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다윈의 [종의 기원] 비판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초기 논쟁들

heojohn 2020. 3. 10. 01:10

 

 

(1) 초기 지지자들

 

당시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사조는 자연에도 하나님의 섭리로서 진보를 향하는 목적론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다윈의 진화론을 이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열렬한 신자인 그의 아내 엠마(Emma) 덕분에 최소한 목적론자로는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다윈의 주장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다른 것이 문제되었을 뿐이다. 다윈은 다만 하나님의 유형별 창조를 과학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경향에는 그의 종의 기원의 마지막 구절에 쓰인 창조자”(the Creator)라는 말도 효과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다윈은 그의 종의 기원마지막 구절에서 생명은 그 몇 가지 능력과 함께 맨 처음에는 창조주(the Creator)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한 개의 형태에 불어넣어졌으며라고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다윈 자신은 불가지론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그가 종의 기원에서 서술한 자연선택론은 자연목적론자의 과학적 주장으로 이해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종의 기원은 그동안 공개적으로는 성역으로 간주되었던 성경에 대해 대담한 도전의 서막이었다. 들불처럼 번진 논쟁의 불꽃은 유럽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번져나가게 되었다. 논쟁의 불길은 영국에서 시작하여 유럽대륙은 물론 아메리카 신대륙에까지 번져나갔다.

 

다윈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대표적 인물로는 토머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를 들 수 있다. 그는 다윈의 책을 처음 읽고,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다니 정말 어리석었군.”이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다윈의 불도그라고 불릴 정도로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앞장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18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옥스퍼드 주교 사무엘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와의 사이에 벌어진 옥스포드 논쟁에서 다윈 대신 나섬으로써 유명해졌다. 윌버포스가 원숭이가 조상이라면 당신의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어느 쪽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자기의 재능과 영향력을 과학적인 문제를 조롱하는데 쓰는 사람과 혈연관계를 맺기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택하겠소라고 응수했다고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언론 보도에서 헉슬리가 무례를 범했던 반면, 윌버포스는 훌륭한 연설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당시의 평가는 후대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고, 이렇게 뒤바뀐 평가가 현재는 정설이 되어 있다. 이것은 시대적 주류사조(主流思潮)의 패러다임이 변하면, 어떤 사건의 평가도 완전히 뒤집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헉슬리는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은 미국에서는 기술자(technical practitioner)를 의미하는 저속한 말이므로 영국에서는 과학지식인(man of science)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헉슬리는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다윈도 헉슬리와 같은 입장이라고 표명했다. 그러나 헉슬리는 다윈의 점진적 변이를 부정하고 돌연변이를 주장했다. 헉슬리는 변이에 대한 그의 이해가 다윈의 종의 기원이론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윈을 열렬히 옹호했다. 헉슬리는 다만 자연 지식 영역의 확장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다윈의 공동조상이론을 옹호했으며, 자기의 필요에 따라 그의 이론을 이용했던 것이다. 헉슬리는 다윈의 이론을 다른 것과 구별해서 가장 먼저 다윈주의라고 불렀다. 헉슬리는 창조주의를 반대하면서 동시에 다윈주의도 비판하는 자들에게는 그렇다면 당신이 내놓을 대안은 무엇이냐?”고 공격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공격을 당하면 즉각 반격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창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다윈을 위한 논쟁에서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그의 순발력과 행동은 뒤에 진술하게 될 그의 손자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 1887-1975)에게 진화론적으로 전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다윈주의자들에게 사고와 행동의 방식을 결정하는 지침이 되었다. 그의 행동은 다윈의 지지자이면서도 라이엘과 후커와는 달리 자기의 주관적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의 이론을 열렬히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유물론에다 옮겨 심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공산주의가 철학적 유물론에서 유물진화론 즉 과학적 사회주의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힘입은 바 큰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후기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었고, 이런 영향으로 과학적 무신론의 원형이 생겨났다. 뒤에서 이 논쟁에 대한 논의를 상술할 것이다.

아사 그레이(Asa Gray, 1810-1888)는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다윈 이론을 전파하는 선봉에 섰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인 그는 변이에 대해서는 신적 영역으로 간주해서 다윈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다윈의 책을 읽고 그의 이론에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했다. 그는 사회 이론에도 진화 개념을 적용하도록 소개했다.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도 그가 처음 쓴 것이다.

프란시스 골튼(Francis Galton 1822-1911)은 다윈의 이종사촌으로서 다윈의 진화론에서 우생학(eugenics) 이론을 만들어냈다. 진화론에 기초한 우생학은 뒤에 백인 우월주의,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인종 및 민족차별 등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토대가 되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헥켈(Ernst Haeckel, 1834-1919)은 다윈의 진화론을 뒷받침하여 배()발생도와 생물계통수(1866)를 만들어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후에 허위로 밝혀졌다.

