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과학적 무신론’의 발전-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다윈의 접촉

heojohn 2020. 3. 10. 21:20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반종교론에 바탕을 두고 철저한 무신론으로 나아갔다. 다윈은 성경의 창조 기사를 그대로 믿지 않은 것은 사실이며, 스스로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그가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윈이 남긴 저작들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면, 그는 이신론자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일반사회 또는 과학계에서는 대부분 다윈주의자들이 무신론을 주장한다. 다윈주의를 자처하는 저명인사들이 거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다윈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이신론적 입장인 유신진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 다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보다 다윈과 종의 기원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사회나 과학계의 다윈주의자들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넘어 과학적 무신론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결과는 과학적 무신론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없으므로 나타난 현상이다. 알고 보면 과학적 무신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과 다윈의 진화론이 결합한 결과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계속 발전하였으며, 서유럽에서 계속된 논쟁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다.

 

1) 종의 기원독서와 편지들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859년에 출판된 다윈의 종의 기원을 엥겔스가 먼저 읽으면서였다. 엥겔스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곧바로 마르크스에게 추천하는 편지를 썼다. 마르크스 평전에서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엥겔스는 즉각 이 책을 읽고서 거기에서 진화의 감각을 발견하고

매료되었다. 그는 그것에 관해 마르크스에게 열정적으로 얘기하면서

다윈도 그들 편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다윈도 그들처럼 인류에

관해 일종의 비종교적 역사를 믿고 있으며, 시장이 강요하는 경쟁과

모든 것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엥겔스는 그를 꼭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 편지를 받는 무렵에 거의 10년이나 걸려 연구했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를 출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편지를 받고서도 1년이 지나서야 다윈의 책을 읽어보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어보고 나서 그는 세계를 하나의 계통으로 생각하는 다윈에게서 역사를 보는 방식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연구한 경쟁의 법칙과 다윈이 세상에 내놓은 자연도태설 사이의 유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엥겔스에게 바로 편지를 보내서 돈을 구걸하는 내용과 함께 다윈이 동물들과 식물들을 통해 영국 사회의 특징인 분업과 경쟁, 시장 개방, 혁신, 생존을 위한 투쟁 등을 발견한 것에 대해 나는 놀랐네라고 썼다. 이 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받아들여 변증법적 사회주의 유물사관을 만들어내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생전에 런던에서 경제적으로 늘 궁핍하였으며, 엥겔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재능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두 사람의 대의를 위해 마르크스를 지원하는 데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영국에서 이렇게 생활하는 동안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그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수용하여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에 접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1862년 가을 마르크스는 다윈의 영국 불독으로 부르는 토마스 헉슬리의 자연도태설에 관한 강연회 시리즈에 참석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헉슬리의 강의에 홀딱 반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다윈에게 가까이 할 생각을 하였다. 사실 다윈은 그의 집에서 3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 앞으로 출판되는 자신의 책들을 헌정하겠다고 제의하는 등 호감을 표시했으나, 다윈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자가 내미는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다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1862)에서, 헤겔은 부르주아 사회를 정신적인 동물의 왕국이라고 묘사했지만, 다윈은 동물의 왕국을 부르주아 사회로 묘사했다고 썼다. 이 말은 마르크스가 종의 기원을 읽고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그의 사적 유물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 창시자 두 사람의 편지는 다윈이 그들의 후기 사상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유럽대륙에서 혁명운동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전독일노동자동맹이 결성(1863)되는 등 급진적 노동운동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국제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1864년에 제1인터내셔널로 통칭되는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이 조직을 지도했다. 이 조직의 결성은 국가 간의 전쟁을 반대하는 국제평화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등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실천하는 출발점이었다. 이 조직은 제네바, 로잔, 브뤼셀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1867에 출판한 자본론1권에서 다윈을 인용하는 등, 다윈의 영향에 힘입어 공산주의 사회발전 이론을 진화론적으로 확대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 자본론 1에 나타난 다윈의 영향

 

