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A 창조론 과 오메가Ω 창조론/알파 창조론 연구

창세기 1장의 현대적 해석에 의한 “알파 창조론”

heojohn 2020. 10. 13. 00:35

영역: 신학/성경

키워드: 알파 창조론, 창세기 1장의 해석, 6일 창조, 현대적 창세기 해석, 창조주 하나님

 

 

Alpha Creationism by Contemporary Interpretation in Genesis 1

 

 

[ABSTRACT] This paper is a study of Genesis 1 to understand the origins of the universe, Earth, and Earth creatures from a modern man's perspective. Genesis 1 is recognized in Christianity as written by Moses in ancient Hebrew and is also called Creation Toledot. The Hebrews believed that Moses, guided by God, heard God's word in a vision, saw the progress of creation, and described the creation Toledot in his view. Creation Toledot forms the basis of faith through the religion of the Hebrew people and continues to modern Christianity. However, after the emergence of scientific atheism through the combination of historical materialism and evolutionary theory, God and his creation are increasingly being rejected in modern society. If so, modern Christians living in this science age must be in conflict with their belief in the creation Toledot. If creation Toledot is rejected, Christianity loses the grounds for its faith.

 

The conflict between modern Christianity and scientific atheism is inevitable.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ad the creation Toledot in the original Hebrew text, to find out the cause of the conflict and how to interpret it. In order to distinguish it from the creationism that has been published so far, I decided to call this creationism the “alpha creationism”. I do not discuss Genesis 2 and beyond in “Alpha Creationism”, because I see it as God's providence.

 

 

. 들어가면서

. 창조 톨레도트(창세기 1)의 해석 방법에 대하여

. 알파 창조론

1. 태초에 창조된 천지

2. 첫날의 창조: 지구의 밤과 낮(흑암과 빛)

3. 둘째 날의 창조: 지구의 대기(‘라키아’, 궁창)

4. 셋째 날의 창조: 육지와 바다와 식물

5. 넷째 날의 창조: 행성의 위치 조정

6. 다섯째 날의 창조: 물고기와 새

7. 여섯째 날의 창조: 동물과 인간

.나가면서

 

 

. 들어가면서

 

이 글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지구 생물의 기원을 사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창세기 1장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서 연구한 것이다. 창세기 1장은 기독교에서 모세가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한 것으로, 창조 톨레도트로 불리기도 한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모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을 환상으로 보고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한 것으로 믿었다. 창조 톨레도트는 히브리 민족의 종교적 토대가 되었으며, 현대 기독교에서도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과 진화론이 결합하여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한 이후에 창조 톨레도트는 현대사회에서 점점 부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창조 톨레도트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대해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부정된다면, 기독교는 믿음의 토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보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오역이나 부적절한 언어의 선택으로 원의를 오해하는 문제를 피할 수 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과 합치되는 해석의 방법을 모색하고 제안했다. 필자는 그 결과에서 나온 이 글을 이제까지 제시되었던 창조론(창조 톨레도트 해석들)과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알파 창조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의미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의 창조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조론을 창세기 전부 또는 23절까지 확장하는 견해들도 없지 않으나, 필자는 그 부분을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제외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창조가 훨씬 간명하게 드러나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 창조 톨레도트의 해석 방법

 

고대 히브리어로 기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경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은 대개 히브리어 성경 사본을 번역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언어들 사이에는 개념의 차이가 있으며, 필연적으로 성경 번역에도 이해의 차이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 성경을 읽으면서 창조 톨레도트의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기록을 좀 더 진실에 가깝게 이해하려는 구약신학자들은 히브리어를 배워서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창조론자들도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히브리어 창조 톨레도트를 연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현대인들이 창세기를 읽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려면,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창조 톨레도트의 서술에는 두 개의 서술적 층위가 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환상 속에서 창조 사건을 보고 듣고 이해한 대로 그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층위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환상을 보고 기억해서 기록한 것이다. 다른 층위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환상을 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두 개의 층위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창조의 전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짧은 시간에 명령어로 몇 마디 말씀하시면서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주셨을 뿐이다. 따라서 창조사건의 일부만 듣고 본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전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에서 현대인의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이해 능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경전인 토라(모세 오경)를 통해 기독교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는 현대 과학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성경의 문자만을 믿고, 천동설을 믿고 지동설을 배척했던 불치의 트라우마(trauma)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과학과 등지게 된 기독교는 결국 과학을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현대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첨단 과학기구로 관측하고 있다. 그 자료들에 의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창조 사건을 보여주셨으나, 모세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창조 톨레도트를 서술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는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서술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문자주의적 창조론의 사실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셋째는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를 일정한 형식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면,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듣고 기록한 모세는 창조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대해 하나님이 이르시되”(וַיֹּאמֶר אֱלֹהִים)라는 말을 앞에 붙여 놓았다. 하나님의 말씀 뒤에 모세는 추가적으로 그가 설명하는 서술을 접속사(וְ) + 동사로 이어놓았다. 그리고 찬양하는 구절과 창조의 날짜가 마지막에 나오면서 그날의 창조가 끝난다. 번역된 성경으로 창세기를 읽는 때에는 하나님이 빠라’(בָּרָא: 창조했다)라는 동사로 명령하셨다고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빠라는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지, 하나님이 하신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동사를 사용하셨다.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사용하신 동사와 모세가 사용한 동사를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 알파 창조론

 

1. 태초에 창조된 천지

 

모세는 창세기 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고 선포했다. 이 구절에서 첫 글자로 나오는 태초에는 히브리어 원어 뻬레쉬트’(רבְּרֵאשִׁית)를 번역한 말이다. 그러나 뻬레쉬트는 전치사 와 최초 또는 첫째라는 서수(序數) ‘레쉬트가 결합한 부사구이다. 이 구절은 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심으로써 우리우주의 시간과 공간(空間)이 생겨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글성경이 태초에라는 말보다 최초에또는 처음에라는 말로 번역했더라면, 이해하기에 더 쉬웠을 것이다. 창세기는 1:1에서 천지(하늘 )”에 해당하는 하샤마임’(הַשָּׁמַיִם)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바로 ()”에 해당하는 하아레츠’(הָאָרֶץ)를 설명하면서 2절로 넘어간다. 여기서 천지는 현대적 우주와 지구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하늘의 아래까지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하늘은 태초 이전부터 있었고, 태초에 창조된 천지와는 시공간적으로 다른 차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하늘이 지구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졌다고 해야 납득할 수가 있는데, 모세는 그렇게 서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창조 톨레도트를 읽는 현대인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공간과 시간의 이중적 공백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창세기 1:11:2를 독립절로 해석하느냐, 종속절로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두 가지를 비교해보면. 독립절로 해석하는 것이 종속절로 해석하는 것보다 합리적이다.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창조 톨레도트 곳곳에서 드러난다.

 

