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창조론 연구 자료실/유사 창조론의 비판적 이해

팀 켈러의 “창조, 진화, 그리스도인 평신도”에 대한 반론(테드 밴 라알트)

heojohn 2023. 3. 26. 23:48

 팀 켈러의 글 창조, 진화, 그리스도인 평신도를 분석함

Countering Tim Keller’s Case for Evolution:

Examining Tim Keller’s white paper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테드 밴 라알트 Ted van Raalte(2019/11/06)

Professor of Ecclesiology,

Canadi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in Hamilton, ON, CANADA

(권수경 옮김)

 

팀 켈러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교인들에게 얻은 신뢰는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진화에 대한 입장은 그렇지 못하다. 몇 년 전 바이오로고스 재단에 기고한 글에서 켈러는 신학자로서 개혁 과학자들에게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는 동시에 진화를 수용하도록 돕는 방법을 제안했다. 13쪽에 이르는 창조, 진화, 그리스도인 평신도는 보수 개혁교회에 속한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역주: 영어 Reformed는 전부 개혁으로 옮긴다. 개혁신앙이나 신학은 이념-ism이 아니므로 개혁뒤에 주의를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글에서 켈러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려 가운데 갖게 될 핵심 질문들을 살피고 그것들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그의 솔직담백함forthrightness은 칭찬할 만하지만 답변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이 논의가 다루지 않는

필자가 켈러와 무슨 논쟁을 하려는지 그것부터 명확하게 하자. 이 토론은 기독교 신앙이 현대 과학과 (또는 과학이라 주장되는 것과) 조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둘이 여러 측면에서 조화될 수 있으나 어떤 점에서는 조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생각이 같다. 이 토론은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조화될 수 있고 또 조화될 수 없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의 논쟁은 진화론이 방어 가능한 세계관인가 다시 말해 우리에게 종교, 윤리, 인간 등에 대한 관점들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가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둘 다 진화론은 거대 이론/모든 것의 설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생각이 같다. (역주: 켈러가 거모이GTE, Grand Theory of Everything’라 부른 것.)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은 곧 성경의 하나님 삼위일체, 주권자, 언약을 맺으시고, 자비로우시고, 구속을 주시며, 새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또 필자는 팀 켈러가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 곧 점진적 창조론자인지 아니면 진화 창조론자인지 아니면 유신 진화론자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켈러의 입장은 다소 모호하지만 필자는 켈러의 글에 나온 내용만 다루도록 하겠다.

우리 사이의 논쟁은 물질이 영원한가, 우주의 질서가 우연히 생긴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 외에 다른 존재목적이 없는가, 인간은 물질일 뿐인가, 인간 생명은 소나 개나 다른 생명과 가치가 같은가, 죽음과 함께 모든 인간 존재가 끝나는가, 윤리는 결국 적자생존 원리인가 등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들 전부가 틀렸음을 즉 성경은 다르게 가르침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다투는 게 아니다.

 

이 논의가 다루는 핵심 질문 3

우리의 차이는 성경과 생물학적 진화의 조화 가능성compatibility에 있다. 즉 인간이 아담 하와 이전의 생물학적 조상을 가질 여지가 성경에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허용 가능한 관점인가?

켈러의 글을 읽을 때 첫째로 알아야 할 것은 그 글의 맥락과 목적이다. 바이오로고스가 2009년 개최한 제1 경축의 신학Theology of Celebration워크숍에서 켈러는 그리스도인 평신도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 창조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 갖게 되는 3가지 우려를 소개하고 있다.

켈러는 바이오로고스의 동료 회원들에게 그리스도인 평신도의 이런 걱정을 덜어 줄 방법들을 제안한다. 따라서 맥락은 생물학적 진화가 허용 가능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어떻게 그것이 폭넓게 수용되도록 할 것인지만 알아내면 된다.

켈러가 다루는 그리스도인 평신도의 세 질문은 이렇다.

만약 하나님이 진화를 이용해 창조하셨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문자적으로 볼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driven 동물에 불과하며 우리와 관련된 것들도 전부 자연 선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고 역사적 아담과 하와가 없었다면 죄와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멋진 질문이다. 그럼 켈러는 과연 어떤 답을 주고 있는가?

 

질문 1. 만약 진화가 사실일 경우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있는가?

켈러의 첫 질문은 이렇다. “만약 하나님이 진화를 이용해 창조하셨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문자적으로 볼 이유가 무엇인가?” 켈러의 짧은 대답은 이렇다.

성경 저자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법은 저자 본인들이 바라는 그대로 읽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읽기를 바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들의 말을 들어야지 우리 생각이나 관심사agenda를 그들에게 덧씌워서는impose 안 된다.

언뜻 보기에 아주 훌륭한solid 답 같다. 성경은 권위가 있다! 그렇지만 켈러는 설명을 추가한다.

