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젊은 날의 단편

장마가 개이던 날

heojohn 2020. 4. 13. 23:41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화장대 위에 있는 작은 탁상시계마저 잠들어 있다. 한복을 입은 인형 하나가 유리상자 속에서 제 맵시를 뽐내고 있다. 언제나 같은 인형의 표정은 생동감이 없다. 그것은 달포 가까이 빗물을 뿌리고 있는 장마처럼 지루할 뿐이다.

이윽고 교회의 종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부시시 일어났다.

열두시다.”

열두 시간의 수면제 효력에서 깨어난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곧 다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런! 얼핏 설핏 반 하루를 꿈속에서 보내고도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베게 위로 팔을 뻗친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 머리맡에 놓아둔 과일 바구니에서 포도송이를 집어 한 알을 따냈다. 포도 한 알을 입안에 넣고 깨물자, 새콤한 맛이 혓바닥에 퍼졌다. 꿈벅거리던 눈동자가 초점을 잡았다. 그녀는 포도 알을 씹으면서 살포시 웃어 보았다.

일노일노(一怒一老) 일소일소(一笑一少), 현관에 걸린 액자, 아버지 생활의 좌우명. 행동하지 않는 앎은 무의미한 거야. 그렇지.

그녀는 가벼운 동작으로 얇은 홑이불을 제치고 일어났다. 그것은 그녀가 아침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자 행동의 순서였다.

세면을 마치고 화장을 하려던 그녀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나갈 일도 없으면서 화장을 왜 하려고 한담! 오늘은 일요일인데.....

콜드크림으로 얼굴에 맛사지를 하던 그녀는 맥이 풀렸다. 2층 방에서 1층 거실에 내려온 그녀를 보고 거실 바닥을 쓸고 있던 아주머니가 재빨리 식탁을 차려 놓았다. 그녀는 말없이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건 늦은 아침도 아니야. 점심이야. 한 끼를 걸렀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네.

그녀는 몇 번 숟가락을 뜨는둥 마는둥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당에 몇 그루의 꽃나무가 가는 빗줄기를 맞고 촉촉이 젖어 있다. 처진 잎들이 왠지 후줄근하게 보였다.

내 마음이 그런가 봐. 이렇게 일요일이 무료한지가 벌써 석 달이나 됐으니.

그녀가 마당으로 나오자 제 집에 웅크리고 있던 쉐퍼드 한 마리가 길길이 날뛰며 반겨주었다. 그녀가 우산을 쓰고 가서 매인 끈을 풀어주니 쉐퍼드는 껑충껑충 뛰며 매달렸다.

믿음직한 놈이야. 이놈이 있어서 우리 집은 안전해.

그녀의 집은 정릉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꽤 넓은 주택이었다. 그녀는 쉐퍼드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마당을 함께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한 구석에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키우기도 했는데.....

그녀는 쉐퍼드와 노는 것에 곧 싫증을 느꼈다.

젖은 털로 비비려고만 하니 참.....도무지 무슨 말을 해도 꼬리밖에 칠 줄 몰라. 그렇다 고 비가 오는데 어디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야단을 치면 멀뚱거리기나 하니. 개는 개야.

그녀는 싫다고 뒷걸음치는 쉐퍼드를 억지로 끌고 가서 도로 줄에 매어놓았다. 그녀는 2층에서 피아노를 쳐볼까하다가 말동무를 찾아 아주머니 방으로 갔다.

그녀가 방문을 두드리자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 빨래를 개고 있던 아주머니는 그녀를 보자 뜻밖이란 듯이 어질러 있던 방안을 이리저리 치워놓고 않으라고 권했다.

아가씨가 웬일이유? 지 방에를 다 오시구?”

