 정자의 과활동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캣스퍼 단백질이 없다면 난자 앞까지 제일 먼저 도착했더라도 난구세포를 뚫지못해 결국 수정은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결국 승리자는 '처음 도달한 정자'가 아니라 '처음 수정하는 정자'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죠." 윤 팀장은 정자의 여정을 한 문장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우리의 정자는 난자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 누구보다 바쁜 난자의 일생
인간의 몸에서 가장 큰 세포는 난자이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달려온 정자 중 하나가 철옹성처럼 닫혀있던 난자를 뚫기만 하면 생명이 탄생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상은 다르다. 난자도 수정을 위해 복잡한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을 뚫고 자궁 경부로 들어선 정자의 수는 100만 개 99.8%가 제외된다. 자궁 경부에 도착한 정자는 이제 길을 잃어선 안된다. 정자의 길이가 50µm(마이크로미터·1µm는 100만 분의 1m) 자궁 경부에서 난자가 있는 나팔관 끝까지의 거리는 18cm이다. 정자를 키가 170cm인 사람으로 치면 6km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셈이다.
이때 정자의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 바로 난자 주변의 세포들이 내뿜는 호르몬 '프로게스테론'이다. 난자는 몸의 주인이 태아이던 시기부터 이미 난소 안에 약 100만 개의 원시난포 형태로 형성돼 있다. 사춘기 이후 월경이 시작되면 달마다 여포자극호르몬(FSH)의 작용으로 난포가 성장하기 시작한다.
난포가 충분히 성숙되면 황체형성호르몬(LH) 증가의 영향을 받아 난포 벽이 터지며 난자가 난소에서 배출돼 나팔관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이 바로 배란이다.
배란은 사람마다 개별 차가 있지만 평균 28일 간격으로 반복된다. 난자가 난소에서 배출될 때 프로게스테론과 함께 배출되는데 이 호르몬은 미약하게나마 자궁에 퍼져 정자를 난자 쪽으로 이끈다. (doi: 10.1093/molehr/5.6.507)
희미한 프로게스테론을 따라 나팔관에 도착한 정자의 수는 200개 남짓이다. 지금부터는 더 강한 힘으로 난자를 둘러싼 난자 외피, 그 바깥층인 난모세포층과 투명대를 뚫어 난자 세포막과 만나는 것이 관건이다. 이때 도움을 주는 것도 프로게스테론이다.
난자 외피층이 내뿜은 프로게스테론은 정자 꼬리의 칼슘(Ca2+) 이온 채널 단백질인 '캣스퍼(CatSper)'를 활성화한다. (doi: 10.1172/JCI173564)
프로게스테론과 캣스퍼가 결합하면 정자 꼬리의 이온 채널이 열리면서 칼슘 이온이 정자 세포 안으로 유입된다. 칼슘 이온 농도가 증가한 정자는 꼬리 운동성이 급격히 증가해 난자를 더 효율적으로 파고들 수 있다. 이전 파트에서 설명한 정자의 '수정능력 획득'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난자가 정자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자신을 찾고 따라오도록 정자를 능동적으로 유도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정자가 난자 막을 돌파하는 건 물리적으로 뚫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화학 반응에 가깝다. 정자와 난자 막에서 서로 짝이 맞는 단백질이 결합하면 난자 막이 열린다. 정자가 가진 어떤 단백질이 그 열쇠일까.
2024년 10월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자생명공학연구소와 빈 바이오센터, 오사카대 미생물 질환 연구소 등으로 꾸려진 국제 공동연구팀이 그 열쇠가 되는 단백질 유전자 세 가지를 밝혀냈다. 열쇠의 이름은 Izumo1, Spaca6, Tmem81이다. (doi: 10.1016/j.cell.2024.09.035)
연구팀은 알파폴드 멀티머(AlphaFold-Multimer)라는 인공지능(AI) 기반 단백질 구조 예측 도구를 활용해 정자와 난자의 첫 만남이 이뤄지는 과정을 분자적 수준에서 밝혀냈다. 정자는 난자 막의 단백질 JUNO와 결합한다.
JUNO는 난자의 세포막 표면에 발현되는 단백질로 정자의 단백질과 결합하며 세포막 융합을 이끈다. 세포막 융합이 시작되면 정자의 핵이 난자의 세포질로 들어오며 유전 결합이 시작된다. 사실 정자의 Izumo1은 이미 난자의 JUNO 단백질과 결합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Spaca6 역시 정자의 성공에 중요한 단백질 유전자일 것이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그 외 메커니즘은 미지수였다.
연구팀은 알파폴드 멀티머로 얻은 단백질 구조 후보들을 기반으로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해 실험을 설계했다. Tmem81과 Spaca6 유전자를 각각 제거한 생쥐와 제브라피쉬를 통해 수정 여부를 확인한 결과 두 단백질 유전자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지 못했다. 당연히 수정도 실패했다.
