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엥겔스의 『반듀링론』읽기-2

heojohn 2020. 3. 10. 21:34

(3) 다윈에 대한 듀링의 비판 및 듀링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

 

엥겔스는 이어서 듀링이 다음과 같이 다윈을 공격했음을 열거한다.

 

다윈이 맬더스의 인구론을 경제학에서 자연과학으로 이식하였다는 점,

그가 동물사육자의 관념에 사로잡혔다는 점,

그가 생존경쟁설(Kampf ums Dasein)로서 비과학적인 엉터리 글을

쓴다는 점,

그리고 또 다윈주의 전체는 라마르크에게서 차용한 것을 제외하면

인간성에 대립하는 일종의 야수성에 불과하다는 점 등

 

엥겔스는 다윈이 생물의 종이 변화한다는 개념을 연구여행에서 얻었고, 돌아와서는 인공배양과 자연관찰을 통해 이러한 종의 가변성을 어느 정도 확인하였다고 주장한다. 엥겔스의 이해에 의하면 생존경쟁은 생존의 싸움터에서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유리한 개체적 특질을 가진 개체가 생존할 가능성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다수의 생존자들이 가진 개체적 특질은 후대에게 유전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유전의 누적으로 인하여 일단 획득된 방향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러므로 종은 다윈의 이론과 같이 자연도태, 다시 말하자면 적자생존에 의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런 것들은 다윈이 탐구하여 얻은 실증적인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엥겔스는 듀링이 이와 같은 실증적인 측면에 깊이 들어가기를 꺼리면서, 그 자신은 언제까지나 도덕적으로만 분노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말하자면 듀링이 다윈의 생존경쟁에 대해 먹이의 약탈과 약육강식이 수행되고 있는 동물계 내부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므로 동물적인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다윈이 멜더스의 학설을 빌려온 것이라는 듀링의 지적을 시인하면서도, 듀링이 다윈의 생존경쟁의 관념은 인구과잉에 관한 맬더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의 견해와 동일한 결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비판한다. 엥겔스는 이런 생존경쟁은 동물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계에도 있음을 도덕가 듀링은 모르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듀링은 다만 도덕적인 분노때문에 자연의 모든 행동에 관한 법칙과 지식을 동물의 세계에 국한시키고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듀링은 다윈이 자연의 모든 행동에 관한 법칙과 지식을 동물세계에서 탐구한 것이라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식물계에서도 이런 법칙이 적용되는지를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듀링이 다윈주의는 그 변화의 차이를 무에서 산출한다고 지적한 것에 대하여, 엥겔스는 다윈이 각 개체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무시하고 그 변화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그러나 엥겔스는 다윈의 문제의식은 원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원인의 결과가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 그 합리적 형식을 발견하는데 있었다고 변호한다. 그리고 엥겔스는 다윈이 그의 발견을 너무나 광범한 영역에 적용하여 그것을 종의 변화의 유일한 지렛대로 삼은 나머지 개체의 변화원인을 무시했다는 점은 진보를 성취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결점이라고 말하면서 다윈의 약점을 변호한다. 엥겔스의 이러한 주장은 모두 다윈과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한 것들이나, 세부적으로 검토해보면 다윈의 이론과 일반 과학적 이론을 왜곡하는 주장이 적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엥겔스가 다윈주의 전체는 라마르크에게서 차용한 것이라는 듀링의 주장을 시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윈주의와 라마르크주의를 동일시하는 이러한 관점은 이후 공산주의자에게 공통적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후에는 더 유물론적인 라마르크주의로 기울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4) 헤켈의 적응과 유전에 대한 논쟁

 