아주머니가 그녀를 맞이하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다른 곳은 다 잘 치우시면서 자기 방은 마구 어질러 두시네요. 이건 집안의 보이지 않는 곳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은 애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시작부터 삐딱하게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아주머니의 집안 살림살이에 가지고 있던 작은 불만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예 예, 죄송해요. 아니예유. 괜찮아유. 아니예요. 알았어유 아가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엉뚱한 공세에 시달리면서 어찌 대답해야 할 줄을 모르고 쩔쩔맸다. 어머니의 고향에서 친척의 소개로 올라온 아주머니는 어머니가 병원에 마지막 입원했을 때부터 그녀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떠들고 나니 그녀의 목소리에 짜증이 한결 사라졌다.

잘하고 계시지만 조금 더 신경 써달라는 부탁이예요. 이해하셨죠?”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막 끝내고 있는데 대문에서 부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일어서자 아주머니는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는 2층에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후줄근한 기분이 조금 개운해진 것 같아. 참기만 하면 병이 된다고 하지. 말을 묻어 두면 병이 된다고 하는데. 정우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말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 텐데.

그녀는 정우에게 토라져서 석 달 째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말을 하는 것이 싫어 억지로 피하고 있었다. 정우도 멀리서 그녀의 눈치를 보기만 했지,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어쨌든 서로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 누가 먼저 말을 하면 금방 풀릴 텐데. 자존심이라는 건가? 그게 싫은 거지.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보며 정우를 생각하고 있는데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주머니가 엽서를 들고 들어왔다. 작은 오빠가 보낸 엽서의 앞면은 두레박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해녀를 찍은 천연색 사진이었다. 뒷면에는 작은 오빠의 갈겨 쓴 글씨가 말하고 있었다.

역시 너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게 잘한 것 같아. 짜증만 내면 어떡해? 너를 두고 온 것은 미안해. 너는 정우랑 잘 해봐야지-작은 오빠로부터엽서의 소인은 1970. 7. 7일자로 찍혀 있었다.

귤 한 상자를 보내준다는 약속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제철도 아닌 귤을 보내준다고 허풍을 칠 때 벌써 알았지. 남의 속 긁는 말하지 말고 오빠나 먼저 잘 하셔.

그녀의 큰 오빠는 이미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고, 작은 오빠는 올 가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약혼녀가 있다. 그 약혼녀는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휴가를 가면서 장래의 올케가 될 그녀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작은 오빠는 귤 한 상자를 약속한다는 쪽지를 남겨놓고는 혼자 따라 가버렸다.

남자가 여자를 더 챙길까, 여자가 남자를 더 챙길까? 둘이만 같이 있으려고 제철도 아닌 귤을 약속하고 떠났으니 오빠는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가자고 해도 내가 거길 왜 따라 가겠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내가 왜 기다리겠어? 어차피 빈 말인 걸.

작은 도련님이 결혼을 하고 나면 다음은 아가씨 차례가 아니우?”

아주머니가 엽서를 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언제 결혼한댔나요? 나는 결혼 같은 거 안 할 꺼예요.”

그녀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아주머니는 찔끔하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처녀 때는 누구나 다 그런 소리를 한다우. 그런데 아까 하는 말을 들어보니 아가씨가 그렇게 살림에 밝을 줄은 미처 몰랐어유. 아가씨가 시집을 가면 틀림없이 시부모님께 고임을 받을 거유.”

그녀가 대꾸도 하지 않고 싫은 내색도 하지 않자, 아주머니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런 때에 아주머니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가씬 돌아가신 마님을 어찌 그렇게도 닮았는지......”

아니나 다를까 싶게 아주머니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머니가 이렇게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누가 말리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는다.

알았어요. 아주머니 전 지금 졸려요. 잠자고 싶어요.”

그녀는 아주머니에게 말하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오늘은 일요일이니께 할 일도 없잖아유. 졸리면 그냥 주무세유.”

아주머니는 눈물이 고일 듯 애처로운 표정을 보이면서 방을 나갔다.

엄마아.”

