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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고찰

heojohn 2020. 3. 29. 13:02

 

조나단 에드워즈

 

                                                                                                허 정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

 

Abstract

 

The suggestion that the end of God's Creation is "for the glory of God" has been broadly supported so far. But the words, "for the glory of God" as the end of God's Creation was transformed from the end of man's life for the "glory of God" in the 1st article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It may be not wrong to say that the end of life of Man the creature should be the same as the end of the Creation of God the Creator. Nevertheless, the assertion that they should be the same is not unreasonable. According to the Genesis, Adam the creature committed sin of disobedience to God and he was banished from Eden. This event makes it hard to say that the omnipotent God's creation was successful. Then, why is it that christians mention the "glory of God" even though He was not so successful in accomplishing of the end of His creation?

Famous American theologian Jonathan Edwards asserts that the end of God's Creation is the "glory of God" by using reasoning and citing the Bible in His book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 If one intends to suggest the "glory of God" is the end of the omnipotent God's Creation, there must be a huge presupposition here: the Creation by good God should be perfect without affliction on the creature. Also this question should be answered: Why have humankind had suffered from the original sin of Adam after being created? These questions should be reviewed in order to understand the "glory of God" properly in Edwards' book. For it is not allowed that the tribute of the "glory of God" is understood as meaningless words.

The book has won best praises for the times. I have researched carefully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by Jonathan Edwards. He endeavors to analyze the issues from multi-angles by using Bible and philosophical thinking and reasoning. The demonstrations of research on the book can be summarized as two. First is to criticize Edwards' view that the "glory of God" as the last end of God's creation may not be the same as that of Jesus Christ's ministry. Second, the book is proved as an unfinished work by Edwards, and that makes it hard to overestimate the theological value of his writings on the "glory of God" in the book. These two proofs functions as a guide to underst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 biblical "glory of God" and the "glory of God" of Edwards.

 

 

1. 서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대개 이사야 48:11과 고린도전서 10:31 및 웨스트민스터 대, 소요리문답 제1에 바탕을 두는 대답이다. 그런데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이사야 43:7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음을 선포한 말이며, 고전 10:31과 영국 장로교회에서 1643-47년 사이에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대, 소리문답 제1조는 다만 사람의 삶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인간에게 적용한 말을 하나님 쪽에다 옮겨놓은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주장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해도, 현대 일반인들에게는 많은 도전적 질문이 제기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인식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인간의 삶의 목적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필연적인 당위성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피조물인 인간의 삶의 목적을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 두 가지의 목적이 결국에는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기독교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에 의해 가장 잘 연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논증하는 대표적인 명저로 꼽히고, 이제는 기독교의 유명한 고전이 되어 있다. 에드워즈는 그의 책에서 철학적 논증과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철저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를 하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이론(異論)이나 반론(反論)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기독교 내에서는 인본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부딪쳐 그다지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나, 헬라 철학의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서, 가장 오래된 주장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조나단 에드워즈와 비슷하게 선포적인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주장하는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그의 책에서 이 주장을 그의 주장과 비교하여 소개하고 있다.

로버트 L. 레이몬드(Robert L. Reymond)는 그의 최신 조직신학에서 에베소서 3:9-10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빛나는 많은 지혜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영역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에게 알려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이 해석에서 레이몬드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사역 자체가 창조목적이며, 그것이 하늘의 영역에도 효력을 미치게 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하늘의 영역에 있는 존재를 위해 땅에 있는 것들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땅의 존재가 하늘에 있는 존재를 위한 도구적 목적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을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죽게 까지 하신 하나님의 구원섭리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결국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대해 연구해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주 하나님을 위한 것이든지, 피조물 인간을 위한 것이든지, 아니면 제3의 천상의 존재들을 위한 것이든지, 또는 이 셋을 이리저리 조합하는 것들 중의 어느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창조자와 피조물의 존재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지 못하며, 따라서 다른 어떤 창조목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어쨌든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대한 기독교의 주류적 견해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이 잠복해 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완성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으로 신음하는 피조물 앞에서 창조자의 영광을 자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조 이후 피조물에게 고통이 과연 없었는가?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8:22)고 말했다. 또 그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13)고 말했다. 또 그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6:23)이라고 갈파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 인간에게는 이미 아담의 죄성(罪性)이 유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에게 범죄한 삯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인간은 죽음의 길에서 방황하는 죄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남으로써 죄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의 영적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로 되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인간이,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야 하는 필요성이 나타난다.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주장한다면,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논증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피조물적 속성만을 가진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하위의 존재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를 하셨다면, 타락 이후에도 이 땅에서 최고의 지성적 실존(實存)으로 군림해오고 있는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많은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그의 창조목적에 따라 태초의 창조와 창조 이후에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를 성경에서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역사적이 사실로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도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논문에서 수행하는 연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의 제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아담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지명령에 불순종하는 사건을 어떻게 저지를 수 있었단 말인가? 결국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자손들에게서 그의 영()을 거두어버리셨다(6:3).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고, 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담이 그렇게 하도록 계획 또는 방임하셨던 것인가? 하나님은 죄인이 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시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관한 주장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에 연구의 범위를 한정한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서적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2.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의 내용

 

이 논문의 전개를 위해서는 먼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론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관련하여 용어의 개념을 정의하고 1부에서는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고찰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한 성경적 고찰을 서술하고 있다.