1:2에서 모세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וְהָאָרֶץ הָיְתָה תֹהוּ וָבֹהוּ וְחֹשֶׁךְ עַל־פְּנֵי תְהֹום וְרוּחַ אֱלֹהִים מְרַחֶפֶת עַל־פְּנֵי הַמָּיִם׃)고 서술했다. 여기에서 깊음으로 번역된 테홈은 깊은 물을 의미한다. 모세에 의하면 땅은 토후’(혼돈)하고, ‘보후’(공허)한 상태로 깊은 물 밑에 있었다. 그리고 호쉐크’(흑암)가 깊은 물 위를 덮고 있었다. 물론 흑암은 깊은 물 밑의 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모세는 또 루아흐’(하나님의 신)가 깊은 물 위의 흑암 속에서 계속 메라헤페트’(מְרַחֶפֶת: 운행한다의 분사)하시는 모습을 본 것처럼 서술했다. 그렇다면 흑암 속에서 모세는 1:2의 상황을 어떻게 동시에 한 눈으로 본 것처럼 서술할 수 있었을까? 일반 독자들은 모세가 상상해서 묘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잠시 흑암 속에서 환상을 보고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인정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주실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2에서 모세가 사용한 하예타‘(הָיְתָה) 동사의 시제는 1절에서 뻬레쉬트에 의해 제한받는 완료형 동사 빠라’(בָּרָא)와 같은 것이다. 완료형 동사는 과거에 완료된 사건을 서술한다. 그러므로 문맥상으로만 보면, “천지인 우주와 지구가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고, 또는 별개의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과학적 상식을 가진 현대인들은 대개 빅뱅 우주론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우주의 태초는 약 138억 년 전 빅뱅의 때이고, 우리우주의 물질은 그때 처음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구는 약 46억 년 전에 태양계에서 다른 행성들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창조 톨레도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를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빅뱅과 우주와 지구의 연대에 관련하여 과학적 상식을 부정함으로써 현대인들과 교회 사이에 고의적으로 갈등을 만들고 있다. 그것이 현대교회에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창세기 1:11:2의 종속절로 보고, “태초를 약 6,000년 전이라고 계산하여 우주와 지구의 나이를 주장한다. 우주와 지구가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1은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의 시작과 전체적 구조를 알려주는 뜻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1:11:2의 종속절로 서술되었다고 이해하고, 천지가 약 6,000년 전에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현대 과학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이라면, 우주와 지구가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 한마디로 우리우주의 모든 별들을 순식간에 만들어낸 마술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모세는 캄캄한 흑암 속에서 하나님의 신이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깊은 물 위를 메라헤페트’(운행)하고 있었다고 서술하지 않았는가?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그의 창조목적인 인간을 땅에서 창조하기 위해 사전에 어떻게 창조 계획을 세우시고 실행하셨는지를 느낄 수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우주 나이 138억이라고 주장하는 빅뱅우주론과 지구 나이 46억 년이라고 인정하는 오랜 지구론을 믿는 일반인들과 갈등할 이유가 없다. 기독교의 전통적 해석 방법은이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창조하셨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사도들은 당시 헬레니즘 사회에서 그리스 신화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 신화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선교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그에게 사망과 하데스’(ᾍδης)의 열쇠를 그리스도가 가졌다고 계시했다(1:18)고 증언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범죄한 천사들이 갇혀있는 지옥이 하데스가 다스리는 타르타로사스’(ταρταρωσας)라고 설명했다(벧후2:4). 그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실이 아닌 이방 민족의 신화를 인용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적 사실을 인용하는 것을 타협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 사실에는 무지하면서 불완전하게 번역된 성경의 문자를 믿고 신앙의 형제들을 비난하는 자들이다.

 

어쨌든 사람들이 태초에서 현재까지 얼마나 오래된 시간이 흘렀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창세기에서 태초의 시기를 알려면, 히브리인의 날자 계산법에 따라, 모세가 첫 하루의 시작을 어떻게 서술했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히브리인들은 하루가 해지는 시각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창조 톨레도트에서도 하루는 밤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첫 하루의 시작은 첫 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찾아야 알 수 있다.

 

2. 첫날의 창조: 지구의 밤과 낮(흑암과 빛)

 

1) 첫날의 밤과 낮의 시간적 길이

 

한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1:3에서 하나님이 예히 오르’(יְהִי אֹור : 빛이 있으라)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읽고, 낮에 빛을 비추는 태양이 처음 창조된 것으로 이해하거나, 그때부터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1:4에서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וַיַּבְדֵּל אֱלֹהִים בֵּין הָאֹור וּבֵין הַחֹשֶׁךְ׃)라는 구절과 1:5에서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וַיִּקְרָא אֱלֹהִים לָאֹור יֹום וְלַחֹשֶׁךְ קָרָא לָיְלָה)는 구절을 연속적으로 읽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אֶחָד׃)는 서술을 바로 이어서 읽기 때문이다.

 

한글성경에는 그런 오해를 사실로 믿게 만드는 심각한 번역의 오류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의 번역 오류는 1:41:5에서 나오는 히브리어 호쉐크’(חֹשֶׁךְ)어둠으로 번역한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호셰크1:2에서 처음 나오며, “흑암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1:41:5에서는 호쉐크를 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어둠으로 번역하여 오해를 초래하고 있다. 한글성경의 번역대본으로 알려진 KJVdarkness로 일관되게 번역하고 있고, 다른 영어성경도 이를 따르고 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한글성경이 1:2호셰크흑암으로 번역해놓고, 이를 1:41:5에서는 어둠으로 번역하여, 심각한 오해를 초래하는 것은 고의적 왜곡 또는 오역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한글성경만 읽으면, 밤의 시작점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모세는 땅의 첫날 밤이 1:2호세크’(흑암)에서 시작되었다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성경은 호셰크흑암어둠으로 다르게 번역하면서 밤이 1:4 어둠에서 시작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밤의 시간은 1:2의 흑암에서 1:3에서 빛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면 그 시간이 첫날 밤의 길이는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번째의 번역 오류는 욤 에하드’(יֹום אֶחָד)첫째 날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에하드는 하나(one)를 가리키는 기수(基數)이지 첫째를 가리키는 서수(序數)가 아니다. 히브리어에서 첫째를 가리키는 서수는 바로 1:1에서 태초에라고 번역된 뻬레쉬트에서 전치사 ’(בּ)를 뺀 레쉬트’(ְרֵאשִׁית)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KJV에하드the first day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뒤에 나온 ASV 등에서는 one day로 수정했다. ‘욤 에하드를 한글성경에서 히브리어 본래 의미를 따라 어느 날’(one day) 또는 이 글에서처럼 첫날이라는 말로 번역했다면, 한글성경 문자주의자들에게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욤 에하드는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날자를 모를 때 하는 말처럼, ‘어느 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이 최초에 창조(뻬레쉬트 빠라)하신 것은 빛이 아니라, 분명히 천(하늘)과 지()였다. 그렇다면 1:1태초1:2의 사이에는 현대인들이 알고 있듯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지 않으신, 우주창조의 긴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한글성경 또는 KJV에처럼 기왕에 첫째 날’(the first day)로 쓴 것이라면, 어떤 사건의 첫째 날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태초을 연결하여 이해하면, 저절로 알게 되는 문제이다.

 

올바른 이해를 위해 한마디 덧붙인다면,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를 실제 본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창조의 시간이 언제인지를 알려 주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의 법칙을 연구하는 물리학에 의하면, 우주와 지구가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에 같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영원히 현재의 시간에 존재하시는 분으로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에 사용하신 시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인간이 알 수 없는 문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굳이 말하지 않는 태초의 시간 문제는 과학의 연구에 맡겨두는 편이 더 낫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믿음이 태초의 시간에 달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교양을 가진 현대인들이라면, 일부 근본주의자처럼 오류가 많은 번역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근거로 우주와 지구가 약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2) 첫날의 낮과 오르(): 창조주의 지구 임재

 

창조 톨레도트에서 첫날의 낮은 모세가 흑암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때 시작되었다. 에 대해서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은 영국국교회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 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국국교회의 설립과 KJV 영어성경 번역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연대기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의해서 생겨난 빛이 BC. 40041023일 일요일 아침 해가 뜨면서 비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어셔 주교에 의하면 그날은 24시간 하루의 시작이었으며,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이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것이 빛이고, 그 빛에 의하여 24시간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관점은 잘못 번역된 한글성경을 문자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첫날은 밤이 없었거나, 또는 첫날 낮 이전에 있었던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불완전한 창조자로 만드는 해석이다.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지구에 빛이 있기 전의 모든 우주적 사건들이 첫날의 밤 즉 호셰크의 시간 또는 그 이전에 일어났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어셔 주교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천동설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큰 거짓말이 된다.

 

곧 알게 되겠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 넷째 날에 광명체를 만드시고, 땅에 빛을 비추게 하시고, 주야를 주관하게 하셨다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1:14-18). 그렇다면 창조의 첫날에 비친 빛은 넷째 날의 빛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아직 지구에 비치지도 않은 해의 빛이 첫날의 낮이 되었고, 그때부터 24시간 하루가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성경적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는 물론, 현대인들의 과학적 상식까지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제대로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무지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날의 빛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 빛에 대해서는 이미 사도 요한이 잘 해석해놓았다. 요한에 의하면 빛은 주 하나님이다(1:1-5).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다. 요한은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4:11)고 썼다. 따라서 첫째 날의 빛은 지구에 인간을 창조하시기 위해 주 하나님이 땅에 임재하셨던 사실을 의미한다. 요한의 해석은 지구의 생명이 물질에서 화학작용으로 저절로 생겨났다는 과학적 무신론을 부정하는 관점이다. 요한에 의하면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자 하나님의 빛은 태양이 빛을 비추기 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에 태양이 필요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22:5). 사도 요한은 모세가 서술한 창조 톨레도트의 빛을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창조주 하나님의 지구 임재라고 새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요한의 관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이 땅에 빛으로 임재하신 주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가 진행되는 장면들을 환상으로 보았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빛을 보았지만, 출애굽 때에는 스스로 있는 자’(3:14)이신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 요한에 의하면 모세가 첫날에 본 빛은 햇빛이 아니다. 그 빛은 이 땅에 창조주로 임재하신 주 하나님이다. 그 빛에 의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빛을 해석하는 요한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 가장 기독교적인 성경 이해라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요한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창조 이후에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여 인간과 대화하신 성경의 기록이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셨다는 요한의 해석을 부정하는 반기독교적 세계관들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사실로 믿는 기독교 창조론자들은 그런 세계관들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고 반박하는 데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은 이전의 모든 관념론적 철학과 종교와 진리를 배척하고,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우주 및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 것이다. 둘째는 찰스 다윈(Chartles Darwin, 1809-1882)1859년에 종의 기원에서 발표한 생물학적 다윈주의 진화론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이 발표한 세계관에 그들의 역사적 유물론을 접목했다.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유물론적 진화론 또는 진화론적 유물사관으로 평가될 수 있다.