 

장르와 의도

켈러는 우선 창세기 1장의 장르를 규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저자가 어떻게 읽어 주기 바라는지 알아내려면 저자가 어떤 장르를 사용하는지 가려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떻게 읽어 주기 바라는가는 다소 모호한 문구지만 일단 저자의 의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자. (그 경우) 켈러의 요점은 저자는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또 연대기적으로 읽기 원하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켈러가 제안하는 장르와 저자의 의도 사이의 연결link은 명확하지 못하다. 같은 의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도 아주 다양한 장르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보기가 가능하다. 만약 내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시를 사용할 경우 내 의도는 그냥 평서문 문장 한두 개를 사용하는 경우와 똑같다. 심지어 삼단논법syllogism을 써 똑같은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

내 삶의 모든 날 동안 난 당신을 사랑하오

오늘은 내 삶의 하루

그러므로 난 오늘 당신을 사랑하오

시든 산문이든 삼단논법이든 (내 아내의 표현에 따른다면 삼단농silly-gism) 내 메시지는 똑같다.

시라면 비유적 표현을 더 많이 쓰겠지만 그렇다고 시가 역사를 묘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편 78편은 시에 역사적 진리가 가득 담긴 경우다.

 

창세기 1장의 장르

켈러는 이어 창세기 1장의 장르가 무엇인지 묻고 보수 장로교 신학자인 에드워드 영Edward J. Young, 1907-1968을 이용해 답한다. 켈러는 영이 창세기 1장은 고양된 준-시적 언어exalted semi-poetic language로 기록되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켈러는 히브리 시의 표식이 없다는 점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있으라” “그대로 되니라등의 반복구를 언급하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명백한 점은 일어난 일을 말하라는 단순한 요구에 답하면서 이런 식으로 쓰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켈러는 이 부분의 논증을 존 콜린스John Collins의 글로 마무리한다. 창세기 1장의 장르는 우리가 고양된 산문 담화exalted prose narrative라 부르는 것으로서........ 고양되었다는 것은 문자주의적해석을 본문에 덧씌워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역주: 히브리 시의 특징은 운, 리듬 등도 있으나 가장 뚜렷한 것으로는 병행구parallelism의 존재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절대적 특성은 아니다.)

이 논증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켈러의 주장은 창세기 1장의 장르가 문자적 읽기를 금한다는 것이다.

 

영에게 잘못misleading 호소함

그렇지만 켈러가 각주에 적어둔 영의 책 창세기 제1장 연구Studies in Genesis One를 직접 살펴보면 켈러가 영의 진짜 요지를 비켜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체를 인용하면 이렇다. “창세기 1장은 고양된 준-시적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아니다.” (강조점은 필자가 추가)

영은 이어 히브리 시의 어떤 요소들이 결여되었는지 지적하고는 독자들에게 욥기 38:8-11과 시편 104:5-9을 창세기 1장과 비교해 보고 창조에 대한 시적 기록과 비시적 기록의 명백한 차이를 확인하라고 권한다. 이 단락 이전에 영은 이렇게 썼다.

창세기 1장은 자기만의 종류sui generis[완전히 독특한] 문서다. 유사하거나 견줄 만한 것을 고대의 그 어떤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창세기 1장은 하늘과 땅의 창조에 대한 신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거기 담긴 것은 히브리인이나 모세의 우주생성론cosmogony이 아니다. 그 우주생성론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늘과 땅의 창조에 관한 계시를 주셨는데 창세기 1장이 바로 그 계시다.

영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 이유로 우리는 창세기 1장의 문학적 장르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수많은 우주생성론 [창조 이야기]하나인 듯 말할 수 없다. 주제의 성격에 따를 때 참된 우주생성론은 신적 계시일 수밖에 없다. 고대의 다양한 민족들의 소위 우주생성론들은 사실상 처음originally 계시된 창조 진리의 왜곡들deformations이다. 참 우주생성론은 창세기 1장 하나 뿐으로서 오직 이 이야기만이 땅의 기원에 대해 신뢰할 만한 정보를 준다. (강조점은 필자가 추가)

영의 이 말을 우리 마음의 안내자로 삼고 켈러의 글을 다시 읽어보자. 켈러는 일어난 일을 말하라는 단순한 요구에 답하면서그 누구도 창세기 1장의 고양된 스타일로 이야기를 작성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한다.

정말인가? 만약 거기 묘사된 것들이 그렇게 고양된 방식 그대로 일어났다면? 물론 우리가 읽는 것은 고양된 산문이다. 묘사된 것들이 너무나도 놀랍기 때문이다! 그 문학적 스타일은 적합할 뿐 아니라 기적적인 사건들을 반영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은 거듭 영광을 받으시는데 특히 그것이 문자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래 된 유언비어: 창세기 1장 대 창세기 2

창세기 1장의 저자가 문자적으로 읽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보는 켈러의 두 번째 이유, 곧 켈러 자신 가장 강력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의 창조 행위 순서의 비교에 근거한다.

