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쳤을 때(1831) 해군 함정 비글호(HMS Beagle)를 타고 탐사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다윈이 5년 동안 비글호 탐사여행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1836)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 세 개의 섬에서 수집한 세 가지의 핀치새(finch bird) 표본을 생물학자 존 굴드(John Gould, 1804-1881)에게 보냈다. 그런데 굴드는 뜻밖에도 다윈이 보낸 세 가지 표본은 각각 다른 종이라고 판정했다. 굴드에 의하면, 그것들은 하나의 종에서 나온 후손들이 다른 종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윈이 표본들을 다시 조사해보니 그것들은 남아메리카에서 날아온 핀치새의 후손들이 갈라파고스 세 군데의 섬에서 따로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굴드가 다른 종이라고 판정한 근거는 부리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분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변종’이라는 의미였다. 다윈은 이때부터 격리된 자연조건에서 종의 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 원인과 한계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다윈은 동물 사육업자들이나 화훼업자들이 인공적인 선택으로 품종개량 작업을 하는 것을 관찰하고 나서는 자연에서도 이런 방식의 변이가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추론하게 되었다. 그는 자연에서 변이를 일으키는 원인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후손에게 대물림하는 유전적 특성이 대대로 축적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제안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 합성어에 ‘자연’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선택 행위의 주체가 ‘자연’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론을 다윈보다 먼저 발표하려고 했던 사람은 (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였다. 당시 말레이시아에 있었던 월리스는 그가 작성한 논문과 편지를 1858년 다윈에게 보내면서 그 해의 린네학회(Linnean Society)에서 대신 발표해줄 것을 요청했다. 월리스의 논문 제목은 “원형으로부터 무한정 멀어지려는 경향성에 관하여”였다. 이것을 읽어본 다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윈이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것과 월리스의 이론이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다윈의 이론은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자칫하면 다윈의 연구와 노력이 빛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다윈은 지질학자이며 친구인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 해 린네학회 회장은 다윈의 친구 후커(Joseph Dalton Hooker, 1817-1911)였으며 그가 사회를 했다. 다윈은 린네학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대신 라이엘이 나서서 다윈과 월리스의 ‘공동논문’(joint paper)이라고 하면서 두 사람의 논문을 발표했다. 월리스의 논문은 다윈에게 보낸 것이었고, 다윈의 논문은 아직 계획서일 뿐이었다. 이후에 다윈은 연구와 집필을 서둘러 다음 해인 1859년에 『종의 기원』을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멀리 말레이시아 외딴 섬에 떨어져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월리스는 런던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다음 해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이후부터 자연발생론에 대한 논쟁의 주도권이 다윈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월리스와 그 이전에 나왔던 진화론적 주장은 모두 묻혀버리게 된 것이다. 라마르크 추종자들은 다윈이 라마르크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이런 주장도 곧 가라앉고 말았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것보다 11년 앞서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 소수의 산업노동자들과 독일 사회주의 운동가들뿐이었다. 주로 항의와 파업으로 나타난 이들의 저항은 각국 정부에 의해 즉각 진압되었으므로 그들의 세력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유물론은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과 포이어바흐의 휴머니즘적 무신론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킨 철학적 유물론의 하나일 뿐이었다. 따라서 크게 문제를 삼을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영국 상류 지식인 사회와 기독교에서는 『종의 기원』을 놓고 심각한 찬반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는 반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윈은 이 책에서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은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서 얻은 관찰 자료를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정리하여 직설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과학에서는 새로 등장한 기술 방법이었다. 아직까지 과학은 관찰 도구로서 사용하는 저배율의 현미경과 실험자의 부주의 등으로 미생물의 존재나 번식 과정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미생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할 생물학적 이론조차 없었다. 그래서 『종의 기원』에 나타난 다윈의 주장은 그 당시의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반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런 방법으로 꼼꼼하게 생물을 관찰한 사람도 없었고, 그런 귀납법적 방법에 의하여 생물학 이론을 구성한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과학주의가 서구의 사상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은 대부분 생물이 성경에 서술된 창조의 역사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후에는 생식에 의하여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약간 회의적인 사람들조차도 기독교에서 용인하는 생물발생의 두 번째 방법, 즉 신의 창조력이 배어있는 물질이나 부패물에서 자연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 이외에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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