 

셋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이 러시아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에 성공한 이후 오파린(Aleksandr Ivanovich Oparin, 1894-1980)생명의 기원에서 발표한 화학적 진화론이다. 이는 지구 생명이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생겨났다는 무신론적 과학주의 세계관이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이런 것들을 모두 종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적 무신론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아편으로 취급하면서 인민을 미신으로 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배척한다. 과학적 무신론은 특히 기독교를 가장 적대시(敵對視)하는 세계관이다.

 

넷째로는 우주가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의 개입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에서 양자요동과 중력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서술하는 위대한 설계의 저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의 세계관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부정한다. 호킹은 우리우주가 무에서 양자 거품으로 생겨난 많은 우주 중에서 하나라고 주장했다. 호킹에 의하면 창조자 없이 우주가 수없이 많이 생겨났으며, 우주만물은 결국 아무 곳에서나 자발적 창조에 의하여 생겨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그런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예배와 기도와 제물을 바칠지라도 용납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3. 둘째 날의 창조: 대기(‘라키아’, 궁창)

 

1) ‘라키아’(궁창)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의 하늘이 되다

 

둘째 날 창조 톨레도트를 보면, 모세에게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1:6)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이때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공중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눈에는 아직도 깊은 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깊은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믿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창조 서사시)에는 최초에 바다의 신과 호수의 신이 서로 물을 섞어서 자식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집트 신화는 신들과 땅도 바다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모세는 이집트 왕가에서 자랐으므로 이집트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양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밀레투스의 탈레스(Thales, BC. 624?-BC. 546?)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 1:2에서 첫날의 밤인 흑암의 시간에 깊은 물이 땅을 덮고 있었음을 서술한 것은 고대 근동지역 사람들의 지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절은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있으라(יְהִי רָקִיעַ בְּתֹוךְ הַמָּיִם).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으라(ִוִיהִי מַבְדִּיל בֵּין מַיִם לָמָיִם׃)”로 직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게 하는 라키아’(궁창)가 만들어졌다. 물의 나눠짐은 물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라키아를 깊은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는 도구로 만드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1:7)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궁창을 샤마임’(하늘)이라고 칭하셨다고 서술했다(1:8). 둘째 날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에서 모세의 서술(1:7)과 모세가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칭하셨다는 서술(1:8)을 읽으면, 현대인들을 당혹감에 빠져버린다. 깊은 물 속에 있던 라키아가 어떻게 갑자기 하늘이 될 수 있는가? 현대인들에게 창세기의 깊은 물은 바다로, 하늘은 대기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키아샤마임이라고 부르셨고, 모세는 라키아가 그 위의 물을 담은 채 들어 올려져서 하늘이 된 것처럼 이해했다. 여기에서 현대인들과 모세 사이에는 엄청난 이해의 괴리가 있는 것이다. 이해의 괴리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도 있었다. 모세의 샤마임에 대한 이해는 단어의 의미에서도 엿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샤마임은 특이하게도 복수도 아니고 단수도 아닌 쌍수로 취급되는 명사이다. 히브리인들이 샤마임을 쌍수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위로 들어 올려진 라키아의 아래와 위를 샤마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라키아의 이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 톨레도트 전체 기사에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모세의 설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이해의 괴리 현상이 적지 않게 발생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물과 물을 나누는 물리적 기능을 라키아로 표현하셨지만, 고대 히브리인 모세에게 라키아는 청동 또는 구리 등의 금속을 두드려 펴서 늘린 얇은 판 또는 거울등의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깊은 물 전체를 아래와 위로 나누기 위한 도구로 라키아를 만드셨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보면 자세한 설명 없이 짧게 말씀하신다. 모세의 서술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 칭하셨을 때, 모세는 그가 알고 있던 선지식(先知識)으로 하나님이 라키아를 그 위에 있던 물과 함께 들어올려서 하늘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이해의 괴리가 생겨난 것은 당시 히브리어에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그림 예시

                        (이 중국어 성경 주석에서는 라키아宮蒼으로 번역했으나, 한글성경은 穹蒼으로 쓴다)

 

하나님의 물과 물을 나누라는 명령 구절을 보면, 히브리어 마베띨’(מַבְדִּיל)바달동사 앞에 ’(ם)을 붙여서 비히동사의 주어인 명사형 분사(나눠짐)로 쓰였다. 이 구절에서 있다는 뜻으로 쓰인 יְהִיוִיהִי두 개의 동사는 모두 미완료형 동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라키아가 있으라.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고 직역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는 다만 물과 물 사이에서 나누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하다는 이유가 발견된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물과 물 사이를 나누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물 구성 분자 또는 원자의 최외곽 전자궤도가 만드는 전자껍질(Electron shell)로 해석할 수 있다(옥텟규칙 등에서는 전자궤도를 전자껍질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오비탈 이론에서는 전자궤도를 함수로 설명하면서 경계면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좀더 일반적인 전자껍질이라는 말로 썼다

 

그러므로 라키아는 현대적 의미에서 물을 원자 또는 분자 단위로 나누는 기능을 하는 전자껍질로 봉수 있다. 그렇게 나눠지는 물은 당시 모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나 분자의 기체이다. 물에서 원자들이나 분자들로 나눠진 기체들은 위로 올라가서 대기를 만든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그런 기체로 대기권을 만드시고 샤마임이라 칭하셨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인들의 지식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세는 라키아를 얇은 판으로 이해했고, 그것이 물을 담고 들어올려져서 물을 담은 하늘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원자와 분자들이 만드는 전자껍질모식도

 

둘째 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깊은 물을 아래와 위로 나누고 있던 라키아가 위의 물을 그대로 담은 채로 들어 올려져서 하늘이 되었다는 모세의 이해는 노아 홍수 톨레도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세는 노아 홍수 때에 위에 있는 하늘의 물이 열려진 하늘의 창을 통해 쏟아져서 사십 주야 내리는 비가 되었다고 서술했다(7:11-12). 모세가 이해한 라키아의 하늘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모세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설명했던 라키아가 지구 역사에서 존재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모세는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의 뜻을 오해함으로써 샤마임의 뜻까지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 ‘라키아는 대기권이다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따라 물이 원자 또는 분자의 라키아에 의하여 나뉘어져 대기를 만들었다. 원자 모델에서 원자는 전자가 회전하는 궤도 안에 원자핵이 자리 잡고 있다. 전자의 회전 궤도가 하나뿐이라면, 그 궤도가 원자의 전자껍질이 된다. 전자의 수가 많으면 회전하는 궤도의 층이 여러 겹이 된다. 그런 경우에는 가장 바깥 전자궤도가 그 원자의 전자껍질이 되다. ‘전자껍질은 다른 원자의 전자껍질과 결합하면 더 크고 무거운 원자가 되거나, 원자가 여러 개가 모인 분자를 만들 수도 있다. 원자 단위로 물을 나누면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이고, 물은 그것들이 결합된 분자(HO)이다. 물을 분자 단위로 나누면, 미세한 물방울의 수증기가 된다. 분자는 원자의 가장 바깥 전자껍질이 다른 분자와 나뉘는 표면이 된다. 원자나 수증기 분자들은 기체가 되어 대기를 형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대기권이 현대인들에게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하신 말씀은 물과 물을 나눈 기체가 위로 올라가서 만들어낸 대기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의 과학적 지식으로 물을 나누는 라키아의 실체가 원자들의 바깥을 감싸는, 또는 원자를 나누는 전자껍질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창조 톨레도트의 둘째 날 하나님이 대기를 만드시는 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현대인들은 대기가 산소와 수소로만 된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원자아 분자가 혼합된 기체이고, 지구의 전자기력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만 그렇게 원자와 분자의 기체로 만들어지는 대기가 지구의 하늘이라는 뜻이다. 현대과학적 관점에서 라키아를 이해하고 보면,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지만, 모세가 알아듣게 말씀하지 아니하지는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그때부터 현재까지 존재하는 지구의 대기권을 만드셨지만, 모세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나님이 둘째 날 지구에 하늘을 만드신 것은 매우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계획은 생물에게 호흡, 특히 최종적으로 인간의 호흡을 위한 것이다. 생물의 호흡에는 산소가 필요하다. 여기서 유물 진화론자 오파린이 생명의 기원에서 물질이 화학적 진화에 의해 처음 생명체가 만들어졌던 원시 대기에는 산소가 없었다는 주장을 반박할 필요가 있다. 원시지구에는 이미 바다와 태양이 있었다. 그렇다면 태양이 생긴 이후 바닷물에서 증발한 수증기의 산소가 대기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는 말인가? 오파린의 주장을 입증했다고 알려진 유리-밀러의 유기물 생성 실험도 산소를 제거한 시험관 안에서 생겨난 몇 개의 아미노산을 증거라고 해석한 것이었다.

