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하신 대로 사는 생활 지식/창조주 하나님의 사회: 이런 일이?

거짓의 유토피아, 北 탈출 작전에 내 전부를 걸었다

heojohn 2023. 10. 22. 00:48

[아무튼, 주말]
[정상혁 기자의 행각]
탈북 다큐 ‘비욘드 유토피아’
구출 진두지휘한 김성은 목사

입력 2023.10.21. 03:00업데이트 2023.10.21. 19:51
 
 

“지금 압록강 물은 어때요?”

비가 와서 강물이 불었다는 현지 브로커의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그럼 애가 위험한데…. 거기 군대들이랑 얘기 된 거죠?” 소년 한 명이 국경을 넘어 백두산 인근에 도착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먼저 탈북한 소년의 어머니가 김성은(58·갈렙선교회) 목사에게 북한에 남아 있는 아들의 구출을 부탁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나라, 그러나 가장 먼 나라. 북한을 빠져나와 공산국가인 중국~베트남~라오스, 그리고 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는 그 길은 사선(死線)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북송(北送)은 사실상의 죽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잡히면 인신매매로 팔려갈 수 있다. 김 목사는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23년째다.

그가 진행한 실제 탈북 과정이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Beyond Utopia)’로 제작돼 올해 초 공개되자 세계는 경악했다. 1월 미국 최고의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고, 지난 1일 ‘우드스톡영화제’에서는 베스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크리틱스 초이스 다큐멘터리 어워즈’ 4개 부문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오는 23~24일 미국 전역 600여 극장에서 상영된다. 자유의 열망이 더 멀리 알려질 것이다. 영상 속에서 한 탈북자가 증언한다. “북한 정권은 우리가 낙원에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도망치려면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에서 김성은 목사가 탈북자들과 함께 라오스 밀림 지대를 통과하는 장면. /비욘드 유토피아

–영화 홍보 투어를 다녀오셨다고요.

“지난달부터 뉴욕·LA·콜로라도·샌프란시스코·워싱턴DC·보스턴 등 수십 지역을 40일간 돌았습니다. 난생처음 할리우드 사람들도 만났네요. 관객들이 많이 환호해주셨어요. 펑펑 울어주시고. 사람 목숨 구하는 영웅이라고요.”

–탈북 촬영이라니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안 하려고 했어요. 영화감독이 미국인(마들렌 개빈)인데 노랑 머리랑 같이 다니면 얼마나 눈에 잘 띄겠어요. 전화 요청은 계속 거절했어요. 그러자 2019년에 감독이 천안의 저희 교회로 찾아온 거예요. 결국 조건을 걸고 승낙했죠. 중국에는 감독 없이 우리 선교회 인원만 간다. CCTV도 철저하고 요새 정말 살벌하거든요. 그리고 제작비가 부족하니 탈북은 딱 한 팀만 진행한다. 촬영은 대부분 휴대폰으로 했어요.”

–영화엔 탈북자 두 팀이 등장하지요?

“그해 촬영에 돌입하자마자, 딱 맞춰 연락이 하나 왔어요. 탈북자 가족 5명이 백두산 근처에 마련해놓은 저희 교회 안가(움막)에서 구조 요청을 한 거예요. 가만 두면 잡히니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데다, 이미 북한을 빠져나왔으니 탈북 비용이 확 줄어든 상황이었죠. 추가 촬영이 가능해진 겁니다.”

다큐멘터리가 비추는 압록강의 겨울. 폭력과 굶주림에서 탈출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저 위를 건넌다. /비욘드 유토피아

1시간 55분 길이의 이 영상은 북한에서 아들을 빼내려는 이소연씨, 그리고 부모, 조모, 두 딸과 함께 탈북하는 노씨 가족의 두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탈북은 첩보 작전과 다름없다. 현지 브로커와의 통화는 도청 우려로 1분을 넘기지 않고, 채팅 메시지로는 은어를 쓴다. ‘한국 올 때 맥주 안주로 명태 다섯 마리만 가져와(한국행 탈북자가 다섯 명 있다)’ 같은. “신고 보상금이 있으니 택시만 잘못 타도 중국 공안에 잡혀요. 돈이 더 들어도 무조건 안전이 먼저예요.” 탈북자들은 주머니에 청산가리를 넣고 다녔다. 여차하면 삼킬 심산으로.