 

2.1 용어의 설명과 정의

 

에드워즈는 서론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의를 세심하게 마련해놓고 있다. 그는 9가지 요점에서 차례로 용어를 나열하고 복잡하고 장황하게 철학적 의미를 붙여서 설명하고 있지만, 오히려 혼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여기에서 에드워즈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최고chief의 목적궁극적ultimate 목적을 구분해야 하며, 최고의 목적은 언제나 궁극적 목적이지만, 궁극적 목적이 언제나 최고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최고 목적은 하위inferior목적에 대한 반대 개념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종속적subordinate 목적에 대한 반대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2.2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 대한 이성적 고찰

 

에드워즈는 2부에서 4개의 장에 걸쳐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을 철학적 이성의 논증의 방법을 통해서 찾아보고자 하는 그의 특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존 파이퍼(John Piper)에 의하면, 이러한 고찰은 에드워즈의 결론이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철학적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에드워즈는 모든 진리가 하나며 이성이 진실하게 가르쳐주는 것과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또한 이성은 결함 있는 안내자이긴 하지만, “계시에 대한 반대에 대해 답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인간의 이성에 신뢰를 나타낸다. 그의 이성적인 고찰을 살펴보면,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하고 있다.

 

(1) 이성적 진리

에드워즈는 이성적 관찰을 거쳐 이성적 진리6가지를 제시하는데, 그러한 진리의 바탕은 하나님은 무한하며, 영원하며, 불변하며 독립적인 영광과 행복을 가진 분이라는 것은 성경과 이성 모두에 의해 명백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거나 유익을 받을 수 없다는데 있다. 이 말의 요점은 그의 설명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먼저 제공해주지 않은 어떤 것을 피조물로부터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결론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결국 에드워즈의 이성적 고찰에서, 하나님이 최고로 존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창조의 최상의 목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제시하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2) 추정

또한 에드워즈는 그의 이성에서 합리적으로 천지창조목적이라고 추정한 네 가지를 제시한다. 그 요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실제적 결과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첫째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지혜, , 선하심 등을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어졌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이 피조물에게 알려지고 보여지는 것은 창조목적으로 합당하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알려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존중받아야하고, 또한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넷째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무한한 충만과 영광스러운 속성의 발산이며, “이런 발산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서 천지창조의 목적으로서 의도된 것이었다고 추정될 수 있다.”

 

(3)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된 인간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은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성향으로 호의 또는 사랑을 피조물에게 전달하기 위해 피조물에게 실존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엄격하게 특정한 대상을 향해 선을 나누어주시려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가장 엄밀하고 정확한 의미에서 적어도 생각이나 기대에 있어서 사랑받는 대상의 실존을 전제한다.” 그것은 마치 자비가 비참하게 고통 받고 있는 대상의 실존을 전제하는 것처럼 사랑 또는 호의도 엄격하게 말해서 존재하는 대상을 전제로 한다.” 이 말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는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임을 전제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자신의 영광의 발산과 지식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신 창조사역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하심의 표현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심으로써, “자신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신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은 확산된 자신 또는 발산된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성향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신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영광이 발산되는 것을 기뻐하는 경향이 있으시다.” 이러한 발산을 통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창조의 목적으로 삼으신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지식과 거룩함을 전달하고 나누시기 위하여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러한 지식의 대상이며, 피조물 안에 있는 이러한 거룩은 모든 참된 덕을 포괄하는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복을 나누는 것 또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행복은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은 찬양의 일부가 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충만의 각 부분, 즉 신적인 것 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은 피조물에게 전달되며, 피조물은 이러한 전달의 비율에 따라 하나님과 일치하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정도가 정해진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생각은 창조에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동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5) 성도와 만물에게 자신이 창조의 최종목적임을 보여 주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나누어주심이 피조물에게 증가될수록 피조물은 점점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연합은 더욱 단단해지고, 형상은 더 완전해져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완벽한 연합에 더 가까워질 것으로 본다. 그는 이에 대해 요한복음 17: 21-23을 인용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

여기서 에드워즈의 관점은 하나님이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성향으로 인하여 천지창조를 하셨지만, “모든 피조물의 목적으로 간주될 선택받은 피조물(성도들)은 영원한 지속과 하나님의 목적의 측면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의 관심은 성도의 하나님과의 연합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 자신의 관심이 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지금까지 말한 것들에서 만물이 첫 번째 원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상을 보여준다. 또한 만물이 하나님께로 가며, 영원토록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점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만물의 최종목적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6) 이성적 반대와 답변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의 최종목적으로 삼으시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그의 추정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이성적인 반론과 그의 이성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그는 네 가지 반론을 가정한다. 그리고 스스로 답변한다.

