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발전

heojohn 2020. 3. 10. 22:05

(1) 레닌의 망명과 마르크스주의 연구

 

이 당시 레닌은 러시아제국에서 변호사 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변호사 활동(1891)을 하고 있다가, 자본론 I을 읽고 이에 심취하여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차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1892)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1895)했으나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했다. 3년 형기를 마친 그는 유럽으로 가서 1차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레닌은 이때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창당(1898)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아버지 플레하노프(Georgy Valentinovich Plekhanov, 1856-1918)를 만났다. 이들은 마르토프(Martov, 본명 Yuly Osipovich Tsederbaum, 1873-1923) 등과 함께 이스크라지를 창간(1900)하고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나, 당국의 눈을 피해 유럽을 전전해야 했다. 레닌은 이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1902)라는 도발적 제목의 저작을 출판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 책은 프롤레타리아 집단을 이끌 공산당은 혁명가로 조직된 당원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곧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마르크스 정통주의자들에게 지도적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03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제2차 대회가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당원 자격 문제로 표결 끝에 다수표를 얻은 레닌측이 볼셰비키(다수파)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레닌에 반대했던 플레하노프와 마르토프는 멘셰비키(소수파)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레닌은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고 플레하노프와 결별하여 이스크라지를 떠났다. 러시아에서 노일전쟁(1904-1905)의 패전 여파로 제1차 혁명이 발발(1905)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던 레닌은 혁명이 실패하자 다시 망명지에 돌아와서 2차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2인터내셔널은 제7차 대회(1907)를 슈트가르트에서 열었다. 2인터내셔널은 회의 때마다 수정주의 논쟁이 없었던 적이 없었지만, 슈트가르트 대회에서 벌어진 반전(反戰) 논쟁은 혁명의 방법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평화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국 내의 폭력적 혁명은 인정했지만, 국가 간의 전쟁에는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전쟁은 부르주아지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데, 실제로 전쟁에서 희생되는 병사들은 대부분 프롤레타리아계급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그의 이론 중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만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회가 국가 간의 전쟁의 시기에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전만을 주장하는 것은 혁명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Róża Luksemburg, 1871-1919)와 마르토프 등의 지지를 얻어 소위 슈트가르트 결의안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외국과의 전쟁을 기회로 자국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제안은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수정을 제안한 것이며, 대회 마지막 날에 반대토론이 없어 통과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10년 뒤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등장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6차 암스테르담 대회(1904)에서 식민지 문제로 인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을 경험했던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결의안에 크게 구속받는 입장이 아니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의안을 계기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러시아의 혁명적 공산주의 그룹과 서유럽의 점진적 사회민주주의 그룹으로 뚜렷하게 양분되었다. 실제로 독일사민당은 서부 아프리카를 점령한 독일 제국주의 정책을 반대하다가 의회선거(1906)에서 참패하자, ‘제국주의 찬성이라는 민족주의적 수정주의 입장으로 이미 돌아서있었다. 마르크스 수정주의자들인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렇게 마르크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다 엄격하게 마르크스주의를 준수하는 교조주의적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2인터내셔널은 제2차 망명생활을 하는 레닌에게 이론 투쟁을 통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1914)이 발발하자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본부격인 독일사민당 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가 드러나면서 결국에는 좌우파가 분열되었다.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해도 조국방위를 위한 전쟁에 찬반을 놓고 견해를 달리하는 좌우파는 더 이상 한 둥지에서 공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독일 내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서로 갈라선 것이다. 이 영향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연대체제도 정지되었다.

 

(2) 볼셰비키파의 활동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표적 교조주의자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은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단계론을 러시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발전단계 이전의 전근대사회에서도 혁명의 가능성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혁명은 역량이 부족한 프롤레타리아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지도적 역량을 갖춘 소수 정예당원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레닌은 이런 문제로 플레하노프와 의견 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1903년에 런던에서 열린 2차 대회에서 레닌에게 다수표를 주었다. 레닌은 이를 계기로 플레하노프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볼셰비키파를 이끌면서 제2인터내셔널 활동과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전념했다. 레닌은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실패를 경험하고 농민과 노동자 세력의 연대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전 인구의 80%가 넘는 농민을 배제하고 극소수에 불과한 러시아 산업 프롤레타리아 세력만으로는 혁명의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레닌은 또한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수행 능력을 부정하게 되었고, 직업적 당원이나 혁명가들에 의한 체계적 혁명운동을 주장했다. 이러한 레닌의 견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 정통주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1차 러시아 혁명을 비평한 그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에서 나타나고 있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그의 색깔로 수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 혁명운동이 노일전쟁의 패배와 피의 일요일사건이 겹쳐서 일어난 호조건에서도 결국 실패한 것은 저항세력의 부족과 유능한 지도 그룹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계급뿐만 아니라 농민의 힘을 혁명운동에 이용해야 한다고 수정안을 제안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을 레닌의 방식으로 실천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비판자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그의 스승이었던 플레하노프와 동지였던 마르토프가 가장 먼저 나타난 비판자들이었다. 그러나 레닌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보다 중요한 것은 조국 러시아에서 황제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성공 가능한 혁명이론이었다. 레닌은 1909년에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출판하여 엥겔스가 죽은 이후 이 책이 출판될 때까지의 자연과학이 얻어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온갖 것을 유물론으로 일반화(一般化)”했다. 그에 의하여 최고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에 도달한 것이다.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에 러시아제국 니콜라스2세 황제(Tsar Nicholas II, 1868-1918: 재위 1894-1917)가 퇴위하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1710월 볼셰비키혁명에 성공하여 러시아를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