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오파린의 [생명의 기원] 읽기

『생명의 기원』읽기-2(제1장: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

heojohn 2020. 4. 10. 00:53

 1. 생명의 기원을 둘러싼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

 

생명의 본질과 그 기원에 관한 문제, 즉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생물의 발생에 관한 문제는 자연과학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느끼든 못느끼든 간에 이 문제를 제기하고, 또 각각 어떤 방법으로든 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답 없이는 가장 소박한 세계관조차도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기원 문제는 이미 태고 때부터 사람들이 품어온 주요한 흥미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철학체계나 대철학자는 없었습니다. 다양한 시대, 다양한 문화의 발전 단계에 따라 생명의 기원 문제도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해 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두 개의 화해할 수 없는 철학의 진영 유물론과 관념론-의 치열한 사상적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주변 자연을 관찰할 때, 자연을 생물의 세계와 무생물의 세계 즉 무기계(無機界)로 나눕니다. 생물의 세계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동물과 식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부터 가장 작은 세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모든 생물에는 무언가 공통된 것이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서로 닮아 있기 때문에 가장 간단한 세균마저도 무기계의 어떤 것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우리들은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생명은 본질적으로는, 다른 세계 만물과 마찬가지로 물질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실험적인 방법에 의해서는 알 수 없는 무언가 영적인 본원의 것일까요?

생명이 물질적인 것이라면 그 법칙을 연구해서 생물을 의식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개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만약 생물이 영적인 본원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서 그 본성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들은-마치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일어난 현상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할 수도 없이-생물계를 다만 소극적으로 관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관념론자들은 생명을 무언가 매우 영적인 비물질적 기원의 것-‘영혼’, ‘세계정신’, ‘생명력’, ‘신의 이성-의 발현이라고 간주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물질 자체는 생명이 없는, 활발치 못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물질은 단지 생물을 구성하는 재료가 될 따름이며, 물질에 형()과 목적에 맞는 구조를 부여하는 혼()에 의해서 이 재료에 생기가 불어 넣어졌을 때, 이 생물은 비로소 출현하며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에 관한 관념론적 견해는 기독교, 유태교, 회교, 불교, 그 밖의 모든 종교 세계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다종다양하지만, 모두 최고의 존재인 신-이 점토로 되어있는 생명 없는 육체에 살아있는 혼을 불어넣으며, 그리고 이 영원한 신의 일부분만이 살아있어, 생물을 움직이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신의 일부분이 날아가 버리면 뒤에는 단지 텅 빈 물질의 껍데기-썩어서 분해된 사체-만이 남습니다. 생명-이것은 신의 현현이므로 인간은 생명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것을 지배하는 것을 배우는 것 따위는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에 대한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결론이며, 이 결론 이외에는 어떠한 종교적 학설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유물론은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생명의 본질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입장에 의하면 생명은 그것 이외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물질적인 것이며,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무언가 초물질적인 영적인 본원의 존재 등을 인정하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생명-이것은 물질의 특별한 존재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법칙에 따라 발생하고 법칙에 따라 소멸하는 것입니다. 생물계의 실천, 즉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은 우리들을 생명의 인식으로 이끌어가는 확실한 길입니다.

생명에 대한 학문-생물학-의 역사에서, 객관적 관찰과 실험 및 사회적 역사적 실천을 기초로하는 생물계의 유물론적인 연구방법은 극히 유용하며, 이것에 의해서 우리들은 생명의 본질을 완전히 밝히고, 생물계를 지배하며-사회의 건설자인 인류를 위해-생물계를 의식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생명의 기원 문제는 생물학의 근본문제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자연과학적인 기초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결과, 모든 종류의 관념론적인 사고방식의 은신처가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매일 모든 생물이 그와 비슷한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태어나고, 송아지는 어미소에게서 태어나며, 병아리는 암탉이 낳은 알에서 부화하고, 물고기는 같은 종류의 물고기 알에서 발생하며, 식물은 같은 식물에 열린 종자에서 싹틉니다. 그러나 언제나 태고 때부터 그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그 자신의 기원을 갖고있으며, 과거 어느 때에 출현한 것입니다. 모든 동식물의 선조는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거기에 출현 했을까요?

