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21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1) 『자연변증법』 등에서 다윈의 진화론 인용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은 후 출판한 『자연변증법』(1883)에서도 다윈을 인용하고 있다. 엥겔스는 특히 [주석과 단편]에서 “과학의 역사에 대하여” 논하면서, 자연과학이 18세기의 기계적 일면성을 극복하고 19세기의 경험주의 과학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음을 지적한다. 엥겔스는 자연과학 발전의 원인으로 세 가지 위대한 발견을 꼽고 있다. 첫째는 “에너지 전화” 즉 “해명되지 않은 현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자연의 무수한 모든 작용원인”이 이것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물체의 운동이 ‘열의 일당량’에 의해 측정이 가능해짐으로써, 자연의 운동은 철학의 주장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사실로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유기세포의 발견으로 유기체의 생성, ..

엥겔스의 『반듀링론』읽기-4

(7) 엥겔스의 생명관 듀링에 대한 비판을 마친 엥겔스는 이어서 자신의 생명관에 관한 진술을 시작하겠다고 하는데, 이 부분 역시 유물론자의 생명의 기원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뒤에 오파린이 화학적 진화론을 다룬 『생명의 기원』에서 여기에 나오는 엥겔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엥겔스는 아직도 듀링을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그는 먼저 “유기적인 신진대사가 생명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30년 동안이나 알려진 과학적 상식이라고 전제한다. 엥겔스는 듀링이 이것을 “형체를 형성하는 도식화에 의한 신진대사”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생명을 생명이라고 정의하는 것과 똑 같다”고 주장한다...

엥겔스의 『반듀링론』읽기-3

(5) 생명의 기원 및 변화의 원리에 대하여 엥겔스는 “자연과학이 아직까지 유기물이 계통 없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시인하고,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아직까지도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화학적 방법으로 출현하였을 것이라는 것뿐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직까지는 아무리 대담한 자연발생론자라 하더라도 다만 박테리아나 곰팡이 종류나 기타 대단히 원시적인 유기물만이 이 방법으로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 곤충이나 어류나 조류나 포유동물이 창조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어서 듀링은 생명의 기원문제에 대해서 매우 주목을 끄는 말을 하고 있는데, “유기적인 자연산물”의 연관이 계통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면, “혈통관계가 끊어진 곳에서” 별개의 ..

엥겔스의 『반듀링론』읽기-2

(3) 다윈에 대한 듀링의 비판 및 듀링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 엥겔스는 이어서 듀링이 다음과 같이 다윈을 공격했음을 열거한다. 다윈이 맬더스의 인구론을 경제학에서 자연과학으로 이식하였다는 점, 그가 동물사육자의 관념에 사로잡혔다는 점, 그가 생존경쟁설(Kampf ums Dasein)로서 비과학적인 엉터리 글을 쓴다는 점, 그리고 또 다윈주의 전체는 라마르크에게서 차용한 것을 제외하면 인간성에 대립하는 일종의 야수성에 불과하다는 점 등 엥겔스는 다윈이 생물의 종이 변화한다는 개념을 연구여행에서 얻었고, 돌아와서는 인공배양과 자연관찰을 통해 이러한 종의 가변성을 어느 정도 확인하였다고 주장한다. 엥겔스의 이해에 의하면 생존경쟁은 생존의 싸움터에서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유리한 “개체적 특질”을 가진 개체가 생존..

엥겔스의 『반듀링론』읽기-1

1) 엥겔스와 듀링의 논쟁 오이겐 듀링(Eugen Dühring, 1833-1921)은 대학교수이며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반대파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마르크스의 『자본론 I』과 다윈의 『종의 기원』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세력을 늘려가고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듀링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엥겔스는 듀링을 반박하는 논문들을 쓰기 시작했고(1876-1878), 이것들을 모아서 『오이겐 듀링씨의 과학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1878). 후에 『반듀링론』이라고 불리는 이 책이 나오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는 체계적인 과학적 이론의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이때까지 공상에 머물러 있던 마르크스와..

‘과학적 무신론’의 발전-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다윈의 접촉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반종교론에 바탕을 두고 철저한 무신론으로 나아갔다. 다윈은 성경의 창조 기사를 그대로 믿지 않은 것은 사실이며, 스스로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그가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윈이 남긴 저작들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면, 그는 이신론자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일반사회 또는 과학계에서는 대부분 다윈주의자들이 무신론을 주장한다. 다윈주의를 자처하는 저명인사들이 거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다윈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이신론적 입장인 유신진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 다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보다 다윈과 『종의 기원』을 택하고 있다. 그리..

『공산당 선언』에 대한 비판

앞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공산당 선언』은 인류 사회역사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공산주의 사회로의 발전은 필연적이라고 예언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진리와 종교와 철학적 사상들을 폐기하고 유일하게 남게 될 종교적 공산주의 사회에서 예언자로 군림하려고 하는 것이다. 신이 없는 종교적 공산주의 제도에서 예언자는 그 자신이 교주가 되므로 최고의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언은 실현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아닌 예언은 오류이므로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이후에 계속 수정되었지만, 『공산당 선언』에 나타난 핵심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권위에 의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공산당 선언』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을 정당화하..

『공산당 선언』-2

(3) 사회주의․공산주의 문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를 열거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① 반동적 사회주의(Reactionary Socialism) ㉠ 봉건적 사회주의(Feudal Socialism)는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들이 그들에게서 지배계급의 지위를 빼앗아간 부르주아지를 문서적으로만 비난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지지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목사가 영주와 손잡고 나아갔듯이 성직자 사회주의(Clerical Socialism)는 봉건적 사회주이와 손잡았다.” 그리고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는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의 색채를 가미한 것이며,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잡고 ‘귀족의 울화에 대해 뿌려주는 성수’에 지..

『공산당 선언』-1

“하나의 유령-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한다. 이 유령을 격퇴하기 위하여” 교황과 짜르(러시아 황제), 메테르니히(Metternich: 오스트리아 정치가)와 기조(Guizot: 프랑스 정치가),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 스파이 등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은 신성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시작하는『공산당 선언』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 문제 마르크스는 일찍이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불만을 표명한 바 있다. 당시 마르크스는 영국의 초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의 절망이나 노동자에게 부르주아에 대한 반항을 유발하는 ‘소외’ 문제를 주목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

초기 공산주의 운동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기독교적 공산주의 또는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이 논의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게 되자 사회주의 사상은 우주의 사물은 오직 물질적 현상이며 인류사회의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변화한다는 유물론적 공산주의로 변하게 되었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841)로 박사학위를 받은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을 운영하다 추방되어 파리로 망명했다. 파리에서 ⌈독-불연보⌋를 발간하면서 헤겔철학을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만나 사상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평생 동지가 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철학에 경제학을 접목하는 『경제학-철학 초고』(1844)를 발표했으나 다시 브뤼셀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최후의 철학적 무신론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에서 “지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