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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성당 죄다 무너졌는데 집창촌만 멀쩡…지독한 대지진 아이러니 [사색(史色)]

heojohn 2023. 2. 11. 18:33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입력 2023. 2. 11. 10:03

[사색-8] 무거운 재난이 무고한 시민을 덮쳤을 때, 무력감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 삶에 대한 회의가 마음속을 가득 채웁니다. 튀르키예에서 벌어진 대지진을 보면 든 생각입니다.

문명의 눈부신 발전에도 인간은 자연의 힘 앞에 무너집니다.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신의 자리에 올라선 인간’이라는 자찬은 얼마나 알맹이가 없는 말인지를요.

지난 6일(현지시간) 튀르키예와 시리아 접경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다. <사진제공=월드비전>
인류는 재난 속에서도 한 발자욱씩 발걸음을 디뎠습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시나브로 희망을 개척해나갔지요.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1775년 리스본 대지진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색은 인류가 대지진에서 일궈낸 희망의 꽃을 소개합니다. 튀르키예 지진 사망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요.
8일 오후(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켄데룬 시내에서 시민들이 모닥불 앞에 앉아 추위를 녹이고 있다. <연합뉴스>
1775년, 성(聖)의 수도가 무너졌다
“로마의 몰락 이후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참사”.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었습니다. 그날은 11월 1일 ‘모든성인대축일’(All Saints‘ Day), 유럽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로 통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였습니다. 모든 신앙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톨릭을 위해 한 몸 희생했던 성인들을 기리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의 한명은 성직자였던 가톨릭 신앙 도시 리스본은 더없이 평화로웠습니다.

리스본 대지진을 묘사한 19세기 삽화. 건물이 종잇장처럼 무너지고, 해일이 일렁이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가족들은 성당에 갈 채비를 갖추고 있었지요. 아가들은 꼬까옷을 입고 엄마에 미소를 지었을 테고, 부모들은 아가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벅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9시 40분. 굉음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땅이 쩍 갈라지고, 가족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모래성 마냥 무너졌지요. 남녀노소 모두 생존을 위한 절규가 시작됐습니다. “신이시여, 제발 살려주소서.”

성당도 구원의 공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미사가 열리는 성소(聖所) 역시 지진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성체(聖體)도, 십자가도, 예수님을 그린 성화도 맥없이 쓰러졌지요. 제대에 놓인 촛불이 목재로 옮겨 붙어 화마가 신도들을 덮쳤습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공간에 펼쳐집니다. 지독한 아이러니였습니다.

카르모 수도원은 여전히 1755년 대지진의 흔적을 품고 있다.
티치아노도, 루벤스도, 지진과 해일에 휩쓸려
“달려야 한다, 바다로 가자.”

생존자들은 건물의 잔해 속에서 구원을 찾았습니다. 리스본은 해양 도시였습니다. 바다만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지요. 속절없이 무너지는 도시 안에서는 생명의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의 젖줄이었던 바다로 향했습니다.

리스본의 모든 생명이 해안에 모였습니다. 자식의 손을 잡고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들, 노인을 부축한 젊은 부부, 미사를 집전하는 성직자, 주인 옆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까지. 그러나 그곳에도 신은 없었습니다. 대지진이 만들어낸 쓰나미가 해안가를 덮쳤지요. 지진 발생 40분 후였습니다. 지진으로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해일에 휩쓸려 죽었습니다. 악인과 선인,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대학살이었습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이 1755년 대지진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지진 발생 12시간 후 아메리카 대륙 북단부터 남아메리카 브라질 지역까지 쓰나미가 닥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리히터 규모 9.0. 사망자는 4만명. 리스본 전체 인구 25%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건물의 85%가 파괴됐지요.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마누엘 양식(후기 고딕)의 건축물도 재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큰 왕립병원이었던 ‘호스피탈 레알 데 토도스 오스 산토스’도 화마에 휩쓸렸습니다.