그녀는 눈을 감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만히 불러보았다. 어머니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여고를 졸업한 해였지. 벌써 7년이나 지났어. 여자에게만 있는 자궁암. 다정하고 알뜰하시던 엄마를 쓰러뜨렸어. 그게 그렇게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던가? 엄마 때문에 큰 오빠가 결혼식을 서둘러 치렀는데, 안타깝게도 엄마는 결혼식에 가보지도 못했어.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아빠도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의사의 말에 속수무책이었지. 어머니가 떠나던 날. 우린 모두 소리 내어 울었어. 아버지는 말없이 손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그런데 하늘은 왜 그렇게도 무표정하게 맑고 밝았던가? 바깥일에 바쁜 아빠를 집안일에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애쓰던 엄마. 그게 병이 되었나? 엄마가 하던 일을 지금은 아주머니와 내가 나누어 하고 있어요. 그러나 아빠의 외로움은 어찌할 수 없어요. 큰 오빠는 결혼하고 나서 아빠에게 재혼을 권유했어요. 아빠는 거절했어요. 엄마를 대신할만한 사람이 있겠냐고 하더군요. 그때는 무슨 말인지 느낌이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알겠어요. 그런 게 사랑이라는 거지요? 아빠는 엄마를 진짜 사랑했나 봐요. 엄마, 아빠가 오빠에게 하는 말 나도 들었어요.

네 어머니가 남겨준 너희들이 있으니 나는 만족한다. 너희 어머니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다른 여자 앞에서 그럴 수 있겠니? 더 이상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그때 아빠가 55세였지. 고마워요, 아빠. 나도 아빠 같은 남자 만났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부럽기도 해요. 엄마, 걱정 마세요. 오빠들은 잘 하고 있고, 나도 이제 엄마가 걱정하던 못된 성격 많이 고치고 있어요.

내가 회복하기는 틀린 것 같다. 엄마는 누구보다 네가 좋은 남자 만나 결혼 잘 하는 것까지 보고 싶었다. 나는 세상을 떠나더라도 항상 너를 지켜보겠다. 여자는 겉으로 나이만 먹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냐. 속은 시퍼렇게 날이 서도 겉은 부드럽게 다듬어야 하고,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해. 내게 약속해라. 부탁이다.’

, 엄마. 약속 잊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때 아빠가 하신 얘기도 잊지 않았어요.

법률상으로 19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지만, 그것은 아직 속이 덜 채워진 죽정일 뿐이야.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한 남자를 사랑하여 서로 결혼하고 나서부터 어른이 되는 거야. 어른은 낳은 자식을 잘 키우고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해.’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 옛날의 선비 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아버지. 나는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러나 엄마보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더 잘 살고 싶어요. 엄마 나 꼭 그렇게 할 꺼예요. 알았어요, 엄마?

그녀는 죽은 어머니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버지와 오빠들에게로 생각이 옮겨갔다.

