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21

유물진화론적 의식과 정신의 의미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보면, 인간의 생명이란 그저 물질의 변화과정에서 거품처럼 잠깐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생명이란 것이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일시적 물질현상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면 그들 사이의 동일성을 보지 못하고 비슷한 것들을 보면 그들 사이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동일성과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의 진실성이다. 전문가들이 고의 또는 실수로 오류를 저지른다면, 그 결과는 일반 사람들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인의 실수는 개인의 몫으로 끝나지만, 전문가의 오류는 사소한 것이..

공산주의 교의(敎義)가 된 유물론

공산주의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주장들을 무오류의 교리처럼 신봉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에 대한 해석은 당시의 공산당 최고 지도자만이 변경할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스탈린의 DIAMAT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1931- )가 집권(1985)하여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이 시작되던 무렵에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지의 편집국장 아파나셰프는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교재에서 생물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모순”이 해결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유기체는 환경이 변하면 새로운 영양물들을 흡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그 유기체의 내용, 즉 그 유기..

변증법적 유물론은 과연 과학적인 주장인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유물사관은 다윈의 진화론과 결합하여 사실상 유물진화론이 된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많이 수정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사후에 특히 서유럽에서 많이 수정되고 변형되었는데, 엥겔스조차 생전에 이러한 수정주의에 부분적으로는 동의하고 있었다.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출신 교조주의자들은 서유럽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 원형을 비교적 잘 따랐었다. 그러나 이것도 레닌에 의하여 점차 수정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되었다. 레닌이 죽은 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스탈린에 의해 과격하게 변형되어 이름만 남고 실제는 스탈린주의로 변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스탈린이 죽은(1953) 후에는 흐루시초프에 의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2

2) 과학적 무신론으로서의 역사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은 물질의 특수 영역인 인류사회의 역사발전의 법칙을 유물론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유물론은 경제사회적 관계의 법칙에 다름 아니다. 마르크스는 “문명이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사회에서 생산관계의 역사적 발전을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생산은, 제직업간의 제신분간의, 그리고 제계급간의 대립에 기초하여 조직되기 시작한다. 대립 없이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엥겔스는 물질의 존재 양식을 운동이라고 보면서, 운동 없이는 물질이 있은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운동은 물질의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는 동력이다. 이것이 바로 문명이 오늘날까지 따라왔던 바의 그 법칙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변증법적 유물론은 ..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1

공산주의 사상은 단순히 앞에서 살펴본 『공산당 선언』과 『반듀링론』만으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여기에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DIAMAT)에 대한 이해가 추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공산주의 유물진화론, 즉 과학적 무신론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데, 첫째 이론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공산주의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플레하노프에 의해서 제안된 것이지만 레닌의 것이 되었으나 스탈린이 재해석했다. 그리고 둘째 이론인 ‘역사적 유물론’은 그것의 실천적인 부분을 논의하는 것이다. 스탈린의 DIAMAT는 1956년에 후르시초프에 의해 결국 폐지되어 본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돌아갔지만, DIAMAT는 그 뒤에도 내용으로 ..

‘과학적 무신론’의 학습 교재

레닌은 혁명에 성공한 직후부터 죽을 때까지 미추린(Ivan Vladimirovich Michurin, 1855-1935)을 통해 라마르크주의 생물학을 받아들였다. 레닌은 미추린의 농작법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이론과 방법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레닌은 병석에 누워 있을 때에도 그에게 사람을 보내 연구 성과를 알아보기도 했다. 레닌이 사망한 직후에 스탈린은 철저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것으로 행세했다. 따라서 미추린의 라마르크주의 생물학적 원리 또한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생물학계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되었다. 이때부터 소비에트공화국연방에서 생물학 이론은 라마르크주의와 일치해야 했으며, 이와 다른 이론은 배척되었다. 이와 다른 주장을 하는 과학자들은 체포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

‘과학적 무신론’의 지배체제 수립

1) 엥겔스의 생명관과 과학적 무신론 사상 앞에서 보았듯이 엥겔스는 생명을 “단백질의 존재양식”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의 생물은 단백질 덩어리에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각종 생물들은 단백질 덩어리에서 태어난 최초의 생명체가 계속되는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하여 진화하고 번식한 것들이다. 그래서 엥겔스의 추종자들은 인간도 물질에서 생겨난 단순한 생물에서 점점 복잡한 동물로 진화한 동물 가운데 하나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도 자연에서 특별한 존재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저 진화하다보니 인간이 된 것뿐이다. 엥겔스는 인간의 정신조차 물질현상이 뇌에 전사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사유도 물질현상의 전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전환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패전국이 된 독일제국에서 국민들은 빌헬름2세 황제(Wilhelm II, 1859-1941: 재위 1888-1918)를 쫓아내는 혁명에는 성공(1918)했으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수정주의 독일사민당이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보수 세력과 연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성공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희망을 저버렸다. 독일사민당 당원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레닌이 소비에트 혁명에 성공하는 것을 경험하고 이에 크게 고무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수정주의로 변절한 독일사민당에 불만을 품고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결집하여 스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발전

(1) 레닌의 망명과 마르크스주의 연구 이 당시 레닌은 러시아제국에서 변호사 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변호사 활동(1891)을 하고 있다가, 『자본론 I』을 읽고 이에 심취하여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차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1892)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1895)했으나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했다. 3년 형기를 마친 그는 유럽으로 가서 1차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레닌은 이때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창당(1898)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아버지 플레하노프(Georgy Valentinovich Plekhanov, 1856-1918)를 만났다. 이들은 마르토프(Martov, 본명 Yuly Osipovich Tsederbaum, 187..

마르크스 교조주의와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

마르크스는 『자본론 I』(1867)을 출판한 이후에도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 아래 1869년 독일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고, 1970년 선거에 참여하여 2석을 얻었다. 1871년 3월에는 파리코뮌(Paris Commune)이 출범했다. 특히 파리코뮌이 성립하는 것을 보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혁명이론이 성공했다고 환영했으나, 아쉽게도 5월에 곧 진압되고 말았다. 파리코뮌은 두 달 만에 괴멸됨으로써 그 짧은 생애를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를 선언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의 국교이던 로마가톨릭을 국가로부터 분리하자는 것이었다. 기독교 국가주의를 따랐던 유럽인들에게 파리코뮌은 처음으로 기독교와 분리된 국가체제를 잠깐이나마 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