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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이 대립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

heojohn 2021. 9. 8. 06:49

시리즈<지구의 깊은 역사>


동아시아

 

2021.09.03. 14:024,727 읽음

 

지구의 깊은 역사』는 지구의 역사를 발견해가는 인류 지성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지구의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이 제임스 어셔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제임스 어셔는 기원전 4004년에 지구가 탄생되었다고 결론 내서 아직도 조롱거리가 되는 인물이다. 과학적 탐구를 통해 알아내야 할 지식을 종교적인 방법을 통해 얻으려 한, 잘못된 연구의 사례로 끊임없이 소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은 제임스 어셔의 작업을 '지구의 역사'를 찾으려 한 작업의 기원으로 평가하는 것일까?

 

한 17세기 역사가가 기원전 4004년의 어느 날 창조 주간이 시작되었다고 추산했을 때, 그 연도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이런 추산이 겨냥했던 정확성만큼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릿수도 너무 작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4004년이라는 이 특정한 숫자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라는 막강한 후원자를 모시며 그의 총애를 받던 아일랜드 역사가 제임스 어셔(James Ussher)가 발표한 것이었다. 

17세기 아일랜드의 역사가 제임스 어셔. 제임스 어셔라는 '역사가'가 지구의 나이를 계산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근래에 와서 어셔와 기원전 4004년이란 그의 연도 추정은 놀림감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어셔는 현대적 의미의 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 어셔는 당대 문화계에서 주류에 속하던 사회 참여 지식
인이었다. 어셔의 기원전 4004년은 당시만 해도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원전 4004년이 말하던 바는 몇몇 중요한 측면에서 전적으로 ‘좋은 것’이었다.
 세계사에 대한 어셔의 관점은 지구에 심원한 역
사가 있다는 현대 과학의 상과 워낙 동떨어져 있어서 어셔의 관점과 현대 과학을 연결하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이 둘은 화해할 수없는 양자택일의 대상인 것만 같다(종교 근본주의자와 무신론 근본주의
자를 가릴 것 없이 현대 근본주의자의 눈에는 딱 이렇게 보인다).
 그러나 실은 어셔 같은 17세기 역사가가 하던 작업과 현대 세계에서 지구과학자가 하는 활동은 단절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셔는 지구의 심원한 역사라는 현대적 관념의 기원을 이해하기에 좋은 출발점이다. 더욱이 어셔의 생각을 그가 살았던 당시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그의 생각과 ‘어린 지구’라는 현대 창조론자의 관념 간의 겉보기 유사성은 극명한 차이로 바뀐다. 창조론자는 어셔와 달리 나뭇가지에, 그것도 곧 부러질 것만 같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어셔의 증거에서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연대학자와 마찬가지로 성서가 아니라 고대의 세속 기록에서 끌어온 증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셔의 전거는 기원전에서도 최근에 가까운 시대에 대한 것일수록 풍부했고, 먼 과거로 가면 갈수록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초창기에 대한 자료는 매우 빈약했고, 고작해야 인류의 초기 세대에 ‘누가 누구를 낳았더라’라는 창세기의 기록이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 이 점을 보면 어셔의 주요 목표가 세계에 대해 상세한 역사를 한데 엮는 것이었지 본래부터 천지창조의 연도를 확정하거나 전반적으로 성서의 권위를 드높이려던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성서는 어셔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귀중하고 믿음직스러운 전거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성서를 여러 전거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

연대학자들이 세계사 연도를 추정한 방법. 현대적 양식으로 그린 이 도표에서 시간 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율리우스 주기’는 인위적으로 만든 연표로, 천문과 역법의 요소를 조합하여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7980년을 연 단위로 명확히 나눌 수 있었다. 율리우 스 주기는 시간의 준거 척도 역할을 했다.