 

라키아의 실체가 대기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남은 문제는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믿음을 강요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우기는 고대 히브리인들과 같은 수준의 인식을 하고 있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한다고 박해했던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과 다르지 않다. 실재하지 않았던 라키아를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마술쟁이로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창조를 거짓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현대과학적 지식으로 라키아를 이해하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라키아에 대한 모세와 근본주의자들의 이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목회자가 기독교 신앙이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를 문자대로 믿어야 한다고 강변한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의 선택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첫째는 그런 목회자를 시대에 뒤떨어져 무지하다고 불신하거나, 또는 과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 배척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를 문자대로 믿을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에 대해 사실과 다른 지식을 가지기를 원하실까? 기독교인들이 그의 이름이 걸린 교회를 떠나기를 원하실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런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왕국 시절에 이미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는 자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는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의 창조를 잘못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소자를 잘못 가르쳐 실족케 하는 자와 다름없다. 공관복음서 3곳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경고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우주에서 지구는, 다른 행성과 달리,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진 생태계가 특별히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런 사실을 안다면, 지구의 기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지구에서 생물, 특히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물과 대기권이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지구는 우연히 존재하는 행성이 아니라, 누군가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창조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를 가지게 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지구에 직접 임재하여 생태계와 생명체를 창조하셨다. 바로 그분이 모세에게 지구의 창조 사건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주 하나님이시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이 제안한 것이 인본 원리(Anthropic Principle). 인본원리에 의하면, 지구가 인간의 생존이 가능한 조건으로 운행하는 것은 우주상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조정(fine-tuned)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정도로 미세조정된 우주상수가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이 그런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동안 우주 탐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미국 NASA 팀이 지구처럼 풍부한 물과 대기권이 보존되고 있거나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를 탐색했으나, 그런 행성을 아직도 확실히 발견하지 못했다. 최근에 케플러 우주망원경 탐사작업에서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행성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그곳은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곳에 생물이 살고 있다고 해도 지구의 인간들과 다르다면 우리와 별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그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다.

 

4. 셋째 날의 창조: 육지와 바다와 식물

 

1), 물과 뭍의 분리

 

모세에 의하면 셋째 날의 원시지구는 라키아와 그 위에 있던 물이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된 뒤에도 물이 아직 땅을 덮고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은 창조 명령을 두 번 하셨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וַיֹּאמֶר אֱלֹהִים יִקָּווּ הַמַּיִם מִתַּחַת הַשָּׁמַיִם אֶל־מָקֹום אֶחָד וְתֵרָאֶה הַיַּבָּשָׁה וַיְהִי־כֵן׃)고 서술했다(1:9).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계획과 그의 공의에 따라, 언제나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창조의 권능으로 명령하시면 그대로 되는것을 믿는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갖가지 왜곡된 이론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 능력을 부정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창조주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떤 이론을 주장할지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의 이론을 알아서 반론하고 올바로 선교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와 관련하여 현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정리해야 할 하나의 쟁점이 남아 있다.

 

그 쟁점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에 창조물이 즉시 완성품 형태로 나온 것이냐, 아니면 그의 창조물이 과학에서 발견한 법칙에 따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완성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냐 하는 해석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모든 창조 사건의 진행에 시간적 과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그 문제의 해답을 알 수 있는 열쇠는 하나님이 창조 명령에 사용하신 동사에 나타나 있다.

 

각 창조물에 대해 하나님의 창조 명령은 짧게 미완료 3인칭 동사로 말씀하셨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미완료 3인칭 동사는 계속 진행되는 상태나 동작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 뒤에 그대로 되니라”(וַיְהִי־כֵן)는 설명문을 접속사 바브’(וַ)를 붙인 미완료 동사(וַיְהִי)로 서술하고 있다. 모세가 쓴 바브미완료 동사는 앞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동사의 상태나 동작을 언제나 완료된 상태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환상에는 창조의 과정은 없고 완성된 형태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물을 즉시 완성된 형태로 튀어나오게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그의 창조법칙에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요술쟁이가 아니고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창조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은 어린이가 동화책을 이해하는 수준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따라 창조의 진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는 말과 그대로 되니라”(וַיְהִי־כֵן)는 말에서 미완료 3인칭 동사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같지 않다.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의 일을 눈앞의 현실로 보실 수 있지만,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환상으로만 볼 수 있다. 더욱이 모세는 창조의 완성과정을 본 것이 아니라, 완성된 순간의 모습만 잠깐씩 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모세의 서술에 대해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탓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실을 합리적으로 추정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하나님의 시간을 계산했던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다.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12:32)고 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시간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지구의 나이를 6,000년이라고 하는 주장은 기독교의 믿음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며, 사실도 아니다. 그런 주장은 과학과 기독교의 갈등을 야기할 뿐이다. 과학이 46억 년 전에 지구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해도 굳이 시비를 걸 필요가 없이 그대로 인정해도 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쇠퇴의 길로 빠지게 한 가장 큰 원인은 과학과 싸워서 패배한 것이다. 과학이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과학이란 창조의 법칙을 연구한 학문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2), 식물의 창조

 

셋째 날 창조 톨레도트에서 물과 마른 땅이 나눠지고 뭍이 드러난 뒤에 모세는 하나님이 두 번째 창조명령으로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וַיֹּאמֶר אֱלֹהִים תַּדְשֵׁא הָאָרֶץ דֶּשֶׁא עֵשֶׂב מַזְרִיעַ זֶרַע עֵץ פְּרִי עֹשֶׂה פְּרִי לְמִינֹו אֲשֶׁר זַרְעֹו־בֹו עַל־הָאָרֶץ וַיְהִי־כֵן׃)었다고 서술했다(1:11). 이 구절에서부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환상을 보는 장소가 땅으로 바뀌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 뒤에 모세가 이어서 설명하는 그대로 되어에 대해서는 히브리어 어법에 따라 그리고 그대로 되어 가니라”(וַיְהִי־כֵן׃)는 미완료형으로 직역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한글 성경은 하나님이 각기 종류대로라고 하신 말씀이 열매 맺는 과목만 수식하는 말처럼 번역하고 있으나, 히브리어 문장은 땅 위에서 씨의 종류대로풀과 채소와 과목을 내라는 의미로 서술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씨의 종류대로의 부분이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제3일에 모든 종류의 식물의 씨앗을 땅이 내라”(תַּדְשֵׁא הָאָרֶץ)고 명령하셨다. 현대 생물학에 의하면 식물은 물 섭취와 광합성 작용으로 생존 에너지를 얻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창조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이 식물의 광합성에 필요한 광명이 땅에 비취라고 명령하신 것은 제4일이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진화론자들이 창조론을 공격하는 시발점이 된다. 진화론과 논쟁하자면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먼저 이 구절의 내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완료 3인칭이라는 사실을 알면, 진화론 문제는 반문 한 마디로 간단하게 해결된다. 아직 땅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식물의 씨앗에게 광합성 작용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땅은 식물의 씨앗을 만들고 있는 중이고, 광합성 작용은 싹이 나온 뒤에 할 일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부가 밤에 씨앗을 뿌린다고 시비할 수 있는가? 생물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생물 가운데 식물의 씨앗을 가장 먼저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땅 위에 동물과 인간의 창조를 계획하셨고, 그들의 먹거리를 위해 먼저 땅에 식물의 씨앗을 종류대로 창조해놓으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시점에서 현재의 환상으로 미래에 식물이 자라난 광경을 보여주셨고, 모세는 그가 본대로 서술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창조자(Creator)가 만든 생명의 형태를 한 개 또는 겨우 몇 개(one or a few)’라고 썼고, 그것()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지구의 생물계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오파린은 지구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생명력이 생겨난 한 개의세포에서 원시 생명체가 생겨났고, 그것에서 모든 생물이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의 단세포 구조의 원핵생물은 DNA와 세포가 동시에 나뉘는 분열 생식을 하므로 자손의 형태에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최소 생명의 구조는 하나의 세포이다. 세포 이전에 DNA세계 가설 또는 RNA세계 가설을 주장하는 가설 등은 생명의 부품이 자연에서 저절로 조립되었다고 가정하는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2011)가 제안한 세포내 공생설에 의하면, 미토콘드리아 또는 엽록소라는 소기관을 가진 원핵생물이 그를 잡아먹은 원핵생물의 몸 안에서 공생하다가 한 몸이 되어 진핵생물로 진화했다. 그리고 미토콘드리아 진핵생물이 다세포 동물계로 진화했고, 엽록소 진핵생물이 다세포 식물계로 진화했다.

