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섯째 날의 창조: 땅의 동물과 사람
1) 땅의 생물
모세는 창조의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וַיֹּאמֶר אֱלֹהִים תֹּוצֵא הָאָרֶץ נֶפֶשׁ חַיָּה לְמִינָהּ בְּהֵמָה וָרֶמֶשׂ וְחַיְתֹו־אֶרֶץ לְמִינָהּ וַיְהִי־כֵן׃)고 서술했다(1:24). 모세는 하나님이 ‘네페쉬 하야’를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사실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진화 생물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믿음이 오히려 깨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의 종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민’(מִינָ)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창조 톨레도트에서 ‘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을 ‘종류대로’ 분류하는 단위이다. 다시 말하자면, 생물의 진화를 부정하는 불변의 ‘종류’이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은 ‘민’의 의미를 무시하단고, 세포 생명체인 LUCA를 지구 최초 생물로 가정하여 칼 우스의 진화론적 생물 분류표’를 만들어놓고, “생명 나무”를 그려 놨다. 칼 우즈는 지구 생물 전부를 LUCA의 자손들로 가정하고, 그것들의 세포 속에서 단백질 생산에 관여하는 DNA와 RNA, 그리고 리보솜의 생합성 작용의 유연관계에 따라서 생물들의 분류체계를 만들었다. 단백질 생합성 방법에 분류 기준을 둔 현대 생물학의 ‘생물 분류표’는 과학적 무신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세의 눈으로는 우즈의 ‘생물 분류표’에서 3역에 속하는 원시 생물은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에 대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창세기에서 서술되지 않았고, 훨씬 뒤에 현미경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발견되었다. 하나님은 각 생물의 “종류대로” 이외의 창조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모세가 ‘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창조론적 분류 기준과 현대 생물학 분류 기준은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에 견주어 ‘민’을 말하면, 지구 생물계는 LUCA의 단일 공통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민’으로 구분하여 직접 창조하신 종류별 조상을 가진다. 이들 ‘민’이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의 ‘생물 분류체계’에서 종에 해당하는 것이다. 종의 자손들에게서는 품종(식물)이나 아종(동물)이라는 변종이 생겨날 수 있다. 현대 진화론의 역사는 생명체의 변종을 관찰하던 찰스 다윈의 상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찰스 다윈은 최초의 생명체의 숫자를 “몇 개 또는 한 개”로 본다. 다윈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지구의 생물은 “몇 개 또는 한 개”의 생명체가 자연선택에 의한 변이에 의해 진화되어왔다는 주장을 담아 『종의 기원』을 집필함으로써 탄생한 것이 현대 진화론의 시발점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명 나무의 밑뿌리인 LUCA를 제안한 칼 우즈의 주장과 창조론적 생물 분류표를 비교해서 검토해봐야 한다. 검토해야 할 포인트는 칼 우즈의 생명 나무 체계를 만들어낸 데이터의 작성과 분류 작업을 한 프로그램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터 작성과 분류 프로그램의 처리 방법과 기준에 따라 창조된 ‘민’의 분류가 맞느냐, 진화 계통에 의한 분류가 맞느냐는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서로 다른 분류의 틀로 만든 데이터를 비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학적 무신론의 사실성을 검토하기 위해서 창조론에서 ‘민’의 개념이 생물의 분류체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생물의 “종류대로”의 종류를 의미하며 칼 린네의 5단계 분류체계 등급(계-강-목-속-종)에서 최하위에 위치한다. 모세의 기록을 린네의 분륭표에 적용하면, [린네-창조론적 분류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모세는 셋째 날에 하나님이 땅에게 식물들을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 등을 종류대로” 나오게 하셨다고 서술했으니, 그것들을 식물계- 육지 식물강의 아래인 속에 놓고 그 아래에 “종류대로”의 ‘민’을 배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네페쉬 하야’를 “종류대로” 분류하여 [린네-창조론적 분류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현대 생물학에서 종의 개념은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종’(species)을 설명하는 데서 발견되며, ‘교배하여 생식 능력이 있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개체의 집단’으로 정의한다. 이 개념은 창조론을 믿었던 칼 린네에 의하여 정의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개념은 ‘민’의 개념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종에는 변종(아종, 품종)을 인정함으로써 종내(種內)의 개체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표현형의 변이적 특성을 따라 분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생물학적 종의 기준을 살펴보면, 그것은 ‘민’의 기준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더 세밀한 분류를 위해 범위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런 일은 생물학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모세에게 보여주시지 않았던 미생물계를 추가해서 3계로 나누는 것과 식물계에서 서식지를 분류하여 강을 추가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민’은 결국 현대 생물학의 분류체계에서 종의 개념이 적용되는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존늬 개념에 생식장벽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생물을 ‘민’의 단위로 번성하도록 만들어놓으신 장치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종은 변종이 가능하므로 품종 또는 아종으로 개량할 수 있다. 따라서 진화의 개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민’(종)의 다양화라는 관점에서 ‘민’(종) 이하에서 일어나는 변종의 발현 현상을 과장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린네 - 창조론적 생물 분류표
*시안으로 제시하였으므로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린네 분류 |
창조론적 분류 | |||||||||||||
1 | 계 | 미생물계 |
식물계 | 동물(네페쉬 하야)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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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강 | 미생물 |
