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흑암전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알자.

heojohn 2008. 11. 9. 11:26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알자.  *이 글은 [흑암전설]의 창조론을 발표용으로 축약한 것이다.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우리 인간의 생명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으십니까? 중동지방의 어떤 고대 문서에는 노예 두 명의 생명은 평민 한 사람과 같은 값이고, 평민 두 명은 귀족 한 사람의 생명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왕조시대에 왕은 자기의 목숨의 가치를 얼마라고 생각했을까요? 최소한 자기 왕국에 속한 국민 전부의 생명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절대 왕권시대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이 국가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근대에 들어와서도 프랑스 혁명 직전에 짐은 곧 국가다 하는 유명한 말을 했던 프랑스 왕이 있지요. 모든 사람이 이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왕의 면전에서 반박을 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당시 생사여탈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한 말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에서 비위에 거슬리던 선비들은 생매장되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면 인간세상에서 인간의 생명 가치는 시대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인간의 생명이 무시되는 경우를 보면,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고 비난합니다. 이 말은 살아 있는 사람에도 가끔씩 쓰입니다. 요즈음 같은 불황에 월급쟁이가 목숨 같이 여기는 직장에서 해고될 경우에도 이 말을 쓰는 것이지요. 사람이 가치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개죽음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또 헌 신짝이나 초개 같이 목숨을 버렸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국가를 위해 순국하는 경우에나, 아니면 다른 어떤 고상한 가치를 위하여 죽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순교자의 경우도 그런 것이겠지요.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목숨을 한낱 하찮은 짐승이나 생명가치가 없는 것에다 비유하는 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고대 중동지방의 문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구약성경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등가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지요. 옛날 왕정제도 아래에서는 계급에 따라서 목숨의 가치가 차등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현대에는 대개의 나라들의 법에서 살인은 보상금을 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범죄로 규정합니다. 오히려 보상보다 처벌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 현대 법정신의 흐름이지요. 인간의 생명은 돈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존중해야 할 플러스알파라는 무엇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서구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 정신의 기본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사회에서 사는 한 누구도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인간의 생명가치는 동일하다는 가치관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눈구나 태어나서 자연사할 때까지 남이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서, 그런 가치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인간생명의 본질은 이 땅에서 육신을 낳아준 인간부모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부터 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신성한 존재에게 인간생명과 권리의 근거가 있다고 보는 것이 만인평등의 인권을 주장하는 천부인권설이지요. 이와 달리 왕들을 위해서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기도 했었지요. 인권이고 왕권이고 모두 하늘에서 주었다는 것인데, 어떤 존재가 있어서 준 것일까요? 이러한 견해를 다 살피자면 여러 가지 설과 우여곡절 이야기가 많은데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합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는 인간의 바탕심리를 알아보고, 이어서 생명가치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동양사상인 태극론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주의 무신론에 대한 반론

그러나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진화론을 잠깐 반론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살펴보면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존환경 안에서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문제가 생기거나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새로운 생존환경을 만들어 내고 적응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문제에대해서도 논리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해석은 새로운 생존환경을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됩니다.