 

현재에도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소를 가진 원핵생물은 살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크기가 거의 같은 다른 원핵생물에게 잡아먹혀서 공생하다가 진핵생물이 되었다는 주장은 황당하지 않는가? 공생설을 실험해본다면, 그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산 채로 비슷한 크기의 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잡혀서 뜯어먹히면 소화되고 만다. 그리고 세포를 붙여놓는다고 다세포 생물이 되지는 않는다. 진화론은 생물을 늘어놓고 스토리를 창작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실험으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는 허구적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억지 주장을 하는 진화론의 가설들을 하나씩 반박해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는 창조론을 올바로 세우는 길이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원핵생물이나 진핵생물에 대해서는 모세에게 알려주지 않으셨다.하나님은 겨자씨보다 작은 그것들을 알게 되는 때에 크신 하나님의 창조도 알게 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닐까?

 

 

5. 넷째 날의 창조: 행성들의 미세조정

 

1) 광명과 궁창

 

넷째 날의 창조 톨레도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מְאֹרֹת בִּרְקִיעַ הַשָּׁמַיִם לְהַבְדִּיל בֵּין הַיֹּום וּבֵין הַלָּיְלָה וְהָיוּ לְאֹתֹת וּלְמֹועֲדִים וּלְיָמִים וְשָׁנִים׃)고 명령하셨다(1:14). 여기서 광명으로 번역된 메오르트’(מְאֹרֹת)가 궁창에 있다는 동사는 미완료동사 예히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룬다는 동사는 하우’(הָיוּ)를 사용했는데 완료동사이다. 두 문장의 동사를 연결해 보면, 하나님이 이미 어딘가에서 준비해두셨던 메오르트(광명체들)에게 궁창에 있으면서 주야를 나누어 징조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는 일을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모세는 1:15에서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 동사들을 반복 사용하여 그런 사실을 다시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넷째 날 광명체의 미세조정 이전의 날자 길이와 우주의 나이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모세가 본 환상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실제 광경과 다름없었으나, 모세는 그가 본 환상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이해하고 기록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왜 히브리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는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역된 번역성경의 문자들을 읽고 쓸데없이 과학과 싸우면서 창조 6일 하루 24시간설과 우주연대 6,000년설을 주장하여 기독교를 과학도 모르는 무지의 종교로 비난받게 만드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땅에서 눈을 들어 하늘의 궁창에서 비치기 시작하는 광명들을 보았다. 모세는 그때 처음으로 지구에 비추기 위해 큰 광명인 해가 떴다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밤이 오면서 초생달과 무수히 많은 별들이 뜨는 장면까지 환상으로 보았다. 모세가 보았던 환상을 생각하면서 이 구절을 읽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창조 톨레도트를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의 문자대로읽고 문자대로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문제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창조 톨레도트의 ’(하루)의 길이 문제이다. 문자적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태양의 빛에 의한 낮과 밤의 24시간 하루는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명확하게 근거가 없는 해석의 오류이다. 그 해석의 오류는 첫날 오르의 빛과 넷째 날 땅에 비친 메오르트의 빛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해결된다. 그 해석의 오류는 첫날과 셋째 날까지 낮의 빛은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해석한 대로 주 하나님의 빛이 땅에 임재하신 것이라고 바꾸면 된다. 첫날 낮의 오르는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고, 넷째 날의 빛은 메오르트’(발광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셋째 날까지의 낮들은 주 하나님이 모세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시간이고, 밤들은 모세가 그런 환상들을 보지 않은 시간으로 이해가 바꿔진다.

 

둘째는 문자적 근본주의자들이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약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우주론이다. 젊은 우주론은 영국교회 주교 제임스 어셔의 해석을 근거로 한다. 그것은 하루 24시간 6일 창조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아담 자손들의 족보를 따라 연수를 계산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 기원전 4004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젊은 우주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우주는 약 138억 년 전 빅뱅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이라는 오랜 우주론을 과학적 상식으로 알기 때문이다. 젊은 우주론과 오랜 우주론은 천동설과 지동설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두 우주관의 차이를 알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창조 톨레도트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모세가 서술한 것일 뿐이고,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문제의 해답은 저절로 나타난다.

 

2)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옛 하늘과 옛 땅

 

넷째 날 창조 톨레도트에서 1:16-18은 모세가 그의 설명을 덧붙여놓은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모세는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과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은 각각 해와 달이고, 그밖에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기 위해 별들도 있다고 서술했다. 하나님은 땅의 시간을 하늘에 있는 광명들이 주관하게 하셨다. 병들은 작은 광명이 주관하는 밤에만 보이게 하셨다. 여기에서 주관하다는 뜻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멤쉐레트’(לְמֶמְשֶׁלֶת)는 왕의 통치권 또는 소유권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땅의 하루가 24시간으로 조정된 땅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넷째 날 지구에 임재하신 하나님이 생태계를 조성하시기 위해 우주와 태양계의 운행을 미세 조정하셨다는 성경적 사실에 의하여 창조 6일의 하루가 첫날부터 24시간이라는 설과 우주 나이가 약 6,000년이라는 근본주의적 주장들은 이제 기독교에서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겨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라키아의 해석도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땅에서 관측하면, 모든 광명체는 대기권인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주선이 탐사해서 얻은 관측자료가 라키아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런 관측자료를 본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가 실제로는 대기권이고,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따라 이해한 라키아는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주와 지구의 나이 6,000년설 논쟁은 그만 종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기독교에 남아 있는 과제는 이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버리는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만들어낸 라키아하늘이 있고, 하나님이 아담을 심판하시면서 저주했던 땅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옛 하늘이며 옛 땅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기억하거나 마음에 두지 말라고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했다(65:17).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니, “이전 것”(הָרִאשֹׁנֹות:하리쇼노트)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이전 것이 바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있는 태초의 하늘과 땅(1:1)이다. 그런 사실은 하리쇼노트에서 정관사 ’(הָ)를 뺀 리쇼노트라는 말이 창세기 첫 마디에 나오는 베레쉬트’(בְּרֵאשִׁית)에서 전치사 ’(בְּ)를 뺀 레쉬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며, 따라서 태초의 하늘과 땅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모세의 잘못된 이해를 따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그런 뜻으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문자주의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옛 하늘과 옛 땅을 잊어버리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구에 임재하여 인간을 위한 생태계의 창조 사역을 하셨고, 다시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탄했다(1:5). 그래서일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시 주어졌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라는 계시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을 주셨다고 증언했다(벧후3:12-13). 요한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고,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고 증언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 만들어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기억하거나 마음에 생각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

 

6. 다섯째 날의 창조: 물고기와 새

 

모세는 창조 다섯째 날 하나님이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יֹּאמֶר אֱלֹהִים יִשְׁרְצוּ הַמַּיִם שֶׁרֶץ נֶפֶשׁ חַיָּה וְעֹוף יְעֹוףֵף עַל־הָאָרֶץ עַל־פְּנֵי רְקִיעַ הַשָּׁמָיִם׃) 하시니, 물에서 번성하는 어류들과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이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서술했다(1:20). 기독교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 생물)를 종류별로 창조하셨다는 서술을 의심 없이 믿는다. 창세기에 의하면 네페쉬 하야에 속하는 것들로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어류와 조류, 그리고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땅의 생물(1:24)이 있다.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식물은 네페쉬 하야로 취급되지 않는다.

 

조르쥬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고대 지층에서 발견된 생물 화석들이 동물군에 따라 해부학적 구조가 다른 것을 발견하여 고생물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동물철학(1809)에서 발표한 용불용설에 의한 진화론을 맹렬히 비난했던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생물의 종()들이 창조 이후에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대가 다른 지층에서 격변의 흔적을 다수 발견하고, 제임스 어셔 주교의 기원전 4004년 창조설을 강력히 비판했다. 퀴비에가 죽은 뒤,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유물론과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했다. 그것들이 합세하여 과학적 무신론으로 발전하면서 그 위세는 더욱 강력해졌고, 기독교는 그 세력에 밀려 점점 쇠퇴했다.