종교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다양한 생물은 모두 최초에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신의 이 창조작업에 의해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유성, 즉 지구 위에 현재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이 전부 완성된 형태로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창조작업에 의해서 최초의 인간이 만들어지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기독교도에게 매우 신성한 책-성경-에 의하면, 신은 전세계를 6일 동안에 창조했습니다. 그때 3일째에 식물이 만들어지고, 5일째에 물고기와 새, 6일째에 짐승이 만들어지고, 최후로 인간이 만들어졌는데, 먼저 남자가 만들어지고 이어서 여자가 만들어졌습니다. 신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생명이 없는 물질인 점토로 만들어, 그것에 혼을 불어넣습니다. 그럼으로써 아담은 생명을 얻습니다.

종교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동물과 식물이 완전히 조직화된 형태로 돌연히 발생했다고 하는 이런 소박한 이야기가 주위 자연에 대한 천박한 관찰을 무학·무비판적으로 해석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초 위에서 지구는 평면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면서 동쪽에서 떠서 서쪽 바닷속이나 산 너머로 진다고 하는 신념이 몇세기에 걸쳐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천박한 관찰은 다종다양한 생물, 예를 들면 곤충, 구더기, 물고기, , 그리고 쥐까지도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부터 태어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진흙, , , 그 밖의 살아있지 않은 물질로부터 자연발생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생물이 돌연 대량 출현한 것을 보고는 언제나 그것을 생명의 자연발생으로 간주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때때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구더기가 똥과 썩은 살 속에서 발생하며, 집에 있는 벌레는 쓰레기나 먼지 따위의 불결한 것에서 발생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먼지나 쓰레기는 벌레가 알을 낳는 서식처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서 낳은 알에서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이러한 천박한 관찰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인도, 바빌로니아, 이집트의 오랜 가르침은 구더기, 파리, 투구벌레는 똥이나 진흙에서, 이는 인간의 땀에서, 개구리, , , 악어는 나일강의 뻘에서 개똥벌레는 불탄 삼나무 껍질의 불티에서 자연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자연발생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종교적 전설과 구전설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생물의 돌연한 발생은 신이나 악마의 창조 의지가 나타난 특별한 경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유물론적 철학자들은 생물의 발생에 대한 종교적 설명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후의 세기에는 유물론에 적의를 품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관념론의 흐름이 발전하고 지배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에 의하면, 식물이나 동물은 그 자체로서는 살아 있을 수 없으며, 그것들에게 불사의 혼-푸시케-을 불어넣음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 생각은 우리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 문제의 그 후 발전에 커다란 부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은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속에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그 후 중세문화의 기초가 되어 거의 2천년 가까이 사람들의 두뇌를 지배해 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작 속에서, 생물이 자연발생한다고 생각되는 몇가지 경우를 기재했을 뿐 아니라, 이 현상에 어느 정도의 이론적 기초를 부여하였습니다. 생물은 다른 형태를 갖춘 물질과 마찬가지로 어떤 수동적인 본성-실질-이 능동적인 본성-형식-과 연관되어서 발생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생물의 형식이란 몸의 엔텔리키()입니다. 그것은 몸을 만들고 움직입니다. 이리하여 실질이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의해서 감싸져 있는 것이며, 목적에 따라 형성되고, 혼의 힘을 입어 조직화된다고 합니다. 혼은 물질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을 생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그 후 역사 전체를 통해 생명의 기원 문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후세의 철학파는, 그리스의 학파든 로마의 학파든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의 자연발생에 관한 생각을 거의 전부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돌연한 자연발생, 이 이론적 설명은 해가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되어 마침내는 신비적인 성격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성격은 기원 초에 신플라톤파에 의해서 부여되었습니다. 당시 널리 유행하고 있던 이 학파의 지도자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생물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생명을 부여하는 영혼에 의해서 물질이 혼을 받아들인 결과 발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력이라고 하는 개념은 플로티노스에 의해 비로소 분명한 모습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도 현대 생기론자(生氣論者)의 반동적인 학설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도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서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서 자료를 얻어 온 것입니다. 4세기 말기쯤부터 5세기 초에 걸친 신학의 권위자들, 소위 교부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신플라톤파의 학설과 결합해서, 그 기초 위에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한 자기의 신비적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개념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의 교리에 의해 완전하게 지켜져 왔습니다.

4세기 중기에 생존했던 주교 바실리우스[교회는 그에게 성도와 대제(大帝)의 위()를 부여하고 있다]‘6일간에 걸친 세계창조에 대한 교설 중에서, 대지는 신의 창조에 의해서 여러 가지 풀이나 나무, 그리고 또 메뚜기, 곤충, 개구리, , , 뱀장어를 그 안에서 만들어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실리우스는 신의 이 창조는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바실리우스와 같은 시대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유력한 권위자 중의 한사람인데, 그는 그의 저서 가운데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견지에서 생물의 자연발생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아우수그티누스는 생물의 자연발생은 신의 전능의 현현이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발생 때에는 활발하지 않던 물질이 생명을 주는 영혼이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혼의 종자에 의해서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발생설을 기독교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확립했습니다.