–난관의 연속일 것 같습니다.

“동남아 밀림 지날 때가 가장 힘들어요. 벌레는 어찌나 큰지…. 밟았는데 물컹해요. 보니까 뱀이에요. 기절한 애도 있죠. 한번은 낭떠러지에서 굴러서 허리 수술도 받았어요. 담낭도 적출했죠. 긴장해서 당시엔 통증도 못 느끼고 벌떡 일어나서 걸었어요. 가시에 베어도 피가 흐르는 걸 못 느낄 정도로. 근데 아이들한테는 여행 같은가 봐요. 산도 넘고 강도 건너고 야생 코끼리도 보고…. 밀림은 백번 천번을 다녀도 길을 몰라요. 반드시 그 구간만 오가는 현지인을 섭외해야 해요.”

–탈북 루트 노출 위험은 없나요?

“욕 많이 먹었어요. 다큐멘터리로 탈북 경로 다 까발린다고. 그런데요, 중국만 놓고 봐도 육로로 수천㎞예요. 경로와 교통수단의 경우의 수도 여럿이고요. 주로 밤에 이동합니다. 손전등을 켜도 공중에서 안 보이는 우거진 숲으로요. 영상에서 장소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넷플릭스와 또 다른 탈북 다큐멘터리 촬영을 논의 중입니다.”

◇자유를 향해 뛰다가 목이 부러졌다

2000년부터 통곡의 땅에서 북한 주민을 구출하고 있는 김성은 목사.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는 그가 지난해 세운 충남 아산의 탈북민 공동체 센터에서 탈북자들과 함께 웃고 있다. “데려오지 못하면 평생을 울며 살아 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 목사가 ‘탈북 사역’을 시작한 건 2000년부터. 평소 다니던 교회 은사(이형렬 목사) 때문이었다. “인생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뭔가 하나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1월 4일, 중국 선교에 따라나섰다. 두만강 투먼. 하루에도 수십 구씩 북한에서 시신이 떠내려왔다. 굶어 죽거나 처형당한 이들이었다. 강가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손을 당겼다. “동포끼리 같이 좀 삽시다.” 구걸하는 꽃제비였다.

–충격이 크셨다고요.

“처음으로 진짜 현실을 본 거죠. 당시엔 그 꽃제비가 일곱 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오래해 보니 이제는 알겠어요. 열 살은 됐을 거예요. 남한과 발육 차이가 크니까. 그 아이를 본 순간 내가 할 일이 바로 여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무슨 일을 하셨나요.

“헌 옷 수백 벌을 모아 탈북자들에게 건네줬어요. 옷도 탈북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차림새 보면 바로 들통나거든요. 가방 하나에 보통 30㎏ 넘게 나갔어요. 그걸 하나는 목에, 두 개는 양 어깨에 메고 국경을 건넜죠.”

어김없이 그날도 두만강을 건너는 길이었다. 쾅, 빙판에 대자로 뻗었다. “우두둑, 목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죠. 일단은 일어나서 다시 달렸어요. 그런데 밤이 되니 목이 안 움직여요. 다음 날 한국으로 들어와 병원에 갔죠. 목뼈에 철심 6개를 박았어요. 9시간짜리 대수술이었죠.” 셔츠 너머로 14년 전의 흉터가 보였다.

–첫 탈북 구출자는 누구였나요.

“제 아내요. 인민군 출신이에요. 부친이 엘리트 과학자였는데도 ‘고난의 행군’ 당시 아사하셨죠. 국경 근처 교회에서 예배 드리다 만났는데, 처음에 대뜸 저보고 ‘김정일 장군님 닮았다’고 하대요. 키 작고 배 불룩하고. 북한에서는 김정일 닮은 게 최고의 칭찬이래요. 서로 정이 깊어졌죠.”

–사랑엔 국경이 없군요.

“신앙심도 깊고 똑똑해서 한국행을 권했어요. 탈북을 마음먹은 뒤 경로를 고민했죠. 배로 와야 하나, 비행기를 타야 하나. 마침 하얼빈에서 아내와 같은 나이의 여자가 결핵으로 죽었는데, 사망 신고하지 않은 그 여자의 신분을 뇌물 주고 샀어요. 중국 여권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혼인 신고까지 마치고, 천신만고 끝에 하늘길로 한국에 왔습니다.”

