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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전설]에 나타난 창조론과 제언

heojohn 2008. 9. 14. 16:17

[흑암전설]에 나타난 창조론과 제언

서론: 인간생명은 신성하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문제

  여러분은 자기의 가치가 얼마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으십니까? 그런데 인간의 가치가 얼마냐에 대해서는 실체를 알지 못하는, 그래서 평가하기가 쉽지 않은 생명적 요소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단순히 물질적 가치를 계산하는 것이므로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계산서에 의하면, 고기 몇 kg에 얼마, 뼈 몇 kg에 얼마, 피 몇 L에 얼마로 계산하고나면, 나머지는 쓰레기로 버리니까, 우리 돈 100,000원이 채 안된다고 하더군요. 물질적 효용성만 따지고 보면 개돼지 값만도 못합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신체의 장기이식 기술이 발달하여 사망 직후에 장기를 적출하여 필요한 환자에게 비싼 값으로 거래하기도 한답니다. 때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것도 매매되고 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료로 주기도 합니다. 참으로 가치의 혼란을 일으키는 현상으로서, 인간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자면, 사회 구성원이라는 상대성과 특별한 요소를 가진 개인적인 생명으로서의 절대성이 검토되어야겠지요. 일반적으로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평가대상의 현재 상태를 먼저 보고,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된 것인지를 검토합니다. 즉, 역사적 과정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도자기와 꼭 같은 모양의 것을 오늘날 만들어  냈다고 해도, 그것은 모조품이고 별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비싸게 팔리는 버버리 레인코트를 중국에서 짝퉁으로 만들어 와도 제 값을 다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고로 죽어서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계산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때는 라이프니치 계산법에 의해 여명기간의 평균소득 손실액을 따져서 계산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상대화된 계산표가 있지요. 남이 계산하고 남이 값을 받는 것이니까요. 이런 관점들에서 살펴본다면, 각자 살아 있는 자기의 가치를 얼마로 평가하시겠습니까? 각자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의 자기가치를 스스로 한 번 평가해서 값을 계산해 보시지요.

   xxxx yyyy ---- ==== ????


  계산해 보고나면, 허무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 계산된 평가금액을 주겠다면, 그 돈을 받고 하나 뿐인 나의 생명을 내놓으시겠습니까? 이 문제의 답은 각자가 풀어보기로 하고 넘어 갑시다.


인간의 생명가치는 동일하다.

  중동지방의 어떤 고대 문서에는 노예 두 명의 생명은 평민 한 사람과 같은 값이고, 평민 두 명은 귀족 한 사람의 생명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왕의 목숨은 얼마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왕국에 속한 국민 모두의 생명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왕조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이 국가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근대에 들어와서도 짐은 곧 국가다 하는 유명한 말을 했던 프랑스 왕이 있지요. 모든 사람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도 반박을 못한 것은 당시 생사여탈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한 말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고 보면 인간세상에서 가치는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에 언급한 고대문서의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구약성경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등가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지요. 오늘날 대개의 나라 법에서는 살인은 보상금을 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범죄로 규정합니다. 오히려 처벌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 현대적 법정신의 흐름이지요. 인간의 생명은 돈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존중해야 할 플러스 알파라는 무엇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서구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 정신의 기본바탕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인간의 생명가치는 동일하다는 가치관의 근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자연사할 때까지 남이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권리의 근거는 이 땅에서 인간생명의 본질은 육신을 낳아준 인간부모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부터 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를 논하는 철학적 또는 법학적 견해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지요. 여기에서는 스스로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는 인간의 바탕심리를 근거로 하여, 생명가치의 근원이신 창조신론을 펼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진화론 비판과 [흑암전설]창조론 


진화론의 해악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존환경 안에서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문제가 생기거나 죽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예외적으로 생존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문제도 논리적으로 엮어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냅니다. 새로운 해석은 새로운 생존환경을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됩니다.