 

반대 1 하나님은 이미 가지고 계신 것 이외에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창조를 통해 무엇을 더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반론은, 영원 전부터 자존하시며 절대적으로 완전하시며 무한하고 절대적인 독립성과 불변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게 피조물이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자기충족성에 어떤 결여를 의심하게 되면서 제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흘러넘치는 자신의 모든 탁월성의 충만을 피조물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본성적으로 기뻐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사역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에게는 변화나 승계가 없다.” 에드워즈의 또 다른 대답에서는, “하나님은 그 목적 자체를 위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행사이다. “하나님의 의지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의 행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모든 것이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스스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반대 2 이 반대는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의 목적으로 한다는 에드워즈의 주장이 하나님을 이기적으로 보이게 하며, 하나님을 불명예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한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이기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시는가?

에드워즈는 이 반론에 대해 에드워즈는 몸의 머리와 심장의 유익이 몸의 유익과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유익이 우주의 유익과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 반론은 최고의 존재이시며, 전체의 창조자이며, 주관자이시며, 다른 모든 것이 그에게 의존하며, 존재의 원천이며, 전체에게 유익이 되는 분에게는 적용될 수가 없다.”

 

반대 3 하나님이 사람들의 찬양과 박수를 받기 위해서 사역을 하신다는 것은 천박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무한히 낮은 존재들의 찬양을 추구하는 것은 합당치 않게 보이지 않는가?

에드워즈는 이 반론에 대해 이렇게 답변한다. “아주 존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자신보다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 행한 평가라 할지라도, 그 평가가 현명하고 정당한 것일 때 이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그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위대성이라기보다는 오만하고 비열한 정신이다.” 또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확산과 표현으로서의 찬양을 탁월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룩과 사랑이라고 답변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의 본질, 특히 위대한 사랑의 본질상 사랑하는 자는 그에게 사랑받는 자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존중도 가치 있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피조물의 사랑과 존중으로부터 기쁨을 취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피조물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의 당연한 귀결이다.”

 

반대 4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자유롭게 자기목적을 위해 행하실 뿐인데 피조물들이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의무는 별로 없지 않은가? 최소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의무를 경감시켜도 좋을 것이다. 이 반론에 대해 에드워즈의 답변은 하나님은 피조물들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뜻대로 창조를 하셨다. 피조물은 하나님 자신을 확장한 것이며, 은혜를 줄 대상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모든 우주적 실존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피조물과 사실상 일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실상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 전체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피조물을 위해 하시는 것이 된다.

 

결국 에드워즈가 이성적으로 추정하고, 그에 대해 이성적으로 질문을 가정하고, 또 그에 대해 이성적으로 답변한 이 네 가지 이외에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창조목적을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질문들에 대해서는 에드워즈 스스로가 잘 답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이성적 고찰의 과정은 그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한 마디 말에 압축하기 위한 예비 작업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의 진술과 용어의 사용에 불분명하고 모호하며 난해함과 동의할 수 없는 불완전함이 있다 할지라도.

 

2.3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 대한 성경적 고찰

 

그의 이성적 고찰에 이어서 성경적 고찰을 살펴보는 2부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경적 사례에 대한 구절의 인용과 해설이 제시된다. 그는 성경을 계시의 안내자로 삼으라고 하면서, 성경구절들을 예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제시한 성경적 고찰이란, 그가 이성적 고찰에서 제기한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성경구절의 인용과 해설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그의 책 2부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사역 및 이스라엘의 행위,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및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사례별로 인용하여 해설하고 있다. 이를 더 짧게 요약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사역을 하셨고,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면이 제한된 이 논문에서 에드워즈가 성경적 고찰에 인용한 구절과 해설에 대해서는 검토를 생략하고 곧 바로 비판적 고찰로 넘어가도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도 논증의 전개에 별 다른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26장에서 제시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는 에드워즈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며, 그의 논증에 중대한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으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2.3.1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약에서의 히브리어 kabod와 신약에서의 희랍어 doxa를 정의해놓고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 말은 보통 영광glory”으로 번역되며, 문맥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때로 어떤 내적이며, 고유한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러한 내적 영광의 발산emanation, 전시exbition, 전달communication을 의미한다. 때로는 전시된 것을 보거나 전달 받은 사람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전적으로 이 말에는 찬양”, “좋은 말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에드워즈도 이런 의미로 하나님의 영광을 진술하고 있다.