 

현대 고생물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에 지배되어 진화론 지지에 앞장서는 학문이 되고 있다. 그들이 그려놓은 생물의 계통수를 보면, 바다에서 하나의 원핵생물이 화학작용으로 생겨나서 번성했고, 그 가운데서 진화한 진핵생물이 다세포의 수중 동물과 수중 식물로 계속 진화했다. 수중 생물이 육지로 올라와서 육상 생물로 진화했다. 그들은 조류가 쥐라기 시대에 깃털 공룡이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생물은 진화하면서 새로운 종으로 분기하게 되고, 분기한 종은 새로운 공통조상의 계통을 따라 계속 진화한다. 그들은 지구 생물 최고의 공통조상을 LUCA(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라고 이름 지었다.

 

근대 생물 분류학의 원조 칼 린네(Carl von Linnaeus, 1707-1778)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는 생물을 식물과 동물 2계로 나누고 각계를 5계급(>>>>)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의 분류 체계는 1977년 칼 우즈(Carl Woese, 1928-2012)가 제안한 각 생물의 리보솜 RNA 염기서열에 따라 고세균을 독립된 으로 분류(진정세균역, 고세균역, 진핵세균역)하고, 그 밑에 6(진핵세균역에 4-원생생물계, 동물계, 식물계, 균계, 그리고 진정세균계, 고세균계)로 나눈다. LUCA는 그동안 계통별로 8계급(>>>>>>>)으로 진화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과학적 무신론에 맞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문제는 LUCA가 물질에서 화학작용으로 발생했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론하는 것이다. 둘째 문제는 생물의 종류별 창조를 부정하고 진화론을 수용하는 경향이다. 기독교는 1860년 옥스퍼드 논쟁에서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 1805-1873) 주교가 다윈의 불독으로 불리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에게 패배한 이후, 그 문제들에 대해서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아직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기독교를 말살하고, 그들이 우리우주의 지배자가 되려고 한다. 기독교가 그런 위기에 몰린 것은 과학은 계속 발전했던 데 반해, 기독교의 창조론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사로잡혀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통 조상(LUCA)으로부터 분화된 3(도메인)의 진화 계통도

                                    (박테리아역: 왼쪽, 고세균역: 중앙, 진핵생물역: 오른쪽) *그림출처:

https://www.chegg.com/homework-help/examine-phylogenetic-tree-life-figure-ways-differ-tree-figur-chapter-17-problem-3rq-solution-9780133984804-exc

 

그 틈새 사이로 진화론을 수용하는 기독교인이 늘어난 것에도 교회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기독교가 미래에도 존속하려면, 과학적 무신론이 사실이 아닌 허구적 가설임을 입증하는 한편,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과학적 사실에 맞게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설명과 반론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근본주의자들처럼 교회에서 유신진화론을 직접 비판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유신진화론은 기독교 창조론이 과학적 무신론에 승리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대적인 과학적 무신론을 내버려 둔 채, 반쪽이나마 믿음을 가진 형제를 공격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만약 그들 중에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18:6, 9:42).

 

알렉산더 오파린이 생명의 기원(1936)에서 주장한 것처럼,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지구 생명이 원시지구의 바다에서 물질의 화학적 진화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파린이 장담했던 인공생명의 제조가 성공하지 못하면서 과학적 무신론은 점차 이론의 근거가 무너지고 있다. 과학적 무신론을 지지하지 않는 과학자들은 유신진화론 또는 외계 생명 기원설을 주장한다. ‘외계 생명 기원설의 대표적 인물은 1953DNA 구조를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크릭 (Francis Crick, 1916-2004)이다. 유신진화론을 대표하는 과학자는 인간게놈 연구와 DNA 지도를 만든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던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S. Collins, 1950- )이다. 콜린스는 신의 언어(2006)에서 바이오로고스(biologos)설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지구에서 생명이 물질에서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던 과학자들이다.

 

크릭은 생명의 개념을 뇌신경에서 발생하는 의식현상으로 보았으나, 그 기원에 대해서는 지구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 생명체의 것으로 주장했다. UFO 등의 외계 생명체 지구 도래설을 믿고 있는 자들이 그의 추종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무신론을 부정하고 있지만, 창조자의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 점에서 지적 설계론도 같은 계열로 볼 수 있다. 콜린스는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지휘하면서 DNA 구조를 연구한 뒤에 지구 물질이 화학작용으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주장하는 바이오로고스설은 신이 진화의 방법으로 생명을 창조한 이후에 방치했다고 보는 유신진화론적 견해이다. 사도 요한의 창조주 지구 임재설은 창조론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3가지 가설들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기독교적 관점이다.

 

7. 여섯째 날의 창조: 땅의 생물과 인간

 

1), 땅의 생물

 

모세에 의하면 창조의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וַיֹּאמֶר אֱלֹהִים תֹּוצֵא הָאָרֶץ נֶפֶשׁ חַיָּה לְמִינָהּ בְּהֵמָה וָרֶמֶשׂ וְחַיְתֹו־אֶרֶץ לְמִינָה)하시니(1:24), 그대로 되었다ּ(וַיְהִי־כֵן). 하나님이 생물을 종류대로창조하신 사실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מִינָ)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창조 톨레도트에서 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을 종류대로분류하는 단위이다. 하나님은 그가 종류대로 창조하신 네페쉬 하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다(1:22).

 

그러나 칼 우스의 분류체계에 의한 현대 생물학은 의 의미를 무시하고, LUCA를 지구 최초 생물로 가정하고 그것의 진화 계통과 상호 유연관계를 따라서 8계급의 생물 계통수를 그려놓았다. ‘생물 계통수에서 3역에 속하는 원시 생물은 당시 모세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굳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런 것들은 현미경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발견되었다. 창조 톨레도트 셋째 날에 창조된 식물계와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창조된 동물계는 생물 계통수의 둘째 단계인 6계에 처음 나타나서 2계를 차지한다. 6계의 나머지 4계는 모세가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과학적 무신론의 영향을 받은 현대 생물학의 생물 계통수는 생물 세포의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생산하는 RNA의 진화 계통에 기준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맨눈으로 본 분류체계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LUCA를 제안한 칼 우즈의 주장을 검토해봐야 한다. 검토해야 할 포인트는 칼 우즈가 DNA의 유연관계를 따라 생명 계통수분류체계를 만들어낸 데이터의 작성과 그것의 처리 프로그램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고 하면 데이터 작성과 처리 프로그램의 방법에 따라 창조냐, 자연발생이냐의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당사자들 사이에 상당한 이해의 충돌이 예상되므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모두 협력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사실 분류의 틀이 같지 않다면,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합리성이 없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의 사실성을 검토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창조론에서 의 개념과 분류체계에서의 위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생물의 종류를 의미하며 창조론적 4단계 분류체계 최하위에 위치한다. 모세에 의하면 셋째 날에 땅에서 만들어진 식물계에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 등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아래에 이 있다. 동물계에는 다섯째 날에 만들어진 바다의 큰 괴물과 떼지어 사는 어류, 그리고 날개 있는 조류,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땅의 육축과 기는 것과 짐승 등이 있고, 그 아래에 이 있다. 그리고 특별하게 창조된 인간에 대해서는 종류대로따로 창조하시지 않았으므로 특별하게 분류체계 최상위에 배치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4단계의 을 린네의 분류체계에 적용하면, 전체적으로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로 나눌 수 있다. 3개의 의 하위에 바다, 육지, 공중 등의 서식지에 따라 의 단계가 있고, 의 하위 단계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구분하신 대로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종류대로의 단계에 해당한다. 칼 우스의 분류체계와 비교하면, 8계급에서 모세가 보지 못했던 3역을 제외한 상위 4단계는 계>>>목이다. 그렇다면 4단계 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종류대로창조하신 의 단계에서 다양하게 발현하는 표현형을 반영하기 위해 하위 분류체계를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면, 칼 우스가 린네의 5단계 분류체계를 8단계로 확장한 것처럼, 확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종류대로의 분류체계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 정확한 범위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생물학이 해야 할 몫이다.

