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A 창조론 과 오메가Ω 창조론/알파 창조론 연구

알파 창조론 (연재 1) 창세기 1장의 현대적 해석에 의한 “알파 창조론”

heojohn 2024. 10. 1. 22:08

목 차

 

. 들어가면서: 창세기 1장의 해석 방법에 대하여

 

II. 창세기 1: 6일간의 창조

 

1. 첫날의 창조: 천지, 흑암과 빛, 그리고 밤과 낮

2. 둘째 날의 창조: 지구의 대기권(‘라키아’, 궁창)

3. 셋째 날의 창조: 바다와 육지의 분리, 식물

4. 넷째 날의 창조: 광명체들의 미세 조정

5. 다섯째 날의 창조: 물의 생물과 조류

6. 여섯째 날의 창조: 땅의 동물과 사람

 

III. 나가면서

 

본 문

 

. 들어가면서

- 창세기 1장의 해석 방법에 대하여

 

기독교의 창조론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1장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창세기가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에서 작성된 문헌이 아니지만, 기독교는 창세기를 중요 경전으로 인정하고 있고, 창세기 1장이 서술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약 3,500년 전에 저자로 추정되는 모세가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한 것이라서 현대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또한, 창세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듣고 서술한 부분과 창조 명령에 따라 일어나는 창조 사건을 환상으로 보고 서술한 부분 등 2개의 서술적 층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전문적인 연구와 해석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를 보면, 시대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쌓아 왔고, 그에 따라 이해의 능력도 증가했다. 여기에서 현대 과학적 지식을 상식 수준으로 습득한 현대인의 관점으로 창세기 1장의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보면,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이 느껴지게 된다.

 

모세가 기록한 창조 톨레도트는 히브리 민족의 종교적 토대가 되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현대 기독교에서도 믿음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과 진화론이 결합하여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한 이후 과학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창조 톨레도트는 점점 부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주의가 만들어낸 고도의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창조 톨레도트를 어떻게 믿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가 부정된다면, 기독교는 믿음의 토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과학적 상식을 가진 현대인의 관점에서 창세기 1장에 서술된 하늘과 땅, 그리고 각종 생물과 이간의 기원을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서 연구한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고대 히브리어의 제한된 어휘와 그것들이 표현하는 의미는 창조의 세부적인 점까지 서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창조 톨레도트에서 사용된 히브리어의 독특한 동사들과 시제의 용법은 창조의 진행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피조된 사람의 제한된 인식 능력 사이의 소통에는 엄청난 이해의 괴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제대로 읽으려면, 창조주와 인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의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대해서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의 둘째는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듣고 환상을 보면서 그의 관점에서 기록한 서술에는 몇 가지 문제가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창세기를 읽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려면, 모세의 서술에서 발견되는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창조 톨레도트에 두 개의 서술적 층위가 병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창조 톨레도트늠 모세가 하나님이 인도하는 환상 속에서 창조 사건에 대해 그 시대의 언어인 고대 히브리어로 말씀을 듣고 보고 이해한 대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첫째의 서술적 층위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환상을 보고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둘째의 서술적 층위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을 보고 듣고 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한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두 개의 층위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짧은 몇 마디 명령어로 창조를 진행하시면서 모세에게 창조의 전 과정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만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창조의 진행 과정을 추론하는 현대인의 합리적 이해 능력과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게 된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토라(모세 오경)를 통해 문자적으로 기독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는 구약성경을 문자대로 믿고, 현대 과학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동설을 지지하고 지동설을 배척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과학은 그것을 빌미로 기독교를 반과학적 종교로 배척하게 되었고, 결국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법칙을 연구하는 일을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자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현대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첨단 과학기구를 사용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 자료들에 의하면, 창조 톨레도트에 바탕을 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현대과학이 발견한 것과 다른 부분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창조 사건을 들려주시고 보여주기도 하셨으나, 모세는 그것들을 고대 히브리인들의 지적 수준에서 이해하고 서술했다는 시대적 한계성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전승된 창세기 1장을 모세가 그렇게 서술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창조 톨레도트의 문자주의적 해석의 한계성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셋째는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를 일정한 형식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면,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환상을 듣고 보고 기록한 모세는 창조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대해 하나님이 이르시되”(וַיֹּאמֶר אֱלֹהִים)라는 말을 앞에 붙여 놓았다. 하나님의 말씀 뒤에 모세는 추가적으로 그가 설명하는 서술을 접속사(וְ) + 동사로 이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찬양하는 구절과 창조 6일의 순서가 나오면서 그날 하루의 창조가 끝난다. 번역된 성경으로 창세기를 읽는 때에는 하나님이 빠라’(בָּרָא: 창조했다)라는 동사로 명령하셨다고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빠라는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지, 하나님이 하신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동사를 사용하셨다.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사용하신 동사와 모세가 사용한 동사의 종류와 시제를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창조론 연구자가 히브리어 원문으로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의 오역이나 부적절한 번역어의 사용으로 원래의 의미를 오해하는 문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야 하나님의 창조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이 합치되는 해석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그 결과에서 나온 이 글을 이제까지 제시되었던 창조론(다른 창조 톨레도트 해석들)과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알파 창조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의미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의 창조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아울러 그분의 첫째 창조론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창조론을 창세기 2장 또는 원역사 전부로까지 확장하는 견해들도 없지 않으나, 필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덧붙인 설명 또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 제외했다. 그렇게 하면 훨씬 간명하게 하나님의 창조가 드러나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고대 히브리어로 기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경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은 대개 고대 히브리어 성경 사본을 번역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언어들 사이에는 개념의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각종 번역 성경의 언어에도 이해의 차이가 초래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 성경을 읽으면서 창조 톨레도트의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기록을 좀 더 진실에 가깝게 이해하려는 구약신학자들은 히브리어를 배워서 창세기를 해석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창조론 연구자도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그들이 연구한 히브리어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창조론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올바른 창조론을 알려주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