헬라어 doxa는 본래 견해opinion”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면 이해에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로서 영광은 명사로서 글자 그대로는 빛나는() ()”이라는 뜻이다. 이는 타인의 찬사를 받는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자에게 주어지는 명예(名譽) 또는 영예(榮譽)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영광은 견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이란 말은 견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양자(兩者)의 관계가 반드시 필요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영광은 먼저 이를 나타내는 주체가 필요하며, 주체가 나타낸 영광을 보고 찬양이나 경배를 드릴 타자(他者)가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런 양자의 관계는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도덕적 존재로 나타난다. 에드워즈에게 도덕적 존재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영광이라는 말은 객관적으로 찬양받을 수 있는 위대한 존재 이외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경에서는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삼위일체의 제2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쓰기도 한다. 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이름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과 자주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74:7)이 된다. 그리고 지성소는 하나님의 이름또는 영광의 보좌라고 불리기도 한다(14:21).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29:43)”고 선포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실재를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뜻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 이외에는 매우 부정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로 쓰이게 된다.

 

2.3.2 하나님의 영광의 정의네 가지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을 네 가지로 분류하면서 정의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정의는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가 스스로 제시한 해석의 틀이다.

 

영광의 정의 1. 영광은 내적인 탁월함을 의미한다

영광의 정의 2. 영광은 전시, 혹은 발산을 의미한다

영광의 정의 3. 영광은 탁월한 관점이나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영광의 정의 4. 영광은 찬양을 포함한다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성경적 사례와 해설적 진술을 분류하면, 결국 이 4가지 정의에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정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에드워즈의 성경 이해에 신학적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진술하고자 한다.

 

3.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비판적 고찰

 

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논증하기 위하여 이성적 방법과 철학적 수사와 그리고 수많은 성경 인용을 통하여 그의 주장을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하지 아니할 수 없는 필자로서는 이 소논문에서 중요한 것 세 가지만 논의하고자 한다.

 

3.1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에 나타난 문제점과 새로운 제안

 

하나님과 관련하여 영광이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의 개념은 대개 전통적인 개신교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대, 소 요리문답서 제1조에 의해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해석에도 별 이의 없이 동의한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진술하면서 이런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에드워즈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1에서 영광의 정의4까지, 그가 제시한 정의와 분류에 따라 그가 인용한 구절들을 자세히 살피고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 필자는,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1. 영광은 내적인 탁월함을 의미한다에서 내적인 탁월함영광의 정의 3. 영광은 탁월한 관점이나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에서 탁월한 관점이나 지식등은 어떤 탁월한 자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같은 뜻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광의 정의1영광의 정의3은 사실상 영광의 정의2. 영광은 전시 혹은 발산을 의미한다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의 내적인 것은 외적으로 발현되고 타자에게 전달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에드워즈의 결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광은 내적으로 감추어져 있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타자에게 알려지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내적인 영광은 외적으로 전시되고 발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영광의 정의는 두 가지만 남게 된다. 첫째는 영광의 정의2. 영광은 전시 혹은 발산을 의미한다이고, 둘째는 영광의 정의 4. 영광은 찬양을 포함한다이다. 다시 말해서,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는 하나님 스스로의 영광과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광이라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의 관점은 페커(J. I. Packer)에 의해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페커의 관점에서 에드워즈가 성경에서 인용한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한 구절들을 검토하고 나서, 필자는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의미이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재분류할 필요성이 있다고 제안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해석하는 그의 영광의 정의에서는, 필자가 다음에서 새롭게 제안하는 성경적 하나님의 영광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제안에서의 “(3)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영광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2 성경적 하나님의 영광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제안

 

1. 하나님 스스로의 영광: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1.2.3.

(1) 내적 영광: 창조자의 탁월한 권능과 사역의 영광

(2) 외적 영광: 피조물에게 전시되고 발현하시는 영광

2.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광: 에드워즈의 영광의 정의4.

(1)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기뻐하는 찬양

(2)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와 헌신과 기도 등

3.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영광

(1) 세상적인 영광: 권세, 재능, 물질적 부()의 영광 등

(2) ()적인 영광: 부활의 생명, 영생, 고난의 영광 등

 

특히 3. (2)항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신적인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을 누락시킨 에드워즈의 문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에 종속적으로 보는 견해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뒤에 3.3 항에서 다룰 것임). 왜냐하면, 에드워즈에게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광의 정의에 종속적 목적을 포함시킬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하기 위한 사역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영광”,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신적인 영광: 부활의 생명, 영생, 고난의 영광 등을 포기할 수 없다.