 

현대 생물학의 분류체계에서 의 개념은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species)을 설명하는 데서 발견된다. 현대 생물학에서 종은 교배하여 생식 능력이 있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개체의 집단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에는 하위 계급(아종, 변종, 품종)을 둠으로써 종내(種內)의 개체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표현형의 특성을 분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생물학적 종의 기준을 살펴보면, 그것은 의 기준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학적으로 더 세밀한 분류를 위해 범위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런 일은 과학에서 알아서 하는 일이다. 다만 모세에게 보여주시지 않았던 미생물계를 추가해서 4계로 나누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생물학적 생식장벽은 하나님이 생물을 의 단위로 번성하도록 만들어놓으신 장치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은 결국 현대 생물학의 분류체계에서 종의 개념이 적용되는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이를 부인한다면, 그들이 스스로 정의한 종의 개념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창조론적 생물 분류표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

미생물계

육상식물

바다

동물

수생

동물

비행

동물

 

육상동물

인간

보이지

않는

것들

 

채소

과목

 

바다

짐승

물 생물

조류

육축

기는 것

짐승

 

 

(‘’)

각 종류

각 종류

 

 

 

그러한 종과 종 사이에 생식장벽(reproduction barrier)이 있어서 어느 종이 다른 종의 자손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이다. 분류체계를 어떻게 만들어도 하나님이 만드신 생식장벽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그 증거로 사이에서 중간 또는 중간종(中間種)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화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다윈의 진화론은 종의 하위 계급에서 발현되는 다양성의 차이- 말하자면 종의 하위 계급인 아종, 변종, 품종 등의 차이를 진화의 발생으로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므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현대 생물학에서 생식장벽현상을 애써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현실에서 발견되지 않는 중간종을 화석에서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일에 힘쓰고 있다. 화석으로 발견된 생물의 경우에는 뼈와 형태의 구조가 유사한 개체를 비교하여 종을 분류한다. 그런 분류방법에는 연구자의 주관에 따라 종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결함이 있다. 그래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형태가 약간씩 다른 화석들을 모아서 중간종을 단계별로 상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중간종 화석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물질에서 자연발생한 LUCA가 오늘날의 생물계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생물의 계통수가 사실이라면, 물질에서 생명이 자연발생하는 화학적 메커니즘(chemical mechanism)과 종간(種間)의 진화 과정에서 생식장벽을 뛰어넘는 중간종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메커니즘과 살아있는 중간종은 발견된 적이 없다. 바로 이 두 가지에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무신론을 반박할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 숨어 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그런 사실을 숨기려고 DNA RNA 이론과 유전법칙을 왜곡하는 이론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이론들을 반박하는 연구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2),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에 인간 아담을 만드시는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יֹּאמֶר אֱלֹהִים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וְיִ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בְּהֵמָה וּבְכָל־הָאָרֶץ וּבְכָל־הָרֶמֶשׂ הָרֹמֵשׂ עַל־הָאָרֶץ׃)고 선포하셨다(1:2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처럼 특별하게 땅과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목적과 권한을 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인간의 창조목적에 관한 서술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 할 부분이다.

 

이 구절에서 한글성경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번역한 것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1인칭 복수 대명사로 표현하시고, ‘나아세’(נַעֲשֶׂה: ‘우리가...만들고’)라는 복수 동사를 쓰셨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엘로힘은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복수 명사이지만, 성경에서는 단수 동사를 써서 단수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를 줄여서 직역해보면,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들의 형상과 우리들의 모양대로 사람(단수)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사람의 복수)이 땅과 생물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구조를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나아세동사의 목적어 아담’(인간, 사람)은 뒤에 나오는 웨이레뚜’(וְיִרְדּו: 다스린다) 복수 동사의 주어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만든다의 목적어인 아담’(사람)은 단수인데, 하나님은 단수 아담을 주어로 하는 웨이레뚜’(다스린다)는 동사는 복수형으로 쓰셨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단수에서 갑자기 복수로 바뀌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의문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라고 서술했다(1:27). 여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아담에게 단수 명사 첼렘’(צֶלֶם: 형상)을 반복 사용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한 인간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토’(אֹתֹו)라는 3인칭 단수대명사를 남자와 여자 앞에 붙여놓았다(한글 번역에서는 생략되었음). 그리고 3인칭 복수대명사 오탐’(אֹתָם)을 덧붙여 그들을 창조하셨다’(בָּרָא אֹתָם׃-이 부분도 한글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단수의 오토를 남자와 여자로 나눠서 복수의 오탐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이 된다. 모세는 앞에서 단수 미완료동사 이바라’(יִּבְרָא)를 사용했으나, 뒤에서 창조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을 각각 같은 의미의 단수로 표현하기 위해서 빠라’(בָּרָא: 단수 완료형)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 하나님이 1:26에서 웨이레뚜동사를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이유와 그 말씀에 대한 구조적 의문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복수로 창조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거꾸로 남자와 여자를 합쳐서 단수 동사로 표현했다. 여기에 아무런 의문이 없을까?

 

기독교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하나님이 삼위일체로서 동일본질(consubstanialis)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삼위일체의 경륜적 일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 아들도 그와 같이행한다고 말씀하셨다(5:19).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1:27)에서 삼위 하나님 중에서 인간을 직접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느 분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의문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은 요한의 해석에 따르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1:3). 요한에 의하면 그분은 창조 톨레도트에서 첫날에 빛으로 이 땅에 임재하셔서 창조를 실행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요한의 해석과 다른 것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이 아니다. 그런 해석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과 유대교적 창조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손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이 창조계획에서 선포하신 인간과 실제 창조된 인간은 다르다. 그런 사실은 1:26에서 인간의 창조계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들의 형상과 우리들의 모양대로라고 하신 말씀과 1:27에서 모세가 창조된 인간에 대해 설명하는 서술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1:27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는 서술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모양대로는 빠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창조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직접 창조하신 하나님은 키데무테누(모양대로)’를 반영하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뻬첼레모)만 반영하고, 대신에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창조하셨다. 이런 서술이 단순한 모세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까?

 

히브리어 사전과 성경의 용례를 보면, ‘형상’(첼렘)은 겉모양 또는 우상 등을, ‘모양’(데무트)은 원형을 닮은 것들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명령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형상은 대개 남성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에게 여성적인 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세계에 여성은 아예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그의 데무트를 주시는 대신에 여성을 주셨는가? 인간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에 하나님의 데무트대신에 여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에 의하여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창조된 인간의 정체성이다. 이와 관련한 인간의 정체성 문제는 앞으로 신학적 연구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모세에 의하면 인간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이 온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계획하셨다. 여기서 3인칭 복수 대명사 그들은 처음 창조된 남자와 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포괄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아는 자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신 인간과 그 자손들의 역사적 행적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왜냐고 한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각종 생물과 인간에게는 그들의 DNA에 각각의 생명정보가 들어있고, 그 생명정보가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정보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큰 죄악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가 생물의 종류마다 다르고, 그것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 상식이 되어 있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그 자손들도 데무트가 결여된 DNA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그의 DNA데무트가 결여된 탓으로 죄악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는 것은 죄악이 된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과 죄악이 관영함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서술했다(6:5).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 추종자들은 현실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고, 죄악에 빠져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세가 1:27에서 하나님이 처음 계획과는 달리 데무트를 빼고, ‘첼렘만으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창조하셨다고 서술한 것을 읽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DNA데무트의 결여가 죄악의 본성으로 작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의 자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오히려 정죄하고 살해한 것이다. 그들의 자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했고, 현대사회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이 그런 사회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되돌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죄악을 가리려는 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외식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4), 하나님 최초의 섭리: 원복음을 주시다

 

모세는 1:28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וַיְבָרֶךְ אֹתָם אֱלֹהִים),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וַיְבָרֶךְ אֹתָוַיֹּאמֶר לָהֶם אֱלֹהִי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אֶת־הָאָרֶץ וְכִבְשֻׁהָ וּ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כָל־חַיָּה הָרֹמֶשֶׂת עַל־הָאָרֶץ׃)고 말씀하셨다고 서술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다섯 가지의 복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 주신 오복의 말씀을 원복음이라고 불러야 한다. 오복(五福) 중의 삼복(三福)은 다섯째 날 창조된 어류와 생물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러나 동물에게 주신 삼복에 추가해서 인간에게만 주신 두 가지 복-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은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목적으로 밝히셨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첫 말씀으로 들려주신 원복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인간에게 복으로 바꿔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원복음을 누리는 권리와 창조목적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는 남자와 여자의 자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인간에게 오복을 누리는 권리와 그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행하는 의무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정해 놓으신 창조질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원복음으로 이 땅에 그의 창조의 질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시작하셨다. 원복음은 그 조건을 이행하는 인간에게는 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죄의 원천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원복음은 권리와 의무라는 양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특히 그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복을 공짜로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실행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땅 위에 건설된 인류사회는 인간으로 충만한 되었지만, 그것을 다스리는(정복한) 자는 대개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도 대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 의하여 수행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이다.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인간 앞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로 가느냐, 아니면 죄악의 길로 가느냐는 선택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다. 이 땅에 두 번이나 임재하셨던 창조자가 가르쳐주셨다. “회개하라!”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그의 창조를 보여주시고 기록하게 했던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전부 서술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과정에서 중요한 장면들을 골라서 모세에게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장면들만을 보고 창조 톨레도트를 서술했다. 그러므로 모세가 본 장면들 사이에 있었던 시간의 간격을 인간의 지식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쓸데없는 오류를 더할 뿐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기록하게 하신 창조 톨레도트의 목적은 그가 만물의 창조주이심과 그의 창조목적을 인간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보면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환상으로 보고, 듣고 기록한 모세의 서술 사이에 이해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 3,500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가서 모세 시대의 히브리어 용어의 개념과 모세의 서술 구조를 현대인의 과학적 눈으로 조명해봐야 한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할 당시 히브리인과 히브리어에는 현대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과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빛(오르)과 흑암(호셰크), 궁창(라키아), 광명(메오르트), 생물의 종류(), 형상(찰렘)과 모양(데무트), (바라크) 등의 주요 명사와 동사의 시제, 그리고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그런 이해가 없이 읽는다면, 그의 해석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나 유대교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현대사회에서 선교와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반론에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적 관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관점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비롯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만이 주 하나님의 창조와 그가 주신 원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다.