중세인들은 이 비과학적인 사고에 거의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중세에는 어떤 철학사상이건 신학의 외양 즉 교회의 어떤 교리로 은폐하고서야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과학의 문제는 뒷전으로 제쳐 두었습니다. 주변의 자연에 대해서 관찰과 경험을 기초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 저작의 여구를 기초로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수학, 천문학, 의학의 문제에 대한 극히 결핍된 지식만이 동양으로부터 유럽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매우 왜곡된 모습으로 유럽인들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설이 위험하다고 간주되었지만, 그 뒤 이 설이 자기의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연과학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선구자의 지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레닌의 예리한 표현에 의하면, 이때 스콜라 철학자와 승려계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은 것은 손에 넣었지만, 살아있는 것은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기원 문제를 통해서 생물의 자연발생설이 특히 급속하게 발전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자는, 이것의 본질은 생명을 갖지 않은 물질이 영원한 신의 영혼에 의해 생명을 주입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중세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실례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설은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유일한 진실된 철학으로 인정받아 왔던 것이며, 미합중국 및 영국의 반동적인 학자에 의해서 자기네 학문의 방패로 선택되었던 것 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저작에서, 생물은 생명이 없는 물질에 혼을 불어 넣음으로써 발생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개구리, , 물고기는 바다의 뻘이나 거름 흙이 썩을 때 발생한다고 되어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각에 의하면, 지옥에서 죄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벌레조차 죄가 부패한 결과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전체적으로 전투적 요괴학(妖怪學)을 지지하고 선전했습니다. 마왕은 악마의 전군 지휘관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를 기초로 해서 그는 인간의 건강을 해치는 기생충의 발생은 신의 지배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마왕과 그에 종속된 악마의 계략에 의해서도 새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나타난 결과가 중세의 수많은 마녀재판입니다. 그들은 밭에서 쥐나 그 밖의 해로운 동물을 쫓아내 작물의 결실을 망치게 했다 하여 재판에 회부되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반동적 학설에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생물의 돌연한 자연발생이라고 하는 독단적 원리를 세웠습니다. 그에 따르면 생물은 생명이 없는 물질에 영혼이 활기를 부여한 결과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정교의 신학 권위자들도 이 원리를 지지했습니다. 예를들면 피요트르 1세 시대의 생존했던 로스토프의 주교 드미트리는 현대의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기묘한 방식으로 이 원리를 그의 저서 속에서 고수하고 있습니다. 전세계에 걸친 대홍수 때, 노아는 그의 방주 속에 쥐, 두꺼비, 전갈, 바퀴, 모기와 같이 악과 멸망에서 태어나·····, 겅중의 안개에서 비롯한것들을 가지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한 생물은 홍수 때 전부 사멸해 버렸고, 홍수가 끝나고 나서 다시 그러한 물질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계나 그 밖의 모든 종교계에서는, 생물이 물질의 발전과는 전혀 무관하게 돌연히 완성된 형태로 자연발생적으로 신의 창조 행위의 결과로 발생했으며 현재에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계를 깊이 연구한 결과, 학자들은 생물의 이러한 돌연한 자연발생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더 고등한 생물, 특히 구더기, 곤충, 파충류, 양서류에 대해서 이미 17세기 중기에 증명되었습니다. 연구가 더욱 진행되자, 이것은 더욱 구조가 간단한 미생물에 대해서도 확인되었습니다. 이 미생물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도처에서 우리 주변의 흙, , 공기 속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생명의 기원에 대한 종교적 관념에 대해 더욱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졌습니다. C.다윈과 그 뒤를 이어 많은 학자들, 특히 K.A 디말랴제프, A.O. V.O 코발레프스키 형제, I. I. 메체니코프, 그 밖의 소비에트 러시아의 뛰어난 연구자들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달리 현재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동물이나 식물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유성에 영원한 옛날부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주었습니다. 가장 진화한 식물과, 인간을 포함해서 가장 진화한 동물은 지구상에 돌연히 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유성이 출현한 뒤로부터 오랜 세월을 거쳐 구조가 간단한 생물이 연속적으로 진화해 온 결과 비로소 발생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가장 구조가 간단한 생물에 도달했습니다.

