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유신론 이해

양자물리학 알기(5): 핵폭탄 제조와 그 이후

heojohn 2020. 3. 15. 13:40

1. 원자폭탄 제조와 제2차 세계대전(1936-1950)


히틀러가 독일에서 총통이 되자 모든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대부분 망명을 떠나고 독일에 남아 있는 과학자들의 수는 많지 않았
다. 남아 있던 오토 한(Otto Hahn, 1879-1968)은 1938년에 우라늄 원자
핵에 중성자를 쏘아 바륨이 얻어지는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다. 오토
한은 이때 튀어나온 중성자들이 연쇄적으로 핵분열을 일으킬 때 엄
청난 에너지가 발생하며, 이것으로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어서 1939년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한스 베테
(Hans A. Bethe, 1906-2005)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수소원자 핵융합을
통해 헬륨이 되는 과정에서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이론을 발표
했다. 핵융합은 계산 결과 최소 1억 도 이상의 고열에 의해서만 발생
하는 것으로 예측되었다. 핵분열 또는 핵융합에 의한 새로운 에너지
원의 가능성은 인류에게 희망이었으나, 동시에 비극을 초래할 운명
이었다. 히틀러의 무모한 야욕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
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미국은 우라늄 원자핵 폭탄을 만들기 위하
여 ‘맨하탄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독일에서 망명한 과학자들까지 끌
어들였다. 모든 과학자들의 지식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1945년 미국에서 개발한 최초의 원자폭탄이 독일의 동맹국 일본에
처음으로 투하되었다. 그러자 한 도시의 수십만 명 인구가 한 순간에
죽거나 끔찍한 부상을 입는 사태가 일어났다. 소량의 우라늄 원자핵
을 분열시켰을 뿐임에도 인류에 의한 인류의 최대 비극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곧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일본은 무조
건 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추축국인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
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전후 평화가 정착되면서 양자물리학이 인류
사회에서 꽃을 피웠다. 양자물리학은 인류의 현대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희망의 길로 이끌어갔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의 전쟁을 위
해 수소 핵융합 폭탄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1947년에 미국의 벨연구소에서 일하던 존 바
딘(John Bardeen, 1908-1991)과 왈터 브래튼(Walter Houser Brattain,

1902-1987)이 전기적 제어가 쉬운 반도체 물질을 이용하여 점접촉 트랜지
스터(point-contact trnsistor)를 발명함으로써 전자산업에 본격적인 발
전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물질을 전기적 특성으로 분류하는 도체,
부도체, 반도체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이제 본격적인 양자물리학
적 응용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무선 통신과 방송, 컴퓨터, 원자력 발
전, 태양광 발전, 그리고 개인의 휴대폰 등 현대문명의 산물은 모두
양자물리학 응용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들이다.


1948년 네델란드의 물리학자 카시미르(Hendrik Brugt Gerhard
Casimir, 1909-2000)는 ‘카시미르 효과’(Casimir effect)를 예견했다. 고전
물리학에 따르면 진공에서의 두 판 사이에는 아무런 장이 없다. 따라
서 아무런 인력이나 척력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자 디
렉의 이론에 따르면 진공은 전자의 음전하로만 채워진 공간을 의미한
다. 카시미르 효과 실험에서, 대전되지 않은 두 금속판을 진공에 원
자 크기의 10배 정도인 1미크론 미만의 거리에 나란히 세우면, 그 사
이에 매우 강력한 힘이 나타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카시미르 효과’
에 의하면 진공에서 가상 입자의 존재가 예측되며, 그 작용에 의하여
미세한 장이 발생한다.


한편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은 진공에서 입자들
이 쌍생성되고 쌍소멸되는 현상을 관찰하였다. 원자의 빈 공간인 진
공에서 양전자와 전자가 만나면 쌍소멸되면서 2개의 감마선 에너지
로 변환된다. 이와 반대로 2개의 감마선이 원자핵 근처에서 만나면
전자와 양전자가 쌍생성된다. 이제 원자 안의 음전하로 채워진 진공
에서 입자와 반입자의 쌍생성과 쌍소멸이 실제로 발생되고 있음이
발견된 것이다. 파인만은 복잡한 방정식 대신 파인만 도형(Feynman
diagram)을 발명하여 양자이론을 설명하였다.

2. 전쟁 이후의 양자이론

아인슈타인은 보어와의 논쟁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지만. 보른에게

“우리는 정 반대의 과학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당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을 믿고 있고, 나는 사물의 세계 안에 실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완벽한 법칙을 믿고 있다. 나는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대단히 노력하고 있다.”