진화론도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한 이후 ‘생물은 자연발생된 것이며, 자연의 선택 또는 도태의 과정에서 진화해 왔다’는 진화론이 생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등장했습니다. 그 때까지 믿었던 ‘모든 물질과 생명은 신성한 창조주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종교적 환경이 도전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에 뒤이어 과학주의가 대두하는 시기였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이 크게 발붙일 여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다윈 자신은 영국 성공회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까지 졸업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새로운 해석, 곧 진화론에 대해 사회적 반향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무신론을 세계관으로 가진 인간들이 다수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진화론은 알다시피 무신론이지요. 애초부터 있었던 물질적 우주자연이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우연’히 원시생명을 만들고, 모든 생명들은 그 원시생명에서 진화한 자손들이라는 주장입니다. 당시 유럽지역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과 개혁파가 서로 종교전쟁을 벌이는 통에 사회가 황폐화되고 있던 저주받은 시기를 겪은 뒤였습니다. 기독교 종교에 회의감이 일던 분위기에 폭풍우가 몰아친 겁니다. 진화론을 이해할 만한 사람들은 당연히 종교를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 폭풍에 휩쓸려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갔지요. 없다고 하는 신을 믿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로 인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사회적 환경도 엄청나게 변하게 되었지요. 그러한 세계관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각종 무신론 인본주의 운동의 본류가 된 것입니다. 세계적 재앙을 가져온 마르크스 공산주의와 히틀러의 파시즘 인종주의가 모두 이를 바탕으로 발전했던 이론이지요. 우리나라도 이런 공산주의에 의한 재앙을 피해 나가지 못했지요. 우리가 진화론이 잘못된 이론임을 철저히 검증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의 저자이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리차드 도킨스’가 ‘종교는 독이고 바이러스’라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진화론이야말로 인간의 사회적 생존환경에서 독이며 바이러스입니다. 진화론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 레닌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산주의가 아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흑색 궤변인 것입니다. 진화론과 같은 무신론 인본주의는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한 덩어리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론입니다. 진화론주의 무신론자들은 처음에는 인간성의 회복이니,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미사여구로 인간을 추켜세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신론주의 진화론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집권세력이 되면, 자신들 이외의 인간들을 개돼지처럼 막 취급합니다. 권력을 잡은 그들의 안중에는 다른 인간들은 진화론 이론에서 말하듯이 경쟁에서 도태된 하등동물일 뿐입니다. 그들과 그들 자손만이 자연의 선택을 받은 우등한 인간일 뿐이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처음에는 다윈이 어설프게 주장했던 가설인데,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일부 과학자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론적인 보완을 거듭하면서 잘못된 몸집을 키워 왔습니다. 물질적 우주의 빅뱅에 대해서는 현대인들이 대개 받아들이는 과학이론이지요. 우주자연에서 원시생명 문제는 기원논쟁의 핵심입니다. 진화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잠깐 봅시다. 빅뱅 때의 초고열은 우주에 물질적 생명의 존재가능성을 완전히 없앴다고 봐야지요. 그럼에도 그 이후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원시 스프가 만들어지고 그것에서 어느 날 갑자기 생명체가 튀어나왔다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원시 스프 가설은 그 뒤에 파스퇴르 실험에서 부정되었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진화론자들 입장에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우연이라는 가설을 새로 하나 더 만들어냈지요. 그리고는 긴 시간 동안에 우연히 생명이 발생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우연한 생명발생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무슨 사건이 우연히 일어나자면, 사건에 등장하는 것들은 모두 어디에선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백보를 양보해서 우연히 생명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런 환경에서는 금방 죽고 말겠지요. 그러니까 먼저 생명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진화론자들의 설명이 없습니다. 자연선택이라는 것도 선택할 대상이 먼저 있어야 성립하는 이론이 아닙니까?

진화론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단백질을 몇 가지 만들어보고는, 그런 과정이 자연에도 있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사전에 재료를 갖추고 하는 인공적인 실험과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연에서 같은 일이 일어날 우연의 확률은 제로에 무한히 가까운 것입니다.

단세포 생물을 구성하는 기초물질인 단백질은 그 종류만해도 수십 가지가 넘습니다. 생명체의 생존에 필요한 각 기관이 각종 단백질을 재료로 자연에서 만들어져 있다가, 어느 영화에서처럼 척척 갖다 붙여졌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나요? 또 처음 우연히 만들어진 생명체가 어떻게 스스로 자손번식을 위한 생식 메커니즘을 갖출 수 있었나요? 암수 기능이 나누어지는 것도 동시에 일어난 우연한 발생인지, 아니면 자연의 선택인지 진화론으로서는 설명이 어렵지요. 더욱이 최초생명의 인식과 판단 기능은 또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최초의 생명체에게 이 모든 시스템이 한꺼번에 저절로 만들어져서 작동되어질 가능성을 생각해봅시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주 쪼끔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확률을 계산해 봐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 수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우주자연이 생겨난 이후 137억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말입니다.

