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창조론 연구 자료실/유사 창조론의 비판적 이해

팀 켈러의 “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

heojohn 2023. 3. 19. 00:52

Timothy Keller’s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팀 켈러 Timothy Keller

(권수경 옮김)

 

도입: 뭐가 문제인가?

세속의 많은 목소리와 복음주의의 여러 목소리는 한 가지 당연지사truism에서 일치합니다. (역주: 당연지사 또는 뻔한 말)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정통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어떤 형태의 진화론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신 무신론New Atheist 저자들과 켄 햄Ken Ham 같은 창조주의creationist (역주: 젊은 지구 창조론을 가리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성경적 신앙은 창조론으로 구분함.) 저자들도 이 점에서 같은 의견인 것 같고 일반 대중 가운데도 이를 당연시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화를 믿을 수 없고, 진화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의심자와 신자 모두를 곤란하게 만듭니다. 서구문화에 속한 수많은 신자는 과학을 통해 의학과 기술이 발전했음을 알고 그 발전을 고맙게 여깁니다. 이들은 과학을 아주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학이 말하는 듯 보이는 진화와 자신들의 전통적 신학적 신념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구도자들이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더 당황스러울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여러 요소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믿기 위해 과학을 거부해야 한다면 내가 어떻게 성경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과학과 신앙이 조화될 수 없다irreconcilable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해서 기원에 대해 한 가지 설명만을 믿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이들은 반과학적 종교와 반종교적 과학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진화 과정을 이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생명체들과 인간 생명을 창조해 내실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 정통 신앙과 진화 생물학의 양립 불가능성incompatibility은 엄청나게 과장된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인간이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된 것이 진화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꽤 많은 사람이 주장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적 신념의 수용력이 적응을 높이거나adaptive다른 적응적 형질들과 결합되어 생존과 번식을 도왔기 때문에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왔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이에 대해 생각이 일치하지 않지만 일단 그런 제안 자체는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실재하신다는 신념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철학자인 피터 밴 인와건Peter van Inwagen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모든 인간이 초자연적 신념을 갖기를 바라셨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인간이 어떤 특성들을 갖게 되면 생존과 출산에 도움이 되어 진화적 관점에서 유리하다는 것과 그런 특성으로 인해서 때가 되면 모든 인간이 초자연적 신념을 갖게 될 줄 아셨다고 (이게 맞다면 하나님이 아실 것이다.) 가정해 보자. 하나님이 이 특성들이 당신이 바라시는 것의 원인이 되게 하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자동차의 설계자가 엔진의 폐열을 이용해 승객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처럼.”

밴 인와건의 논증은 강력합니다. 설령 과학이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상속받은 유전적 요소라는 것을 밝힌다 해도 그 발견이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믿음, 나아가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과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성향을 주시고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 선포를 들었을 때 그것을 참 신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하시지 못할 논리적 이유는 없습니다. 이건 하나의 보기에 불과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조금만 진득하게 생각해 봐도 전통 신앙과 진화 사이의 소위 양립 불가능성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성도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정통과 진화는 서로 배척한다는 목소리가 다른 주장보다 더 크고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평신도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과학이 말하는 창조와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 사이에 더 큰 일치greater coherence가 있음을 알 수 있을까요?

 

목사들과 사람들

제가 볼 때 오늘날의 과학이 말하고 있는 진화는 정통 개신교인에게 네 가지 어려움을 안겨줍니다. 첫째는 성경의 권위 분야의 어려움입니다. 진화를 설명하려면 적어도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경우 제기될 질문은 성경이 최종 권위를 갖는다는 사상은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문자적으로 볼 수 없다면 다른 부분을 문자적으로 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으로 과학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과학을 재판석에 앉혀 우리의 성경 이해를 판결하게 만드는 일이 아닌가요?

두 번째 난점은 생물학과 철학의 혼동입니다. 진화를 생물학적 과정으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진화를 또한 거대한 모든 것 이론Grand Theory of Everything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연 선택을 이용하여 인간의 행동 전부를 설명할 뿐 아니라 중요한 철학적 질문들 이를테면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왜 이런 인간성을 가졌는지 등에 대한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까지 주려고 합니다. 생명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믿으려면 결국 이런 세계관전체를 수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세 번째 난점은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입니다. 현대 과학이 진화에 대해 말하는 바를 조화시키는 한 방법은 아담, 하와의 이야기가 문자적이 아닌 상징적이라고 보는 방법인데 그렇게 되면 신약 로마서 5장 및 고린도전서 15장의 가르침 곧 우리의 죄성sinfulness이 아담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는 가르침은 어떻게 됩니까? 역사적 타락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고 저주받은 자가 되었을까요?

