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마르크스 교조주의와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

heojohn 2020. 3. 10. 21:58

마르크스는 자본론 I(1867)을 출판한 이후에도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 아래 1869년 독일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고, 1970년 선거에 참여하여 2석을 얻었다. 18713월에는 파리코뮌(Paris Commune)이 출범했다. 특히 파리코뮌이 성립하는 것을 보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혁명이론이 성공했다고 환영했으나, 아쉽게도 5월에 곧 진압되고 말았다. 파리코뮌은 두 달 만에 괴멸됨으로써 그 짧은 생애를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를 선언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의 국교이던 로마가톨릭을 국가로부터 분리하자는 것이었다. 기독교 국가주의를 따랐던 유럽인들에게 파리코뮌은 처음으로 기독교와 분리된 국가체제를 잠깐이나마 선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기독교는 마르크스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서는 비호를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파리코뮌이 짧은 생명을 끝마치자,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의 실패를 프랑스 내전(1871)에서 정리했다. 그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면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 동시에 기존의 국가를 파괴해야 하는데 파리코뮌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1872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6차 회의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심각한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당국의 탄압이 심해지고 반대파가 득세하자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 본부를 뉴욕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은 1874년 선거에서 라살레(Ferdinand Johan Gottlieb Lassalle, 1825-1864)가 주도하는 전독일노동자동맹과 연합하여 9석을 얻었다. 그러자 1875년에 전독일노동자연맹과 사회민주노동당이 합쳐 독일 사회주의노동당을 창당하면서 고타강령을 채택했다. 마르크스는 강령의 내용이 그의 공산주의 이론과 다른 것을 보고 고타강령 비판을 써서 수정을 요구했으나 라살레파에 의하여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상심한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실질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던 제1인터내셔널을 해체해버렸다(1876).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사노당 내에서 세를 확장하는 듀링이 마르크스와 다윈에게 비판의 포문을 열자, 그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들을 써서 앞에서 논의한 반듀링론을 출판한 것이다(1878). 엥겔스가 대부분을 저술한 반듀링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더불어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에 가장 핵심적인 이론서이다.

 

독일 사노당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나, 1878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사회주의 규제법에 의하여 불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사노당은 1889년에 파리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 통칭 2 인터내셔널”)의 재창립을 주도하였고 8시간 노동을 주장하였다. 그밖에도 미국 총파업이 일어났던 51일을 국제노동운동 시위일로 지정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서 국제적 지도력을 과시했다. 독일사노당은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1890년에 사회주의 규제법이 폐기됨으로써 합법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의회선거에 참여하여 20%의 득표율로 35석을 획득했다. 독일사노당이 의회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때 마르크스는 이미 죽었지만 엥겔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엥겔스는 독일사회민주당이 재창당(실제로는 독일사노당의 이름만 바꾼 것이다)하면서 채택한 에르푸르트 강령(1891)이 대부분 그들의 이론을 따라 작성되어 있음에 크게 고무되었고, 런던에 있으면서도 이 당의 자문역을 기꺼이 맡기로 동의했다. 에르푸르트 강령은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1938)가 자본주의 붕괴에 의한 사회혁명의 필연성을 기술한 전반부와 베른슈타인이 혁명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기술한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수정주의 논쟁은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시작되었다. 이 강령을 기초한 위 두 사람은 초기 독일사민당에서 마르크스 교조주의와 수정주의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카우츠키는 다윈주의자였다가 마르크스 이론가로 변신하여 다윈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리게 된 인물이며 초기에는 교조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붕괴될 것이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 폭력적 혁명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역사는 단지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므로 혁명에 의해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은 엥겔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오이겐 듀링의 지지자였다. 그는 또한 자유주의가 곧 사회주의라고까지 말했다. 이들은 초기 독일사민당의 좌파와 우파의 양축을 이끈 인물들이었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폭력적인 혁명운동에는 공통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초기 독일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 해석과 실천적 적용을 둘러싸고 교조주의와 수정주의 이론 투쟁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1895년까지 살았던 엥겔스는 죽기 전에 독일사민당에 대해 합법적인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이 정당은 마르크스의 급진적 폭력 혁명이론을 완전히 포기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조건을 현실에서 개선하는 데 주력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전환은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무오류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제2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방법에 대한 논쟁이 만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사민당은 수정주의적 변화의 정당성의 근거를 엥겔스에게서 찾았다. 엥겔스는 의회에 진출한 독일사민당을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1895년 재출판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서문에서 의회 장악을 통한 마르크스주의 실현에 긍정적인 전망을 진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적 전통을 가진 유럽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종교폐지와 폭력 혁명론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난 이념 논쟁은 교조주의 그룹이 러시아로 넘어가기까지 더욱 확대될 일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적 야망은 불운하게도 생전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이 죽은 후에 레닌이 대신 이루어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야망은 스탈린 등에 의해 인류에게 혹독한 재앙을 가져왔을 뿐, 인간에 의해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면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