탈북은 그렇게 ‘가족’의 일이 됐다. 알음알음 다른 탈북자들과 교류하며 ‘탈북 로드’ 개척에 나섰다. 시행착오도 숱하게 겪었다. “아내 데려오는 데 23년 전에 6000만원이 들었어요. 몇백 만원이면 될 일을…. 지금은 중국에만 도착하면 태국까지 일주일이면 갈 수 있어요. 네트워크가 있으니까요. 초창기에는 동생들부터 어머니까지 총동원됐죠. 베이징에서 대학 다니던 조카는 운전수 역할까지 해주고요.”

◇사상 첫 公海上 탈북 작전

2009년 12월, 중국 밀항선을 타고 건너온 탈북자를 끌어올려 한국행 배에 옮기고 있는 김성은 목사. /조선일보DB

김 목사는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사업이 기울어 서울에서 군산으로 내려갔다. 돈을 벌어야 했던 소년은 중학교 때부터 어선을 탔다. 벌이가 제일 좋은 일이었다. 연근해 고깃배에서 인부들에게 밥을 차려줬다. 밥을 태워 먹을 때마다 날아오는 뱃사람들의 발길질과 구박을 견뎠다. 이후 회사원으로 개인 사업자로 목회자로 살아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고단하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은 좋은 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던 2009년 12월, 또 한 척의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해상 탈북이었죠?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의 가족 4명을 데려오는 일이었어요. 그들을 인도할 조력자 한 명이 배를 탄 적이 있었고, 저도 어릴 적 바다 경험이 있으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시간이 단축되니까요. 중국서 빌린 목선을 타고 탈북자들이 서해 공해(公海)로 나오면, 마중 나간 우리 배가 그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계획이었어요.”

–계획대로 됐습니까?

“처음엔 인천에 갔어요. 배를 아무도 안 빌려줘요. 가진 돈은 2000만원뿐인데, 턱도 없다는 거죠. 그래서 예전 살던 군산으로 내려갔어요. 교회 전세금을 담보로 배를 빌렸죠. 그런데 하필 출발 당일 풍랑주의보가 내렸어요.”

–위험천만이었네요.

“선장이 안 가겠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만 믿고 바다에 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소연해도 안 통해요. 자기도 처자식이 있다고. 당장 다른 배를 구해야 했어요. 수제비 식당하는 여동생에게 전화했죠. 돈 좀 부쳐달라고.”

겨우 출항했지만, 약속된 접선 시간보다 9시간이 지체돼 있었다. 탈북자들은 집채 같은 파도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수시로 무전을 타전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버텨주기를. 기다려주기를. 20시간 가까이 내달렸을 때, 저 멀리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선 한 척이 보였다. “그때 같이 간 선장이 그러더군요. 기적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 일화는 조선일보가 기획·제작한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2′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그해 그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뇌병변을 앓던 일곱 살짜리 아들. 후원을 받기 위해 부부가 다른 교회에 다녀오던 날이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들의 눈이 뒤집어져 있었다. 음식이 기도로 넘어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때 다 그만두려고 했어요. 아내는 자기도 죽겠다고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다 환상을 봤나 봅니다. 내가 너희 아들을 천국으로 인도했는데, 지금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아들의 유골을 바다에 뿌린 뒤, 그는 다시 지옥의 국경으로 향했다.

◇돈 없이는 목숨도 없다… 냉혹한 현실

지난 1월 미국 ‘선댄스 영화제’ 초청 당시 기념 촬영 중인 김성은 목사와 매들린 개빈(오른쪽 옆) 감독, 그리고 실제 탈북자들. 맨 오른쪽이 이소연씨, 다른 네 명은 노씨 가족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지금껏 1000명을 구하셨다고요?

“과장된 숫자예요. 1000여 명에게 도움을 주긴 했어요. 데려온 건 300명이 약간 안 돼요.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영끌’해도 안 됩니다. 코로나 사태 직전에 북한에서 중국으로 오는 데만 2000만원 들었어요. 지금은 5000만원이 넘어요. 한국까지 오는데 한 명당 1억원 가까이 들죠.”

–구조 요청은 늘었을 텐데요.

