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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창조론(연재 3회): 둘째 날의 창조

heojohn 2024. 2. 4. 01:45

목 차

 

. 들어가면서: 창세기 1(창조 톨레도트)의 해석 방법에 대하여

 

II. 6일간의 창조

 

1. 창조의 첫째 날: 지구의 밤과 낮: 흑암과 빛

2. 둘째 날의 창조: 지구의 대기

3. 셋째 날의 창조: 육지와 바다

4. 넷째 날의 창조: 행성의 위치 조정

5. 다섯째 날의 창조: 물고기와 새

6. 여섯째 날의 창조: 동물과 인간

 

III. 나가면서

 

II. 6일간의 창조

 

2. 둘째 날의 창조: 대기(‘라키아’, 궁창)

 

1) ‘라키아’(궁창)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서 하늘이 되다

 

둘째 날의 창조 톨레도트를 보면, 모세에게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1:6)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이때까지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공중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눈에는 아직도 깊은 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깊은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믿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창조 서사시)에는 최초에 바다의 신과 호수의 신이 서로 물을 섞어서 자식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집트 신화는 신들과 땅도 바다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모세는 이집트 왕가에서 자랐으므로 이집트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양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밀레투스의 탈레스(Thales, BC. 624?-BC. 546?)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 1:2에서 첫날의 밤인 흑암의 시간에 깊은 물이 땅을 덮고 있었음을 서술한 것은 고대 근동지역 사람들의 지식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절은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있으라(יְהִי רָקִיעַ בְּתֹוךְ הַמָּיִם).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으라(ִוִיהִי מַבְדִּיל בֵּין מַיִם לָמָיִם׃)”로 직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게 하는 라키아’(궁창)가 생겨났다. 물의 나눠짐은 물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라키아를 깊은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는 도구로 만드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1:7)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궁창을 샤마임’(하늘)이라고 칭하셨다고 서술했다(1:8). 둘째 날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에서 모세의 서술(1:7)과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칭하셨다는 모세의 서술(1:8)을 읽으면, 현대인들은 당혹감에 빠져버린다. 깊은 물 속에 있던 라키아가 어떻게 갑자기 하늘이 될 수 있는가? 현대인들에게 창세기의 깊은 물은 바다로, 하늘은 대기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키아샤마임이라고 부르셨고, 모세는 라키아가 그 위의 물을 담은 채 들어 올려져서 하늘이 된 것처럼 서술했다. 여기에서 현대인들과 모세 사이에는 엄청난 이해의 괴리가 있는 것이다. 이해의 괴리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도 있었다. 모세의 샤마임에 대한 이해는 단어의 의미에서도 엿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샤마임은 특이하게도 단수도 아니고 불특정 복수도 아닌 쌍수로만 취급되는 명사이다. 히브리인들이 샤마임을 쌍수로 취급하는 이유는 물에서 위로 들어 올려진 라키아의 아래와 위를 샤마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라키아의 이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 톨레도트 전체 기사에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모세의 설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처음부터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이해의 괴리 현상이 적지 않게 발생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물과 물을 나누는 물리적 기능을 라키아로 표현하셨지만, 고대 히브리인 모세에게 라키아는 청동 또는 구리 등의 금속을 두드려 펴서 늘린 얇은 판 또는 거울등의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깊은 물 전체를 나누기 위해 사용하신 라키아를 그대로 들어 올려 하늘을 만드셨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세한 설명 없이 짧게 창조 명령을 말씀하신다. 모세의 서술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 칭하셨을 때, 모세는 그가 알고 있던 선지식(先知識)으로 하나님이 라키아를 그 위에 있던 물과 함께 들어 올려서 하늘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이해의 괴리가 생겨난 것은 당시 히브리어에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그림 예시

 

(그림 출처: 중국어 성경 주석서. 여기에서는 라키아宮蒼으로 번역했으나, 한글성경은 穹蒼으로 쓴다)

 

물과 물을 나누라고 번역된 하나님의 명령 구절에 쓰인 히브리어 마베띨’(מַבְדִּיל)바달동사 앞에 ’(ם)을 붙여서 비히동사의 주어인 명사형 분사(나눠짐)로 쓰였다. 이 구절에서 있다는 뜻으로 쓰인 יְהִיוִיהִי두 개의 동사는 모두 미완료형 동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라키아가 있으라.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고 직역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는 다만 물과 물 사이에서 나눠지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물과 물 사이를 나누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물 구성 분자 또는 원자의 최외곽 전자궤도가 만드는 전자껍질(Electron shell)로 해석할 수 있다(옥텟규칙 등에서는 전자궤도를 전자껍질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오비탈 이론에서는 전자궤도를 함수로 설명하면서 경계면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좀더 일반적인 전자껍질이라는 말로 썼다).

 

그러므로 라키아는 현대적 의미에서 물을 원자 또는 분자 단위로 나누는 기능을 하ᅟᅳᆫ 전바떱질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나눠지는 물은 당시 모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물 분자의 기체이다. 물에서 분자들로 나눠진 기체들은 위로 올라가서 대기를 만든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그런 기체로 대기권을 만드시고 샤마임이라 칭하셨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인들의 지식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세는 물을 담아 들어 올리는 얇은 판으로 라키아를 이해했고, 그렇게 하늘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깊은 물을 아래와 위로 나누는 라키아가 위의 물을 그대로 담은 채로 들어 올려져서 하늘이 되었다는 모세의 이해는 노아 홍수 톨레도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세는 노아 홍수 때에 위에 있는 하늘의 물이 열려진 하늘의 창을 통해 쏟아져서 사십 주야 내리는 비가 되었다고 서술했다(7:11-12). 모세가 이해한 라키아의 하늘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모세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설명했던 라키아가 지구 역사에서 존재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모세는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의 뜻을 오해함으로써 샤마임의 뜻까지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대한 모세의 오해였을 뿐이다.