어셔는 다른 연대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칼리제르가 고안한 복잡한 연대 추정 체계를 채택했다. 스칼리제르는 천문과 역법의 요소를 바탕으로 일부러 인위적인 ‘율리우스’ 시간 척도를 만들었다. 율리우스 시간 척도는 중립적 시간 차원을 제공해서, 이를테면 이 척도를 바탕으로 서로 경합하는 연대기를 정리하고 비교할 수 있었다. 율리우스 시간 척도는 그저 편리한 장치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과 역사 사이의 중대한 차이를 부각했다. 시간 자체는 햇수로 측정되는 추상적 차원에 불과했다. 역사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일어나는 실제 사건의 총체였다. 연대학자가 실제 역사라고 주장하는 대상은 율리우스 시간 척도를 기준 삼아 천지창조부터 점점 숫자가 커지는 ‘세계의 해’로 기록하거나, 강생으로부터 거꾸로 세는 ‘그리스도 이전의 해’로 기록하거나, 강생부터 정 방향으로 세는 ‘주의 해’로 기록할 수 있었다. 연대학 연구를
추동하는 힘은 정밀한 수치를 향한 지적 열망이었다. 이런 열망은 그 시대의 특징이었고 연대학 같은 기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런 열망은 예컨대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 같은 천문학자들이 당대에 내놓은 저작처럼 여러 자연과학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연대학과 자연과학 연구 모두에서 정밀한 수치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연대학은 우주론과 마찬가지로 논쟁의 여지가 매우 큰 연구였다. 사건의 연도를 기입한 연표를 만들다 보면 기록들이 불완전하거나 애매모호하고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연대학자들은 학식을 토대로 어떤 기록이 가장 믿을 만한지, 그 기록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그럴듯한 방식으로 연결하여 끊어지지 않는 연표를 만들 수 있을지 수시로 판단해야 했다. 그 결과 주요 사건마다 연대학자의 수만큼 이나 많은 추정 연도가 경합하고 있었다. 천지창조의 연도는 유독 심했다. 어셔의 기원전 4004년은 온갖 숫자가 넘쳐나던 가운데 나온 하나의 제안에 불과했고, 어느 조사에 따르면 그 범위는 기원전 4103년부터 기원전 3928년에 이르렀다. 가령 스칼리제르는 천지창조 연도를 기원전 3949년으로 정했고, 여러 활동에 종사했지만 명민한 연대학자이기도 했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나중에 기원전 3988년을 천지창조 연도로 받아들였다. 다는 아니지만 일부 연대학자들은 정확한 날짜를 내세우기도 했는데, 어셔 역시 이들처럼 매우 상세한 일시를 주창했다. 그 일시란 바로 추분이 지난 후 첫 주의 첫날이 시작하는 때(유대인 시간 기록법에 따르면 해가 질 무렵)였다. 이날은 기독교 햇수로 기원전 4004년에 해당하는 해의 유대인 설날을 가리켰다.
 당시에는 복잡한 역법 계산과 역사적 추론을 거쳐 이 정도로 정확한 결과를 내놓는 일은 충분히 노려봄 직한 목표였다. 물론 우리의 눈에는 괴상해 보이지만 말이다.

 

17세기에 지구의 역사를 밝혀내는 작업은 연대학자들의 일이었다.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매우 부조리하다. 지구의 역사를 밝혀내는 것은 '과학'의 일이니까. 화석이나 지층 등 여러 과학적인 증거와 방법을 활용해야만 지구에 일어난 일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문헌이나 자료를 통해 지구의 역사를 파악하려 했던 과거의 작업은 비이성적이고,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지구의 역사를 알아내려고 했던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이 어떤 의미에서 이어져 있다고 역설한다. 어떤 의미에서일까?

 

  

그러나 현재의 맥락에서 아담 이전에 인류가 있었다는 생각이 중요한 이유는 진위가 의심스럽던 고대 이집트, 중국, 바빌로니아의 기록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들 기록은 모두 인류의 역사가 서양에서 관례적으로 인정하던 연대기보다 훨씬 길어서, 5000~6000년 정도가 아니라 1만 년 이상, 바빌로니아 기록을 믿는다면 심지어는 수만 년에 걸쳐 이어졌을 수도 있다는 함의를 던져주었다. 이런 생각은 모두 통념에 반하는 것이었다. 꼭 천지창조의 연도 추정이나 성서의 권위에 의문을 품어서라기보다 더욱 급진적 추측이 끼어들 여지를 열어주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인류사가 그렇게 길다면, 여러 주제에 대한 논의로 유럽에서 오랫동안 높은 평가를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등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또 한 번 적중한 듯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와 지구, 인간 생명이 매우 오래된 것을 넘어 말 그대로 영원불멸하다고, 즉 창조가 일어난 시점도 모든 것이 끝나는 종점도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주장은 뼛속 깊이 불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창조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만든 초월적 조물주에게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부인한다면 인간 자신의 행위와 처신에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주장은 도덕과 사회의 토대 자체를 위협하는 것 같았다.