육지 식물 |
수중 식물 |
수중 동물 |
공중 동물 |
육상동물 |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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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목 |
풀 | 나무 | 바다 식물 | 민물식물 |
바다 동물 |
민물 동물 |
공중 동물 |
가축 | 야생동물 | ||||
4 |
속 | 풀 | 채소 | 열매나무 | 바다 괴물떼지어 움직이는 어류 |
수중 동물 |
조류 | 가축 |
짐승 | 기는 동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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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종 | 각 종류(‘민’) | 각 종류(‘민’) | |||||||||||
변종 | 품종 | 아종 |
(표 설명)
⓵ 종과 종 사이에는 생식장벽(reproduction barrier)이 있어서 어느 한 종이 다른 종과 짝짓기를 해도 정상적인 자손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식장벽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종과 종 사이에 진화의 증거인 중간종(中間種)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식장벽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단위인 종이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종류대로의” ‘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것이 곧 진화론이 오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진화론에 대한 관점을 다시 세워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② 사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살펴보면, 그의 진화론은 ‘민’의 범위 안에서 나타나는 개체의 다양성 - 말하자면 종의 하위 등급인 변종, 즉 아종, 품종의 출현을 보고 확대해석한 허구적 가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체의 변종이 계속 진행되면, 결국 생식장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종이 나올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③ 진화론을 옹호하는 현대 생물학에서는 ‘생식장벽’ 현상을 애써 가르치지도 않고, 현실에서 발견되지 않는 중간종을 만들려고 가짜 뼈를 찾아서 화석에 꿰맞추는 일에 힘쓰고 있다. 화석으로 발견된 생물의 경우에는 뼈와 형태의 구조가 유사한 개체를 비교하여 종을 분류하지만, 정확성을 보증하기 어렵다. 그런 분류방법에는 분류자의 주관에 따라 해석과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같은 종에서 다양하게 발현되는 각 개체의 작은 차이를 근가로, 다른 종으로 판단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 즉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개체별로 형태가 약간씩 다른 화석들을 모아서 단계별로 상상한 중간종을 조립해놓고, 그것을 중간종 화석이라고 우기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물질에서 자연 발생한 LUCA가 진화해서 오늘날의 생물계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현대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듯이 LUCA를 최초의 공통조상으로 하는 ‘생물 계통수’가 사실이라면, 무기물질에서 LUCA라는 단세포 생명체가 자연발생하는 화학적 메커니즘(chemical mechanism)과 진화적 분지(分枝) 과정에서 생식장벽을 뛰어넘는 살아ᅟᅵᆻ는 중간종(中間種)이 다수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명 발생 메커니즘과 살아있는 중간종은 발견된 적이 없다. 바로 이 두 가지에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무신론을 반박할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 숨어 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그런 사실을 숨기려고 화학적 실험과 DNA 및 RNA 이론과 유전법칙을 왜곡하는 생물학적 가설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가설들을 반박하는 연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연구의 결론은, 필자와 같이, 각종 생물은 종(‘민’)내에서 발현되는 변종의 범위를 벗어나는 진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2)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에 사람(아담)을 만드시는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담의 창조에 대하여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יֹּאמֶר אֱלֹהִים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וְיִ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בְּהֵמָה וּבְכָל־הָאָרֶץ וּבְכָל־הָרֶמֶשׂ הָרֹמֵשׂ עַל־הָאָרֶץ׃)고 선포하셨다(1:2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처럼 특별하게 땅과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목적과 권한을 주시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사람의 창조목적에 관한 서술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 할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한글성경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번역한 것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1인칭 복수 대명사로 표현하시고, ‘나아세’(נַעֲשֶׂה: ‘우리가...만들고’)라는 복수 동사를 쓰셨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복수 명사 ‘엘로힘’은 성경에서 단수 동사를 쓰므로 단수로 본다. 기독교에서 이 구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를 직역해보면,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들의 형상과 우리들의 모양대로 사람(단수)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사람의 복수)이 땅과 생물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문법적 구조를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나아세’ 동사의 목적어 ‘아담’(단수)은 뒤에 나오는 ‘웨이레뚜’(וְיִרְדּו: 다스린다) 복수 동사의 주어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만든다’의 목적어인 ‘아담’은 단수인데, 하나님은 단수 ‘아담’을 주어로 하는 때에는 복수 동사 ‘웨이레뚜’(다스린다)를 쓰셨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라고 대답했다(1:27). 