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창조론 연구 자료실/유사 창조론의 비판적 이해

논평: "팀 켈러의 '진화, 창조,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에 대한 반론"

heojohn 2023. 3. 26. 23:55

Comments on Countering Timothy Keller’s Case for Evolution: Examining

Timothy Keller’s white paper “Creation, Evolution, and Chritian Laypeople”

(2019/11/06)

저자: 테드 벤 라알트 Ted van Raalte(Professor of Ecclesiology)

Canadi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in Hamilton, ON, CANADA

논평자: 허정윤

 

라알트는 켈러가 바이오로고스에 기고한 진화, 창조,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라는 제목의 글이 보수 개혁교회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의 호평을 받았다고 전하면서, 켈러가 쓴 글을 분석하고 반박한다. 라알트는 켈러가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들 중에서 선택한 핵심적 질문 3가지와 그에 대한 켈러의 대답만을 논의하겠다고 한다. 그것들은 기독교 신앙이 현대 과학과 (또는 과학이라 주장되는 것과)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조화될 수 있고 또 조화될 수 없느냐하는 문제들이다. 논평자는 이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질문 1. 만약 진화가 사실일 경우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있는가?

 

창세기 1장 읽기(장르와 의도, 창세기 1장의 장르, 영에게 잘못 호소함)

위 질문에 켈러의 대답은 저자가 바라는 대로 장르에 따라 다르게(문자적으로 또는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하고, 거기에다 우리의 생각이나 관심사를 덧씌워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라알트는 시든 산문이든 삼단논법이든장르는 달라도 같은 메시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들어 켈러의 주장에 대해 날 선 비판을 던진다. 켈러는 이어서 영의 글에서 창세기 1장은 고양된 준-시적 언어라는 말에 기대어 그것을 문자적 역사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라알트는 창세기 1장은 하늘과 땅의 창조에 관한 계시이며 참 우주생성론이라는 영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영에게 잘못 호소한 켈러에게 호된 비판을 가한다. 여기서 라알트는 켈러의 왜곡된 주장을 올바르게 비판한다.

 

오래된 유언비어: 창세기 1장 대 창세기 2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영의 글에 기대어서 주장했던 켈러는 다시 창세기 2장은 창조의 순서가 자연스러운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1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장 강력한 이유로 내세웠다. 켈러는 창세기 1장의 부자연스러운 창조의 순서를 빛과 식물의 창조라고 지적했다.

*빛이 있고(1일 창조) 그 뒤에 빛의 원천이 있었다 (4일 창조됨).

*식물이 있고(3) 그 이후에 대기와 비가 있었다 (4일 창조되었다고 켈러가 주장).

그러나 라알트는 켈러가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를 일거에 들통이 난 유어비어로 몰아세운다. 라알트는 이것들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창조가 아니라고 공박한다. 라알트는 빛의 원천은 계21:23에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가 원천이 될 수 있고, 식물을 위한 비는 제2일에 궁창 위에 올린 물이 그때부터 언제든지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라알트는 창세기 1장은 하나님에게, 2장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주장하며, 1장과 2장에서 창조의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은 앞에 나오는 제6일의 창조를 더울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히브리 산문의 흔한 용법이라고 주장한다. 라알트는 창세기 2:4 이하를 하늘과 땅의 톨레도트라고 한다. 켈러는 창세기 1장 또는 2장이나, 아니면 전부를 역사적으로 읽을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라알트는 영과 정반대로 창세기 1-2장 전부를 역사적으로 또 문자적으로 읽을 수 있다고 반론한다. 사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압축된 원역사로 이해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일시에 무너진다.

 

누구의 권위

라알트는 켈러가 존 왈튼이 본문의 권위에 대해 그 본문의 첫 독자들이 이해한 본디의 뜻에 달려있다고 말한 것과 닮은 말을 한다고 지적하면서 성경 저자들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왈튼과 켈러의 성경 이해에 칼을 댄다. 라알트는 성경의 본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며 주저자는 성령이므로 하나님 권위까지 존중해야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라알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의도가 담긴 예언이나 성경 구절은 예언자들과 천사들도 알아보고 싶어 한다는 베드로전서 1:10-12를 인용하면서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라알트는 켈러보다 더 깊은 주의를 기울여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라알트의 제안에 동의하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본다.

 

질문 2: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가?