이 주장은 다소 복잡하여 이 글보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핵심은 창세기 2:5로서, 이 구절은 일단apparently 공기도 비도 또 경작할 사람도 아직 없어서 하나님이 땅에 식물을 내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게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켈러는 말한다. 창세기 1장은 부자연스러운 순서이므로 문자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켈러의 주장은 오래된 유언비어다. 하지만 이미 들통이 난 유언비어다.

검토해 보자. 켈러가 창세기 1장이 부자연스러운 순서로 되어 있다고 보는 이유는 이렇다.

* 빛이 있고 (1일 창조됨) 그 뒤에 빛의 원천sources이 있었다 (4일 창조됨).

* 식물이 있고 (3) 그 이후에 대기와 비가 있었다 (4일 창조되었다고 켈러가 주장).

두 번째 경우를 먼저 검토해 보자. 켈러는 본문을 너무 급히 읽고 있다. 위의 물과 아래 물의 나눔은 제2일에 있었으므로 식물이 있기 전에 비가 가능했다. 설령 비가 없었다 하더라도 빛이나 물이 하루 없었다고 이 식물들이 다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첫 문제를 보자. “빛이 빛의 원천에 앞선다는 문제다. 하나님이 빛을 제2일에 (역주: 1일의 착오인 듯) 즉 빛의 원천을 만드시기 전에 해 달 별은 제4일에 창조되었다 - 창조하셨다니 재미있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해 없이도 빛을 만드실 수 있다. (21:23) [켈러도 필자처럼 이런 순서가 하나님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켈러는 창 2:5의 순서를 문제삼는데 비판자는 오히려 켈러가 문제가 아니라 한 것을 문제 삼고 공격한다. 계시록 인용문도 하나님의 영광이 빛의 원천으로 언급되어 있으니 원천 없이도 빛이 있을 수 있다는 비판자의 주장에 합당한 인용구는 아니다.]

계속해 보자. 창세기 2, 특히 5절에 나오는 사건들의 순서는 창세기 1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창세기 1:1-2:3하나님만 언급하면서 인간을 위해 땅을 준비하고 꾸미시는 멋진 창조주에게 초점을 맞추는 반면 창세기 2:4-25야웨이신 하나님 곧 사랑스럽게 또 다정하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름다운 동산을 준비하시고 그러면서 그들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 이야기에서 각 장이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2장이 반대 순서로 전개된 이유는 제6일의 사건들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는 히브리 산문에서 흔한 용법이다. 게다가 우리는 2:4-251:26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사이에 시간 순서상으로 쉽게 끼워 맞출 수 있다. [순서가 왜 반대로 되어 있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순서도 같아야지 왜 거꾸로인가? 히브리 산문 어디에 그런 보기가 있는가? 1:261:27 사이에 들어간다고? 아담 창조 후, 여자 창조 전 동물을 만드신 일은 어떻게 하고? 그 점은 켈러가 지적하지 않는지 살펴보자.]

끝으로 창세기 2:4톨러도트또는 계보의 서술로 시작되는데 이 문구는 이후의 창세기를 구조적으로 나누는 도구가 되어 9번 등장한다. (역주: 톨러도트는 구약성경의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 도구의 하나) 영은 톨러도트난 것들those things which are begotten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의 제안을 따른다면 창세기 2:4이하는 우리에게 하늘과 땅에게서 난 것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은 (몸은) 땅의 존재요 (영은) 하늘의 존재이며 동산은 땅의 것이지만 하나님이 창설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2:5들에는 초목이아직 자라지 않았고 밭에는 채소가아직 나지 않았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황량함이 과일이 풍성하였던 동산 (2:8-14)과 생산력 있는 아내 (2:18-25)를 위한 준비단계였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들의 초목채소는 인간의 돌봄을 요구하는 경작 식물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아담은 농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2:5의 요점은 식물이 아예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돌보아야 하는 그런 식물, 이를테면 야웨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심으실 그런 식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역주: Vern Poythress도 창 2:5은 좁은 지역에 대한 묘사로 본다. Interpreting Eden, 188f.)

[설명이 좀 부실하다. 첫째, 2:4은 하늘과 땅의 톨러도트를 말한다 했지만 사실상 땅의 톨러도트를 말하고 있다. 아담과 동산을 하늘과 땅으로 엮는 것은 억지다. 동산이 흙과 하나님의 합작이어서 땅과 하늘이라고? 하나님은 하늘이 아니라 땅과 하늘을 다 관장하시는 분이다 이 사람아! 사람의 몸은 땅이고 영은 하늘이라고? 그 본문 어디에 영이 언급되어 있나? 채소는 1장에 나오는 사람의 식물인 그 채소가 맞으므로 사람의 경작이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연히 전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초목은 사람의 경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그 어떤 암시도 없는 단어다. 생산력 있는 아내도 아주 어색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켈러와 정반대로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켈러는 우리가 창세기 1장과 2장을 역사적 사건들을 그대로 적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고 1장이 아닌 2장이 자연적 순서를 제공한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아주 확실하게 둘 다 역사적으로 또 문자적으로 읽을 수 있다. [글세? 필자는 다시금 창 1, 2장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특히 켈러가 언급 않은 동물과 새 창조의 문제 등.]

