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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에 대한 비판 (3): 아담과 하와가 지옥에 갔을까?

heojohn 2021. 2. 9. 22:15
  • 박유신 전문연구위원

승인 2020.09.01 07:02

 

박유신 목사의 유튜브 쟁점 진단/ 서사라 목사편 (3) - 바울서신은 참고서라 하신 주님

 

3.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

1) 서사라 목사 주장

그리고 불연못 쪽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쇠창살 안에는 두 영혼이 같이 들어 있었는데 그 두 영혼들은 뼈만 남아 있었고 눈도 없이 구멍만 뚫려 있었다. 나는 즉시 그들이 아담과 하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오랫동안 저 불 못에서 고생하고 타다가 이 쇠창살 안에 넣어졌다는 것이 그냥 알아졌다···. 아담을 보고 ‘왜 여기 와 있냐?’물었다. 아담이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뱀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성경편 1-창세기)」, (남양주시: 하늘빛 출판사, 2015), 66).

주여!··· 나는 어떤 자들이 이렇게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에 나에게 그 답이 그냥 마음으로 알아졌다. ‘아하~이 자들은 세상에서 살 때에 거짓말을 하고 산자들이구나.’ ···들어 우리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하면 예를 들면 뷔페 집에 가서 실컷 먹다가 도저히 못 먹고 그렇다고는 버리기에는 아까운 음식들이 남을 때 집에 있는 애완용 강아지에게 주려고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 한 두 개 정도 냅킨에 싸서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라면 우리는 정말 어느 누구도 이러한 거짓말에 걸려들지 아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 광경을 통하여 그리고 그 연두색의 큰 뱀 머리가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를 생각하여 볼 때에 나는 이제 다시는 내 삶에 조그만 거짓말이라도 없애야 할 것이고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입장이 곤란하다고 할지라도 거짓말을 말하지 할 것이며 또한 절대로 뷔페 집에 가서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았더라면 주인 모르게 냅킨에 싸가지고 와서 강아지에게 주는 것도 삼가야 하겠다고 다시 마음먹은 것이다···

〔계 14:3-계 14:5〕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지옥편)」, 221-224).

이 할머니는 자기 돈을 떼어 먹은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이 할머니는 여기 와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떼어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이 지옥의 광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설사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빌려가서 떼어 먹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지옥편)」, 293).

나는 ‘주님, 00이 왜 저기에 있어요?’하고 물었다. 주님이 대답하신다··· “그는 내 말보다 사도바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지···”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한 말을 진짜로 믿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참고로 하라”하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과 다른 사도들의 말을 같은 비중으로 보는 그것이 문제라 하신다. 주여!(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성경편 1-창세기)」,193 ).

 

‘지옥에 가있는 사람들’에 대한 서사라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아담과 하와는 지옥에 가 있다.

* 사소한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지옥에 간다.

* 자기 돈을 떼먹은 자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도 지옥에 간다.

*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람도 지옥에 간다.

 

2) 성경적 해석

서사라 목사는 어느 날 네 명의 무장한 천사들의 인도로 불 연못 쇠창살 안에 갇혀있는 아담과 하와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었기에 이곳에 와있다는 아담의 말까지 전한다. 과연 아담은 회개를 하지 않았을까? 과연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에도 여전히 뱀에 순종하며 살았을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에덴 이후의 아담의 삶을 추적해볼 수 있고, 또한 나름의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아담 범죄 후, 하나님은 뱀에게 장차 여자의 후손이 뱀(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창 3:15). 소위 원복음에 대한 고지이다. 이어서 아담은 단순하게 여자로 불리던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부여한다(창 3:20). 하와(חוה)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여자의 후손이 장차 사망의 아비 사탄의 권세를 부숴버릴 것이라는 그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한 다음, 바로 자신의 아내가 영원한 생명을 이을, 그 여자의 후손을 낳을 자임을 선포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창 3:20)에서 “부르다”는 혼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 이후 이 아담을 기록하고 있는 이 첫 장면은 음울한 분위기에서 눈부신 희망의 빛으로 전환된다.

 

창세기 4:1에서 아담은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신앙 고백한다. “여호와로 말미암아”로 번역되는 ‘에트 예흐와’(את־חוה)에 대한 해석들이 역사적으로 분분했다. 하지만 대부분 주석가들은 ‘에트 예흐와’를 아담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었음을 고백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 고백 안에는 이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부모로서의 소망이 반영되어있다(고든 웬함. 『창세기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1”. 박영호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1). 235.) 이러한 장면들은 아담이 비록 추방당한 몸이었지만 아직도 하나님은 자신을 기억하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몸부림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창 4:3-4)라는 문장은 이러한 확신에 신빙성을 더할 수 있다. 3절의 “제물”(מנחה)은 감사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제물을 가리킨다. 이는 가인은 자기의 농사에서 열매들을 얻자 이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음을 보여준다. 반면 아벨은 동물의 초태생을 하나님께 바쳤다(고든 웬함, 236-237).