 

진화의 두 의미, 거모이진화에 대한 켈러의 비판은 유익함, 하지만 켈러는 생진과거모이에 이르지 않음을 입증하지 못한다.

켈러는 진화의 의미를 하나님이 창조에 사용하신 생물학적 진화(생진과)”와 생명의 모든 측면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진화로 설명하는 무신론적 세계관(거모이)2개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생진과만을 믿을 수 있다고 답했다. 켈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목사, 신학자 과학자에게 평신도는 그렇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 점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라알트는 그렇게 나누면, 설명과 믿는 것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진화는 꾸러미 또는 전체적 관점 즉 하나로 이어진 세계관이어서 한 부분만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켈러의 관점은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모두가 비판하는 것이며, 라알트의 반론은 옳바르다.

 

라알트는 켈러가 (글에서가 아니라) 동영상에서 거모이진화 수용자들과 종교 반대자들의 설명해 없애기를 비판한 것을 소개하면서, 유익한 것으로 평가한다. 켈러의 거모이비판을 요약하면 이렇다. 예를 들어 거모이수용자들은 종교가 사실은 거짓인데 종교가 어떻게든 우리 조상의 적자생존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저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라알트는 이렇게 반문한다. 켈러의 비판처럼 거모이가 믿을 수 없는 거짓이라면, ‘자연선택이라는 거짓이 우리를 인도하여 그것을 믿게 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들의 자기 지칭’(논평자 주: 자기의 주장에서 스스로를 논박하는 것) 을 근거로 볼 때 거모이진화는 불합리하다.

 

켈러는 진화론자들의 설명해 없애기를 비판하는데 씨 에스 루이스를 인용해서 통하여 보기로 설명했다. 난삽한 본문을 정리하면, ‘설명해 없애기는 한 편의 이론을 계속 주장해서 반대편의 이론을 밀어 없애려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는 진화론자들의 집단적 행동 특성이며, 창조론자들은 이 특성에서 사실상 밀리고 있다. ‘통하여 보기한 창문을 통해서만 계속 보는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므로 관점이 제한된다는 뜻이다. 라알트는 켈러가 보편 주장들 가운데 스스로를 논박하는 것들이 많다고 하면서 니체와 프로이드의 예를 가져온다. 어떤 보편주장(‘거모이같은 거대담론)에 대해 하나의 창문으로만 보고 결론을 짓고 나면, 다른 관점들은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라알트는 이렇게 거모이진화를 반대하는 것만으로도 켈러를 통찰력 있는 기독교 신앙의 변증가라고 추켜세워 준다.

 

그리스도인이 생진과를 수용하면서 거모이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가?

켈러는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했지만, 라알트는 켈러가 긍정의 근거를 입증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고 지적한다. 라알트는 그리스도인이 생진과를 채택하면서 거모이에 이르지 않는 길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라알트는 생진과를 채택하는 순간부터 다음과 같은 입장들을 수용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1. 아담과 하와는 생물학적 조상이 있어서 침팬지 같은 그 동물에게서 진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무생물에서 첫 생물의 세포로 이어지는 어떤 전환이 있었다. 이는 사실상 거모이를 수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논평자 주: Alexander Oparin생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화학진화론을 암시한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최초의 생명체 한 개 또는 몇 개를 창조자가 만들었다고 했다).

2. 진화는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라알트는 진화론에 반대하여 우주와 생명 발생 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과학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6천에서 1만 년의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그렇지만 논평자는 라알트의 주장(창조과학 또는 성경적 창조론)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창세기와 시편 등에서도 하나님의 이 사실상 오랜 시간일 수 있다고 암시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논평자 주: 2:17 ‘먹는 에는 죽으리라, 시편 90: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논평자는 그리스도인이 지구의 연대와 관련하여 젊은 지구론을 고집하는 것은 필패하리라고 본다. 창조의 6일은 하나님의 시간에 속한 것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3. 인간은 영혼이 없다; 인간은 그저 물질적 존재일 뿐이다. 이런 관점은 무신론적 진화론자의 관점이다. 켈러와 바이오로고스 지지자들도 원칙적으로 이런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고 믿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라알트가 너무 나간 것 같다.