켈러는 장르와 연대기 논증들을 하나로 엮어 이렇게 결론 짓는다.

따라서 이게 무슨 뜻인가?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24시간으로 된 6일에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진화를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지구가 아주아주 오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볼 수 없다는 근거는 둘 다 허약하기 짝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에 반해 창세기 1장을 문자적, 역사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영의 강력한 논증은 우리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확인한 것처럼 든든히 자리를 잡고 있다. 고양된 산문이라고? 당연한 말씀!

 

누구의 권위?

켈러가 제기한 두 번째 질문을 다루기 전에 본문의 권위 문제를 잠시 살펴보자. 켈러는 우리는 성경 저자들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켈러의 문구를 보면 존 월튼John Walton의 강연에 나온 문구와 닮았다. 월튼은 필자가 참석한 20159월의 한 콘퍼런스에서 본문의 권위를 자주 언급하면서 그것은 그 본문의 첫 독자들이 이해한본디의 뜻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켈러와 월튼의 견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점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며 (딤후 3:16) 따라서 주저자는 성령이시라는 (벧후 1:21) 인식이다. 우리는 인간 저자들이나 본문의 권위뿐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권위를 존중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역주: 켈러와 월튼은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지 않는다. 켈러는 강의에서 성경이 영감된 글임을 두 번 언급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말하는 목소리는 두 개다. 우리는 인간 저자의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Walton, The Lost World, 15.)

그렇기에 성경에는 인간 저자의 첫 의도를 최대한 파악한다 해도 그것이 신적 의도에 미치지 못하는 구절들이 있다. (이를테면 시편 2, 110편 같은 메시아 시편과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금지령 등. 25:4; 또 고전 9:9; 딤전 5:18) 사실 베드로는 구약 선지자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한 것들의 때와 정황을 알아내기 위해 큰 주의를 기울여 탐구했다고 말하는데 이 말에는 예언은 선지자들 자신의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베드로는 또 천사들마저도 이것들을 알아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추가한다 (벧전 1:10-12). 따라서 성경의 주저자는 성령이시며 본문의 권위는 무엇보다 성령의 의도에 있음이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의 핵심 규칙에는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월튼은 독자들의 이해를 말하는데 필자는 지금 인간 저자의 이해를 말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멀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 해도 그 예언을 당장 듣는 아하스에게는 당면한 상황에서 구원해 주겠다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언을 담은 구약 구절이 그 당시 독자에게도 똑같은 뜻이었을 것이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사야의 의도와 그것을 다시 인용하는 신약 기자들의 의도가 달랐다고 해야.] [인간 저자의 의도를 성령의 의도와 분리시킬 경우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 생각차이가 있다. 월튼은 텍스트는 처음 의미하지 않았던 바를 의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The text cannot mean what it never measnt. The Lost World, 19. 이 주장은 다윗의 글에 담긴 메시아 예언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주의 깊게 다루도록 하자. 이 점에 관해서 켈러보다 훨씬 큰 주의를 기울이자. 그리고 창세기 1장 자체가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켈러 자신 달리 입증하지 못하였으므로) 연대기적으로 읽어야 함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결론짓자. [1장의 주저자가 성령이라 인정하는 것이 왜 그것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가? 성령께서 어디서 창 1장은 문자적으로 읽으라 하셨는가?]

 

질문 2.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가?

이제 켈러의 두 번째 질문을 살펴보자. 평신도질문은 일단 문제에 봉착한다.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driven 동물에 불과하며 우리와 관련된 것들도 전부 자연 선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인가?”

켈러는 다음의 간단한 답을 준다. “아니다. 진화를 생물학적 과정으로 믿는 것은 진화를 세계관으로 믿는 것과 같지 않다.”

 

진화의 두 의미 EBP vs. GTE (생진과 vs. 거모이)

이 질문 및 답을 설명하면서 켈러는 진화의 두 가지 뜻을 구분한다.

* 하나님이 창조에 사용하신 진화. 또는 켈러의 표현대로는 인간 생명은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EBP, Evolutionary biological processes, 생진과)

* “인간성의 모든 측면에 대한 설명인 진화. 켈러는 이것을 거대한 모든 것 이론이라 부른다. (GTE, Grand Theory of Everything, 거모이)

여기서 켈러가 다루는 문제는 스스로를 진화 창조론자라 부르는 이들 곧 바이오로고스와 관련된 그런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창조주의자들과 진화론자들 모두에게 똑같은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양측 모두 생물학적 진화 이론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무신론적 진화론 전체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양 비판자들 모두가 진화는 꾸러미package 곧 세계관 또는 전체적big-picture 관점이어서 한 부분만 떼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바이오로고스의 동료 회원들에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평신도는 생진과와 거모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진화론을 수용하되 하나님이 창조과정에서 생물학적 차원에서 사용하신 방법들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국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앹킨슨David Atkinson의 글을 켈러가 인용함)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켈러는 묻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꼭 해야만 하는 구분으로서 만약 그렇게 못한다면 생진과의 중요성을 절대 인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켈러는 간단히 그리스도인 목사, 신학자, 과학자는 자신들이 진화를 거모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모이 진화에 대한 켈러의 비판은 유익함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켈러는 짧지만 유익한 분석을 하나 제시한다. 거모이로서 진화론은 스스로를 논박한다는 것이다. 켈러는 글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고 나중에 온라인 동영상에서 자세히 설명하는데 여기 인용해 보겠다.