 

(2) 반대자와 실험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자 기독교 성직자들이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났다. 앞에서 말한 윌버포스 논쟁은 생명속생설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외에 가장 먼저 다윈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다윈을 초기에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다윈에게 지질학을 가르쳤던 세지위크(Adam Sedgwick, 1785-1873) 교수와 다윈의 승선을 허락하고 함께 항해를 했던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Robert Fitzroy, 1805-1865)는 적극적으로 다윈을 반대하고 나섰다. 사실 다윈이 진화의 개념에 착안하게 된 것은 당시 지질학자로서 세지위크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라는 책을 읽은 것이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피츠로이는 자기가 읽었던 이 책을 항해 중에 읽어보라고 다윈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다윈은 그의 스승 세지위크와 비글호 선장 피츠로이의 견해와는 정반대로 나아갔다.

 

피츠로이와 세지위크는 종의 기원이 나온 후에 다윈을 가장 먼저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반대 활동에 나섰다. 특히 피츠로이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게 된 것은 그가 다윈을 비글호에 태워준 것과 지질학 원리를 다윈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 그러나 후세의 일부 기록(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은 피츠로이의 자살은 정신병이 원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리차드 오웬(Richard Owen, 1804-1892)은 한 때 다윈의 친구였으나, 종의 기원을 비판하면서 토마스 헉슬리와 논쟁하였다. 이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당시 과학계의 주도권을 다투는 양상으로까지 전개되었다.

훼웰(William Whewell, 1794-1866)귀납적 과학철학, 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1840)을 저술하여 통섭의 개념을 정립했던 과학철학자인데, 다윈의 종의 기원이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리학자 존 허셜(John F. W. Herschel 1792-1871)은 결정론적인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연적 발생이 개입될 수 있는 다윈의 귀납법적 진화론은 쓰레기와 다름없는 이론이라고 하면서, “자연선택은 돼지를 살 때 흥정하는 이론이라는 말로 다윈의 진화론을 혹평했다.

스위스 태생으로 미국에서 초기 자연사 연구를 주도했던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 1809-1879)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판하여 과학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방법론이 비과학적이며, 그 성향이 유해하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 1834-1914)은 꼬리를 잘라낸 쥐를 계대(繼代) 실험하여 획득형질이 유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유전에 관하여(1883)는 직접적으로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나, 다윈의 진화론에도 피할 수 없는 반증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지지하는 후대의 다윈주의자들에 의해서 뛰어난 진화생물학자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반증하는 과학자들의 이론이나 실험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생물학자 비르효(Rudolf Virchow, 1821-1902)가 있다. 그는 다윈이 월리스와 공동논문을 발표하던 1858년에 세포병리학에서 모든 생물의 세포는 세포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생물속세포설을 이미 발표했다. 이것은 분명하게 다윈의 진화이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윈의 생물학 진화론을 결정적으로 반증하는 과학적인 실험은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파스퇴르는 더욱 발달한 현미경을 자체 제작하여 박테리아 등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의 생명 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유명한 백조목(S)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생물은 부모로부터만 발생한다는 생물속생설(生物續生說, biogenesis)을 확립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자연발생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실험에 성공하는 자에게 거액의 상금을 걸었는데, 파스퇴르는 이 상금을 획득했다. 파스퇴르는 이 실험을 바탕으로 하여 1861자연발생설 비판을 출판함으로써 유물론적인 또는 물활론적인 자연발생설에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그가 주장한 생물속생설은 생물의 생명은 오직 그 부모의 생식에 의해서만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은 종류별로 신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난 과학적 사건이 영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수도사이자 생물학자인 멘델(Gregor J. Mendel, 1822-1884)7년의 연구 끝에 1865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에서 생물의 유전법칙을 발표한 것도 그랬다. 멘델이 발표한 유전법칙은 부모의 유전형질에 의해서 자손의 유전형질이 결정된다는 것으로, 후천적 형질이 유전된다는 다윈의 주장, 즉 자연선택에 의한 변이의 축적이 자손의 종을 바꿀 수 있다는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영국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생물학의 기둥원리로 인정되고 있는 세포속세포설과 생명속생설, 그리고 멘델의 유전법칙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변수를 만나 뒤안길로 밀려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을 공산주의 유물사관에 받아들이자 공산주의자들이 다윈을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파스퇴르와 멘델의 이론이 제대로 알려지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을 그들의 유물론에 접목하지 않았더라면,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이때 이미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