진화론에서 최초의 생명발생설이 논증되지 않으면 진화론은 그것으로 논쟁을 끝내야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설 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진화론자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게 진화론자들의 속성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자는 물귀신 같은 근성입니다. 인간세상에서는 만든 자가 부실 권한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저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했던 사실이 두렵기도 하겠지요. 그러니까 저들은 남들을 끌어들여 패거리를 키워서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몰아낼려고 합니다. 여기에 끌려 들어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동양사상으로 증명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진화론자들이 아무리 부인해도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로서, 모든 생명의 아버지 되시는 존재로서 살아 계십니다. 창조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창세기 1장 1절이 한 마디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나 민족의 창세 설화를 찾아서 생명기원에 대해서 알아보면 어떨까요? 그러나 아무리 뒤져보아도 창세기 기록만큼 체계를 갖추거나 납득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던 태초 이전에는 어떻게 존재하고 계셨을까요?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신다고 밝히지 않고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하십니다. 다만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외형상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 통할 수 있게 인간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말입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적인 인격성을 갖추고 계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사실은 뒤집어 말해야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신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면 다음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닮아 있지만, 그러나 훨씬 초월하신 능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나는 이에 관해서 생각해보다가 마침내 태허의 모습을 설명하는 우리의 태극론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동양사상의 바탕이 되는 음양론과 주역사상이 태극론에서 나왔고, 태극론의 원류는 고대 한민족의 사상입니다. 태극론을 짧게 설명하자면, 태허라는 허무가 있었고 그 안에 존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허에서부터 존재하는 허무라는 음에서 생명존재의 싹이 되는 양이 자라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음양이 교대로 성하고 쇄하면서 성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주의 변화에 적용시켜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음양론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점을 치기 위하여 이 음양론을 더 끌고 나간 것이 음양오행론으로 발전했고, 주역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괘상을 만들어 역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지요. 태허에서부터 존재하는 허무라는 음은 흑암입니다. 흑암에 자리 잡고 있는 양이 바로 최초의 생명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을 하나의 물질적 자연현상으로 잘못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생명존재는 잊혀져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전에 죽은 조상을 잊어먹듯이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제는 증거가 없어진 일이니까, 그런 것은 아예 있지도 않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진화론자들이 쓰고 있는 억지 셈법입니다.

이 최초의 생명이 점점 능력을 발전시켜서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태허는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되는 것이며, 태극론은 성경 창세기의 기록보다 훨씬 앞선 시기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진화론자의 태초인 우주의 빅뱅 이전에 이미 창조주 하나님이 계셨고, 이분이 빅뱅을 이용하여 우주자연을 만드셨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태초 이전에 무한한 음의 속성을 가진 알 수 없는 깊음의 흑암에, 생명의 알이 부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유일하신 생명존재의 형태를 상상하면 됩니다. 그 알이 긴 시간 동안 자라나서 생명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되셨으며,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우주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태극론으로 증명하는 창조주 하나님 존재론의 핵심입니다. 우주창조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과정이며, 이 최초의 생명이 하나님으로 성장하셔서 만들어내신 기적입니다. 어차피 최초의 생명은 우리가 발생상황을 볼 수 없습니다. 최초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하든지 기적이라고 하든지, 이것을 설명하는 말이라면 의미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똑같은 말로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진화론자들은 자연법칙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우연히 벌어졌다고 하면서 그것도 자연법칙의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는 하나님은 안 계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연법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은 기적이라고 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요.

성경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는 더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으므로, 성경대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 안에서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거센 공격을 하고 있음에도,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제까지 알려진 다섯 가지의 신 증명론** 이외에, 더 이상 새로운 반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롭게 동양사상의 하나인 태극론으로 보는 신 존재증명을 하나 더 제시했습니다. 이 복잡한 우주자연과 생명체를 만든 복잡한 지적존재는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진화론자들은 질문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제 설명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가지의 신 존재증명: 조직신학 참조

1.(절대)존재론적 증명

2.우주(원인)론적 증명

3.목적론적 증명

4.도덕론적 증명

5.역사적 또는 인종학적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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