 

5), 먹거리를 정해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에게 원복음을 주신 후에 인간과 이 땅의 모든 생물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정해주셨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1:29)고 말씀하셨고,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에게는 모든 푸른 풀”(כָּל־יֶרֶק עֵשֶׂב: 콜 에레크 에셰브)을 식물로 주셨다(1:30). 하나님이 오클라’(אָכְלָה: 먹거리)를 정해주시니 인간과 모든 생물은 각자 그들의 먹거리를 찾아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가 창조하신 인간과 모든 생물의 생명활동에 가장 필요한 에너지를 식물이 만든 유기물 섭취를 통해 획득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에게 무릇 산 동물을 먹거리 식물로 추가해주셨다(9:3). 노아의 가족 네 쌍은 현대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이하 인간을 포함한다)의 물리적 구조는 약 70%의 물을 제외하면, 세 가지 생화학적 유기물 분자-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와 극소량의 무기물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에 지구에는 무기물밖에 없었다. 생태계에 유기물이 없으면 생물이 살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이 서둘러 식물계를 먼저 만드신 것도 광합성을 통하여 무기물을 유기물로 바꿔 공급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생물의 몸체는 모두 유기물로 만들어져 있다. 초기 지구의 유기물은 대개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처음에 생겨난 식물의 몸체는 하나님이 만드신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생물은 먹거리를 섭취하여 생명활동의 에너지를 획득한다. 그 과정을 현대 생물학에서는 metabolism(신진대사, 물질대사 또는 대사)이라고 한다.

 

생물이 물질대사를 통해 생명활동에 필요한 영양소와 에너지를 얻는 형태를 보면, 식물은 무기물질을 섭취하여 광합성 작용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독립영양체다. 그러나 동물은 섭취한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분해하여 저분자 화합물질로 바꿨다가 다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로 바꾸는 종속영양체다. 물질대사 과정에는 이화작용(異化作用 catabolism)과 동화작용(同化作用 anabolism)이 있다. 이 과정에서 생물의 몸 안에서는 엄청나게 다양한 유기 화합물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화작용은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섭취하면, 소화기관에서 분해하여 저분자 화합물인 영양소를 얻고, 찌꺼기는 다시 밖으로 배출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탄수화물, 지질, 단백질과 같은 큰 유기물 분자를 단당류, 지방산, 아미노산과 같은 작은 단위로 분해한다. 동화작용은 이화작용을 거쳐 획득한 저분자 화합물을 자기 생명활동에 필요한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고분자 화합물로 다시 바꾸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세포의 증식 등에 필요한 분자들을 합성하기 위해 복잡한 효소 반응이 일어난다. 식물의 광합성과 동물이 아미노산으로 단백질을 합성하여 자가 세포의 유지와 성장, 그리고 생명 활동에 필요한 유기물 분자를 제조하는 물질대사의 방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주신 생명 정보는 각 세포 안에 있는 DNARNA에서 발현되고, 각 세포는 DNA를 복제하여 새 세포에 공급한다. 생물은 그런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생겨나는 DNA 변이를 자체적으로 수선하는 기능이 있으며, 모든 생명 정보는 자손의 DNA에 그대로 전달된다. 생명 정보를 가진 DNA는 리보솜에 있는 RNA에 지시하여 단백질을 만들고, 번식기능을 작동하게 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RNA 유전체만 가진 바이러스는 자체 내에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이러스는 반드시 다른 생물의 세포에 침투해서 그 생물의 DNA에 역전사를 통해서만이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자손을 증식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인 DNA 구조와 기능을 알게 되면, 생명 정보가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물론과 진화론이 결합한 과학적 무신론을 반박할 수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모세 시대의 히브리인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반론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 나가면서

-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과 기독교의 계시

 

모세는 창조 톨레도트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וַיַּרְא אֱלֹהִים אֶת־כָּל־אֲשֶׁר עָשָׂה וְהִנֵּה־טֹוב מְאֹד)고 찬양하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הַשִּׁשִּׁי׃ ף)고 마지막 후렴구를 서술했다(1:31). 모세가 서술했던 하나님의 6일 창조 톨레도트는 이로써 끝났다. 필자는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를 바탕으로 진행했던 연구 결과를 알파 창조론으로 명명하면서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하고, 그 바탕 위에서 기독교의 현실과 미래의 계시를 바라보고자 한다.

 

1. 창조 톨레도트는 모세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진행하신 창조의 장면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것들을 그의 관점에 따라 서술한 것이다.

2.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창조 톨레도트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유대교에 전해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수준의 이해를 벗어날 수 없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창시한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을 개혁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를 비롯한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그런 관점을 가진 기독교인은 구약성경을 결코 문자적으로 읽지 않는다.

4. 창조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현대 과학적 사실 사이에는 상위(相違)한 점이 전혀 없다. 그러나 모세의 관점으로 서술된 부분에는 상위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서술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5. 기독교 창조론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그의 복을 누리면서 그의 창조목적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창조론은 창세기 1장의 범위를 벗어날 이유가 없다. 기독교 창조론을 아는 기독교인의 사명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지배하는 땅에서 선교하기 위해 과학적 무신론의 허구성을 반론하는 일도 해야 한다.

6. 특히 칼 우즈가 DNA의 유연관계를 따라 생명 계통수분류체계를 만들어낸 데이터의 작성과 그것의 처리 프로그램을 검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약 그 검증에서 LUCA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의 선교적 가치를 세계 교회에서 나온 100년 분량의 설교와 기도보다 더 크게 평가하실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는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그 말씀은 그에 앞서 세례 요한이 했던 말과 똑 같다(3:2).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십일을 금식하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다(4:9).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기독교 사역을 시작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가 만들고 시복(施福)하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마귀의 것이 되었으므로 그것들을 회복하여 그의 나라로 만드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면서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있는 천하만국의 과학적 무신론자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태초의 말씀이었고, 생명의 빛이시고, 만물을 지으신 주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창조목적과 원복음은 주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목적에 따라 살지 아니한 죄를 지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외친 말씀은 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행하여 마귀의 것이 된 천하만국을 주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하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최우선으로 실행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회개하고 마귀가 지배하는 천하만국을 그리스도의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들은 주 하나님은 옛 하늘과 옛 땅을 불살라버리시고,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실 때,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주 하나님은 그곳에서 창세 이래 그의 창조목적을 알고 실행했던 인간들을 선택하여 새 하늘과 새 땅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영생을 누리는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다.

 

 

참고 문헌

 

허정윤. 과학과 신의 전쟁. 서울: 메노라, 2017.

 

Collins, Francis. 이창신 역. 신의 언어 . 파주: 김영사, 2009.

Darwin, Charles. 이민재 역. 종의 기원 . 서울: 을유문화사, 2008.

Hawking, Stephen and Mlodinov, Leonard. 전대호 역. 위대한 설계. 서울: 까치, 2010.

Marx Carl and Engels, Friedrich. 남상일 역. 공산당 선언. 서울: 백산서원, 1989.

Oparin, Alexander. 柘植秀臣. 生命起源. 東京: 岩崎書店, 1955.

 

조덕영. “창세기 1, 어떻게 해9석할 것인가?”. [창조론 오픈 포럼] 141(2020.1).

Woose, Carl and Fox, George E.. “Phylogenetic structure of the prokaryotic domain: the primary kingdoms”

(구글 검색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43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