아빠의 말을 들을 때 갓 결혼한 큰 오빠와 올케는 웃고 있었지. 작은 오빠는 그렇게 할 자신이 꽉 찬 표정이었고, 나는 웬지 반발심을 느꼈어. 꼭 일찍 죽은 엄마의 삶을 따르라고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으니까. 엄마가 남긴 우리 남매들은 모두 법률적으로는 성인이 되었어. 우리 남매들을 보는 사람들은 아빠에게 자식 잘 키웠다고 얘기하지만, 아빠의 눈에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을 뿐이지. 나는 아직 사랑하는 남자를 결정하지도 못했어.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걸까?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걸까? 선택은 일방적일 수 없지. 그렇다면 서로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빠들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이제 정우에게로 생각이 옮겨갔다. 정우를 처음 만나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날은 정우가 처음 입사한 날이야. 과는 달랐지만 같은 영업본부 소속이었지. 그날 정우는 과장을 따라 부내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내게도 왔었지. 첫 인상이 매우 깨끗했어. 눈빛이 마음에 와닿았어. ROTC로 군에서 제대하고 입사했다지. 여직원들끼리 정우에 대해 쑥덕거리는 일이 많아진 건 그가 아무에게나 친하게 지내려고 설친 게 원인이지. 점심시간에는 아무에게나 따라붙고, 퇴근 후에는 젊은 부원끼리 맥주집이나 극장으로 몰려가기도 하고. 주말에는 남녀 직원들에게 회람을 돌려 등산을 가기도 했지. 같은 여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괜찮은 남자 같았어. 나도 자연히 멀리서나마 정우에게 눈길이 가기도 했지. 그러나 반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같이 어울리지 않았어. 어쩌다 마주치면 그저 지나가는 인사 외에 다른 말을 나눈 적도 없었으니까. 가끔 그가 우리 과에 건너와서 같이 등산 갔던 여직원에게 말을 걸면서 내가 있는 방향으로 힐끗거릴 때는 괜히 주책스럽게 보일 뿐이었어. 그날은 내가 여자의 월정 휴가를 보내고 출근한 날이었지. 영업실적이 좋다고 특별 보너스를 받은 날이었지.

그날 특별 보너스를 받은 직원들이 왁자지껄 한꺼번에 좀 일찍 퇴근했었다. 그녀는 전날에 밀린 일처리를 하느라 같이 나가서 맥주 한 잔 하자는 권유를 사양했다. 그녀는 혼자서 1시간 반쯤이나 늦게까지 일했다. 그녀가 퇴근하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정우가 갑자기 나타났다.

지영씨, 나 지영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오늘 저녁식사 같이 하면서 우리 이야기 좀 해요.’

다소 일방적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정우가 싫지 않게 느껴졌다. 마침 배가 고파 빨리 밥을 먹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따라간 곳이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일식집이었다.

나 지영씨에게 관심 있어요. 회식에 참석했다가 지영씨가 빠진 것을 알았어요. 지영씨 회사에 남아 있다고 해서 저녁 안 먹고 돌아왔어요. 앞으로 우리 사귀어보는 거 어때요?’

식사 주문을 받은 여종업원이 방을 나가자 정우가 말했다.

뭐 난 아직 남자 사귀는 거 생각해본 적 없지만, 정우씨라면 나쁘진 않겠네요.’

그녀가 약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한 마디 질문을 덧붙였다.

다른 여자 사귀지 않고 있어요? 여자들에게 인기 좋은 것 같던데요.’

아 그런 거 없어요.’

정말이예요?’

정말이예요.’

그럼 좋아요.’

지영씨, 오케이한 걸루 알겠어요.’

그래요.’

그럼 우리끼리는 말 놓자.’

정우와 나는 그렇게 시작했지. 생선초밥을 시킨 정우. 나는 겨자가 싫어 김초밥을 시켰지. 초밥으로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아주머니에게 전화 했었지. 저녁 먹고 간다고. 내가 남긴 김초밥 하나를 마저 집어 먹으면서 정우가 하는 말.

사람은 이 김초밥 같아. 겉으로 봐서는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거든.’

왜 몰라? 밥이 들었지 뭐가 들었어?’

밥이 들어있는 것은 누구나 알지. 중요한 건 맛을 내는 반찬 재료 아니겠어?’

반찬 재료에 따라 김밥 이름이 다르잖아? 김밥 이름을 보면 속 반찬이 뭔지 알지. 이건 참치가 들었네. 참치김밥이야.’

사람은 이름만 가지고는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거든. 주먹 김밥이나 썰지 않은 김밥이라면 뭐가 들었는지 어떻게 알아?’

그럼 먹어보면 되지

그럼 사람도 먹어보아야 알겠네.’

나는 정우가 내가 한 말을 따라하면서 덧붙인 의미를 알아채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었지. 나는 정우에게 눈을 흘겼다.

아니, 아니, 미안. 농담이야.’