엥겔스의 설명에 의하면, ‘다윈의 독일 불독이라고 불리는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은 자연도태론의 개념을 적응과 유전의 교호작용으로 확대하여, “적응은 진화의 변화적 측면을, 유전이 그 보존적 측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듀링은 자연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생활조건에 대한 진정한 적응은 관념에 의하여 규정받는 충동과 행동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식물이 태양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은 자극에 의한 작용인데, 이것을 비유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적응이라는 말을 쓴다면 이것은 개념 속에 유심론적 혼란을 끌어넣는 것이라고 헤켈을 비판했다. 여기서 엥겔스는 듀링이 헤켈을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하여 덤벼든다. 엥겔스는 듀링에 대해 듀링씨가 자연에 목적 개념을 적용시키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고비판하면서, 듀링이 청개구리 등의 보호색과 벌레를 잡아먹는 식물의 먹이 획득 행태를 합목적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것의 예로 제시했던 사실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엥겔스는 또 적응은 관념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듀링의 말을 인용하고, 이 말을 목적적 행위가 관념에 의해서 매개되어 의식적, 의도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엥겔스는 듀링의 말을 왜곡해서 듀링이 현실철학에서 늘 보는 목적적 창조자, 즉 신에 도달하였다고 동료 유물론자를 과도하게 비판하고 있다. 듀링이 여기서 적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유심론적 혼란을 끌어넣는 것”, 다시 말해서 목적 개념을 적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 유물론자의 입장에서는 자연의 조건에서 적응이라는 말은 비유적으로만 써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런 뜻의 말을 두고 엥겔스가 반박하는 것을 보면, 엥겔스는 듀링의 말을 오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일부러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전에 관련해서 엥겔스는 듀링이 유기계 전체가 하나의 원시생물에서나왔다고 주장하는 다윈주의는 잘못된 길로빠진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반박하고 있다. 엥겔스는 그 근거로 다윈의 종의 기원6끝에서 두 번째 페이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엥겔스는 여기서도 자신이 왜곡한 사실을 반박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엥겔스는 다윈이 자신은 모든 생물을 별개의 피조물로 보지 않고 몇 개 소수의 생물의 직계자손으로 본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면서, 듀링이 하나의 원시생물이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다. 말하자면 다윈은 소수의 생물이라고 말했지 하나의 원시생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인용한 구절의 전체 서술을 보면, 다윈은 우리가 모든 생물을 특수한 창조물로서가 아니라, 캄브리아계 최초의 층이 퇴적되기 훨씬 이전에 생존한 어떤 소수의 생물에서 계통을 이은 자손으로 볼 때, 그러한 모든 생물들은 고귀하게 되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고 말했다. 다윈이 했던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최초의 생명발생에 관한 그의 생각을 나타내는 종의 기원마지막 구절에 보다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생명이 그것의 여러 가지 능력과 함께 최초에 조물주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태로 불어넣어졌다는, 그리고 이 지구가 불변의 동력

법칙에 따라 계속 회전하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놀라운 무한한 형태가 발생되었고, 또 진화되고

있다는 견해에는 장엄함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윈이 소수의 또는 하나의형태(a few forms or into one)라는 말에서 문맥상의 강조점은 앞의 소수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의 하나”(one)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엥겔스가 다윈의 몇 개 소수의 생물이라는 말 한마디와 듀링의 하나의 원시생물이라는 말 한 마디를 맞대놓고, 듀링이 다윈을 잘못 비판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엥겔스는 여기서 헤켈이 이것은 모두 그 원생적인 단충(單蟲)형태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인용하고 있다. 헤켈의 원생적인 단충(單蟲)형태모든 유기적 생물의 원형생물로서 완전히 동질적이고, 구조가 없고, 형태가 없는 단백질 덩어리이며, “세포발생 이전의 형상체로서 식물과 동물이 분화되었던 자연발생적인 생물 형태이다. 이것은 명백히 듀링이 말한 하나의 원시생물을 뒷받침하고 있다. 헤켈은 식물계와 동물계와 단세포 생물계는 각각 다른 계통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한 3개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구상의 생물들은 3개의 원생적인 단충(單蟲)형태의 계통에서 발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듀링이 헤켈을 공격했다고 엥겔스가 나서서 반격하고 있는 것은 엥겔스가 듀링과 헤켈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현존하고 있는 생물의 종이 수백만 개라고 알려진 상황에서 조상이 하나이냐, 또는 3개이냐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며 어느 것이 옳은지 확인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게 중요하게 논쟁할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는 다윈이 수백만 개로 변화해온 종의 혈통관계를 진화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진화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원시생물이란 말은 다윈은 물론 그 이전의 철학자들이 숱하게 사용했던 말임에도 엥겔스는 듀링의 원시생물들은 원시 유태인인 아담과 대비시켜 될 수 있는 대로 악평하기 위하여 듀링씨가 발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엥겔스가 이런 식으로 듀링을 반박하는 것은 사실의 진위조차 혼돈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럼에도 엥겔스는 뒤에서 아담은 원시 셈족의 사람이었고, 창세기의 노아 홍수 이야기가 중동 지방에서의 고대 이교도의 종교 신화의 한 구절임에도 이를 모르고 있는 것은 듀링의 불행이라고 비꼬아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엥겔스는 다윈을 비판하는 듀링을 공박하기 위하여 억지 주장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엥겔스가 듀링의 말을 꼬투리 잡아 심하게 공박하는 것은 학문적 논쟁에서 보면 품위를 잃은 짓이며 정당하지도 않은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정이 학문적 품위나 주장의 정당성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듀링과 엥겔스 사이에 벌어진 이 논쟁은 듀링이 먼저 다윈과 마르크스를 공격함으로써 촉발된 것이기는 하나, 사실상 이 논쟁은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 듀링과 엥겔스 양쪽 진영이 세력 확장과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과 연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듀링의 지지자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이 주도권을 잡고 유럽 사회민주주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러시아 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세계 사회주의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