네 번째 난점은 폭력과 악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장벽의 하나는 세상의 고통과 악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폭력, 고통,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전통 신학의 답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때문에 죽음과 고통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진화 과정은 폭력, 약탈, 죽음 등이 생명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만약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 생명을 주신다면 그것을 선하신 하나님 개념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악 문제는 유신 진화를 믿는 이들에게 더 골치 아픈 문제일 것입니다. (역주: 악과 고통은 창조를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주제인데 유신 진화를 믿으면 더 어려워진다는 뜻.)

저는 35년 가까이 목회하면서 현대 과학과 정통 신앙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수많은 교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도들 대부분에게는 앞의 세 가지 어려움이 가장 많았습니다. 네 번째 어려움 고통과 죽음 문제 을 말하는 분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고통 문제는 타락의 역사성에 관한 세 번째 문제와 이어져 있습니다. 타락의 역사성을 믿는 전통적 관점이 아니라면 악 문제는 더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성도들이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과학의 설명을 듣고 갖게 되는 기본적인 세 가지 문제점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여기 쓴 글이 이런 문제들에 답할 때 요구되는 엄격한 학문적 논증들의 수준에 미친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대중의 수준에 맞춘 목회자의 대답이요 안내입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연구에 많이 기대야 했습니다. 성경의 권위에 관한 첫 질문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및 성경학자들의 최고 저작을 참고했습니다. 진화를 거대한 모든 것 이론으로 보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의 글을 참고했습니다. 아담 하와에 관한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에게 의존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목회자인 제가 신자와 구도자 모두를 도와 과학과 신앙을 일관성 있게 연결할 수 있게 하려면 과학자, 주석가, 철학자, 신학자들의 책을 읽고 그것들을 성도들에게 해석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게 목회자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라 생각하고 차라리 성도들이 학자들의 저작을 직접 살펴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목사가 여러 분야의 다양한 학자들의 글을 간추리고 이해할 그런 단계까지못 간다면 성도들이 어떻게 그걸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성도들이 목사에게 기대하는 일 가운데 하납니다. 우리는 학문 세계를 일상의 세계 및 교회의 강단과 이어줄 책임이 있습니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잘 압니다. 목회자 일이 이렇게 어려웠던 환경이 다시 있었던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라 믿습니다.

 

1. 진화는 창세기의 문자적 읽기와 조화될 수 있는가?

질문 1: 만약 하나님이 진화를 이용해 창조하셨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문자적으로 볼 이유가 무엇인가?

: 성경 저자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법은 저자 본인들이 바라는 그대로 읽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읽기를 바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들의 말을 들어야지 우리 생각이나 관심사agenda를 그들에게 덧씌워서는impose 안 된다.

 

장르와 저자의 의도

성경 저자들을 진중하게 대하려면 이 저자는 어떻게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게 훌륭한 읽기요 또 일반적인 예절이기도 하지요. 사실 황금률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 말을 액면 그대로literally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잘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편지에 그 사람을 밟아 버려야지하고 썼다면 상대방이 은유적 표현으로 읽어 주기를 바라겠지요? 만약 그 사람이 경찰을 불러 당신을 잡아가게 한다면 액면 그대로 읽을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수고를 왜 하지 않았느냐고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주: 월튼은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장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Walton, The Lost World, 20.)

저자가 어떻게 읽어 주기를 바라는지 분간하려면 저자가 사용하는 장르를 구분하면 됩니다. 사사기 5:20은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이스라엘을 위해 시리아인들과 싸웠다고 기록합니다. (역주: ‘시리아인들시스라의 군인들을 가리키는 듯한데 성경은 이들을 시리아인이라 부르지 않음. 별들이 내려왔다는 표현도 원문이나 영어 번역에 나오지 않음. 개역개정은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하지만 그 전투를 묘사하는 사사기 4장을 보면 그런 초자연적 사건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모순입니까? 아닙니다. 사사기 5장에는 히브리 시 장르의 특징들이 있지만 사사기 4장은 역사적인 산문 서술이니까요. 사사기 4장은 일어난 일의 기록이고 사사기 5장은 일어난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담은 드보라의 노래입니다. 누가복음 1:1이하를 보면 본문에 기록된 것은 전부 역사적 기록으로서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확인한 것이라고 저자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자가 문자적으로곧 실제 사건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읽어 주기 바란다는 명확한 표시지요.

