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40

세례논쟁 및 그 전말에 관한 고찰-루터, 츠빙글리, 재세례파, 칼빈

I. 서 론 신약성경에 의하면, 세례는 처음에 유대인들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마 3:1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마3: 16), 그 후에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서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셨다(요 3:22). 더욱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사도들에게 친히 명령하셨다(마28:19). 그러므로 세례는 기독교의 처음 시작에서부터 집행되어온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세례는 그리스도의 제자, 즉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로서 가장 중요한 성례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례의 형식을 차츰 정립하면서 세례를 포함한 7성례를 확정했다. 로마가톨..

루터의 “칭의에 관한 토론문” 읽기

-로마서 3:28절에 관한 마틴 루터 박사의 세 번째 및 네 번째 논제에 대한 토론 서 론 이 “칭의에 관한 토론문”은 1535년 야콥 쉔크(Jacob Schenk)와 필립 모쯔(Philipp Motz)의 박사 자격 심사를 위하여 실시된 것이다. 이 토론문을 보면, 루터 박사가 로마서 3:28에 관련하여 세 번째와 네 번째로 작성한 “논제”들과 그것에 대하여 박사 후보자들과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쟁”의 기록문을 보면, 이것 역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칭의에 대한 루터의 토론”이고, 두 번째는 “믿음이 의롭게 하는가에 대한 루터의 토론”이다. 논쟁의 진행은 먼저 “논제”에 관한 반론이 제시되고, 그 다음에는 대체적으로 보충적 설명에 이어서 루터의 답변이 이어진다. 여기에 ..

터툴리아누스의생애와 사상

1.서 론 우리가 고대 신학자를 짧은 시간에 연구하고자 하는 경우에 부딪히는 난점이 몇 개 있다. 언제나 부족한 것은 자료와 시간이다. 그리고 언어 능력의 부족도 한 가지 난점의 요인이 될 것이다. 특히 모르는 외국어와 번역조차 신통치 못한 경우에는 자료와 시간의 부족에 겹쳐 더욱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터(테르)툴리아누스에 대한 필자의 경우에서도 이 세 가지 난점이 모두 나타났다. 그러나 고대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를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또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필자로서는 제한된 짧은 시간에 최대한 요점적으로 몇 개의 책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를 간추려보았다. ..

마르크스·엥겔스의 기독교 이해와 신학에 미친 영향

카를 마르크스(뒷줄 왼쪽)가 1864년 세 딸, 그리고 평생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뒷줄 오른쪽)와 함께 찍은 사진(모요사 제공) I. 서론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세계철학사』에서 “레닌 시대에 이루어진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인 ‘과학적 무신론’이 더욱 수준 높게 발전된 점 또한 빠뜨릴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무신론의 원형이고, 레닌 시대에 이것은 “더욱 수준 높게 발전”되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1917년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에 의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을 계기로 세계에 혁명의 열기를 불어 넣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이라는 것이다. 이렇..

한국교회에 대한 제안 한 가지.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연결하는 정신, 곧 영혼의 존재와 불멸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은 그 실상을 자세히 알고 보면 생명의 발생과 물질변화의 법칙을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자연발생론, 즉 위장된 과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이 유신론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윤리체계를 뒤엎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에서 나온 정치적 이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과학적 무신론자와 종교적 유신론자로 갈라져 생존을 걸고 정치적 투쟁을 하고 있다. 이 투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미래의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과학적 ..

한국교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이제까지 무신론, 특히 1948년 『공산당 선언』 이후에 과학적 무신론의 형성과 발전과정, 그것에 내포된 오류, 그것이 초기 한민족 사회와 교회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영향 등을 연구하고 비판하였다. 또한 과학적 무신론에는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전통적 종교의 근거인 유신론의 타당성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과학적 무신론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와 다른 사상들을 수용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도 밝혔다. 나아가 과학적 무신론이 한민족 사회와 교회로 유입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자행한 반인륜적 폭행과 기독교 박해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 책은 탈(脫)경계선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학적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타협적 유신진화론자들을 일깨우는 ..

공산당의 종교 정책과 기독교에 끼친 영향

해방 후에 한반도는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에 의해 남한에서는 미국적 자유민주체제가, 북한에서는 소비에트적 공산주의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서울에서 박헌영 등에 의하여 재창당(1945)되었지만, 남한에서 성공하지 못하자, 소련군 점령지역인 북한으로 월북하고 말았다(1948). 결국 이로 인하여 한민족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참극을 겪어야 했다. 북한은 이 전쟁에서 실패하자 박헌영 등 소위 월북 공산주의 인사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고 ‘자유시 참변’ 또는 ‘스탈린 대탄압’과 똑같은 방식으로 처형했다(1955경). 소련군 점령 시절 및 북한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 북한 기독교 역시 처참한 핍박을 당하고 많은 순교자들을 내었다. 과학적 무신론의 본거지 소련..

일제 치하 교회의 양면적 변화

일제는 3.1운동 직후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면서도 1925년부터는 ‘치안유지법’을 시행하여 한민족의 사상 활동을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특히 일제는 교회를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보고 감시와 탄압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한민족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종교보다 민족독립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인들 중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예로서는 기독교인으로서 전도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했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이동휘를 비롯한 다수의 신민회원들, 여운형, 선우혁 등 상해한인교회 인사들, 이동녕과 김구 등 상해임시정부 인사들, 그리고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통천교를 만들었던 양기탁 등의 종교적 방랑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은 기..

국내 기독교 비판 및 선교지 공산주의자의 교회 박해

(1) 국내 기독교 비판 공산주의 과학적 무신론 사상이 한민족에게 전래된 이래 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이광수(李光洙, 1892-1950)로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이광수는 교역자들이 “신학 이외의 학문에는 무지”하여 “정통(正統)의 폭군(暴君)”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광수의 비판은 기독교를 전적으로 배척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과는 다르다. 이광수는 목사와 전도사들이 “신앙 이외의 사상이나 과학을 경시”하여 “교인들을 미신으로 이끌고 문명의 발전을 막는다”고 비판했다. 서양의 신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였던 기독교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기독교 자체의 안일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1928년 김활란(金活蘭, 1899-1..

국내 공산주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

1) 국내 공산주의 운동 코민테른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두 개의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창당 지도에서 부닥친 최대의 난제는 한민족 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 경쟁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동휘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유일정통성’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할 수 없이 꼬르뷰로를 따로 조직해서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담케 했다(1922. 12.). 그러나 꼬르뷰로가 정재달을 공식적으로 국내에 파견하기(1923) 전에 이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국내에 조직을 따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동휘는 상해임정에 있을 때부터 김철수 등의 사회혁명당의 비밀조직을 만들어놓았다. 이르쿠츠크파는 김찬이 조직한 신사상연구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