결론은 명확하다. 정자가 난자와 결합해 수정에 성공하려면 정자에 Izumo1, Spaca6, Tmem81이라는 세 가지 열쇠가 모두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난자는 수정되지 못하고 결국 월경 주기를 따라 몸 밖으로 배출된다.
정자가 난자의 자물쇠를 푸는 것과 동시에 난자는 수정란이 될 준비를 시작한다. 먼저 난자는 다른 정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투명대를 변화시켜 방어막을 형성하고 난자와 정자의 핵은 세포 내부의 운송 네트워크인 미세소관의 안내를 받아 점차 가까워진다.
정자의 핵과 난자의 핵은 사람이 가진 유전물질의 절반 되는 양인 각각 23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마침내 두 핵이 만나 하나로 융합되는 순간 새로운 생명체의 수정란이 만들어진다. 삶이 시작되는 신호탄이다.
수정란은 배아로 발달하기 위해 세포 분열을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난자의 미토콘드리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 에너지원인 ATP를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기까지의 움직임을 위한 에너지만 공급할 뿐 수정 직후 난자 내부에서 제거된다. 따라서 수정란에 존재하는 모든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이는 생명체의 모계 유전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수정란은 초기 발달 과정에서 이미 난자에 저장된 모성 mRNA(메신저RNA)와 단백질을 사용한다. 모성 mRNA는 배아 발달 초기에 필요한 단백질을 생산하며 전체 유전자 발현 프로그램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난자의 세포질에 존재하던 미토콘드리아는 세포내 적절한 위치로 재배치돼 효율적으로 ATP를 공급할 준비를 마친다. ATP는 세포 분열을 위한 엔진과 같다. 세포 주기를 진행하고 방추사를 형성하며 염색체를 정확히 분리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로 인해 염색체 비분리 같은 문제가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염색체 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ATP 생산이 부족하면 세포 주기가 중단되거나 염색체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배아 발달에 치명적이다. 염색체에 이상이 생긴 배아 대부분은 임신 초기인 12주 이내에 자연 유산된다. 성염색체 이상으로 인해 다운증후군이나 에드워드증후군 같은 상태가 발생할 경우에도 정상적으로 착상되고 발달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란이 성숙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봤다. 이 모든 단계는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여정이다. 정자와 난자는 수많은 관문을 통과하며 수정란으로 발전했음에도 착상, 태아 성숙, 그리고 출산이라는 큰 산들이 남아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매우 낮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 어긋난 팀플레이, 난임의 과학
정자와 난자가 천신만고의 노력을 기울여도 여러 이유로 생명이 탄생하지 않을 수 있다. 어려울 난(難)에 임신할 임(妊) 우리는 이를 '난임'이라 부른다. 현대 과학은 어떻게 난임을 극복하고 새 생명을 선물할까. 난임 극복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차병원에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봤다.
● 2023년 전 세계 성인 6명 중 1명은 난임
꽉 닫힌 회색 통의 뚜껑을 돌리자 하얀 연기를 내뿜는 액화질소가 퍼져 나왔다.
"실제 난자를 냉동하는 방식입니다." 12월 4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차병원 기초의학연구소에서 만난 윤숙영 기초의학연구팀장은 긴 슬레이트를 꺼내 들며 기자에게 난자 보관 기구를 보여줬다.
"난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본적인 발생학을 연구하는 것이 제 일이죠." 그는 말했다.
난임은 피임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이어갔음에도 1년 이상 임신이 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를 질병으로 정의한다. 2023년 WHO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성인의 약 17.5%가 난임을 경험하며 이는 성인 6명 중 1명에 해당하는 수치다.
우선 난임은 크게 남성 난임과 여성 난임으로 나뉜다. 남성 난임은 정자 문제로 발생한다. 정자의 수가 적거나 운동성이 떨어지는 경우, 정자의 형태가 비정상적인 경우, 또는 특정 유전자의 결함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여성 난임은 그 원인이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먼저 난포가 성숙하지 않아 배란이 이뤄지지 않는 난포 성숙 장애가 있다. 수정에 필요한 난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설령 수정이 이뤄진다 해도 자궁 내막 문제로 인해 임신이 실패할 수 있다. 자궁 내막이 지나치게 얇으면 수정란이 착상되지 못한다.
노화된 난자 역시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나이 든 난자는 염색체 이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이로 인해 정상적인 수정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만 들어진 비정상적인 수정란은 난임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이상 염색체는 기형아 출산의 주요 원인 이 되기 때문이다. 윤 교수의 이야기를 듣던 중 묵혀뒀던 질문이 불쑥 떠올랐다.
"정상적인 수정란이 만들어지지 않는 건 남자 와 여자 중 누구의 책임인가요."
"난임과 수정란 이상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러 다양한 원인 때문에 수정란에 문제가 생기는 건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어요. 이런 불확실성 탓에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죠. 다만 원인이 명확한 난임이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치료법이 발전 해 온 겁니다."라고 윤교수는 답했다.