여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면서 단수 명사 ‘첼렘’(צֶלֶם: 형상)을 반복 사용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모세는 ‘오토’(אֹתֹו)라는 3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그(아담)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한 뒤에[ 3인칭 복수대명사 ‘오탐’(אֹתָם)을 써서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한글 번역에서는 생략되었음).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단수의 ‘오토’를 남자와 여자로 나눠서 복수의 ‘오탐’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이 된다. 모세가 하나님과 아담에 대해서 단수동사와 복수동사를 착각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사실대로 쓴 것이다. 하나님이 1:26에서 ‘웨이레뚜’ 동사를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이유와 그 말씀에 대한 문법적 의문은 아담이 남자와 여자의 복수로 창조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하나님이 삼위일체로서 동일본질(consubstanialis)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삼위일체의 경륜적 일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고 말씀하셨다(요5:19).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었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1:27)에서 삼위 하나님 중에서 사람을 직접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느 분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질문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은 요한의 해석에 따르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1:3). 요한에 의하면 그는 창조 톨레도트의 첫날에 빛으로 이 땅에 임재하셔서 창조를 실행하셨다. 창조주에 대해 요한과 다른 해석은 기독교의 창조론이 아니다. 요한과 다른 해석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과 유대교적 창조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손들
하나님이 사람의 창조계획에서 선포하신 아담과 실제 창조된 아담은 단수와 복수의 문제 이외에도 다르게 나타난 것이 있다. 그런 사실은 1:26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형상과 우리들의 모양대로’라고 하신 말씀과 1:27에서 모세가 창조된 사람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는 서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모양대로’는 빼놓고 서술함으로써 드러났다. 창조된 아담은 “모양”이 빠진 대신에 여자가 들어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키데무테누(모양대로)’를 반영하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뻬첼레모)만 반영하셨다. 대신에 아담을 나눠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런 서술이 단순한 모세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까?
히브리어 사전과 성경주석서의 용례를 보면, ‘형상’(첼렘)은 겉모양 또는 우상 등을, ‘모양’(데무트)은 원형을 닮은 것들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우주만물에 대해 명령하시는 분이시고, 형상은 전지전능하신 삼위일체 유일신이시다. 하나님에게 여성적인 형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세계에 여성의 형상은 아예 없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그의 ‘데무트’를 주시지 않고, 대신에 여자를 주셨는가? 사람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속하는 일이다. 결국 사람의 세계에 하나님이 ‘데무트’ 대신에 여자를 만들어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의 인식 능력 차이로 이해붉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에 의하여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창조된 사람의 정체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의 정체성 문제는 기독교에서 앞으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들’이 온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계획하셨다. 여기서 3인칭 복수 대명사 ‘그들’은 처음 창조된 남자와 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포괄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알고 믿는 자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신 사람과 그 자손들의 역사적 행적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각종 생물과 사람에게는 각자의 DNA에 각자의 생명 정보가 들어있고, 그 생명 정보가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 정보에 의하여 창조된 사라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큰 죄악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 앞에 사람이 아니라 동물일 뿐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 생명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의 모든 개체마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가 다르고, 그것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 상식이 되어 있는 시대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그 자손들도 ‘데무트’가 결여된 DNA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데무트’가 결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르지 않는 것은 죄악이 될 수밖에 없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과 죄악이 관영함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서술했다(6:5). 현대사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 추종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고, 죄악에 빠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세가 1:27에서 하나님이 처음 계획과는 달리 ‘데무트’를 빼고, ‘첼렘’만으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창조하셨다고 서술한 것을 읽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DNA에 ‘데무트’의 결여가 죄악의 본성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나 그의 DNA에 ‘데무트’가 결여된 탓으로 죄악에 이끌리는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죄악의 경향성을 극복하고 거듭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닐까?