마르크스는 1867자본론 1초판을 출간했다. 마르크스는 다윈에게 자신을 충심의 숭배자라고 쓴 편지와 함께 자본론 1초판 한 권을 보냈다. 그러나 다윈은 그 책을 읽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잘 받았다고 답신을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끝냈다. 마르크스는 3권으로 된 자본론을 생전에 완성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1883년 죽음으로써 유고로 남았다. 유고로 남겨진 나머지 두 권은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에 의하여 완성·출판되었다. 다윈이 1882년에 죽은 뒤에 마르크스가 보낸 자본론 1초판이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전체 802페이지 가운데 앞의 104페이지까지만 페이퍼 나이프로 잘려 있었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이 책 후반부에서 다윈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다윈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론 I에서 노동자의 도구를 기능과 목적에 적합하게 개량하는 것에 대해서 다윈을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윈은 그의 획기적인 저서 ()의 기원(起源)에서 동식물의

자연적 기관(器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일한 기관이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하나의 특수한 목적에만

봉사해 야 하는 경우에 비해 자연도태가 형태상의 작은 변이(變異)

덜 세밀하게 보존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에, 그 기관은 변하기 쉽다.

예컨대 여러 가지 물건을 베는데 쓰이는 칼은 거의 온갖 형태를 가질

수 있으나, 어떤 한 가지 용도만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는 특수한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기계에 대해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의하면서, 산업혁명의 시발점이 된 존 왓트(John Wyatt)의 방적기의 발명(1735)과 기계의 발달을 논의한다. 여기서 그는 다윈이 자연의 기술사에 대해서 관심을 돌리고 있었으며 종의 기원자연의 기술 형성사로서 저술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본론 I종의 기원에 비교해서 그와 동일한 주의를 돌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사회의 생산적 기관의 형성사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다윈과 자신의 양자 관계를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마르크스 유물사관의 핵심 개념이 서로 잘 비교되고 있다.

 

다윈(Darwin)은 자연의 기술사 [, 생명의 유지를 위해 생산도구의

역할을 하는 동식물의 기관(器官)들의 형성]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인간사회의 생산적 기관의 형성사 [, 모든 사회조직의 물질적 기초가

되고 있는 기관의 형성사]에도 그와 동일한 주의를 돌릴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더 용이하게 저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비코(Vico)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만들었지만 자연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학(技術學)은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생산과정을 밝혀주는 동시에,

인간생활의 사회적 관계들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적 관념들의

형성과정을 밝혀준다. 이 물질적 기초를 사상(捨象)하고 있는 모든

종교사(宗敎史)는 무비판적이다. 안개처럼 몽롱한 종교적 현상의

현세적 핵심을 분석에 의해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생활관계들로부터

그것들의 천국형태(天國形態)를 전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일이다. 후자의 방법이 유일하게 유물론적(唯物論的), 따라서

유일하게 과학적(科學的)인 방법이다. 자연과학의 추상적 유물론

(, 역사와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자들이

일단 자기의 전문영역 밖으로 나왔을 때에 발표하는 추상적이며

관념론적인 견해에서 곧 드러난다.

 

다윈의 진화론이 이렇게 마르크스의 후기 사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 배후에는 종의 기원을 먼저 읽은 엥겔스가 다윈이 서술한 진화론에 감동을 받아 마르크스를 권유했고, 마르크스 자신이 또한 다윈을 열렬히 받아들인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윈이 보여준 생물의 현실의 생활관계들에서 그것들의 천국형태(天國形態)를 전개하는 방법을 유물사관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유일하게 유물론적(唯物論的)것이 유일하게 과학적(科學的)인 방법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진화론적으로 유물사관을 전개하여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타나 있는 초기 공산주의 사상이 다윈의 진화론과 일체로 결합하여 과학적 무신론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엥겔스의 반듀링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 두 사람의 후기 사상이 크게 변모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전기 사상에서 후기 사상으로의 전환을 나타내는 대표작 반듀링론에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 의해 영향을 받은 부분과 후일 생명의 기원을 쓴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에 영향을 끼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