4.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하지 않는가? 사탄의 미혹과 시험이 개입될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라알트가 교리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염려가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5. 지구는 동물이 있던 기간에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알트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 동물들의 진화 과정에 폭력, 약탈, 죽음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화론은 생물이 출생 때부터 생존 경쟁에 의해서 적자생존이라는 자연 선택적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며, 생존과 진화 과정에 자연 선택적 먹이사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주시면서 동시에 같은 복을 받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1:28).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아담에게는 과일과 채소를, 모든 동물에게는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정해 주셨다(1:30). 하나님이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노아홍수 이후(9:3)이고, 이때 모든 동물의 먹이사슬도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생진과를 수용하는 경우에 라알트가 제기한 염려는 동물 세계의 생존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동물의 생존경쟁의 원인은 거의 먹을거리와 암수 짝짓기로 제한된다. 폭력, 약탈, 죽음을 초래하는 생존경쟁은 처음 창조된 각종 동물이 지구에 온통 충만하기까지 일어날 요인이 별로 없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 교리까지 훼손하리라는 라알트의 염려는 과도해 보인다. 정작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훼손한 것은 아담이 아니가?

6. 하나님은 손을 더 놓으신 게 분명하다; 라알트는 생진과를 수용하면, 우주의 질서가 빅뱅으로 생겨났다는 이론을 믿는 이신론으로 향하게 되는 것을 염려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과 지혜라는 섭리적 의도가 대부분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다는 진화론을 고려하면, 이 문제는 하나님이 생진과를 창조의 어느 과정에서 사용하셨는지를 보는 관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어쨌든 창조는 지나간 일이고, 앞으로 하나님이 구원의 섭리에 어떻게 손을 쓰실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창조론자에게도).

7. 하나님의 본성을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창조가 처음부터 이빨과 턱이 시뻘거 것이었다 해도 라알트의 이 주장에 논평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이 점에서 라알트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오판하고 있다.

8.성경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생진과를 수용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과 다른 창세기부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지지 않을 것이 당연하다. 어렸을 때 읽었던 성경과 어른이 되어서 일는 성경은 다르게 해석된다. 이런 염려까지 늘어놓는 라알트가 오히려 유치해 보인다.

 

경계선은 어디에?

 

라알트는 켈러의 거모이에 대한 비판은 유익했으나, 켈러가 생진과를 견지하는 것이 그 자체로 거모이까지 수용할 가능성을 열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생진과를 견지하는 것)이 사실상 궁극적으로 점점 더 많은 진화로서의 거모이를 회피하는(avoid)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더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논평자 주: 역자는 원문에 not가 빠진 것으로 보는데, 없는 것이 문맥상으로 맞다). 그 이유가 현대 진화론 대부분이 무신론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생진과거모이의 경계선이 없다는 것 때문이라고 라알트는 올바르게 지적한다.

 

라알트는 한때 정통 개혁신앙을 가졌던 학자들 하워드 반틸(Haward van Til), 피터 엔즈(Peter Enns), 에드윈 월하우트(Edwin Walhout) -의 학문적 종교적 궤적을 예시하면서 생진과만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많은 신학자와 과학자가 바이오로고스, 페러데이연구소, 캐나다 과학과 기독교 협력 등의 기관과 연결하여 기독교 신앙과 진화과학을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템플턴 재단의 돈이 팜플렛, 발표, 콘퍼런스, 책 등을 통해 이런 관점들을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싷도 지적한다. 라알트는 도여베르트(Dooyeweerd) 철학의 영역 주권을 고수하면, 진화와 자신의 신앙을 구획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는 그것 때문에 라알트의 교파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고 소개한다. 그리스도인이 진화를 생진과로만 믿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고 보는 라알트의 분석은 올바른 것이다.

 

질문 3.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죄와 고통은 어디서?

 

라알트는 이 3번째 질문을 논의하기에 앞서 켈러가 1번 질문에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으며, 2번 질문에는 인간 생명에 대해 생진과를 믿는다고 진화를 반드시 거모이로 주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요약했다. 라알트는 이 3번 질문에 대한 켈러의 대답은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인물이며 단순한 상징은 아니라고 주장하고자 한다고 요약한다. 그리고 켈러가 창세기 1-3장의 본문에 대해 더 자유적인 사람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켈러에 부분적으로 동의함, 데릭 키드너 모델, “사람을 우리의 형상으로 만들자

 

라알트는 켈러가 주장하는 원칙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켈러가 그의 원칙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켈러가 수용하는 데릭 키드너(Derek KIdner)의 아담 모델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한다. 데릭 키드너는 구약학자요 영국 성공회 모사로 1967년 창세기 주석을 발표했다. 여기서 키드너는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불어넣으신 피조물(2:7)은 기존의 종(호모 파베르)에 속한 존재였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라알트는 키드너가 아담의 모델을 추정하여 설명하는 용어는 창세기 1:26-27 2:7, 22)의 문자적 기록과 맞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기존의 사람과 동물에서 지명하신지 않았고, 직접 창조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불어넣으셨다. 이와 같은 라알트의 반박은 옳다.