대지진 7개월 전에 문을 연 리스본 오페라 하우스(Opera do Tejo)도 불에 탔습니다. 250년 동안 왕의 거처였던 리베이라 궁전도, 가톨릭 성지였던 리스본 대성당도 지진과 쓰나미로 파괴됩니다. 인류의 지식과 예술이 담긴 7만권의 도서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포르투갈이 소장하고 있던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 루벤스, 코레조의 작품도, 대항해 시대를 이끈 바스코 다 가마의 탐사기록도 볼 수 없게 됐지요.

화가 주앙 글라마 스트로베를레가 묘사한 작품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 상단에 불의 칼을 들고 있는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지진을 신의 심판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스본 국립고미술관 소장.
신의 장난인가···언덕에 놓인 집창촌은 살았다
“신이시여, 정녕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지진은 끔찍한 상흔을 남겼습니다. 리스본 중심지를 초토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포르투갈 최남단 알가르베에서도 무너진 집과 성당이 여럿 목격됐습니다. 충격파가 북유럽의 핀란드까지 전해졌을 정도입니다. 영국 남부 해안의 콘월 지방에서도 3m 높이의 쓰나미가 닥쳤다지요. 지질학자들은 이 지진으로 대서양 건너 브라질까지 쓰나미가 닥쳤다고 보고합니다. 진앙에서는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펼쳐졌을지 감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대지진 이전 리스본의 모습. 1700년대 중반 작품으로 영국 출판업자 로버트 세이어에 의해 1752년 발행됐다.
그런데, 지독한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멀쩡한한 지역 하나, 그곳의 이름은 알파마였습니다. 바로 집창촌이었지요. 성스런 도시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죄악으로 가득찬 지역만이 화를 면했습니다. 일반 시민과 성직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습니다. 고도가 높았기에 지진의 충격파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쓰나미를 피하기에도 좋았지요. 신의 장난이었을까요. 악마의 농간이었을까요.
주앙 글라마 스트로베를레의 18세기 작품. 1755년 대지진 현장에서 3살짜리 아이를 구출하고 있다. 성모가 성자를 안고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독한 재난 속에 과학과 철학이 꽃을 피우다
“신이 있다면, 성당은 무너뜨리고, 집창촌은 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지독한 역설이 사유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신이 모든 일을 주재하신다”는 가르침에 철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삐뚤어진 인간을 향한 신의 심판”이라는 성직자의 목소리를 철학자들은 더 이상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리스본 대지진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철학자였다. 1768년 요한 베커가 그린 초상화.
종교의 자리에 이성을 놓았습니다. 지진의 원인을 ’신의 섭리‘로 보지 않고,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지진 이론을 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과학의 용어로 지진을 설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후대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독일 과학 지리학과 지진학의 시작”이라고 평했습니다. 물론 책의 내용은 뜨거운 가스로 가득찬 거대한 동굴의 이동이 지진을 불렀다는 둥 황당한 이론으로 가득합니다. 다만, 칸트 이후로 학자들은 이성과 지성으로 분석하기 시작했지요.

프랑스의 대표 사상가인 볼테르 초상화.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가 그렸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신께서 그림자처럼 세상 만사를 관장하고 계신다’는 신정론(神正論)을 공격합니다.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 Poeme sur le desastre de Lisbonne)’가 대표작입니다. 볼테르는 신의 존재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신이 있다면, 리스본의 성당을 무너뜨리고 집창촌을 온전하게 둘 수 있겠느냐”는 메시지였지요. 전 유럽이 그의 사상에 열광합니다. 프랑스 사상가 디드로도 리스본 지진을 “우연한 지질학적인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폐허가 된 카르모 교회 본당. 1775년 대지진의 처참함을 기록하기 위해 파괴된 모습 그대로 유지했다.
최악의 재난 속에서도 빛났던 정치
“죽은 자를 묻고, 산 사람에겐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절망 속 리스본에는 그러나 ’사람‘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국왕 주제 1세가 총리이자 폼발 후작이었던 카르발류와 힘을 모았습니다. 총리는 시신을 처리해 전염병을 막고, 이재민 구호에 나서야 한다고 주제 1세에 보고합니다. 왕은 총리에 전권을 맡기지요.