기본적으로 진화를 모든 것에 대한 설명으로 (거모이로) 수용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종교가 생겨난 것은 그것이 어떻게든 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적자생존).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상 우리는 모두 신도 천국도 신적 계시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건 잘못된 신념들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자연 선택은 우리 마음을 인도하여 생존을 위해 거짓 것들을 믿게 만든 것이라고 켈러는 주장한다. 게다가 만약 사람의 마음이 거의 보편적으로 신에 대한 신념을 가졌고 종교 활동을 해 왔으며 도덕적 절대성을 견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상 전부 거짓이라면 우리는 우리 마음이 말하는 그 무엇도 믿지 못할 것이며 거모이로서의 진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자기 지칭을 근거로 볼 때 거모이 진화는 불합리하다absurd.

온라인 동영상에서 켈러는 기독교와 종교의 반대자들이 일반적으로 설명해 없애려고explain... away노력하는 한 문제를 다룬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전에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것을 영원히 설명해 없앨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중에 설명 그 자체도 설명해 없애 버렸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켈러는 루이스를 따라 설명해 없애기를 사물들을 통하여 보기로 설명한다. 창문은 자신을 통해 불투명한 어떤 것을 보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게 전부 창문이라면 즉 전적으로 투명한 세상이라면 모든 것이 안 보이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통과해 본다는 것은 아예 못 보는 것이다.” 이게 우리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켈러는 이어 보편 주장들 가운데 스스로를 논박하는 것이 많음을 보여준다.

만약 니체Nietzsche의 말대로 모든 진리 주장이 사실상 권력 쟁취에 불과하다면 니체 자신의 말도 그럴 것이므로 귀 기울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만약 프로이트Freud의 말대로 신에 대한 모든 관점이 사실상 우리의 죄책과 불안정을 다루려는 심리적 투사일 뿐이라면 프로이트 자신의 신관도 그럴 것이니 귀 기울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만약 진화 과학자들의 말대로 내 두뇌가 도덕과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실제가real 아니라면 내 유전 부호에 전달되도록 설계된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면 그들의 두뇌가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그들에게 귀 기울일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모든 것을 통해 본다는 것은 안 보는 것이다. (역주: 앨빈 플랜팅가Alvin Platinga의 개혁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이 이런 종류의 논증을 주도하고 있다.) (역주: 각주 6이 없어 각주 7부터 한 번호씩 줄었다.)

켈러는 이렇게 언제나 통찰력 있는 기독교 신앙의 변증가다. 거대한 모든 것 이론으로서 진화론을 반대하게 돕는다.

그런데 다른 저명한 진화 창조론자인 드니스 알렉산더Denis Alexander가 최근의 (2016) 콘퍼런스에서 질문들에 답하면서 우리 조상들에게 언제 종교성이 생겨났는지evolved 정확한 시기를 모른다는 답을 했다. 따라서 켈러의 비판이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바이오로고스의 동료 멤버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종교성이 진화된 형질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면 적어도 그런 관점을 허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켈러는 생진과가 거모이에 이르지 않음을 입증하지 못한다.

필자가 켈러의 글에 나오는 유익한 점을 부각시키긴 했지만 켈러가 했어야 하는 중요한 작업은 인간의 (또 다른 모든 생명체들의) 생물학적 진화적 조상이라는 이론을 고수하는 것이 진화를 거대한 모든 것 이론으로 수용하는 것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켈러는 그 점을 입증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 글을 발표한 정황을 고려할 때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강연은 바이오로고스에서 발표한 것인데 그 기관은 생진과는 고수하지만 회원들이 그리스도인인 만큼 거모이는 배제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바로 진짜 문제다.

 

그리스도인이 생진과를 수용하면서 거모이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진화를 생진과로 채택하면서 거모이로서의 진화에 이르는 길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내가 볼 때 생진과를 채택하는 순간 다음의 입장들을 (가정으로, 또는 이론으로, 또는 확고한 입장으로) 수용하게 된다.