수백만년 전에 지상에 살고 있던 동식물의 유해가 발굴된 것을 연구해 보면, 그 즈음 지상에 살고 있던 생물은 오늘날의 것과는 다른 것이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생물은 점차 단단해지고, 종류도 점차 적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연속적으로 내려가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옛날의 생명을 연구해 가면 마침내는 현재의 미생물과 비슷한, 그때의 지구에 오직 홀로 서식했던 가장 간단한 생물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생물계의 가장 간단한 것의 최초의 출현, 즉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의 조상의 발생에 대한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됩니다.

물질계의 발전이라는 구체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생명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 의견을 타파한 자연과학은, 그와 동시에 살아있지 않은 물질로부터 생명에로의 이행, 즉 생명의 발생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F. 엥겔스의 천재적 저작 반듀링론』 『자연변증법에서, 과학의 진보가 훌륭하게 일반화되어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른 과학적 제기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엥겔스는 이 방면의 과학적 연구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소비에트 생물학은 이 방향에 따라 진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엥겔스는 자연의 진화라는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생물의 발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척하고, 생물계와 무생물계는 통일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과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그는 생명을 물질 진화의 산물, 역사적 조건과 생명 출현에 선행하는 시대에 자연의 끊임없는 변화에 의해 준비된 물질의 질적인 개조라고 간주했습니다.

18세기 러시아의 뛰어난 자연과학자 M. M. 톌레호프스키는 생물의 자연발생에 대한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의하여 예리하게 비판한 반대자의 한 사람으로, 이 문제에서 유물론적 방침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비과학적 관념의 포로가 되어있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많은 학자들은 현재 생물학의 업적을 돌아보지 않고 생명발생의 문제를 '인간 두뇌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저주 받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이다'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은 외국의 생물학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생명에 대한 반동적인 관념론적 견해가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는 전 소비에트농업과학아카데미의 8월 대회(1948)에서 T. D. 루이센코의 생물학에 있어서의 입장에 대하여라는 강연 속에서 훌륭하게 폭로되고 있습니다.

생활 과정에 있어서도 변화를 받지 않는 특별한 '불사(不死)'의 물질(배아형질)이 존재하며, 그것이 유전이나 생물의 다른 특성의 보유자라 하는 와이스만주의의 입장은 생명의 기원 문제를 왜곡하고 있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화적인 유전 물질은 영원한 존재로서 발전을 알지 못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유체를 지배한다고 하는 와이스만적인 특징을 부여받고 있다"T. D. 루이센코는 말하고 있습니다.

와이스만주의의 신비설을 지지하고 있는 모건학파의 유전자 '학설'은 유전자에, 생체의 자기재산-유전-에의 결정적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즉 모건 학파가 유전의 출발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의 최초는 어떻게 해서 발생했던가를 성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고 있는 많은 부르조아 학자들(예를 들면 프랑스의 데빌리에, 혹은 미국의 알렉산더)은 이 문제를 극히 단순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의 각 원자의 '매우 요행스런' 결합에 의해서 유전자의 분자가 완전히 우연히 발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 원자는 '저절로' 더욱이 돌연하게 생명의 전 성질을 갖는, 유전자 물질이라는 매우 구조가 복잡한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행한 기회'는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지구가 발생한 뒤로 단 한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이 단 한번 발생했던 영구불변한 유전자 물질의 부단한 증가가 보일 뿐입니다.

'설명'은 결국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외 없이 모든 생물의 특성이란, 생물의 내부구조가 일정한 생명현상, 즉 영양, 호흡 등이 일정한 생존조건에서의 생장과 생식의 실현을 위해 매우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형태, 가장 간단한 생활형태에 있어서조차 특징적인 이 내적 적응성이 이러한 요행한 기회에 의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앞에서 말한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기원 과정의 합법칙성을 비과학적으로 부정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유성의 생명에게 가장 중대한 이 사건을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답할 수 없었으며 신의 최초의 창조의지 혹은 생명 창조의 일정한 계획이라고 하는 가장 관념론적인, 신비적인 관념으로 전락해버리고 있습니다.