● 정자와 난자 만남 주선하는 3단계 시술법
엄실장의 말처럼 난임 치료가 가능한 이유는 현대 의학이 난임의 다양한 원인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난임의 원인에 따라 개입하는 깊이에 따라 난임 치료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방법은 '인공 수정(IUI)'이다. 인공 수정은 정자의 수가 적거나 운동성이 낮을 때 사용되며 운동성이 좋은 정자만을 선별해 가느다란 관으로 여성의 자궁에 직접 주입하는 방식이다. 난자와 잘 만날 수 있도록 정자에게 지름길을 제공하는 셈이다.
정자와 난자가 아예 만나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나팔관이 막혀 정자가 난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 막힌 경우 또는 여성이 정자를 공격하는 면역 항체를 가진 경우다. 이때 쓰는 방법이 '체외 수정(IVF)'이다. 정자와 난자를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뒤 잘 수정된 배아를 자궁에 이식한다. 정자들과 난자의 직접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정자를 직접 난자에 넣어줘야 한다. 이것이 '난자 세포질 내 정자 직접 주입(ICSI)' 기술이다. 이 방법은 단일 정자를 난자 세포질 내에 직접 주입해 수정시키는 기술로 정자의 운동성이 아예 없거나 형태가 비정상적인 경우 혹은 IVF에 실패했을 때 주로 사용된다.
실험실에서는 실험에 사용하는 난자 채취 기구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윤 팀장은 자리에 앉아 긴 호스와 연결된 스포이드를 들어 시범을 보였다. 호스 한쪽 끝을 입에 물고 공기를 흡입하며 난자를 하나씩 수집했다. 정자는 실험 목적에 따라 채취 장치나 협조를 통해 수집된다. 이렇게 채취된 난자와 정자는 세포의 특성을 분석하거나 난임 치료 및 관련 연구에 활용된다.
착상을 돕는 치료도 있다. 착상은 수정란이 자궁 내막에 성공적으로 붙어 임신이 시작되는 과정이다. 수정란은 3~4일 동안 난관을 따라 이동하며 세포 분열을 통해 내부에 세포 덩어리가 있는 구형 구조, 포배로 변신한다. 자궁에 도착한 포배의 영양막 세포는 자궁 내막 세포 사이로 침투한다.
자궁과 포배를 단단히 고정하고 혈관을 연결하기 위해서다. 착상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다. 사실 임신 초기의 가장 중요한 단계가 착상이다. 수정된 포배가 자궁에서 착상되지 않으면 그저 월경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착상 실패의 주된 원인은 수정란의 질이 낮거나 자궁 내막이 착상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체외 수정 과정에서는 유전자 검사(PGT-A, PGT-M)를 통해 건강한 배아를 선별하는 방법이 있다.
자궁 내막의 두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르몬 치료를 진행하거나 자궁 내부에 미세한 생채기를 만들어 내막을 재생시키고 면역 반응을 자극하기도 한다. 다른 치료는 다 이해가 됐지만 자궁에 생채기를 낸다는 방법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윤 교수는 "적당한 염증 반응은 자궁 내막의 착상 수용성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염증 반응은 혈류 와 조직 재생을 촉진해 배아가 착상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수정과 착상 각각의 과정에서 정교한 기술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 원하는 이는 모두 잉태할 수 있도록
"매년 약 1만 2000명의 아기가 차병원의 난임 치료를 통해 태어나고 있어요. 결혼 연령이 늦어지면서 난임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도 계속 늘고 있죠."
차병원을 찾는 환자 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엄 실장은 이렇게 답했다. 난임 연구의 중요성이 최근 들어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초혼 연령이 상승하면서 건강한 정자와 난자가 적어지고 출산 연령이 증가해 임신과 출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 예로부터 수동적 존재라는 난자의 이미지는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축소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엔 난임 기술 개발을 위해 '난자' 자체에 집중하는 연구가 상당히 많아지고 있다. 정자보다 훨씬 복잡한 난자를 연구할 수 있는 최신 기술도 밑바탕이 되고 있다.
윤 팀장은 "출산 연령은 증가하지만 임신하고 싶은 여성들은 여전히 많다"며 "이런 추세 덕분에 난자 노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극복하는 것이 최근의 연구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차병원은 노화로 인해 기능이 저하된 난모세포에 항산화제를 적용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항산화제는 세포 내 산화적 스트레스를 감소시켜 세포 기능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 난모세포의 질을 향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이 개발되면 노화로 인해 난임을 겪는 환자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난임 연구는 노화 이외의 이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손상된 난소 조직을 재생시키려는 줄기세포 요법이나 항암치료의 영향으로 난소의 활동성이 줄어든 여성을 위한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다. 윤 팀장은 자신의 일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잉태를 원하는 모든 이는 잉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희의 일이니까요."
김미래 기자,이창욱 기자 futurekim93@donga.com,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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