아담의 자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과 같이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정죄하고 살해한 것이다. 그들의 자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했고, 현대사회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이 그런 사회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되돌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태만한 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외식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생명책 심판에서 하나님이 새 창조하실 하나님 나라의 벡성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4),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 섭리: 원복음을 주시다
모세는 1:28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וַיְבָרֶךְ אֹתָם אֱלֹהִים),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וַיֹּאמֶר לָהֶם אֱלֹהִי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그리고 또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אֶת־הָאָרֶץ וְכִבְשֻׁהָ וּ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כָל־חַיָּה הָרֹמֶשֶׂת עַל־הָאָרֶץ)고 말씀하셨다고 서술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다섯 가지의 복을 주시는 섭리의 말씀이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처음 주신 오복(五福)의 말씀을 원복음이라고 불러야 한다. 오복 중에서 ① 생육하고 ② 번성하여 ③ 땅에 충만하라는 삼복(三福)은 다섯째 날 창조된 물에 사는 어류와 공중에서 나는 조류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동물들에게 주신 삼복에 추가해서 사람에게만 주신 두 가지 더 주신 복 - ④ 땅을 정복하라 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복은 하나님이 사전에 선포하셨던 사람의 창조목적과 같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첫 말씀으로 들려주신 원복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그대로 복으로 바꿔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원복음은 권리와 의무라는 양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와 원복음의 오복을 누리는 권리는 아담과 그의 자손은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오복을 누리는 권리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행하는 의무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사람을 위한 창조법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창조법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주신 원복음으로 이 땅에 그의 창조의 질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시작하셨다. 원복음은 그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에게는 오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권리도 없을 것이며 죄의 원천이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특히 그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의 복을 공짜로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의무를 실행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땅 위에 건설된 인류사회는 이제 사람으로 충만하게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땅을 정복했던 자는 대개 하나님의 창조를 아는 자가 아니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도 대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사람 앞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로 가느냐, 아니면 죄악의 길로 가느냐는 선택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다. 이 땅에 사람의 창조와 타락한 사람의 죄사함을 위해 두 번이나 임재하셨던 분이 가르쳐주셨다. “거듭나라!”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를 보여주시고 기록하도록 선택했던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전부 서술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과정에서 중요한 장면들을 몇 개 모세에게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장면들만을 보고 그 시대의 지식 틀 안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서술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본 창조의 장면들 사이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시간의 길이를 사람의 시간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쓸데없는 오류를 더할 뿐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하나님만이 아실 뿐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기록하게 하신 창조 톨레도트의 목적은 그가 만물의 창조주이심과 그의 창조목적을 사람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관통하여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환상으로 보고, 듣고 기록한 서술 모세의 인식 사이에는 이해의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 3,500년 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가서 모세 시대의 히브리어 용어의 개념과 모세의 서술 구조를 현대인의 과학적 눈으로 조명해봐야 한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할 당시 히브리인과 히브리어에는 현대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과 용어가 없었다. 과거의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살펴보면서 읽지 않으면, 해석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더욱이 무한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잘 알 수 있으랴?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편 기자가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노래한 것은 그런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시간이 언제나 현재이므로 사람의 시간법으로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창조 6일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오래된 과거에 있었던 창조 사건의 환상을 6번 보여주신 것을 6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가장 합리적인 이해라고 보여진다.
