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전환

heojohn 2020. 3. 10. 22:13

1차 세계대전의 결과 패전국이 된 독일제국에서 국민들은 빌헬름2세 황제(Wilhelm II, 1859-1941: 재위 1888-1918)를 쫓아내는 혁명에는 성공(1918)했으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수정주의 독일사민당이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보수 세력과 연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성공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희망을 저버렸다.

 

독일사민당 당원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레닌이 소비에트 혁명에 성공하는 것을 경험하고 이에 크게 고무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수정주의로 변절한 독일사민당에 불만을 품고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결집하여 스파르타쿠스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하고 투쟁했지만, 독일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서 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그러나 독일사민당은 이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그들의 강령에서 폭력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아예 지워버리고, 합법적 의회주의 정당으로 변모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폭력 혁명이론을 영구히 포기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이제 세계적으로는 합법적 의회주의로 변신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 폭력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나누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가 되어버렸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인 독일사민당의 우파는 독립사회당으로 재조직되었으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나치당이 집권(1933)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교조주의자였던 카우츠키는 베른하르트를 따라 수정주의 우파로 변신하여 레닌의 볼셰비키파와 격렬한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는 나중에는 암살 위협에 쫓겨 다니다가 해외로 망명했다. 결국 그는 망명지에서 의문사(疑問死)했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기독교를 가장 폭넓게 소개했던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그리스도교의 기원(190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지도자로,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프롤레타리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이 공산주의 원형이 기독교라는 오해를 만들어내는 한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한데, 이것을 공산주의와의 접촉점으로 이용하는 기독교인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무익한 오해일 뿐이다. 유물론자들은 결코 쉽게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을 깨우치는 방법은 과학적 무신론의 오류를 알게 하는 것뿐이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오토 바우어(Otto Bauer, 1881-1938)는 공산주의 혁명의 극단적인 투쟁성에 반대하였다. 그는 비윤리적 계급투쟁을 거부하면서 인간주의적 토대 위에서 사회민주주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서유럽국가들은 이와 같이 정통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점차 자국의 현실에 맞게 또는 개인의 관점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재기한 독일사민당은 치열한 내부 논쟁 끝에 마르크스주의 포기를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전후 서독의 부흥을 이끌었고 독일 통일을 주도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현대 서구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단지 자본주의 사회제도와 기계문명의 비인간적 요소를 비판하는 철학적 도구로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변증법 이성 비판(1960)은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실존주의로 흘러간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