 

아담의 두 자녀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가인과 아벨의 이러한 삶은 그들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듣고 따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아담에게 “셋”이라는 아들을 선물로 주었고(창 4:25). 그리고 이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는 하나님께 공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창 4:26). 물론 이전에도 아담의 가족이 제사를 드렸지만, 에노스 때부터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예배 양식이 도입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담은 930세까지 사는 동안 많은 후손의 후손을 보았고, 이 후손의 족장으로 지냈다. 이 최고의 족장은 당연히 자기 후손들의 삶에 관여한다.

물론 아담은 자신에게 부가된 반역자라는 허울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부단한 몸부림의 흔적들은 창세기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 때 하나님과 대화하며 동산을 거닐었던 추억뿐 아니라 인류의 비극을 초래했던 그 원흉이라는 오명까지 세포 깊이 새기고 살았을 그가 지속적으로, 대범하게 하나님과 등지며, 뱀에게 순종하며 930세를 향유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창세기가 증언하는 타락 이후의 아담의 삶의 정황과 불 연못 쇠창살에 갇혀 있다는 현재의 아담의 모습이 쉽게 조화되지 않는다. 필자는 개인의 신비 체험보다 성경에 기반을 둔 합리적 추정에 해석의 무게 중심을 둔다. 성경은 아담이 재기를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아담이 지옥 쇠창살에 갇혀 있다는 보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

 

서사라 목사가 지옥에서 보았다는 사람들 중에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 부류는 사소한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을 행하며 산 신앙인, 돈을 떼이고도 원통함을 풀지 않은 신앙인들이다. 서사라 목사는 사소한 거짓말에 해당되는 예를 집에 있는 강아지를 먹이기 위해 식당에서 음식을 몰래 싸가지고 오는 경우로 든다. 뷔페 음식은 앉은 자리에서 먹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거짓에 해당되며, 그러한 죄를 지은 자는 지옥에 가며,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실제로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짓’을 요한계시록 14:5에 등장하는 “거짓말”과 연결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4장은 천국을 묘사하지도, 십사만 사천을 천국에 있는 성도로도 말하지도 않는다.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3절)은 천국에 있는 영혼이 아닌 교회공동체를 상징한다.(M. 유진 보링,『요한계시록』, 소기천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1),244). 요한계시록 13장은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짐승’의 압도적인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승리한 교회를 묘사한다. ‘순결’, ‘거짓말’ ‘흠’은 모두 승리한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계시록 14:3-5은 선의의 거짓말조차도 안하는 자라야 천국 시민의 자격될 수 있다는 서사라 목사의 진술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사소한 거짓말 혹은 선의의 거짓말이란 과도한 칭찬, 아첨하는 말, 마음에 없는 말, 자기 이익을 위해 꾸미는 말 등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말을 하는 자는 예수를 믿어도 지옥에 간다면 과연 이 세상에 구원 얻을 성도가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리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본성상 평생 모은 자기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서사라 목사의 주장은 기독교적 인간 이해가 전적으로 결여되어있다. 신앙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임과 동시에 여전히 성령의 견인하는 은혜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해도 죄를 모두 쳐부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고 죄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신앙인은 성령의 인도아래 있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흔적도 남아있다.

 

바울은 로마서 7:21-25에서 자신 안에 두 종류의 법 즉 양심의 법, 죄의 법이 있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는 이 양심의 법을 따라 살기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이 죄의 법이 자기를 포로로 삼아 악을 행하게 만든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양심의 법과 동일하게 공존하는 죄의 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계속 제압당하는 모순된 자기를 보고 절망한다. 이미 새롭게 되어 새 생명 안에 있게 된 바울이지만 매번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모든 성도의 심정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바울에게 어떠한 개인적인 비밀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타락한 도덕적 상태를 표현하는 이 고백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를 말한다. 매번 굴복 당했던 그 죄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바울의 통곡을 감안해 본다면 그것은 ‘사소한 거짓말’ 정도의 수준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도 당연히 지옥에 처해 있어야 한다. 숱한 믿음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백전노장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어떠할까?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거짓말을 하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며, 지옥에 처해진다는 서사라 목사의 진술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론’에 상당히 탈선되어 있다. 로마서 4:5은 서사라 목사와 다른 주장을 제시한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문장은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즉 경건하지 않는 그가 경건하지 않는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그가 경건한 자로 칭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말의 실수가 많은 성도라도 ‘믿음 안에 있으면’ 결코 의인의 신분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을 떼이고 원통함을 쉬 풀지 못하는 성도라도 ‘은혜 아래에 있으면’ 여전히 그 은혜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를 갈라디아서 3:27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음으로 표현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말한다.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라도 그 위에 흰옷을 덧입으면 흰옷 입은 사람이 되듯이, 죄를 옷 입고 있는 죄인이라도 그 위에 그리스도라는 옷을 덮어 입은 사람은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죄인이라 할지라도 의의 옷을 입혀서, 의인으로 칭해주겠다는 것이다. 돈을 떼이고 원통함을 풀지 못해도, 선의의 거짓말을 해도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이 재결정을 내리면 그는 여전히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 서사라 목사의 체험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칭의’의 효력은 발생되지 않는다.