창조 톨레도트를 읽을 때에는 빛(오르)과 흑암(호셰크), 궁창(라키아), 광명(메오르트), 생물의 종류(민), 형상(찰렘)과 모양(데무트), 복(바라크) 등의 주요 명사와 동사의 시제, 그리고 모세의 서술적 관점과 층위,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할 요소가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런 이해 없이 창조 톨레도트를 읽는다면, 그의 이해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나 유대교적 인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현대사회에서 선교와 과학적 무신론에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에서 멈추고 말 것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적 관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관점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비롯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만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와 그가 주신 원복음의 섭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5), 먹거리를 정해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에게 원복음을 주신 후에 이 땅의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정해주셨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1:29)고 말씀하셨고, 사람 이외의 동물에게는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다(1:30). 하나님이 ‘오클라’(אָכְלָה: 먹거리)를 정해주시니 사람과 모든 동물은 그들의 먹거리를 찾아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가 창조하신 사람과 모든 동물의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식물이 만든 유기물 섭취를 통해 획득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중에 사람의 죄악이 관영해지자 홍수로 심판하시지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셔서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그 후에야 “무릇 산 동물”을 먹거리로 허락해주셨다(9:3). 노아의 가족 네 쌍은 현대 인류의 조상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과 동물의 물리적 구조는 약 70%의 물을 제외하면, 세 가지 유기물 -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과 극소량의 기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에 지구에는 무기물밖에 없었다. 생물의 생활 에너지는 모두 유기물애서 만들어진다. 생태계에 유기물이 없으면 생물이 살아갈 수가 없다. 초기 지구의 유기물은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서둘러 식물계를 먼저 만드신 것도 무기물을 생물이 필요로 하는 유기물로 바꿔서 공급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처음에 생겨난 식물의 씨앗은 하나님이 만드신 유기물질을 공급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생물이 물질대사를 통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영양소와 에너지를 얻는 형태를 보면, 식물은 무기물질을 섭취하여 광합성 작용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독립영양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식물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섭취하는 사람과 동물은 물질대사를 통해 이를 분해하여 저분자 화합물질로 바꿨다가 다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질로 바꿔서 생명 에너지로 사용하는 종속영양체로 만드셨다. 물질대사 과정에는 이화작용(異化作用 catabolism)과 동화작용(同化作用 anabolism)이 있다. 이 과정에서 동물의 몸 안에서는 섭취한 식물에 대해 엄청나게 다양한 화학적 분해와 결합이라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화작용은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섭취하면, 소화기관에서 분해하여 저분자 화합물인 영양소를 얻고, 찌꺼기는 다시 밖으로 배출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탄수화물, 지질, 단백질과 같은 큰 유기물 분자를 단당류, 지방산, 아미노산과 같은 영양소 단위로 작게 분해한다. 동화작용은 이화작용을 거쳐 획득한 저분자 화합물을 자기 생명활동에 필요한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고분자 화합물로 다시 바꾸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세포의 증식 등에 필요한 분자들을 합성하기 위해 복잡한 효소 반응이 일어난다. 식물의 광합성과 동물이 아미노산으로 단백질을 합성하여 자가 세포의 유지와 성장, 그리고 생명 활동에 필요한 유기물 분자를 제조하는 물질대사의 방법 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 저장소인 DNA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생명 정보가 어떻게 물질의 우연한 화학작용으로 생겨나서 저절로 생명체로 만들어지고 수많은 종류의 지구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주신 생명 정보는 각 세포 안에 있는 DNA와 RNA에 저장되어 있어 필요할 때에 꺼내 쓸 수 있다. 각 세포는 자기 DNA를 복제하여 새 세포에 공급한다. 생물은 그런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생겨나는 DNA 변이를 자체적으로 수선하는 기능이 있으며, 모든 생명 정보는 자손의 DNA에 그대로 유전된다. 생명 정보를 가진 DNA는 리보솜에 있는 RNA에 지시하여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단백질을 만들고, 생식기능을 작동하여 번식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RNA 유전체만 가진 바이러스는 자체 내에 생활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바이러스는 반드시 다른 생물의 세포에 침투해서 그 생물의 DNA에서 역전사를 통해서만이 생명활동에 필요한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자손을 증식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인 DNA 구조와 기능을 알게 되면, 생명 정보가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과 유물론이 결합한 과학적 무신론을 반박할 수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모세 시대의 히브리인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친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반론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공세에 밀리면서 기독교는 위축될 일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창조목적 수행은 물론 오복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