“지난여름에도 4명 데려왔어요. 더 구하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괴롭습니다. 자꾸 돈 얘기 하면 ‘무슨 종교인이 저래’ 사이비 같겠지만, 그게 현실이에요. 당장 가진 게 없으니 ‘나중에 한국 도착하면 꼭 지불하겠다’고 현지 브로커한테 각서도 써요.”

–언제나 돈이 문제군요.

“100만원 들 거 200만원 쓰면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승합차를 한 대 더 빌리면 검문소를 더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거예요. 투자한 만큼 돌아오는 거죠.

탈북 사역은 후원금으로 진행된다. “정기적으로 마음을 보태주시는 교인이 300명 정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교회 건물 전세금이 올라 방을 빼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 그 때마다 기적이 찾아왔다. 홀연히 60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고 사라진 익명의 부부, 은행 대출까지 받아 위기 극복에 힘 보탠 김밥집 주인, 하나님께 바친다며 1억원 넘게 건넨 의사…. 이 돈으로 사람을 구했다. 그러나 보상은 없다.

–섭섭하지는 않으세요?

“칭찬은커녕 험담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결국 당신 유명해지고 싶은 거 아니냐고. 영웅 놀음 그만 하라고. 어느 외교부 공무원은 ‘자꾸 이러면 중국과의 관계만 껄끄러워진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 계속 하십니까.

“열네 살 때 탈북하다가 붙잡혀 중국에 팔려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13년간 사창가에 있었다더군요. 얻어맞을 때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요. 저희와 연결됐을 때도 당연히 믿지 않았대요. 팔려가더라도 그저 한 번 더 팔려가는 거니까, 속는 셈 치고 따라나선 거죠. 그랬던 여자가 마지막 관문 메콩강을 건너자 울더군요. 하나님이 뭔지 교회가 뭔지 잘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받은 경험이 생전 처음이라고. 예전엔 억울해서 울었지만 이번엔 고마워서 운다고.”

◇거저 주어지는 유토피아는 없다

 

 

지난해 김 목사는 충남 아산에 탈북민 공동체 센터를 지었다. 독지가 등의 후원으로 2100평 땅을 마련해 30~40명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꾸린 것이다. “4년 전 서울 봉천동에서 탈북자 모자(母子)가 집에서 굶어죽은 일도 있었고…. 누구나 와서 쉬면서 고민도 털어놓고 음식도 나눌 그런 곳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지난 7일 찾은 이곳 텃밭에서 탈북자 일고여덟 명이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북한 있을 때 다 농장원이었고 강냉이 심던 경험이 있으니까, 흙을 밟으면서 내적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탈북자 자활 운동도 하셨죠.

“탈북이 끝이 아니잖아요. 여기서 잘 살아야죠. 제 전 재산에 어머니가 보태주신 돈, 대출금을 합쳐 천안에 3층짜리 교회 건물을 8년 전에 샀어요. 1층 전체를 탈북자에게 무료로 내줬죠. 가게 차리라고요. 고기 잡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사는 잘됐습니까.

“세탁소도 하고, 카페도 있었고, 그런데 코로나가 왔죠. 쉽지 않아요.”

–기업 등의 외부 후원은 있나요?

“없습니다. 큰 기업일수록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할 테니 이해는 합니다.”

–정부의 도움은요?

“아뇨. 지난 정권은 특히 힘들었습니다. 귀순한 북한 주민을 추방하기까지 했잖아요.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똑같은 국가기관인데 정권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게 참 웃깁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자유포럼'에 참석한 김성은 목사가 탈북자 인권 보호를 호소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저지하는 철조망이 김 목사의 뒤쪽 스크린에 펼쳐져있다. /유튜브

국제 정세도 녹록지 않다. 중국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지난 9일 탈북자 약 600명을 강제 북송했다. 이 같은 대규모 북송은 코로나 발발 이후 처음이다. 김 목사는 지난 6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국제 인권회의 ‘오슬로 자유 포럼’에 연설자로 참가해 중국 정부의 각성을 호소한 바 있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한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중국이 탈북민들의 주요 탈출 루트에 있는 만큼, 중국 정부가 인권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팬데믹 기간 중국에 구금돼있던 2000명 가까운 탈북민이 북송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헌신을 모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북송의 두려움에 떨며 물건처럼 팔려 다니는 탈북민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최종 목표는 무엇인지요.

“더는 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날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