고 쓴 편지를 보냈다(1948).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양자론과 일반상대성이론
을 통합하여 실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완전한 법칙을 찾으려는 연구에 몰두했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관측하기 전에는 어떤 물체의 상태를 확정할
수 없다는 피라독스(paradox)에 빠뜨린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물질
이 고유한 주파수의 물질파를 방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물체를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실체를 관측하기 전에는 존재의 여부조차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의 인식능력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럼에도 양
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의 물질 개념을 수정하면서 과학의 지배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1951년 데이비드 봄(David J. Bohm, 1917-1992)이 『양자이론』을

출판하면서 EPR 역설 문제가 다시 불거지게 되었다. 봄은
이 책에서 앞에서 설명한 폰 노이만의 ‘숨은 변수 불가능성 증명’에 오
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알게 된 아인슈타인은 봄을 격려했다.
봄은 1952년 이와 관련한 3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문제를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했으므로 별다른 성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이미 노
쇠한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 사상 문제로 미국에서 추방된 봄에게 더
이상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에 다만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바꾸지 않고 현재의 양자이론에 단순히
무엇을 추가함으로써 그 이론에서 확률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고 토로했다.


아인슈타인이 EPR에서 ‘맞바꿈’ 이론으로 제안했던 물리량의 측정
문제는 보어의 반론에서 ‘단일 시스템적’ 상호작용의 개념을 유발하
였고, 슈뢰딩거가 이에 대해 ‘얽힘’ 문제를 재반론하면서 아무도 예상
하지 못했던 길을 개척할 기초를 마련해두었다. 이것들은 이후 양자
이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양자 얽힘’이라는 기묘한 현상을 내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98 그러나 당시에는 분리된 두 개의 입자 A와
B를 따로 잡아둘 방법이 없었으므로 실험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
다. 더욱이 논쟁의 당사자인 아인슈타인이 1955년에 죽은 이후로는
이와 관련한 연구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슈뢰딩거 혼자서 실재
의 문제를 논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슈뢰딩거도 1961년 죽었다.
1962년에는 보어도 죽었다. ‘얽힘’ 문제는 마치 보어와 아인슈타인 그
리고 슈뢰딩거의 관계처럼 얽힌 상태로 묻혀버렸다.

 

1964년에 ‘얽힘’을 풀어낼 양자론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노이만
의 ‘숨은 변수 불가능성 증명’과 이를 반박했던 봄의 논문이 모두 불
완전하다는 주장이 아일랜드의 존 스튜어트 벨(John Stewart Bell, 1928
1990)의 연구에 의하여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벨은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과 아인슈타인의 EPR 역설을 연구하여 그들 사이에 얽힌 문제점
을 모두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유명한 ‘벨 부등식(Bell’s inequality) 이
론’은 “EPR에 대하여”라는 그의 논문에서 주장되었다. 그의 ‘부등식
이론’은 EPR을 검증하여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의 핵심인 물리적
실재의 ‘숨은 변수’를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벨 부등식은 위치
나 운동량, 스핀과 같은 입자의 양자적 물리량은 개별적이 아니라 전
체가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벨은 두 개의 검지기를 사용하여 얽혀있는 전자쌍의 물리량을 측정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벨은 이 논문에서 관찰자와 상관없는 실재의 존
재와 국소성의 유지를 가정했다. 벨의 부등식 이론을 보면 아인슈타
인의 국소성 숨은 변수가 입증될 것이고 보어의 주장은 틀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직 실험으로 검증할 일이 남아 있었다.


한편 우주물질의 최초 입자에 질량이 부여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자들의 꿈이다. 그것은 바로 우주를 구성하는 모
든 힘을 알 수 있는 대통일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꿈에 한 발짝 다
가가는 ‘힉스 메커니즘 이론’이 영국의 힉스(Peter Higgs, 1929- )에 의
하여 발표되었다(1964). 힉스는 여기에서 표준모형의 게이지 대칭성
이 자발적 깨짐을 통해서 질량을 만들어내는 가상 입자의 존재를 예
측했다. 이 입자는 힉스입자로 불리게 되었지만,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서 ‘신(神)의 입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힉스는 그의 이론을 설

쿼크 이론

신의 입자

명하는

『신의 입자, God Particle』라는 책 이름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다.

이 무렵 미국의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1929- )은 물질의 기
본입자를 쿼크(quark)라고 명명하고 ‘쿼크 이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자신이 예측한 쿼크를 실제로 발견하기도 했다.