 

3.3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고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광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가지고 계시는 것으로 진술하는 에드워즈의 견해는 맞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가지신 것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에 대해서만 영광의 정의에 포함함으로써 그의 하나님의 영광은 신학적 진술로서 완전한 것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시는 영광을 구하라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그의 영광의 정의에 이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하나님의 영광은 부활, 곧 거듭남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언급한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의 최종적인 저작에서의 영광의 정의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든지, 아니면 실수로든지 이를 넣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언급된다면, 특히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 언급된다면,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으나, 이 소논문에서는 이에 대해 간략하게 진술하고자 한다.

 

3.3.1 세상적인 영광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은 주로 왕에게 하나님이 영광을 주신다고 말했다. 이런 영광은 왕권과 부를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왕이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주시는 것을 영광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영광은 직분을 수행할 권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는 이방의 왕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이나 그가 하신 일을 보면, 인간의 권세나 재능이나 물질적 부의 영광은 보잘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관련해서는 긍정적으로 쓰이며, 인간에게는 제한적 또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영광이라는 말을 같이 써서는 안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에드워즈는 예수께서 누가복음 12:27에서 하시는 말씀을 인용한다.“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3.3.2 신적인 영광

 

하나님에 관련해서 영광이란 말은 성경 곳곳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는 말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신적(神的)영광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신적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 부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고난 등을 말한다. 이러한 뜻의 하나님의 영광은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주로 나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 영광을 가장 강조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적 영광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사례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1) 나사로에게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요한복음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는 나사로가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예수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도 즉시 움직이지 않으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1:4). 그리고 이틀을 더 지낸 다음에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집으로 간다. 그것은 병든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그를 다시 살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이런 계획이 있었음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0)”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증명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부활의 생명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해 보여주시는 권능의 표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고 하신 말씀에서 이러한 사실은 잘 입증된다.

이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사역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창조자라고 표현함에 있어서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히브리어 “bara”에는 무에서 창조뿐만 아니라, 있는 것을 재생시키다는 뜻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죽은 생명을 재생시키는 부활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다시 암시된다. 나사로에게 일어난 부활은, 비록 완전한 부활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음으로 주실 영생의 부활을 예표(豫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그의 영광인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신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한 강조점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구하라고 가르치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제까지 검토했던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과는 그 의미를 사뭇 달리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는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영광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배신자 가룟인 유다를 내보내신 후에 즉시 만찬설교를 시작하신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13:31-32)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영광은 부활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영광은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 즉 십자가의 죽음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고난 등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이다.

 

(3) 제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는 만찬기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만찬설교에서와 같이 영광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17:1-2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이 구절은 원래 각주에서 인용한 영어본문과 같이 두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영어본문과 같이 읽어야 그 뜻을 잘 알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이 땅에서의 사명이 완성될 때가 왔음을 먼저 말하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중심어가 되는, “아들을 영화롭게 해주십시오(Glorify Your Son)”라는 간구에는 두 개의 목적절(that 이하)이 붙어 있다. 두 개의 목적절은 그의 사명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보여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첫째는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은 이 세상에 아버지의 사랑과 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그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누구나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곧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뜻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또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살펴보자.

 

17:4-5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영광)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구절에서 영화롭게 하다는 동사는 영광을 주다와 동의어적 의미이므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이 쉽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영광을 주다는 뜻은 생명을 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영광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생명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아들은 그의 지상적 생명을 바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룰 때가 왔으니, 아버지는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졌던)을 주실 것을 간구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결국 예수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영광은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완수한 그의 지상적 생명이고,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을 영광은 부활을 통해 다시 받게 되는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이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은 그의 공로를 제자들에게 돌리면서 그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들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아버지가 창세전부터 주신 영광을 그런 제자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는 기도로 이어진다.

 

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영화롭게 되었)나이다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 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4) 하나님에게 구하는,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분명히 구분하시고, 사람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행위를 질책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라고 가르치신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4).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주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빠져 있다. 바로 이점에서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영광신학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았다.

누가복음 11:9-10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개방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죄에 빠져 있던 자기의 옛 생명을 버리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 즉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이다. 예수 리스도가 가르쳐주신 이 복음을 믿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어야 한다.

사도요한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공회로부터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관리들을 향해,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12:43)고 힐책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세상의 영광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라고 가르치고 계심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었을 뿐이지만,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도 주시므로, 구해서 가지라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만의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도 있는 것이 된다. 마태복음 6:2에서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가르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추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19:30)고 하신 말씀을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계시하신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21:6-7)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에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영원한 생명이 포함되어 있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드리는 찬양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새 생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굳이 인간이 드리는 영광을 바라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그의 영광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에 맞게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0:31에서 바울사도가 하신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Therefore,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soever you do, do all to the glory of God”의 이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영원한 생명)을 얻 위해 하십시오라고 의미를 확장 해석해야 한다. 이 말에 대해서는 바울의 메시지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도록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로 이해해야 한다.