1. 아담과 하와는 생물학적 조상이 있어서 침팬지 같은 그 동물에게서 진화되었다. 이들 침팬지들역시 다른 모든 동물처럼 다른 생물학적 조상과 친척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상 빅뱅과 더불어 시작되는 완전한 계통수phylogenetic tree 내지 진화 발전의 연쇄chain가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가장 단순한 생명체 이를테면 식물 같은 것을 공통조상으로 가질 것이다. 그 이전의 어떤 지점에서는 무생물로부터 첫 생명 세포로 이어지는 전환이 있었다. (진화 창조론자 가운데는 하나님이 무생물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전환을 위해 어떤 초자연적 일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2. 진화는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다양한 계통이 모여 이룬 증거는 명백히 우주가 147억 년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구는 약 47억 년, 생명은 약 30억 년, 그리고 인간 생명은 아마도probably (거의 확실히) 40만 년 됐다. (숫자는 변동 가능하다. 나는 6천에서 1만 년이면 아주 오래됐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역주: 실제 과학에서는 우주의 나이를 138억 년으로, 지구의 나이를 454천만 년으로 말한다.)

3. 인간은 영혼이 없다. 인간은 그저 물질적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바이오로고스와 다른 신학자와 철학자가 옹호하는 관점이다. 진화 창조론자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을때 영혼을 주셨다는 이도 있고 영혼이 진화 역사의 어떤 지점에서 고위의 지능 과정으로 창발했다emerged는 이도 있다.

4.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 무질서에서 점증하는 질서로, 또는 나쁨에서 좋음으로 더 좋음으로 가장 좋음으로 가는 지속적인 궤적에 놓여 있다. 이는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 새 창조로 들어가는 근본적 전환 등의 교리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기독 진화론자들은 이런 초자연적 개입의 가능성을 배제하는가? 진화의 전 과정이 백 퍼센트 자연주의적이어야 한다고 보는가?]

5. 지구는 동물이 있던 기간에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켈러는 글에서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진화 과정은 폭력, 약탈, 죽음을 생명 발전의 바로 그 동력으로 이해한다.” 이는 첫 창조의 선함, 죄로의 타락 등의 교리에 엄청난 어려움을 안겨준다.

6. 하나님이 손을 더 놓으신 게 분명하다. 우주의 질서는 주로 하나님이 빅뱅이라 불리는 첫 특이점에 심어 놓으신 것이 분명한 내적 능력들 및 구조들의 전개를 근거로 생겨난다. 이 이론에는 이신론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내재하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과 지혜라고 말하는 것의 많은 부분이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가 되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그런 일이 된다.

7. 하나님의 본성을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창조가 처음부터 이빨과 턱이 시뻘건red in tooth and claw것이었다면 (야만과 폭력이었다면)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달리 보아야 한다.

8. 성경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는 생진과를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석의적 훈련의 결과 도끼질을 당하게 된다. 성경의 의미는 더이상 지금의 그 명백한 의미가 아닐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모든 해석의 가능성을 열게 된다.

 

경계선은 어디에?

결론적으로 켈러는 거대한 모든 것 이론 (거모이)으로서의 진화에 대해 유익한 비판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진화 과정(생진과)을 견지하는 것이 그 자체로 거모이로서의 진화를 수용할 가능성을 열지 않는다는 것과 사실상 궁극적으로 점점 더 많은 진화를 거모이로 회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역주: 원문에 부정어(not)가 누락된 듯.)

그 이유는 분명 진화론의 대부분이 무신론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생진과와 거모이 사이의 경계가 어딘지 결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내가 볼 때는 주장하는 과학자나 신학자가 누구냐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sliding scale이 아닐까 싶다. 낙타 코가 텐트에 일단 들어오면...... 나머지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역주: Once the camel’s nose in in the tent: 아랍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우화에서 나온 표현. 처음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만 것을 허용하면 나중에는 더 큰 문제가 된다는 뜻.)

한때 정통 개혁 입장을 가졌던 학자들의 학문적 종교적 궤적을 살펴보면 진화를 생진과로만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사람은 하워드 반 틸Howard van Til (지금은 자유 사상가가 된 사람), 피터 엔즈Peter Enns (지금은 사도신경 하나만 고백하며 성경의 기원이 하나님 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봄), 에드윈 월하우트Edwin Walhout (창조, , 구원, 섭리 등의 교리를 다시 써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 등이다.

수많은 신학자와 과학자가 바이오로고스, 패러데이 연구소, 캐나다 과학과 기독교 협력 등의 기관과 연결되어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과 진화 과학을 연결하려고 활발하게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템플턴 재단의 돈이 팜플렛, 발표, 콘퍼런스, 책 등을 통해 이런 관점들을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 도여베르트Dooyeweerd 철학이 말하는 영역 주권을 고수하면 이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생물학 지질학과 자신의 신앙을 따로 구획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 철학 학파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 교파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나는 생진과 자체와 역사적 고백적 기독교 신앙의 불일치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생진과를 함께 지키는 것이 극도로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고 본다. 내가 볼 때 진화를 생진과로만 주장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질문 3.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죄와 고통은 어디서?

이제 질문 하나가 남았다. 켈러는 이 평신도질문을 이렇게 표현한다.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고 역사적 아담과 하와가 없었다면 죄와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켈러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답한다.