정우는 질겁한 시늉으로 두 손을 가로 흔들면서 웃었지. 혼자 있는 여자 앞에서 그런 농담이라니? 지나치지 않았어?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에 화를 낼 수도 없고, 나도 따라 웃고 말았지. 그렇게 웃으며 열렸던 마음에 한 동안은 신바람이 불었어. 사무실에서 우리들을 놓고 말들이 오갔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지. 주중에는 시내에서. 주말에는 야외로. 그 바람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멈춰버렸지. 나를 화나게 한 정우의 행동 때문에! 전화도 없이 1주일이나 출장을 갔다가 돌아와서는 다른 사람과 저녁 약속을 하다니! 정우가 그런 남자였던가? 내가 알고 있던 정우와는 완전히 딴 판이었어.내 마음에 어찌 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 다음날 사무실에서 정우가 걸어온 전화에 대고 말했지. 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옆자리에 있던 선배 언니가 눈치를 채고 일어나서 나와 멀리 있는 정우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날 이후 나는 모른 체하고 정우를 외면했지. 전화를 하면 받자마자 끊어버리고. 며칠을 그러다보니 정우도 더 이상 전화를 못하게 되었지. 사무실 직원들이 눈치를 채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지. 내가 너무 자존심을 세우는 것 아니냐고? 여자의 자존심. 맞아요. 발화성 높은 폭탄. 때로는 지푸라기로 건드려도 폭발하지. 건드리면 있는 대로 터지고 마는 폭탄. 내 자존심 폭탄. 그 많던 폭탄이 바닥이 나고. 이제 남은 게 없어.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서 망각의 잠에 빠지고 싶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커텐을 내렸다. 그러나 여름의 태양은 그녀의 뜻을 무시하고 커텐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누워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욕실에서 뜨거운 물에 땀이나 흠뻑 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머니, 욕실에 불 좀 넣어주세요.”

그녀가 고함치듯이 말했다.

예 예, 알았어요.”

아래층에서 아주머니의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일러를 아주 높이세요. 목욕물이 뜨겁게.”

그녀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아주머니, 한 어름에 왜 뜨거운 물이 필요하냐구요? 나는 아직 어린애니까요. 그래요. 아빠가 그랬어요. 결혼해서 애 낳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라구요.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어린애지요. 철모르는 어린 아이.

그녀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겼다.

동료 직원들이 입방아를 찧어댔지. 쟤가 뭔데 정우 같은 남자를 차버려? 쟤는 주제를 몰라. 그래? 나보고 여자의 자존심을 팽개치란 말야? 차라리 찼다는 말이 차였다는 말보다 듣기에는 낫네. 그래 니가 가져라. 아니야, 정우. 차려고 그러지는 않았어. 여자의 자존심 때문이야. 정우는 내 마음을 알까? 안다면 분명 연락을 할 거야. 아니면? 할 수 없지 뭐. 여자의 자존심을 어쩌겠어. 한 번 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게 여자의 자존심이야. 정우. 조금은 후회되지만 네 앞에서 내 자존심을 버리고 싶지는 않아. 그래, 나는 후퇴할 수 없어. 아무렴.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지금 나를 비비고 문질르고 뜨겁게 해서 땀을 뽑을 거야. 그래야 몸도 마음도 시원해질 것 같아.

그녀의 집에 욕실은 2층에 하나밖에 없다. 식구들 중에 그 욕실을 쓰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그 욕실은 처음에는 간단한 샤워기밖에 없던 2층용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여고 졸업반이 되었을 때 그녀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공중목욕탕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버지가 화장실을 넓혀 욕조를 들여놓고 욕실로 개조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식구들은 그 욕실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주말에 공중목욕탕에 가고 아버지와 오빠는 시내에 새로 생겼다는 사우나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오빠들은 집에 와서 화장실을 사용할 때도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2층에 있는 화장실 겸 욕실을 언제나 그녀의 욕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욕실로 갔다.