 

타락 이전의 고통과 죽음? 영적 죽음? 신체적이 아니고?

 

라알트는 켈러가 하나님의 창조에 첫 순간부터 완벽한 질서와 평화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키드너의 창세기 1장 모델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본다. “창조의 여러 날 동안 누르셔야 했던 애초의 혼돈”, 사탄의 현존, 세상이 아직 영광스럽고 완벽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 등을 주장했고, 죽음과 부패 등이 없었다면 나무에 달린 과일을 소화도 시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해 라알트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첫째로는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우리도 강조해야 한다. 라알트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이 창조의 선함에 대한 여러 확언들의 절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고려할 것은 하나님의 좋았더라는 말씀이 피조물의 생존 활동의 선함을 100%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을 100%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먹고 타락에 빠진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둘째로 라알트는 좋은 박테리아가 있어서 음식을 소화하게 했을 거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창세기에 언급하지 아니한 미생물이 창조된 것이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논평자는 창조된 것이라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박테리아의 먹을거리인 부패한 유기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 상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것들을 모조리 부정하는 해석 방법은 좋은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고 하는 나쁜 행동이다. 논평자는 지구 생태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사실을 중시하는 해석이 진리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본다.

셋째로 라알트는 켈러가 혼돈을 마치 그것이 하나님에 대적하는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여 하나님은 그것을 능동적 능력으로 제압하셔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라알트는 하나님은 엿새를 사용하셔서 첫째 날 먼저 생산해두신 것들을 형성하고......”라고 하는 말에서 켈러와 마찬가지로 6일 창조와 그 이전에 먼저 생산해 두신 것들을 분리해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6천에서 1만 년이면 아주 오래 됐다고 하는 라알트의 생각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끝으로 라알트는 켈러가 말한 사탄의 현존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불완전하거나 악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켈러가 여기서 아담의 타락 이전에 죽음과 고통을 다루면서 사탄을 끌어들인 것은 실수였다. 사탄은 하늘에서 범죄했지만, 땅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엿새 동안 사람의 반역을 아직 부추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알트는 켈러의 주장이 하나도 성경적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라알트가 성경적 증거를 제공하라는 요구는 그가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것은 부인하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라알트가 하나님과 우리 누구도 고통과 악이 우리 죄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적 발전에 불과하다고 하는 주장을 거부해야 한다는 반론한다. 라알트의 반론은 결국 젊은 지구론을 옹호하는 견해에 불과하다. 논평자는 젊은 디구론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증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것들은 자연현상을 보고 알 수 있다고 본다.

 

켈러는 타락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한 번도 하나님의 형상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다고 했다. 라알트는 켈러가 타락을 그렇게 취급한다면 아담과 하와 이전의 수십만 년 동안 있었던 동식물의 죽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라알트는 그 이유를 하나님이 아담을 사람으로 선택하시기 이전에는 모든 피조물은 그저 동물이었다는 것이 켈러의 관점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라알트는 그들은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를 죽음의 길에 두었고......”라고 비판한다. 라알트의 비판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처럼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24시간 안에 죽었다면, 옳다.

 

결론

 

라알트는 켈러의 변증학과 교회건설에 대한 저작들을 귀하게 여기고, 특히 켈러가 거모이진화 이론의 불합리성을 지적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켈러가 키드너 모델의 생진과진화를 수용하는 입장을 논의하기 위해 교회에 더 큰 텐트를 갖추자고 제안한 것을 심각한 오류라고 반대한다. 라알트는 그의 입장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고백문에 계속 충실하기를 바란다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6일이라는 기간에 창조하셨다고 언급한다. 논평자는 켈러에 대한 라알트의 비판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라알트가 성경적 창조론자들처럼 6(24시간 하루)이라는 기간에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관점에는 창세기 2:17과 시편 90:4를 들어 하나님의 시간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는 비동의 입장을 밝힌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새 창조의 길을 열었다는 라알트의 결론에 동의하면서 논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