  진화론도 그렇습니다. 찰스 다윈 이후 ‘생물은 우연한 기회에 자연발생된 것이며, 자연의 선택 또는 도태의 과정에서 진화해 왔다’는 진화론이 생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등장하면서 ‘모든 물질과 생명은 신성한 창조주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그동안의 종교적 환경이 도전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에 뒤이어 과학주의가 대두하는시기였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이 크게 발붙일 여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다윈 자신은 영국 성공회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까지 졸업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의 진화론에 대해 사회적 반향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진화론은 알다시피 무신론이지요. 애초부터 있었던 물질적 우주자연이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우연’히 원시생명을 만들고, 모든 생명들은 그 원시생명에서 진화한 자손들이라는 주장입니다. 당시 유럽지역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과 개혁파가 종교전쟁을 벌리는 통에 사회가 황폐화되고 있던 저주받은 시기였습니다. 기독교 종교에 회의감이 일던 분위기에 폭풍우가 몰아친 겁니다. 진화론을 이해할 만한 사람들은 당연히 종교를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 폭풍에 휩쓸려 떨어져 나갔지요. 없다고 하는 신을 믿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로 인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사회적 환경도 엄청나게 변하게 되었지요. 그러한 세계관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각종 인본주의 운동의 본류가 된 것입니다. 세계적 재앙을 가져온 마르크스 공산주의와 히틀러의 파시즘 인종주의가 모두 이를 바탕으로 발전했던 이론이지요. 우리나라도 이런 재앙을 피해 나가지 못했지요. 우리가 진화론이 잘못된 이론임을 철저히 검증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요.

  리차드 도킨스는 종교가 독이고 바이러스라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진화론이야말로 인간의 사회적 생존환경에서 독이며 바이러스입니다. 무신론 인본주의는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한 덩어리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론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무신론주의를 인간성의 회복이니,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미사여구로 인간을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막상 무신론주의 진화론자들이 정치사회의 주도권을 잡아 집권세력이 되면, 자신들 이외의 인간들을 개돼지처럼 막 취급합니다. 권력을 잡은 그들의 안중에는 다른 인간들은 경쟁에서 도태된 하등동물일 뿐입니다. 그들과 그들 자손만이 자연의 선택을 받은 우등한 인간일 뿐이지요.


진화론의 오류

  진화론은 처음에는 다윈이 어설프게 주장했던 가설인데, 신의 계율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일부 과학자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보완을 거듭하면서 잘못된 몸집을 키워 왔습니다. 물질적 우주의 빅뱅에 대해서는 현대인들이 대개 받아들이는 이론이지요. 우주자연에서 원시생명 문제는 기원논쟁의 핵심입니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잠깐 봅시다. 빅뱅 때의 초고열은 우주에 물질적 생명의 존재가능성을 완전히 없앴다고 봐야지요. 그럼에도 그 이후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원시스프가 만들어지고 그것에서 어느 날 갑자기 생명체가 튀어나왔다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원시스프 가설은 그 뒤에 파스퇴르 실험에서 부정되었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진화론자들 입장에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우연이라는 가설을 새로 하나 더 만들어냈지요. 그리고는 긴 시간 동안에 우연히 생명이 발생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우연한 생명발생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무슨 사건이 우연히 일어나자면, 사건에 등장하는 것들은 모두 어디에선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백보를 양보해서 우연히 생명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런 환경에서는 금방 죽고 말겠지요. 그러니까 먼저 생명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진화론자들의 설명이 없습니다. 자연선택이라는 것도 선택할 대상이 먼저 있어야 성립하는 이론이 아닙니까?

  진화론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단백질을 몇 가지 만들어보고는, 그런 과정이 자연에도 있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사전에 재료를 갖추고 하는 인공적인 실험과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자연에서 같은 일이 일어날 우연의 확률은 제로에 무한히 가까운 것입니다.

  단세포 생물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종류만 해도 몇 가지입니까? 생명체의 생존에 필요한 각 기관이 각종 단백질을 재료로 자연에서 만들어져 있다가, 어느 영화에서처럼 척척 갖다 붙여졌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나요? 또 처음 우연히 만들어진 생명체가 어떻게 스스로 자손번식을 위한 생식 메커니즘을 갖출 수 있었나요? 암수 기능이 나누어지는 것도 동시에 우연한 발생인지, 아니면 자연의 선택인지 진화론으로서는 설명이 어렵지요. 더욱이 최초생명의 인식과 판단 기능은 또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최초의 생명체에게 이 모든 시스템이 한꺼번에 저절로 만들어져서 작동되어질 가능성을 생각해봅시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 조금 조금 아주 쪼끔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확률을 계산해 봐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 수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우주자연이 생겨난 이후 137억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말입니다.

  진화론에서 최초의 생명발생설이 논증되지 않으면 진화론은 그것으로 논쟁을 끝내야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설 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진화론자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게 진화론자들의 속성입니다. 죽으면 같이 죽자는 물귀신 같은 근성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따르자니 힘들고 귀찮기도 하고 면목도 없겠지요. 또한 하나님을 부인했던 사실이 두렵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진화론자들이 아무리 부인해도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로서, 모든 생명의 아버지 되시는 존재로서 살아 계십니다.