 

2) ‘라키아는 대기권이다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따라 물이 라키아에 의하여 원자 또는 분자의 나뉘어져 대기를 만들었다. 원자 모델에서 원자는 전자가 회전하는 궤도 안에 원자핵이 자리 잡고 있다. 전자의 회전 궤도가 하나뿐이라면, 그 궤도가 원자의 전자껍질이 된다. 전자의 수가 많으면 회전하는 궤도의 층이 여러 겹이 된다. 그런 경우에는 가장 바깥 전자궤도가 그 원자의 전자껍질이 되다. ‘전자껍질은 다른 원자의 전자껍질과 결합하면, 원자가 여러 개가 모인 분자를 만들 수도 있다. 물을 나누면 원자 단위로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이고, 그것들이 결합된 분자가 물(HO)이다. 물을 분자 단위로 나누면, 미세한 물방울의 수증기가 된다. 물의 원자나 수증기 분자들은 기체가 되어 대기를 형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대기권이 현대인들에게 지구의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이라고 말씀하신 라키아를 물과 물을 나눈 기체가 위로 올라가서 만들어낸 대기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의 과학적 지식으로 물을 나누는 라키아의 실체가 원자들의 바깥을 감싸는, 또는 원자를 나누는 기능을 가진 전자껍질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창조 톨레도트의 둘째 날 하나님이 대기를 만드시는 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현대인들은 대기가 산소와 수소로만 된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원자와 분자가 혼합된 기체이고, 지구의 전자기력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만 그렇게 원자와 분자의 기체로 만들어지는 대기가 지구의 하늘이라는 뜻이다. 현대과학적 관점에서 라키아를 이해하고 보면,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에게 명령하셨지만, 모세에게 알아듣게 설명하지는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그때부터 현재까지 존재하는 지구의 대기권을 만드셨지만, 모세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나님이 둘째 날 지구에 하늘을 만드신 것은 매우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계획은 땅 위에 사는 생물들에게, 특히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호흡을 위한 것이다. 생물의 호흡에는 산소가 필요하다. 여기서 유물 진화론자 오파린이 생명의 기원에서 물질이 화학적 진화에 의해 처음 생명체가 만들어졌던 원시 대기에는 산소가 없었다는 주장을 반박할 필요가 있다. 원시지구에는 이미 물에서 나눠진(증발한) 분자들의 대기권이 있었다. 오파린의 주장을 입증했다고 알려진 유리-밀러의 유기물 생성 실험도 산소를 제거한 시험관 안에서 생겨난 몇 개의 아미노산을 증거라고 해석한 것이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그 실험에는 물에서 발생하는 산소를 간과한 오류가 있었다고 반론되고 있지 아니한가? 산소가 있는 환경에서는 그런 유기물이 발생하지 않는다.

 

라키아의 실체가 대기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남은 문제는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믿음을 강요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우기는 고대 히브리인들과 같은 수준의 인식을 하고 있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Niklas Koppernigk, 1473-1543)와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지동설을 주장한다고 박해했던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실재하지도 않았던 청동제 라키아로 하늘을 만드셨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마술쟁이로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창조를 거짓되게 믿는 사람들이다. 현대과학적 지식으로 라키아를 이해하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라키아에 대한 모세와 근본주의자들의 이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목회자가 기독교 신앙이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를 얇은 청동제 판으로 믿어야 한다고 강변한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의 선택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첫째는 그런 목회자를 시대에 뒤떨어져 무지하다고 불신하거나, 또는 과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 배척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를 믿을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에 대해 사실과 다른 지식을 가진 자들을 용납하실까? 그의 신자들이 그의 이름이 걸린 교회를 떠나거나 거짓말하기를 원하실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런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왕국 시절에 이미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는 자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는 말씀을 전했다. 공관복음서 3곳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경고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잘못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소자를 잘못 가르쳐 실족케 하는 자와 다름없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우주에서 지구는, 다른 행성과 달리,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진 생태계가 특별히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런 사실을 안다면, 지구의 기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지구에서 생물, 특히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물과 대기권이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물과 대기는 지구가 우연히 존재하는 행성이 아니라, 창조주가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창조하셨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를 가지게 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지구에 직접 임재하여 생태계와 생명체를 창조하셨다. 바로 그분이 모세에게 지구의 창조 사건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이 제안한 것이 인본 원리(Anthropic Principle). 인본원리에 의하면, 지구가 인간의 생존이 가능한 조건으로 운행하는 것은 우주상수가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미세조정(fine-tuned)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정도로 정밀하게 미세조정된 우주상수가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기독교의 창조 톨래도트가 증언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런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동안 우주 탐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미국 NASA 팀이 지구처럼 풍부한 물과 대기권이 보존되고 있거나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를 탐색했으나, 그런 행성을 아직도 확실히 발견하지 못했다. 최근에 케플러 우주망원경 탐사작업에서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행성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그곳은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곳에 생물이 살고 있다고 해도 지구의 인간들과 다르다면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다. 지구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그를 따르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믿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