진화에 대한 신념은 역사적 타락 및 문자적 아담 하와와 조화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답이 없는 질문이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하셨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서로의 관점에 열려 있어야 한다.

켈러는 앞의 두 질문에 비해 이 질문과 관련된 우려들은 근거가 더 확실하다고 본다. 첫 두 질문 대해 켈러는 이렇게 간단히 말한다. “나는 창세기 1장을 문자적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고 믿지 않으며 인간 생명이 생진과를 통해 왔다고 믿으면 진화를 반드시 거모이로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셋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인물이며 단순한 상징은 아니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켈러는 창세기 1-3장 본문에 대해 더 자유주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

 

켈러에 부분적으로 동의함

켈러의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볼 때 켈러는 강력하고 타당한 논지를 펼치지만 결국 그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아무 쓸모가 없다. 켈러는 교회가 만약 죄로의 역사적 타락historical fall into sin이라는 신앙을 버린다면 결정적인 요점들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교리적 입장이 약화될 것이라 우려한다. 그런 우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신뢰가능성trustworthiness이고 또 하나는 죄와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켈러는 해석의 열쇠는 성경 자체라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또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 자신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 모자람을 확인했다. 원칙은 건전해 보이지만 켈러는 그 원칙을 실천하지 않는다. 게다가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신 성령을 말하지 않고 있다.

켈러가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을 호의적으로 인용한 것은 고대인들은 신화를 역사화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신화가 정말로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실제 인물과 사건을 신화적 용어로기념하였다는 것인데 이 점 우리도 다시금 동의한다. 이는 본디 메시지는 창세기에 나오는 그 진리요 주변 국가들의 신화들이 그것을 더럽혔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데릭 키드너Derek Kidner 모델

1967년 영국의 구약학자요 성공회 목사였던 데릭 키드너가 창세기 주석을 출판했다. 거기서 키드너는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신 피조물은 (2:7) 기존의 종에 속한 존재였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그 종의 신체적 문화적 유적” (화석, , 동굴 벽화를 말하는 듯)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이들은 상당한 지능을 가졌지만 아담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켈러는 결론짓는다. “따라서 이 모델에는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하나님이 도구를 만들던 무리 가운데서 하나를 취해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을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도구 사용자들 전부가 문제가 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아담과 관련되어 있지만 영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키드너는 다음 단계를 제안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이제 아담의 방계 친족collaterals에게 부여하시고 그들을 동일한 존재의 영역으로 인도하셨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아담이 모두의 대표로 선발되었다면 하나님은 그들 모두가 비록 물리적으로physically 아담 하와의 후손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담의 타락에 포함된 것으로 보셨을 수 있다. (한편 아담의 연합적federal 또는 언약적covenantal 머리 됨을 강조하는 개혁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종류의 움직임을 환영한 이들도 있다. 역사적으로 개혁 신학자들은 이 머리 됨을 아담의 물리적 머리 됨과 절대 분리시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람을 우리의 형상으로 만들자

키드너의 설명과 켈러의 고려에 보이지 않는 것은 창세기 언어에 대한 더 깊은 유념이다. 하나님은 이미 있던 존재를 그냥 지명하셔서 당신의 형상을 부여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협의하시고 당신의 결정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다스리게.....” (1:26). 그리고 27절은 창조하셨다는 말을 세 번 사용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역주: 히 원문에는 창조하다가 세 번 나옴.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창조하는것을 말씀하셨고 2장에서는 이 창조의 구체적인 방식이 나타나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한다 (2:7, 22). 사람과hominid든 네안데르탈인이든 그 무엇이든 이미 있던 것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거나 수여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창조하셨다” “만드셨다” “지으셨다등의 용어를 바르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타락 이전의 고통과 죽음?

타락 이전의 죽음 문제로 넘어가면서 켈러는 이 질문이 아주 유명한 것임을 인정한다. 켈러는 과도한fulsome 대답을 주는 대신 몇 가지 요점을 제시하여 바이오로고스 동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이런 우려들을 극복할 수 있게끔 시도한다. 켈러는 우선 창조의 특성들 가운데 자기가 볼 때 첫 순간부터 창조에 완벽한 질서와 평화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을 부각시킨다. (강조는 필자가 추가함.)

그런 특성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여러 날 동안 누르셔야했던 애초의 혼돈, 사탄의 현존, 세상이 아직 영광스럽고 완벽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분명 죽음과 부패decay 등이 있었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나무에 달린 과일을 소화도 시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등이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첫째로, 성경이 강조하는 바를 우리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1:31). 이것은 그 장에 나오는 창조의 선함에 대한 여러 확언들의 절정이다 (1:4, 9, 12, 18, 21, 25). [좋았다는 말의 뜻은? 여자가 뱀의 질문에 답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에도 피조물의 한계가 분명 있었다. 좋음과 완벽을 혼동하지 말자.] [아름다운 창조에 유기체의 역학도 담겼다. 더러운 똥도 아름다운 창조의 일부고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도 또 똥을 부패시키는 것도 창조의 역학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무엇인가?]