 

3.4 주기도문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에드워즈는 또 그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주장을 성경적으로 논증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인용한다. 그는 주기도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기도의 첫 번째 간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는 성경언어에서 이름이 영광을 받으옵시며와 동일하다고 지적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도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첫 번째 간구 제목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심에 따라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또 하나님의 영광주기도의 알파와 오메가이므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창조목적인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전반부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 나라의 임함과 뜻이 이루어짐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기도의 끝에 나오는 송영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과 병행 구절을 이루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보면, “영광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하나일 뿐이다. 이 세 가지 요소에서 나머지 것이 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영광이라고 하는 한 가지 요소만 창조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아무래도 이 세 가지를 다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송영에서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미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가지고 계신 영광을 피조물에 의해 더 완성해야 할 필요가 있으시단 말인가? 하나님은 이미 충족하신 분이시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한다고 에드워즈 자신이 이미 말했다. 또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도 그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신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는 점에서 볼 때, 에드워즈의 해석은 아무래도 앞뒤의 말이 맞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뜻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적은 바라고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역의 목적을 이루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아니한가? 따라서 주기도문에 의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진술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하늘에서 이미 다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다만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얻어 하늘에서 누리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에는 이러한 뜻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처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한 마디에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알파와 오메가를 다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3.5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종속적 목적인가?

 

여기서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주장하는 에드워즈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속사역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전달 추구와는 일치하지 않고 단지 종속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를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보고 비판하고자 한다. 이 말에 이어서 그는 그러나 요한복음 316절과 같은 표현은 다른 생각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요한일서 4:9-10과 에베소서 2:4를 더 인용하고 있다. 이에 더해 에드워즈는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유익과는 전적으로 다른 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그 사랑은 엄격하고 정확하게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다른 궁극적 목적에서 종결되고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그는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유익이 전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수단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유익이나 선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에드워즈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각각의 사역에서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진술은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창조 이후에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지, 태초의 창조목적인 선하심의 전달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에 따른 것 같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제대로 연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아담의 원죄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아담의 타락 때문에 죄인이 된 인간을 본래대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목적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사역의 최종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틀림없이 창조사역의 최종목적이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최종 최고목적으로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위대한 섭리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사역의 최종목적이라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도 주장한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주장과 같이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말해 그의 창조목적의 완성인 인류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죽게 하기까지 하셨다는 성경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에드워즈도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주장하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완성될 그의 영광이외에 또 다른 창조목적을 갖고 계신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아니하는가? 에드워즈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로서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왜 이렇게 스스로 혼란에 빠져 있는가?

성경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아담의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으므로 피조물에게 복을 주시고 안식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달성된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시작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는 범죄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죄인된 아담의 후손들을 창조목적대로 회복시키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청교도적 경건주의자 에드워즈에게 딜레마가 나타났다고 본다. 아담의 타락을 아담의 자유의지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예정으로 볼 것인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의 목적을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목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창조 이전에 이미 계획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우려하고 있는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별개의 목적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다루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 사역의 원인을 제공하는 아담의 타락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필자가 에드워즈에 대해 비판하는 단초가 드러나는 것이다. 오늘날 에드워즈의 독자는 이 모든 것의 내력을 다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하나님이 그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보내신 그의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창조의 최종목적을 완성하실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점은 누구나 수긍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주장하는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완성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인가?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주장에는 이런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편집한 존 파이퍼는 바로 이 단락(228)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서 기뻐하신다고 소제목을 붙여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파이퍼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견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진술문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파이퍼가 에드워즈의 주장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 존 파이퍼는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독자들을 심각하게 오해로 이끌어 가는 잘못이다. 파이퍼와 함께 에드워즈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와 편집자의 서로 상반된 견해가 나타남에 대하여, 또 저자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음에 대하여 당혹감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 여러 신학자들의 과장된 찬사에 의해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영광을 에드워즈의 이성적 논리의 혼돈 속에다 빠뜨려놓고 있음은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4.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의 실체

 