최초의 생명이신 하나님 존재에 대한 탐구

  창조에 대해서는 창세기 1장 1절이 한 마디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나 민족의 창세 설화를 찾아서 생명기원에 대해서 알아보면 어떨까요? 그러나 아무리 뒤져보아도 창세기 기록만큼 체계를 갖추거나 납득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태초 이전에 존재하고 계셨을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신다고 스스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창세기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에서 하나님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외형상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 통할 수 있게 인간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뒤집어 생각해서 하나님이 인간적인 인격성을 갖추고 계신 것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인간처럼, 그러나 훨씬 초월하신 능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봐야겠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태허의 모습을 설명하는 우리의 태극론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동양사상의 바탕이 되는 음양론과 주역사상이 태극론에서 나왔고, 태극론의 원류는 고대 한민족의 사상입니다. 태극론을 짧게 설명하자면, 태허에 허무가 있었고 그 안에 존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허에 허무라는 음에서 존재의 싹인 양이 자라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음양이 교대로 자라고 쇄하면서 성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것을 지구의 변화에 적용시켜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음양론입니다. 이 음양론을 더 끌고 나가면서 인간사회에서 점을 치는 근거가 되는 음양오행론으로 발전되었고, 주역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괘상을 만들어 역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지요. 태허에서 양이 음에서 자라는 현상이 바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을 하나의 물질적 자연현상으로 잘못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생명존재는 잊혀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전에 죽은 조상을 잊어먹듯이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증거가 없어진 일이니까 이제는 그런 것은 아예 있지도 않았었다고 주장하는 억지셈법을 진화론자들이 쓰고 있는 것이지요.    

  이 최초의 생명이 점점 능력을 축적하여 창조자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태허는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되는 것이며, 태극론은 성경 창세기의 기록보다 훨씬 앞선 시기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흑암전설]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이를 바탕으로 시작합니다. 빅뱅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셨고, 이분이 빅뱅을 이용하여 우주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최초 생명존재의 형태는, 테두리 없는 허무이며 알 수 없는 깊음의 흑암에, 생명이라는 알이 하나 박혀 있는 모습입니다. 그 알이 긴 시간 동안 자라나서 생명의 능력으로 뜻하시는 대로 우주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흑암전설]에 나타난 창조론의 핵심입니다. 우주창조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과정이며, 이 최초의 생명이 하나님으로 자라서 만들어내신 기적입니다. 어차피 최초의 생명은 우리가 기원을 볼 수 없습니다. 최초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하든지 기적이라고 하든지 가능성에 있어서는 차이를 구분할 수 없는 말이며, 사실상 똑같은 말로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연은 자연법칙으로 저절로 되어가던 일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로 벌어졌으나 하나님은 안 계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기적은 창조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말하신 것 외에는 더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으므로, 성경대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안에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거센 공격을 했음에도 더 이상 새로운 반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측면이 있습니다. [흑암전설]은 최초생명의 존재환경, 곧 하나님의 태허를 탐험한 생명기원사이며, 우주발생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를 추적한 팩션입니다. 이 복잡한 우주자연과 생명체를 만든 복잡한 지적존재는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진화론자들은 질문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제 대답한 것이 되었지요. 


결론: 창조론의 새로운 이해와 제언


창조론의 새로운 이해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권능은 어떻게 얻어진 것일까요? 진화론에서도 주장하듯이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우주만물과 생명체를 만들자면, 그것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설계하고 만들 수 있는 더 복잡한 지적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 이전에 유일하셨던 하나님은 복잡한 지적권능을 스스로 수련하신 분이시지요. 영원이라는 시간은 태초 이전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은 홀로 복잡한 모든 권능을 수련하실 수 있었지요(그러고 보니 이 부분은 진화론과 똑 같아지네요). 그분의 권능으로, 그분의 뜻대로, 다스릴 만큼만 창조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분이 만드신 것은 그분의 전능하신 권능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창조신이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창조신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하게 창조하시지는 않았을 테지요. 그러니까 모든 창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일어나는 모든 우주자연과 생명의 사건에도 그분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해석입니다. 현실에서는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지요. 전능하신 그분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일이 이루어진 뒤에 결과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동의를 하든 말든, 그렇습니다.  속 시원히 쉬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면 좋으련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지요. 창조신 하나님을 알고 깊이 그분의 뜻을 묵상하고 헤아리는 자들만이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지 아니할까요?