현대의 부르조아 과학은 승려계급과 신앙철학에 새로운 논증을 부여하고 있지만 이것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폭로할 필요가 있다A. A. 쥬다노프는 말했습니다. 최근 출판된 슐레딩거의 저서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미국의 생물학자 알렉산더의 저서생명, 그 본성과 기원, 그 밖의 많은 부르조아 학자의 저서에서, 생명은 신의 창조 의지의 결과로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당당하게 긍정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멘델-모건주의는 관념론에 대한 생물학자의 투쟁에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해제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멘델-모건주의는 생명의 기원 문제-이 가장 중대한 세계관적 문제-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단정을 우리는 올바른 과학적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쉽게 타파해 버렸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생명은 본질적으로는 물질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모든 물질 일반이 반드시 갖추고 있는 특성은 아닙니다. 반대로 생명은 오직 생물에만 존재하고 있고, 무기계의 대상이나 물질에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것은 물질운동의 특수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형태는 영원한 옛날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또 생명은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에 의해서 무기물질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세계의 진화과정에서 이 물질로부터 새로운 질()로서 발생했던 것입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물질은 한 순간도 정지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운동하고 발전하며, 그 발전 과정에서 점차 높은 단계로 올라가 점점 복잡하고 완전한 운동형태를 획득해 갑니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상승해가면서 물질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질을 획득합니다. 생명은 물질의 역사적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와 같은 새로운 질입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우리를 확실하게 생명의 기원 문제의 해결로 인도할 근본적인 길은 물질의 발전 역사를 연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발전이야말로 새로운 질의 발생으로, 즉 생명의 발생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돌연한 자연발생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증명하려고 했던것과는 달리, 돌연하게 발생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간단한 생물조차도 매우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돌연히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조가 가장 간단한 생물조차도 그 발생의 근원인 물질의 끊임없고 아주 오랜 변화의 길을 거쳐 형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매우 오랜 것으로, 지구가 출현했던 첫 시기 지구 형성 때에 이미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문제를 바르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화를 연구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명의 진화적 발생에 대한 깊은 사상을 우리는 V. I. 레닌의 저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지구상에 인간과 그 밖의 어떠한 생물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던 상태가 있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고 그는 쓰고 있습니다.

금세기 초, I. V. 스탈린은 그의 노작 무정부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에서 유물론 학설의 기초를 설명하고, 생명이 어떠한 진화의 길을 거쳐 발생했는가를 완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지구가 이전에 새빨갛게 작렬하는 불의 물질이었다는 것, 이어서 지구가 점차 식었다는 것, 그리고나서 식물과 동물이 발생했다는 것, 생물계의 진화 결과 일정한 종류의 원숭이가 출현하고, 이러한 것이 전부 일어난 후에 잇따라 인간의 출현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자연의 진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고, 자연과학자들 사이에 (진보적인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조차)생명의 기원 문제에서 기계론적 원칙이 지배하고 있던 때에, I. V. 스탈린에 의해서 진화의 길이 제시되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1910년대에 지금부터 우리들이 연구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한 진화적 태도가 자연과학에서 가까스로 주목할 만한 발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특히 여기에서 우리들의 탁월한 동포 디밀랴제프의 발언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논문 1912년의 과학 연대기에서속에서, 생명의 기원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그 밖의 모든 물질과 정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물질은-진화에 의해서-출현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화의 가설그것은 현재 단지 생물학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자연과학-천문학, 지질학, 화학, 물리학-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아마 무기물의 세계로부터 유기물의 세계로 이행할 때에 관여했을 것이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의 업적 중에서 특히 아카데미 회원 V. L. 코마로프의 저작 식물의 기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명은 영원하며, 위성간의 공간에서 지구상의 우리들에게 생물의 종자가 날아왔다는 학설을 연구한 결과 그것을 부정하고, 코마로프는 생명의 기원을 생화학적 학설, 즉 생명의 발생은 물질의-일반적 진화, 질소의 탄소화합물의 긴 계열의 진화에 있어서의- 연속적 단계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는 깊은 확신이야말로 유일하게 과학적인 것이다고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물질의 진화적 발전의 원칙은 소비에트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의 많은 자연과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국가의 많은 연구자들은 생물 출현에 선행한 물질의 진화시대에 대해서만 이 원칙을 적용할 따름입니다. 문제가 물질의 역사적 발전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르면 그들은 어떻게든 이전의 기계론적 입장, 마침 경우가 좋은 우연성혹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물리적인 힘 때문에 생물이 발생했다는 입장으로 전락해 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의 자연과학 앞에는 생명의 기원 문제에 관해서 세가지 과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째, 최초의 생물 발생을 가져온 물질의 연속적 진화를 정확하게 묘사할 것. 둘째,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을 기초로 해서 물질의 역사적 발전의 각 단계를 완전히 분석할 것. 셋째, 진화의 과정에서 차례차례 발생해 오고 그 스스로 생명의 형성을 확정한 법칙을 밝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