주제 1세는 폐허 속에서 약탈·방화 행위를 일삼는 야수 같은 자들을 처벌합니다. 도시 곳곳에 교수대를 세워 30명을 본보기로 목매달았지요. 선을 바로 잡고, 악을 벌함으로써 도시를 재건하고자 했던 셈입니다.

리스본을 재설계한 폼발 후작이자 총리인 카르발류 그림. 루이스 마이클 반 루와 클라우드 조세프 버넷 작품.
리스본의 리더들은 ‘재난’을 그저 불운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같은 재난이 다시 도시를 덮치더라도, 단단한 대응책으로 맞설 요량이었습니다. 카르발류 총리는 전국 모든 교구에 설문지를 돌립니다. “지진은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가”, “바다나 연못, 강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땅이 갈라진 곳에서 어떤 특이점이 있었는가” 등을 물었지요. 기록은 분석을 낳고, 분석은 지식을 잉태합니다. 오직 지식만이 재난을 막을 길이라는 걸 이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현대 리스본 도시를 만든 제1대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호세 데 카르발류.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험블린의 말처럼 “세계 최초 지진에 관한 객관적 설문조사”였지요. 이때의 설문 결과는 포르투갈 국립문서보관소인 토레 도 톰보에 소장돼 있습니다.
포르투갈 국립 기록 보관소인 토레 도 톰보. 폼발 후작이 진행한 설문조사가 보관된 곳이다. 후대 과학자들이 리스본 대지진을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2023년 튀르키예가 1775년 리스본의 길을 걸으려면
리스본은 한 달 만에 재건 계획을 발표합니다. 왕국 수석 엔지니어인 마누엘 다 마이아가 설계한 폼발린 양식이었습니다. 건물 벽에 완충재 형식으로 목재를 넣고 사이를 회반죽으로 채우는 형식입니다.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인 리스본의 코메르시우 광장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리스본 광장의 모습. 도시 중심부는 폼발린 바이샤로 불린다. 리스본 재건 을 주도한 총리였던 카르발류의 작위 ‘폼발 후작’에서 따왔다 .
과거 리스본은 가톨릭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대지진 이후 리스본을 세운 건 건축학, 도시공학, 그리고 인간의 지식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왕주제1세와 총리 카르발류의 지도력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리스본 대지진을 ”유럽 근대화의 출발점“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재앙은 때론 큰 진보를 낳았음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8일 오후(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켄데룬 항구에서 지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컨테이너와 크레인 등이 불에 타고 있다. 이스켄데룬 항구는 한국전쟁 당시 튀르키예군이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한국으로 출발한 곳이다. <연합뉴스>
9일 오전(현지시간) 튀르키예 하타이 안타키아 일대에서 한국긴급구호대(KDRT) 대원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 있던 어린이를 구조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지진이 튀르키예를 다시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건물의 잔해 속에서 망연자실한 어린아이의 눈빛에서는 허망함만이 느껴집니다. 따뜻한 공간에서 글 쓰는 일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요즘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 소망합니다. 1755년 리스본 부활이 2023년 튀르키예에서도 일어나기를. 대재앙을 겪은 아이들의 영혼이 다시 환하게 피어나기를.
튀르키예 이스탄불 국제공항 입국장 내 면세점의 한 전광판에 지진 피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검은 리본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참고 문헌>

ㅇ니콜라스 시라디,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 피운 1775년 리스본 대지진, 에코의 서재, 2009년

ㅇ송태현, ’리스본 대지진을 둘러싼 볼테르와 루소의 지적 대결과 근대지식의 형성‘, 한국비교문학회 비교문학 70권, 2016년

<네줄요약>

ㅇ177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 ‘역대급’ 대지진이 일어났다. 왕궁과 성당이 무너졌지만, 집창촌은 무사했다.

ㅇ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과학적 사유를 시작했다.

ㅇ포르투갈 정치 리더들 역시 ‘대지진’에 관한 기록을 남겨 후대의 과학적 탐구를 도왔다.

ㅇ힘내라, 튀르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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