  창세기 1장 우주만물의 창조기록과 2장 에덴동산의 창조기록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1장의 인간창조를 부연해서 2장에 기록한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어떤 분들은 별개의 창조를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또 다른 주장도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가 이 세상과 어떤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고 왜 오셔야 했는가를 검토했다면, 1장과 2장은 씌어 있는 그대로 별개의 창조를 기록한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합니다. 창조자도 물론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해석해야지요. 창세기 기자가 괜히 두번을 따로 기록한 것이 아니지요.1장의 창조는 창조신의 아들이 창조한 기록입니다. 2장의 창조는 창조신이 직접 창조하신 기록입니다. 그에 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나올 연작 시리즈에서 서술될 것입니다.

  우주에서 생명창조를 위해 창조신 아버지의 권능을 위임받은 아들이 이곳을 선택하고 이 지구를 만드셨습니다. 이 지구는 인간의 생명창조를 위해 특별히 설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우주에 있는 많은 별 가운데서 혼자 우연히 진화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장 쉬운 예로서 생명체를 유지하는 필수조건인 물과 유기물질이 이 지구에만 있지 않습니까? 이 지구를 위해 해와 달이 가장 알맞은 위치에서 궤도를 지탱하고 빛을 보내고 지구의 온도를 유지하고 광합성작용을 촉발하지요. 이런 것들은 우연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단 하나 지구의 창조 증거입니다.   

  

성경 기록의 한계

  어떤 기독교인들은 성경 안에 세상 진리가 다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고 다 이해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학문의 종류는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날에는 각 학문분야의 개론서 하나씩만 읽자고 해도 힘듭니다. 각 분야의 필요한 사람들이 스스로 책을 찾아서 공부합니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목적은 바로 필요한 사람을 위해 만듭니다. 요즈음에는 광고를 통해 수요를 창출한다는 이론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에 기록되었던 당시의 유대민족들에게 읽히고 낭독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유대민족에게, 선지자들을 통해서 들으라고 말해준 것을 그때그때 기록했다는 것이지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는 우리가 그때 사용했덩 언어의 뜻을 오해하고,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때로는 더 큰 오류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만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의문의 하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악한 사회가 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하는 것이지요. 악인은 번창하고 의인이 곤궁한 처지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사회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지요. 하나님이 인간생명을 등가가치를 가진 선한 것으로 만드셨다고 한다면, 이런 사회악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면, 당연히 악도 하나님이 창초하신 것이 되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당연히 악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라면, 현실적으로 악이 발생하는 현장에도 하나님은 계실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이 참으로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왜 전능하신 능력으로 악을 소멸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창조론에서 선과 악의 문제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주 하나님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죄악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 납득할만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제작자는 뜻에 맞지 아니하면 그가 만든 작품을 언제든지 부술 권리가 있지요? 사람들은 단지 소유자의 권리로서 가축을 죽이기도 하지요. 소유자의 권리로서 죽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창조자에게 죽일 권리가 없겠습니까? 동의하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죽일 권리까지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생명의 창조원리로서 선과 악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은 빛과 어둠이 나누어져야 하듯이 그렇게 나누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일고 유추해보면, 하나님은 처음 두 아들을 만들고 선과 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악과 어둠을 다스리는 사탄을 창조주가 계시는 선과 빛의 나라에서 추방함으로써, 하나님에게는 결국 선과 빛을 다스리라고 상속해 준 한 아들만 남아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선과 악의 문제에 직접적으로는 손을 떼셨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선을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의의 창조자로 불리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자가 만드신 질서에 따라 각자의 선악에 대한 심판은 육신의 삶을 끝낸 다음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평등한 생명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신다면, 심판의 기준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론에서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면 믿고 따라야 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선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화론자들이 생명과 가치의 원천이신 창조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므로, 인본주의적인 무신론이 오히려 인간가치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각시키면서 윤리논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흑암전설]에서는 어둠의 나라 악의 왕 사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루어 놓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주제가 아니므로 가볍게 문제 제기만 하겠습니다.