그래 이 욕실은 어머니가 내게 마지막 남겨 주신 거야. 여자는 안을 깨끗하게 겉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하셨나요. 뜨거운 목욕이 제격이지요.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면서 1층을 내려다보니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지 거실 쪽에는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욕실에 들어서자 옷을 한 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반쯤 열어둔 환기창을 애써 닫아버렸다. 욕조에 달린 온수 꼭지를 틀자 쏟아지는 물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옷을 벗어 빨래통에 넣고 욕조를 채우는 물에 손을 대보았다.

앗 뜨거!”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물을 이렇게 뜨겁게 하다니? 내 말에 대답도 않더니 듣긴 들었네. 그렇다고 이렇게 뜨겁게 해? 일부러 나 약 올리는 거 아냐? 아냐, 내가 화를 내면 안 돼지. 여름철에 목욕물을 뜨겁게 해달라는 내가 이상했지. 내가 아주머니의 배알을 건드렸어. 아주머니 내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엄마가 내게 여자는 안을 부드럽게 겉을 깨끗하게 해야 한댔어요.

아주머니, 보일러 이제 그만 꺼주세요. 물 다 받았어요.”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예 예, 알았어요.”

이번에는 아주머니의 대답이 들렸다.

그새 마음이 풀렸나? 아니 내 마음의 변덕을 알아챈 모양이지. 그렇겠지. 우리 집에서 지낸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녀는 찬 물을 조금 섞어 물의 온도를 약간 식혔다. 욕실은 김이 차올라 천정에 달린 형광등이 곧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물 온도를 다시 가늠해보았다.

이 정도 뜨거우면 견딜 만 해. 충분히 땀을 뺄 수 있지.

그녀는 비누와 샴푸를 가까이에 갖다 놓고 욕조 안으로 가만히 발을 들여놓았다.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두 다리를 뻗었다. 반쯤 누운 자세로 목만 밖으로 내놓고 온 몸을 물속에 담갔다. 그녀는 온 몸에 스며드는 열기를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예순......일흔...... ......이백......삼백

그녀는 열기를 참아내느라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마에 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300을 세었을 때는 물에서 더 이상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욕조 밖으로 나왔다. 욕실은 안개 같은 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녀는 샴푸를 풀어 머리를 감고 목욕 타올에 비누를 묻혀 몸의 곳곳을 씻어냈다. 김이 서린 욕실 안에서 그녀의 나신은 환상처럼 몽롱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감기와 씻기를 마친 그녀는 욕조에서 물마개를 뺐다. 물 빠지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쭈우욱! 그 소리에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가 환기창을 반쯤 다시 열어놓고 샤워기에서 찬물을 틀어 머리와 몸에 남은 샴푸와 비누의 찌꺼기를 털어냈다. 샤워를 마친 그녀는 마른 타올로 젖은 몸을 닦았다. 그녀는 욕실에서 김이 빠져나가는 동안 벽거울에 서렸던 김도 닦아냈다. 그녀의 나신이 거울에 비쳐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름다운 청춘의 실상, 그녀에게도 눈부시다! 잘 익은 수밀도가 달려있는 듯한 양쪽 가슴. 팽팽하게 당겨진 허리, 대리석 조각처럼 군더더기 없는 엉덩이. 흑발을 흔들 때마다 드러나는 하얗게 빛나는 이마와 귀. 오똑한 콧날 위에 상큼한 그녀의 두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상쾌해. , 이게 나야. 신이 나에게 만들어준 작품이지. 남자와 여자.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 흔히 얘기하더라. 그래도 나는 나야. 네가 나를 무시하는 꼴은 절대 못 참아. 서로 절반의 정체성은 유지되어야지. 아이를 낳아도 그렇잖아? 너와 나의 유전자를 절반씩 가진 우리 아이. 정우 나는 그걸 상상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 둬야지. 더 이상 만날 일 없는 거야. 나의 결론이야.