둘째로, 우리는 좋은 박테리아가 있어서 음식을 소화하게 했을 거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식물을 음식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1:30. 또 창 9:3을 보라) 새 창조에서도 생명나무가 달마다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잎은 소성시키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22:2). 요한계시록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식물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새 창조와 반대되지 않는다 (65:25 참고). 따라서 소화와 타락 이전 식물의 죽음은 좋은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다. [왜 말을 비트나? 지금 문제는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현상이 타락 전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죽음이 새 창조와 반대되지 않는다? 첫 창조에서 식물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가?]

셋째로, 하나님은 혼돈을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능동적 능력에 대적하는 것인 양 제압하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엿새를 사용하셔서 첫째 날 먼저 생산해 두신 것들을 형성하고 모양 지으셨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 삶의 양식pattern을 설정하시고 자신을 능력과 지혜와 질서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셨다.

끝으로, 사탄의 현존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불완전하거나 악하게 만들지 않았다. 사탄은 대적하기로 선택하였고 하늘의 평화를 깨뜨렸지만 사람의 반역은 아직 부추기지 않았다. 따라서 켈러의 주장은 하나도 성립되지 않으며 그 어느 것도 고통에 대해서든 타락 전 죽음에 대해서든 성경적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 , 고통에 책임이 있다거나 고통과 악이 우리 죄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적 발전된 것에 불과하다는 그 어떤 주장도 거부해야shun 한다. [타락 이전의 죽음이 성경과 반대라는 설명은 하나도 하지 않는구나. 식물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가? 왜 그 문제는 다루지 않는가?]

 

영적 죽음? 신체적이 아니고?

타락 이전 고통과 죽음의 여지를 확보하려는 켈러의 마지막 시도는 물리적 죽음과 영적 죽음을 구분하는 방법에서 나온다. 창세기 2:17에 나오는 죽음의 위협과 타락 이후 죽음의 저주를 단순히 영적 죽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취급한다면 아담과 하와 이전 수십만 년 동안 있었던 동물의 죽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왜 문제가 되는지도 말하지 않고..... 5장을 이미 창조과학자들처럼 보고 있구먼.] 켈러가 쓴 것처럼 그렇지만 타락의 결과는 영적 죽음으로서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형상인 적이 없었기에 알 수 없었던 그런 죽음이다,” 눈여겨볼 점은 이 주장은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적어도 두 사람과의 동물에게 (아니면 어떤 존재였던) “부여하시고 그래서 그들을 인간으로 선택하셨다는 관점의 일관된 적용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모든 피조물이 그저 동물이었다. [역주: 켈러가 한 구분이 아니다. 필자는 켈러 입장을 논박하기 위해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 온 구분도 거부할 생각인가?]

그렇지만 물리적 죽음과 영적 죽음을 나누는 것은 인위적이다. 창세기 5장의 죽었더라는 반복구는 창조에 대한 저주가 정확히 물리적 방식으로 구현되었음을 강조한다. 물론 아담 하와는 불순종한 바로 그 순간 물리적으로 죽어 쓰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순간 스스로를 죽음의 길에 두었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으며 생명의 창시자Author로부터 달아났다. 오직 씨에 대한 약속에서만이 그들은 희망 물리적 희망과 영적 희망 - 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날에 죽을 것이라 하신 말씀은 설명하지 않았네.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 않았나?] [“죽음의 길에 두었고라 한 것으로 보아 이 사람도 죽어가기 시작했다고 해석하는 입장인 듯.]

 

결론

내가 볼 때 키드너의 모델도 또 동료 바이오로고스 회원들에게 수사적 제안들을 주고자 한 켈러의 시도도 성경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들은 그저 성경의 메시지에 맞지 않는 것들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 시도다. 역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켈러의 입장 곧 교회가 가질 바른 태도는 더 큰 텐트를 갖추고 그래서 개혁 신앙을 가진 우리가 인간이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 다른 종으로부터 유전되어 왔다는 견해를 성경과 조화시키는 방법을 평화롭게 함께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난 그런 관점이 심각한 오류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것들은 평화를 깨뜨린다. 그것들에 맞서 교회를 보호해야 내적 평화를 지킬 수 있다.

난 변증학과 교회 건설에 관한 켈러의 여러 저작들을 귀하게 여긴다. 나는 또 켈러가 진화를 모든 것에 대한 설명으로 지지하는 일의 불합리성absurdities을 지적한 점을 특히 높게 평가한다. 그렇지만 이 글을 통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고백문에 계속 충실하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6일이라는 기간에 선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존재한 순간부터 당신의 대리인vicegerent으로 세우시고 피조물에게 당신을 대변하고 당신에게 책임을 지게 하셨다. 우리가 사탄의 제안에 굴복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죽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우리 잘못이지 하나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사역이 용서, 새 생명, 그리고 궁극적으로 새 창조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