과학과의 충돌 문제

  현대에 늘어난 과학지식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상당 부분 문자적 오류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은 당시의 관점으로서는 하나님이 격리를 명령한 부정한 질병이며, 유대인들에게는 불치병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한센이 그것을 단순한 레프라 간균에 의한 세균성 질환으로 밝혀냈고, 이제는 항생제 치료가 가능한 보통질병에 불과합니다.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바뀐 현실적인 지식체계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문자주의적인 관점만을 고집하다가는 현실과 맞지 않는 논리 때문에 오히려 성경을 불신 당하게 하기가 쉽지요. 그러므로 읽고 깨달은 사람들이 잘 해석하고 잘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창조에 관련해서는 너무나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으므로 어렵지요. 그러나 창조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기독교는 끝장이지요.

  그러므로 과학이론과 충돌을 일으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생명기원에 관한 창조론과 진화론이지요.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창조신론은 진화론에 대해 충분히 반론했다고 봅니다. 진화론의 모순을 드러내고 오류를 증명한 이상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아무리 주장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더 나아가서 창조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경의 기록을 가지고 우주와 지구의 나이를 딱히 몇 년이라고 하는 것은 정답 계산공식이 아닌 것입니다. 창조과학에서 주장하는 젊은 우주론을 따르는 기독교인들도 6일 창조론의 시간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으로 하루를 계산한 기록을 보고, 해가 뜨고 지는 하루라고 그대로 믿는다면, 해와 달과 별은 제4창조일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 됩니다. 처음부터 반복되는 똑같은 말로 하루를 계산하고 있지만, 앞의 3일은 제4일에 만들어진 해가 뜨고 지면서 생기는 하루와 같은 의미의 하루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눈을 들어 다시 본다면, 따라서 간격이론도 크게 시비할 것이 없지요. 무엇이나 잘못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소멸합니다.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부수어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면, 무엇 때문에 깨지면서까지 반대해야 합니까? 주장하는 이론 중에서 틀린 점만 지적하면 되지 굳이 깨질 정도로 싸울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일부 과학계에서는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이다 하는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빅뱅을 통하여 생겨났고 같은 우주물질을 가진 하나의 별이라고 하는 지구의 나이는 왜 젊은 것으로 계산해야 하는 것인지, 그 이유와 연대를 측정한 방법과 근거의 오류를 밝히는 정도로 반론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주장이 아닐까요? 그러면 그들은 스스로 틀린 주장을 철회할 테니까요. 그러므로 분야별로 반론증거를 찾는 전문 분과위원회를 만들어서 집중하는 방향이 좋지 않을까요?


창조론의 방향과 집중적 연구를 위한 제언

  노아의 홍수와 연결된 대격변이론을 놓고 봅시다. 지구에 대격변이 있었다면 이 땅에 분명 흔적과 증거를 남겼을 테니까 그것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주 대륙이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주장은 노아의 홍수와 연결해서 좋은 가설이 될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미주 대륙이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면, 그 당시 그로 인해 생기는 엄청난 쓰나미 파도 때문에 전 지구적인 침수는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주 대륙이 바다 밑에서 솟아올랐다는 설은 공인된 학설입니다. 그 증거가 남미대륙 고산지대에 있는 소금 호수와 북미대륙 곳곳에 산재한 그랜드 케년과 같은 대협곡들의 지층들과 산맥 위에서 발견되는 바다 동물들의 화석에 있습니다. 미주대륙이 노아 홍수시기에 40일간을 이동하면서 바다 밑에 잠겼다가 솟았다가 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전 지구적인 대격변은 지구과학에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학설이 되겠지요. 이런 방향으로 창조과학자들이 지질학적 증거들을 좀 더 찾아 검토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런 흔적을 찾으면 창조론은 완전히 승리하는 것이지요. 다중격변설의 주장은 종 안에서의 소진화론과 같이 국지적인 소격변 정도의 이론으로 보면 별로 충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전 지구적으로 안정적인 판구조로 창조되었던 지표층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대격변을 일으켰을만한 사건은 노아 홍수와 미주대륙 이동설이 가장 그럴듯합니다. 다른 사건들은 잘해야 국지적인 지층변화를 일으키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지질학적 증거들을 보완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해야 하는 주장입니다. 창조과학은 그렇게 해서 진정한 학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짧게 살펴보았지만 창조론은 결론적으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설명과 주장에 집중하고, 나머지 부수적인 이론들은 상대방 진화론주의자들 주장의 오류와 허위성에 대응하여 분야별로 나누고 과학적인 자료를 찾아서 반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창조론을 살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신론주의 진화론자들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창조론 진영이 작은 일로 나누어지지 말고 역량을 결집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끝으로 바울사도가 오늘날과 같은 시대를 염려하여 예언한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으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것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들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전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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