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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신(神)을 부정하는 세상, 과학적으로 신(神)을 증명

신간 , 과학적 무신론 VS 과학적 유신론의 대결 최종 승자는?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7-09-11 10:52 신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 유신론과 무신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질문들에서 어느 쪽을 긍정하고 어느 쪽을 부정하더라도 수학적으로 보면, 그에 대해 맞거나 틀릴 확률은 반반(半半)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신론은 인류의 신화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각 종교와 신학의 바탕을 이룬다. 자연철학은 자연발생론을 주장하면서 신의 역할을 점차 축소했다. 과학은 실증주의를 학문적 방법론으로 채택한 이후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해버렸다. 《과학과 신의 전쟁-과학적 무신론 vs 과학적 유신론》(메노라 출판)은 신화와 신학, 철학과 과학에서 신의 존..

[과학과 신의 전쟁] 출판

과학과 신의 전쟁(양장본 HardCover) 과학적 무신론 vs 과학적 유신론저자허정윤 출판메노라 | 2017.8.30. 페이지수535 | 사이즈 161*234mm판매가서적 22,500원 책소개 [과학과 신의 전쟁]]은 고대신화와 종교, 신학과 철학, 그리고 초기 과학에 대해 신의 존재에 대한 기초적 이해에 필요한 분량만큼 간략하게 서술했다. 제2부에서는 과학적 무신론의 발전 과정과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제3부에서는 노자의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양자물리학이 발견한 이론들과 과학적 실재 논쟁들, 그리고 현대 우주론 등을 검토하여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접기 저자 허정윤 저자 : 허정윤 저자 허정윤은 사회생활 은퇴 후에 총신대 평생교육원에서 공부하여 신학학사(Th.B)를, ..

한국교회에 대한 제안 한 가지.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연결하는 정신, 곧 영혼의 존재와 불멸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은 그 실상을 자세히 알고 보면 생명의 발생과 물질변화의 법칙을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자연발생론, 즉 위장된 과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이 유신론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윤리체계를 뒤엎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에서 나온 정치적 이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과학적 무신론자와 종교적 유신론자로 갈라져 생존을 걸고 정치적 투쟁을 하고 있다. 이 투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미래의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과학적 ..

한국교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이제까지 무신론, 특히 1948년 『공산당 선언』 이후에 과학적 무신론의 형성과 발전과정, 그것에 내포된 오류, 그것이 초기 한민족 사회와 교회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영향 등을 연구하고 비판하였다. 또한 과학적 무신론에는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전통적 종교의 근거인 유신론의 타당성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과학적 무신론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와 다른 사상들을 수용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도 밝혔다. 나아가 과학적 무신론이 한민족 사회와 교회로 유입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자행한 반인륜적 폭행과 기독교 박해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 책은 탈(脫)경계선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학적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타협적 유신진화론자들을 일깨우는 ..

공산당의 종교 정책과 기독교에 끼친 영향

해방 후에 한반도는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에 의해 남한에서는 미국적 자유민주체제가, 북한에서는 소비에트적 공산주의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서울에서 박헌영 등에 의하여 재창당(1945)되었지만, 남한에서 성공하지 못하자, 소련군 점령지역인 북한으로 월북하고 말았다(1948). 결국 이로 인하여 한민족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참극을 겪어야 했다. 북한은 이 전쟁에서 실패하자 박헌영 등 소위 월북 공산주의 인사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고 ‘자유시 참변’ 또는 ‘스탈린 대탄압’과 똑같은 방식으로 처형했다(1955경). 소련군 점령 시절 및 북한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 북한 기독교 역시 처참한 핍박을 당하고 많은 순교자들을 내었다. 과학적 무신론의 본거지 소련..

일제 치하 교회의 양면적 변화

일제는 3.1운동 직후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면서도 1925년부터는 ‘치안유지법’을 시행하여 한민족의 사상 활동을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특히 일제는 교회를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보고 감시와 탄압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한민족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종교보다 민족독립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인들 중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예로서는 기독교인으로서 전도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했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이동휘를 비롯한 다수의 신민회원들, 여운형, 선우혁 등 상해한인교회 인사들, 이동녕과 김구 등 상해임시정부 인사들, 그리고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통천교를 만들었던 양기탁 등의 종교적 방랑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은 기..

국내 기독교 비판 및 선교지 공산주의자의 교회 박해

(1) 국내 기독교 비판 공산주의 과학적 무신론 사상이 한민족에게 전래된 이래 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이광수(李光洙, 1892-1950)로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이광수는 교역자들이 “신학 이외의 학문에는 무지”하여 “정통(正統)의 폭군(暴君)”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광수의 비판은 기독교를 전적으로 배척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과는 다르다. 이광수는 목사와 전도사들이 “신앙 이외의 사상이나 과학을 경시”하여 “교인들을 미신으로 이끌고 문명의 발전을 막는다”고 비판했다. 서양의 신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였던 기독교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기독교 자체의 안일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1928년 김활란(金活蘭, 1899-1..

국내 공산주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

1) 국내 공산주의 운동 코민테른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두 개의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창당 지도에서 부닥친 최대의 난제는 한민족 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 경쟁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동휘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유일정통성’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할 수 없이 꼬르뷰로를 따로 조직해서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담케 했다(1922. 12.). 그러나 꼬르뷰로가 정재달을 공식적으로 국내에 파견하기(1923) 전에 이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국내에 조직을 따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동휘는 상해임정에 있을 때부터 김철수 등의 사회혁명당의 비밀조직을 만들어놓았다. 이르쿠츠크파는 김찬이 조직한 신사상연구회(화..

상해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상해임정은 27년 동안 5차례의 개헌을 하고 8번을 이사하면서 존속했으나, 상해시대 초기를 제외하면 열악한 재정으로 행정비용을 충당하기에 허덕였고, 내각 인선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하자면 사실상 이름뿐인 정부였다. 임정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주원인은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금조달의 어려움과 지도적 인사들의 참여 거부, 그리고 공산당 진영의 분열책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내전, 일제에 의한 상해사변(1931)과 중일전쟁의 발발(1937-1945) 등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임정을 보따리장수처럼 옮겨 다니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이렇게 고난에 찼던 임시정부 시대의 지도자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 5인..

상해임시정부의 혼란과 분열

1. 대통령 이승만과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임정 유지파인 민족진영은 곧 국무총리 노백린과 내무총장 김구 등을 중심으로 상해임정 유지에 주력하면서도 현실적인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재하므로 그 직무를 대행하기 위하여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하였다.(1924. 6.)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이승만을 해임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임시의정원의 이런 비상조치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반대했으나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에 정식으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체제개편을 서둘렀다. 처음에 국무령제로 출발했다가 통합을 위한 1차 개헌(1919)을 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