언뜻 보면 이 ‘영원주의(eternalism)’(그때부터 이렇게 불렸다)는 기껏해야 수천 년에 불과한 연대학자들의 짧고 유한한 이야기와 극명히 대비되며 지구와 우주의 역사가 수십억 년에 이른다는 현대적 이해를 예견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주의의 겉보기 현대성은 눈속임이며 커다란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사실 17세기에 고려의 대상이 되었던 유이(惟二)한 선택지인 ‘어린 지구’와 영원한 지구는 뭐가 낫다 할 것 없이 비현대적(un-modern)이었다. 두 선택지 모두 인류가 우주에서 언제나 제일 중요한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었다. 연대학자들이 그린 지구(와 우주)의 짧고 유한한 역사는 인간이 등장하기 전 매우 짧은 무대 설치 시간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인간의 드라마였다. 영원주의자의 상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그린 지구(와 우주)에 인류가, 적어도 이성을 지닌 아담 이전의 몇몇 인류라도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천지창조 연도의 일반적 추정 범위보다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집트, 중국, 바빌로니아의 초기 인류 기록이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한사람들은, 이런 기록도 우연히 아직까지 살아남은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이라고 가정했다. 그들은 당연히 그 이전에도 인류 문화가 오래도록, 거의 무한히 이어졌으며, 다만 시간의 심연 속에 모든 흔적이 사라졌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원주의에서 그리는 무한히 오래된 지구(와 우주)는 지구의 역사가 엄청나게 길지만 유한하다고 보는 근대 과학의 상을 예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심지어는 그 이후 시대까지도 영원주의는 문화적으로 주류였던 짧고 유한한 우주라는 상에 급진적 대안이 되었다. 영원주의는 종교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측면에서도 위협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영원주의는 대체로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었다. 영원주의가 눈에 띄는 경우는 비정통파 지지자가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출할 때가 아니라 대개 정통파 비판자가 공격할 때였다. 영원주의가 인간 사회에 급진적 위협을 초래한다고 여겨졌다는 사실은 일부 집단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매우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이끌어낸 ‘어린 지구’를 왜 그렇게 집요하게 수호했는지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반대로 영원주의자들이 종교적 회의주의, 더 나아가 무신론 같은 자신만의 의제를 펼치고자 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이는 결코 계몽된 이성(Reason) 대 종교적 독단(Dogma)으로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는 있는 투쟁이 아니었다. 강렬한 ‘이데올로기적’ 의제는 논쟁 양편에 모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영원주의가 함축하는 대로 인간의 삶이 계속해서, 무한히 이어진다는 생각은 전 세계적으로 보면 예외라기보다 표준에 가까웠다. 
대다수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시간이란, 아니 그보다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역사란 되풀이되거나 어느 정도 주기를 따르지, 화살처럼 한쪽으로만 나아가며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가정이 문화에 녹아들어 있었다. 이 가정의 바탕에서 이를 상식처럼 보이게 해주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인간 삶의 주기에 대한 보편적 경험, 세대마다 반복되어온 이와 같은 경험이었다. 대다수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강력히 규정하는 요소였던 계절의 순환도 여기에 한몫했다. 이들은 다함께 인류 문화, 지구, 나아가 전 우주가 이와 비슷하게 순환한다거나 ‘정상 상태(定常 狀態, steady-state)’에 있다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이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세계에 유일무이한 시작점이 있고 선형적이며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역사가 있다는 생각, 유대교에서 처음 나타나 기독교로, 나중에는 이슬람교로 확대된 이 생각은 두드러지는 변칙 사례에 해당한다. 이런 아브라함 계통 신앙에서는 역사가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관점을 금식과 축제(유월절, 부활절 등)로 이루어진 1년 주기로 압축했다. 1년 주기는 우주의 모습을 평범한 일상에 와닿는 수준으로 축소하여 모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규모가 큰 우주관도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 즉, 인류, 지구, 우주에는 공통의 진짜 역사가 있으며, 그 방향은 화살처럼 비가역적이라는 생각 말이다.



역사에 대한 의식이 이렇게 확고했기 때문에 유대교-기독교 전통의 바탕에 놓인 구조는 지구(와 우주)의 심원한 역사를 유한하고 일방향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현대적 관점과 매우 유사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류사에 정확한 수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질적으로 중요한 시대와 시기들의 연쇄로 분할하는 학술적 연대학은 지구의 심원한 역사에 그와 유사한 정확성과 구조를 부여하고자 하는 현대 과학인 ‘지질연대학(geochronology)’과 매우 닮았다. 이 점이 ‘그저’ 유사성에 불과한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지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탐구할 것이다.

 

『지구의 깊은 역사』는 지구의 역사를 누가, 언제, 어떻게 발견해냈는지 복기한다. 지금에야 지구과학은 확고한 과학의 한 분야이며 지구에도 지구 나름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받아들이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구과학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도 있다는 말이다. 『지구의 깊은 역사』는 지구과학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했는지, 지구과학이 과학이 아니던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지구과학은 지질학, 생물학, 물리학 등과 교차하면서 하나의 학문으로 확립되어 간다.

 

지구과학의 지성사를 방대하게 풀어낸 역작 
『지구의 깊은 역사』

 

지구의 깊은 역사

지구의 나이 45억 살. 누가, 언제, 어떻게 알아냈을까?지구과학의 탄생과 발전을 한 권으로 묶은 지구과학의 지성사지구의 깊고 낯선 과거를 밝혀낸 사람들의 좌충우돌 이야기_ 한양대학교 철학과 이상욱이 책에서 다루는 폭넓은 역사는 문ㆍ이과 모두에게 흥미로울 것이다_ 《뉴 사이언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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