그녀가 거울 속의 그녀를 보면서 옷을 입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누구세요? 아주머니?”

, 전보가 막 왔는데유. 뭐 지급전보래유.”

그녀가 문을 열자 아주머니가 손에 쥐고 있던 전보를 건네주었다.

여섯 시에 전화할게. 정우

정우? 뭐야, 갑자기? 여섯 시면 다 되지 않았나?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서 탁상시계를 보았다. 탁상시계는 아직 잠자고 있었다. 그녀가 급히 손목시계를 찾고 있는데 거실에서 괘종시계가 울리고 있었다. 여섯 번의 종소리가 끝나자 곧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정우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러 1층으로 한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지영이, 나야. 정우.”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정우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긴장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

알아. 오랜만이야. 무슨 일로, 갑자기?”

그녀는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다른 일 없으면 연극 같이 보자. 7시 반에 명동 국립극장이거든.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러브 스토리. 어때? 우리도 한 번 봐야지. 영국 본토박이 극단이래.”

정우의 두 번째 말은 특유의 단도직입적인 화법이었다. 그동안 전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

그녀는 정우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재빠르게 돌아가면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냥 나간다고 하면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이미 표는 끊어놓은 것 같고. 시간도 충분하니. 적어도 한 마디 쯤 더 기다려 보자. 3개월에 대한 보상으로. 그러면 무슨 변명이라도 하겠지. 어떻게 나오나 보자.

그녀의 내심 날카로운 분석은 적중했다.

그동안 섭섭했다는 거 알아. 미안해. 회사 비밀 프로젝트 때문에 내가 좀 바빴어. 이제 성사됐거든. 만나면 다 이야기 해줄게.”

그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아빠 저녁도 준비해야 하구. 사정이 좀 그렇네.”

그녀는 한 번 더 꼬리를 빼느라 아버지까지 끌어대고 거짓말했다.

회사 비밀 프로젝트? 나도 그제 들었어. 정보 유출될까 봐 팀원끼리도 감시했다며. 그래서 경쟁회사 물리치고 오더 잡았다는 뉴스. 이 정도까지 나오면 됐어. 다른 얘기는 만나서 들어보면 되겠지. 그렇지만, 아직 뭔가 한 마디가 부족해.

집에 아줌마 있다면서? 그러지 말고 아줌마에게 맡기고 나와 줘. 표는 예매해두었어.”

정우가 약간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알았어. 저녁은 어떻게?”

극장 옆에 김밥집 있잖아? 그걸로 때우자. 내가 그거 준비해 놓을게. 끝나면 간단히 맥주 한 잔 하고. 시간 늦지 않게 오면 돼.”

알았어. 그렇게 해. 기다리고 있어 곧 나갈 께.”

그녀도 옛날처럼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우의 애를 태우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끊는 그녀의 표정이 오랜만에 풀어졌다. 입가에 미소까지 떠올랐다. 장마가 그쳤는지 창밖으로 햇살이 나는 것 같았다. 여름의 태양은 기울어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는 방으로 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거실을 지나쳐 현관으로 나가다가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나가서 연극보고 저녁 먹고 올 거예요. 아빠 먼저 들어오시면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 알았어요. 목욕을 해서 그런지 아가씨 얼굴이 환해졌어요. 보기 좋네요. 잘 다녀오세유.”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약간 수다스럽게 말했다.

, 그런데 참 아까 썼던 우산이 안 보이네.”

그녀가 현관문을 나가려다가 돌아서서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 우산 말이유? 아까 장마가 그쳤다는 방송이 나와서 지가 밖에 내다 말리고 있는데유.”

아주머니가 하는 말을 듣자 그녀는 휭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아 그러네요. 장마가 개였네요!”

밖에서 그녀가 말하는 소리와 쉐퍼드가 짖는 소리가 안에 있는 아주머니의 귀에 함께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