 

서사라 목사의 지옥 체험기에는 ‘은혜’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믿음’(πίστις)이라는 단어가 영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이라는 단어는 복음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어이다. 은혜와 믿음을 말하지 않고서 복음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서사라 목사의 지옥 체험기에는 ‘얼음장 같은 심판과 저주’만 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복음의 기본적 의미가 선명치 않다. 성경적 기독론에서 이탈한 이러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은 성경을 훼손하는 근간이 된다.

서사라 목사는 지옥에 가 있다는 유명한 신학자 한 사람을 집중 보도한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성경편 1-창세기)에서 세 번에 걸쳐 지옥에 처한 이 신학자 이야기를 다룬다. 세 번 언급한 것으로 봐서 유명한 신학자인 것 같다. 서사라 목사는 왜 이 사람이 지옥에 와 있냐고 물었더니 주님이 ‘그는 내 말보다 사도바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신학자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참고만 해야 할 ‘바울 서신서’를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둔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서사라 목사의 이 목격담이 사실일까? 과연 예수님께서도 바울 서신서를 참고서적으로 정도로만 여기고 계시는 걸까? 예수님은 정말 성경에 차등과 우열이 있다고 믿고 계시는 것일까? 성경에도 등급이 있다는 서사라 목사의 진술을 매우 큰 당혹감을 안겨준다.

신약 성경이 형성되기 전 모세오경, 시편, 선지서만 존재했을 당시 예수님의 성경관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모두 자기를 가리키는 글(눅 24:44)로 말씀하시며 구약의 예언이 자기에게서 모두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셨다. 모세오경, 시편, 선지서. 그 어떤 성경에도 차등을 두지 않고, 모두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이 없어지는 그날까지도 유일하게 세상에 존속해 있을 단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율법’(성경)이라 선언하셨다(마 5:18). 보존될 그 범위는 ‘일점’과 ‘일획’ 즉 글자 한 자 한 자까지이다. 예수님은 영감된 일점과 일획도 패하여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결코 성경에 우열을 두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 마지막까지 보존될 것을 주장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울 서신서를 ‘참고서’ 정도로만 여긴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바울서신을 포함한 66권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 66권의 성경에 하나님의 거룩한 입술 기운을 부으셨다. 바울서신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교훈과 바울의 가르침은 동일한 하나님 말씀이며, 동등한 권위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바울 서신서를 참고서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는 서사라 목사의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이는 예수님께서 바울 서신서의 정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서사라 목사의 천국 지옥 체험기가 펙트가 아니라고 분명히 확신한다. 바울 서신을 복음서보다 더 중시했기에 지옥에 보내졌다는 어떤 신학자에 대한 스토리도 허구라 확신한다. 서사라 목사의 이 모든 이야기는 그의 내면의 심리에서 표출된 상상이 아닐까?

이처럼 성경이 서술하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는 서사라 목사의 간증은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약화시킨다. 어떤 한 개인의 체험에 따라 성경의 내용이 추가되거나 보충된다면 성경은 더 이상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사라 목사는 자신의 책 서론에 자기가 지옥편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 글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옥편을 쓰게 하신 것은 지옥에 가는 인생들이 불쌍하여 한명이라도 지옥가지 않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나를 지옥 구경을 시키셔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로 나를 쓰신 것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사라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보다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 자기에게 이 특별한 체험을 먼저 하게 하고 알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의도라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또 다른 환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환상이 정말 그러한 목적을 가진다면 주제별로 환상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바울은 왜 자신이 세 째 하늘을 본 후, 자신의 본 것을 기록하여 성경에 남기지 않았을까?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천국 장면에 대한 묘사는 사람의 언어로는 담아내기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금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가히”(고후 12:4)라는 부사어를 첨가하여 그러한 시도는 합법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음을 밝혔다. 하나님께서 천국 장면을 바울에게 공식적으로 그리지 못하

도록 하셨다. 이러한 천국 지옥 체험기에 열광하는 성도들은 고린도후서 12:1-6을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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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포털뉴스 이단문제 전문 연구위원 박유신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 대학원(M.A)을 졸업한 후 계명대학교 신학과에서 조직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안산공과대학 교양강좌부 초빙 교수와 계명대학교 교양강좌부 초빙 교수를 역임했고 안산 제일교회 협동 목사로 있다.

저서로는 「미국 장로교 신학사: 축자영감교리 형성사」(한국학술정보사), 「한국장로교성서관 칼빈적인가」(한들출판사), 「사복음서 단락별 설교핸드북」(베드로서원), 「바울서신」(베드로서원), 「신약성서 속의 편지들」(베드로서원), 「신천지 대해부」(기독교포털뉴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