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비판

초기 공산주의 운동

heojohn 2020. 3. 9. 21:29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기독교적 공산주의 또는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이 논의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게 되자 사회주의 사상은 우주의 사물은 오직 물질적 현상이며 인류사회의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변화한다는 유물론적 공산주의로 변하게 되었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841)로 박사학위를 받은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을 운영하다 추방되어 파리로 망명했다. 파리에서 -불연보를 발간하면서 헤겔철학을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만나 사상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평생 동지가 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철학에 경제학을 접목하는 경제학-철학 초고(1844)를 발표했으나 다시 브뤼셀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최후의 철학적 무신론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에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포이어바흐 역시 자연물로서의 주체적 인간이 대상으로서의 현실에서, 그것을 보고 느끼고, 역사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에 바탕을 두는 관점은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철학에서 관념론적인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리고 엥겔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신성가족(1845)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낸 것이지 신이 종교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 이데올로기(1845)에서는 독일 관념론 철학을 비판하면서 그는 앞으로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철학을 전개할 것임을 예고했다.

 

드디어 18482월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을 바탕으로 세상의 모든 관념적인 종교와 사상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엥겔스가 기독교 교리문답 형식으로 적어둔 25개 조항의 공산주의의 원리(원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제조건에 관한 학설)”(1843)를 기초로 하였다. 이것은 독일 망명 노동자 그룹인 의인동맹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전환하면서 강령으로 선포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들이 꿈꾸던 공산주의 사회를 현실세계에 세워보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유물론적 공산주의 이론이 처음으로 역사적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무렵 유럽 대륙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파리와 독일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했다. 그러나 혁명운동이 모두 실패하자 두 사람은 1849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이들은 죽을 때까지 영국에 눌러 살면서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저술하고 출판하면서 공산주의 정치활동을 지도했다. 대륙에서의 혁명운동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영향으로 독일에서는 국민의회가 성립(1848. 5.)하고, 프랑스에서는 제2공화국이 출범(1848. 12.)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독일에서는 통일 독일을 위한 헌법을 만들었다(1949. 3). 혁명운동은 대륙에서 이렇게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런던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장 먼저 성공할 수 있는 국가는 산업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혁명의 폭풍이 도버 해협을 건너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열풍은 대륙에서 진압되어 곧 삭으라들고 말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초기 저작인 공산당 선언은 전술한 바와 같이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 철학과 포이어바흐의 철저한 반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다 프랑스의 기계적 유물론과 영국 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을 비판적으로 접목하고 산업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프랑스혁명(1789)의 역사적 실패 경험을 첨가해서 정치적 강령으로 완성한 것이다. 마르크스를 연구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의 원형을 초기 기독교적 재산공동체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의 아버지가 유대교 랍비(후에 개신교로 개종했지만)였다는 사실과 그가 고등학교에서 성경과목 레포트의 성적이 좋았던 사실을 근거로 나온 허구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공산주의적 이상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보다 영국 헨리 8(Henry VIII, 1491-1547, 재위 1509-1547) 치하에서 국교회 설립에 반대하다가 처형된 로마가톨릭교회의 순교자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1477-1535)경이 쓴 유토피아, Utopia에서 보다 잘 나타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토피아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고 공산당선 선언에서도 비판했으나, 역사적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면, 그의 공산주의 사회이론 역시 유토피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재산공동체 제도는 사유재산권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었다. 또한 마르크스 이외에도 철학적으로 재산공동체적 사회주의 이론들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 공산주의가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 이론이 되었다. 유물론적 공산주의 사상에서 보면, 인간은 물질적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적 생활에서 그의 욕구의 결과물, 즉 관념과 표상과 의식작용 등의 정신적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인간의 물질적 생활이 발전하여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이 분담되면, 상부구조 차원의 정신적 생산물인 종교, 도덕, 법률, 정치와 철학 등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발전에 따라서 인간의 물질적 하부 토대가 정신적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현실적 생활인 실천과정에서 인간의 소외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한 논쟁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특별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당시 대영제국이 선도하는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노동자에게 나타나는 물질적 소외, 즉 경제적 빈곤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문제를 공산당 선언에 담아 철학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을 위한 테제로 끌고 갔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 방법론까지 제시했으며, 그들 자신이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소외에서 해방되고 물질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제시한 공산주의 이념과 행동에 따르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최종 목표로 제시한 것은 인간사회에서 모든 소외가 사라진 뒤에 실현될 공산주의적 유토피아 사회였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고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별로 주목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