4.1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은 미완성된 논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개념이 성경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지를 검토하고 비판했다. 그런 가운데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에드워즈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고 연구했던 세계적 신학자가 어떻게 이런 미흡함을 남겨두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필자는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 나타난 이런 문제를 보고, 에드워즈의 신학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이 더 이상 다른 방향, 또는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과 자료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은 에드워즈 생애의 최종적인 작품이며, 그의 사후에 발간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책에 대해 다시 면밀하게 조사하면서 뜻밖에도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파이퍼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의 주제를 가지고 평생 동안 씨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에드워즈가 19세인 1722년에 작성한 첫 결심문에는 이런 글이 써 있다고 한다. “나의 전 생애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지금 당장이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든지 간에 시간은 전혀 생각하지 말자.” 이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에드워즈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 이와 같은 결심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과 관련된 그의 구상과 집필이 일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의 일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보았을 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그의 삶의 목적을 일치시키려는 생활에서의 노력과 이를 논증하려는 저술 작업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다른 증언으로서는 토마스 쉐퍼(Thomas Schafer)가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전달해주고 피조물이 자신의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쓴 쪽지를 읽었다고 밝힌 것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서 읽은 바로는, 이 쪽지의 전반부의 뜻은 반영되어 있으나, 후반부의 사상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집필이 완결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필자가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서 미흡하거나 오류라고 비판한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 이유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읽고 있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은 에드워즈에 의해 미완성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에드워즈가 이 책(논문)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던 때는 1755년 봄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생전에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에드워즈는 먼저 완성해놓았던 또 하나의 논문인 "참된 도덕의 본질"과 함께 이 책을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존 파이퍼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집필 당시의 병고와 다른 바쁜 일, 그리고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직에 취임해야 하는 일 등으로 인해 이 책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7581월에 마침내 사양하던 프린스턴 대학 총장에 취임한 에드워즈는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은 부작용으로 뜻밖에도 그해 3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이 책은 그의 사후 7년이 지난 1765년에 새뮤얼 홉킨스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 새뮤얼 홉킨스는 그의 편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아마도 만일 에드워즈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 내용들을 개정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 완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여기저기에 몇몇 새로운 내용들이 첨가되었을 것이고, 어떤 구절들은 더 많은 예화로 더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원고에 묶어 놓지 않은 종이에 써놓은 내용들과 힌트에 의해 추측할 수 있다.” 홉킨스의 말을 뒷받침하는 에드워즈의 집필 습관에 대해서는 이런 증언이 또 있다. 스테펜 니콜라스(Stephen J. Nichols)는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의 출판에 관련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벌써 이 책을 1746년에 숙고하기 시작했다....출판과 관련하여 공평하게

말하면, 책이 출판하는 일이 지체된 것은 에드워즈가 이 책을 끊임없이 교정했기 때

문이다. 하지만 1754년에 에드워즈 책의 보스턴 출판업자인 사무엘 닐란드는 원고를

얻는데 성공하여 알미니안 논쟁에 관한 에드워즈의 사상을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 이 책이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살펴본 결과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은 미완성 저작으로서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장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이에 대해 무조건 비판을 계속하는 것도 타당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의 비판적 주장의 정당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필자의 비판은 비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간과되었던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서 미완성인 부분과 미흡한 점을 밝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중요한 신학적 주제에 대한 검증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에드워즈에 의해 집필과 교정이 진행중이던 원고가 미완성인 채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미흡한 점이 발견되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에 미완성 부분과 미흡한 부분이 있음을 지적해야 하는가? 필자는 기독교에서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과 같이 완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에서 미흡한 부분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과 그가 가르치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에드워즈의 주장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진술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의 집필 작업을 계속하여 그의 계획대로 이 논문을 완성했더라면, 이런 문제들과 관련하여 좀 더 진전된 내용이 그의 인생에서 최종 작품이 된 이 논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당연히 표현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에드워즈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지는 이유이다.

 

4.2 ”잘못 이해된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하나님의 영광

 

이 책은 현대에서 난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왜냐하면 에드워즈 특유의 길고 복잡한 철학적 논증 방법과 300년 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과 뒤의 주장에 혼란이 있는 논증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과 함께 편집 출간한 존 파이퍼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아버지 가운데 하나입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신학자 또는 비평가들의 글을 소개한다: “아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놀라운 비전과 이러한 비전을 수용하는데 필요한 인간 성향의 만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마크 놀Mark Noll).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은 신학적 위대함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일 것이다”(데이비드 브랜드David Brand). 또 국내에서 이 책을 번역 출판한 백금산은 이 책은 성경과 이성의 추리를 통해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과 인간의 최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분명하게 밝힌 교회사 최고의 걸작이다고 극찬한다.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이 책의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책에 나온 주장을 그대로 믿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오고 있으며, 실제로 그런 효과는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미완성된 논문을 발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미완성 작품에 대해 신학자들은 왜 무조건 찬사를 늘어놓기에 급급하고 있었는가? 그동안 이 저작에 대해 비판적 검증 없이 격찬하거나 인용했던 것은 신학자들의 안목이 출판업자의 상업주의적 목적을 간파해내지 못한 점에 원인이 있다고 보인다. 그 영향으로 기독교는 에드워즈의 미완성 하나님의 영광신학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는 물론 신학자와 목회자들조차 상업적 목적으로 과장된 찬사로 얼룩진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을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면서 잘못 이해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에드워즈의 모든 저작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그는 어쨌든 기독교 신자로서 또 목회자로서 열심히 봉사했다는 점은 필자를 포함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상업적 목적으로 그의 미완성 논문을 과장되게 선전하고 판매한 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본다.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을 읽는 동안, 필자는 오히려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아니한 아담의 범죄 사건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왜냐하면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목적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목적을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인류의 구속사역의 시발점이 된 아담의 타락 문제를 하나의 연결된 관점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언급을 자주 하면서도 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미루고 필자는 여기서 이 문제의 논의를 마무리 하려고 한다.