1972년에 광자쌍을 이용하여 벨 부등식을 검증하는 실험이 진행되
었다. 첫 편광 실험에서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반대로 나타났다. 처
음이라 신뢰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이후 여러 차례 장치를 개선
한 실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상호작용에 의해서 얽힌 양자 A
와 B가 측정하는 순간 서로 공간 이동한 것처럼 나타났다. 그렇지만
사실은 A의 상태가 B로, B의 상태가 A로 바뀐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슈뢰딩거의 말대로 양자의 ‘얽힘’에 의한 것이었고, 보어의 억지 주장
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상호작용으로 얽혔던 입자의 ‘얽힘’이
깨어지지 않는 현상은 아직 실험실에서만 관찰된 것이었다. 더 이상
의 실험을 진행하지 못한 벨은 1990년 사망하기 전에 ‘양자이론은 일
시적 처방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고 말했다.299 그렇다면 상호작용으로 얽혔던 두 개의 입자는 멀리 떨
어진 상태에서도 ‘얽힘’이 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실험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할 수 있었다. 왜
냐하면 상호작용했던 양자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둘 수 있는 방법
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자 얽힘’ 현상이 원거리에서도 유효하다
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실험결과가 2015년 10월 「네이처」지 및 국내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이 보도에 의하면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
카블리 나노과학연구소의 물리학자 로날드 핸슨의 연구팀이 주도하
고 스페인과 영국의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실험이 이루어졌다. 연구
팀은 델프트 대학 캠퍼스 내부 1.3㎞ 떨어진 거리에 두 개의 다이아몬
드를 배치하고, 각각의 다이아몬드 전자의 자기적 속성인 ‘스핀’을 측
정했다. 이후 마이크로파 펄스와 레이저 에너지로 ‘스핀’을 측정한 결
과 1.3㎞ 사이의 두 개의 전자에서 얽힌 결과가 도출됐다. 실험을 이끈
핸슨 박사는 “이 실험은 1970년 후반 이후 계속 수행됐으나 항상 추가
적인 가정의 필요성이라는 장애물이 있었다”라며, “이제 우리는 먼 거
리에서 양자 얽힘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이 EPR에서 제안했던‘맞바꿈 이론’은 보어를
반론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어는 BKS 이론에서 실패했
으나 아인슈타인은 EPR에서 실패했다. 보어도 양자 상태를 완전하게
설명하는 이론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이론은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잠정적으로는 승자가 되었다. 승자가 역사의 주도권을 잡게 되
는 사회적 법칙에 따라 이후 양자 이론의 세계는 죽은 보어의 왕좌를
그의 후계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보어의 후계자들이 그 왕좌를 언
제까지나 계속 차지할 수 있을까? 많은 과학자들이 불확정적인 확률
에 기반하는 양자물리학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도전하고 있다.
199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양자물리학 학술대회
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는 90명의 학자들 중에서 코펜하겐 해석에 표
를 던진 사람은 4명뿐이었고, 30명은 에버렛의 다중세계를, 50명은
판단유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새로운’ 양자 이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한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 실험 역시 

연구자가 실험에서 선택하는 측정 기준에 따라 실험 결과가 달라질 수 있 다

고 지적하면서 ‘측정의 임의성’을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을 광자에서 시작했고, 보어
는 전자를 중심으로 양자이론을 시작했다. 이것이 그들 사이의 생각
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아인슈타인은 측정의 교란에 의한 불확정성
은 점차 해소되리라고 믿었고, 관찰과 독립적인 실재의 국소성과 인
과성, 그리고 그의 상대성이론을 과학적 신념으로 가지고 있었다. 아
직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아무도 메워주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미묘
한 현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원자의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고리를 찾
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아인슈타인은 한때 고전물리학적 정상 우주
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상수(常數)를 하나 끼워 넣었다가
‘내 일생 최대의 실수였다’고 하면서 철회하는 해프닝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우주의 가속 팽창이 발견되면서 아인슈타인의 우주상
수는 다시 필요하다는 사실이 와인버그(Steven Weinberg, 1933-)에 의
하여 밝혀졌다.

 

양자 이론에서 측정의 교란에 의한 불확정성은 결국 관측 장비의
정밀도에 의하여 감소되어갈 것이다. 파동함수의 확률적인 불확정
성 또한 마찬기지 방법으로 감소될 수 있다. 어쨌든 아인슈타인은 죽
을 때까지 양자 이론의 완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생애
를 ‘숨은 변수’를 포함하는 대통일 이론 연구에 바쳤으나, 우리가 알
고 있듯이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 자신이 양자이론을 창시
한 사람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양자물리학은 이렇게 보
어에게도 아인슈타인에게도 쉽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일반인들이 쉽
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과학적 물질 개념이 발전하는 과
정에는 이런 우여곡절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양자 얽힘은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국소적 실재론을 뛰어넘
는 자연의 기묘한 양자적 현상이다. 이로 인하여 양자이론에 중요한
특성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양자 얽힘 현상은 양자세계가 근본적으
로 비분리적이며, 비국소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후 ‘초끈 이론’으
로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양자 얽힘에서 나타나는 정보 이동의 동
시성은 상대성이론에서 제한되었던 빛의 속도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
기하고 있다. 어쨌든 이제 ‘양자 얽힘’은 이론의 단계를 넘어 양자컴
퓨터, 양자통신망 등의 실용적 기술 개발에 이용되기 위하여 연구와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