 

5. 결론

 

현대인은 모든 사회분야에서 각각 자기 좋을 대로의 주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으로는 자기의 신론(神論)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이 없다고 하는 철학적 주장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종교적 교리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철학적 주장이나 종교적 교리를 우상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우상이 나타날 것임은 바울사도가 이미 예견한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우주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사건의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러한 창조의 교리를 선교에 적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목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를 역사적인 사실로 논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창조사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다. 사건은 보도기사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사건의 목적에 대해서는 사실 행위자가 진술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고, 최소한 목격자의 증언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대해서는 인간이 피조물의 입장이고, 아득한 태초의 일이고 보면, 창조자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기록과 우주의 흔적에서 단서를 찾아 사건의 경위를 재구성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를 연구하는 작업은 기록과 흔적의 의미를 새로 발견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작업은 과거의 전통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 이해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종교적 망상은 그것이 확언하고 있는 것들이 이루고 있는 체제와 언제나 그것의 전제가 되는 마술적 지평과 더불어, 사회발전에 비해 개인적 퇴행처럼 나타난다고 말했다. 푸코의 비판에서 기독교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발전에 비해 개인적 퇴행처럼나타나는 종교는 과학주의 현대사회에서는 미래가 없다. 푸코가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가 사회발전에 비해 개인적 퇴행처럼 나타나지 않으려면, 또한 사회발전에 뒤떨어진 한 집단의 문화적 산물에 불과한 종교적 망상이 되지 않으려면, 현대의 종교는 교리의 문제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풀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불합리한 주장이나 가치를 또 다른 불합리한 주장이나 가치로 부정하는 모순이 축적되는 침전작용 층위에역사적으로 되풀이 되어오는 교조주의적 광기를 막을 수 있는 길이다. 이 논문의 서두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실패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책을 읽는 동안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필자의 기존 인식과는 다른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인간에 의해 그가 계획하신 목적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인해 그의 계획에 실패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배신한 아담과 그런 아담을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탓할 수 있는가? 자유로우신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타락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셨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행동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실패를 감수하신 것도 그의 자유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배신에 쓰라림을 느끼시고 창조를 후회하시기도 하셨지만, 구원 이외의 다른 선택을 하지 않으신 것도 그의 자유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멸절하시는 것까지도 생각하셨지만, 그의 본질이신 사랑은 변하지 않으시고 진노를 참으시면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주시는 언약을 만들어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의 불순종에 대해서 무조건 눈 감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공의를 시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의 창조목적에서 완전히 실패하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 성경에서 아담의 타락 사건에 이어 구원사역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의 사랑 때문에 인간의 불순종에 대해 진노를 참으시고, 오히려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 즉 역사 가운데서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탄의 훼방으로 인하여 아담이 불순종할 수도 있는 상황을 미리 아셨으면서도, 그의 본질인 사랑의 충만에서 창조를 하셨고, 사랑하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었다. 비록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피조물에게 창조자가 주실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주신 것이다(2:16, 17). 하나님은 아담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는 행위에 대해서 죽음의 처벌을 경고하셨지만, 아담의 선택의 자유까지 금지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깨달음이 없이 현대인을 향해 선교를 한다는 것은 싸울 마음도 없이 전장에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불순종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구원의 행위에 대해서도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굳이 그의 구원을 거절하는 인간들까지 구원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자유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거절하는 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셋째, 하나님은 인간들이 불순종하는 죄를 저지를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을 확장하는 계기로 삼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증명된다. 에덴동산의 아담에서, 아라랏산 기슭 시날 평원의 노아 가족으로, 또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로, 이제는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로 확장되었고, 앞으로 거할 곳이 많은”(14:2)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완성될 것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또 이때 하나님을 거절하는 악의 세력을 멸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세와 나라가 완성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도 완전하게 빛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의 옛 생명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그것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은 이제 그의 구원계획에서 그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적은 분량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나아가야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하나님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조금쯤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아주 작은 소량이라도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얻은 자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는 말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얻지 못한 인간들, 곧 영생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영원한 생명이라는 진리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태초의 창조목적으로 만드신 아담에게 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의 언약은 아담 스스로가 파기했다. 두 번째로 창조하신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의 영과을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이제 세 번째로 창조하시는 새 사람”(4:24), 즉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주시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한 마디 말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창조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에는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정의에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에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영광의 뜻을 추가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함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뜻이 전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곧 인간의 삶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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