그렇다고 성경 저자의 의도나 장르가 늘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이나 전도서 같은 경우는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표지가 명확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원칙은 이겁니다. 성경의 부분을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해서 다른 부분도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르와 창세기 1

그럼 창세기 1장의 장르는 무엇일까요? 산문입니까 시입니까? 일단 질문 자체가 틀렸습니다. 에드워드 영은 보수적인 히브리어 학자로 창세기 1장의 6일을 역사 기록으로historical 읽으면서도 창세기 1장은 고양된 준 시적 언어exalted semi-poetical language로 기록되었다고 인정합니다. 한편으로 이 본문은 서사로서 연속된 사건들을 묘사하며 산문의 특징인 와이잌톨wayyigtol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 히브리 시의 핵심 특징인 병행구parallelism는 없습니다. (역주: wayyiqtol (lfOqYw)이 옳음. ‘리고 그가 .....했다는 표현.) 그런데 이를테면 출애굽기 15장 미리암의 노래에는 시적 요약recapitulation 또는 반복restatement 즉 시적 병행의 표시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출애굽기 15:4-5)

이와 달리 창세기 1장의 산문은 많은 사람 말대로 아주 독특합니다. 후렴구refrains 즉 찬송이나 노래처럼 계속 돌아오는 반복구가 있습니다. 보기가 많습니다만 7회 후렴구인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0회 반복인 하나님이 이르시되,” 10번의 있으라,” 7회 반복구 그대로 되니라등입니다. 일어난 일을 그냥 말하라는 요구에 응해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태양과 (“큰 광명”) 달을 (“작은 광명”)을 가리키는 용어도 무척이나 예외적이고 시적이어서 성경 다른 어디에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동물을 가리키는 들의 짐승역시 시적 표현에만 국한된 용어입니다. 그래서 콜린스는 결론짓기를, 그 장르는

우리가 고양된 산문 서술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장르 이름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다. 첫째, 지금 다루는 본문이 산문 서술임을 인정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진리 주장들도 여기 포함된다. 둘째로, 고양되었다 부름으로써 인정하는 것은....... ‘문자주의적해석을 본문에 덧씌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가 문자적으로 읽히기를 원치 않았다는 가장 강력한 논증은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창조 행위의 순서를 비교해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이 말하는 창조는 자연적 순서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빛이 있고 (1) 그 다음에 빛의 원천들인 해, , 별이 있었습니다 (4). 식물이 있고 (3) 그 이후 대기가 있었는데 (4, 태양이 창조되었을 때) 그건 비가 가능하기 전에 식물부터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아무 문제도 아니겠지요. 하지만 창세기 2:5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개역개정)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우리가 자연적 순서라 부르는 것을 따라 하실 필요는 없겠지만 창세기 2:5은 하나님이 따라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대기와 비가 있기 전에 땅에 식물을 내지 않으셨다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는 비가 가능하거나 경작할 사람이 있기 전에 식물이 분명 있습니다. 사실 창세기 1장에서는 자연적 순서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태양이 떠오르기도 전에 저녁과 아침이 세 번이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는 자연적 순서가 표준입니다. (역주: 2:5의 상황이 전 지구가 아닌 에덴동산이 생길 지역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사용한 용어가 1:11-12와 다르므로 우기 직전의 마른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는 주장. Vern Poythress, Interpreting Eden, 188, 201, 포이트레스는 Bruce Waltke의 견해를 반박하며 그런 주장을 편다. 319.)

결론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의 사건 순서는 문자적으로 읽고 창세기 1장은 그렇게 읽지 않거나 혹은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합니다만)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고 창세기 2장은 그렇게 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둘 다를 역사적 사건들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둘 다 문자적으로 읽을 글이라면 저자가 이 둘을 붙여 놓은 이유는 뭐겠습니까? (그렇게 읽으면) 둘이 서로 맞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가장 좋은 답은 이 둘은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5장과 (홍해 건너기) 사사기 4-5장에는 (이스라엘이 시스라의 시리아군을 물리침) 역사적 이야기가 그 사건의 의미를 선포하는 더욱 시적인 노래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 어떤 것을 창세기의 저자가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24시간의 6일에 창조하셨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진화를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생명을 창조하신 실제 과정을 다루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지구가 아주아주 오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특정한 과학적 관점을 위한 여지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먼저 본문에 충실하고 그래서 영감된 저자의 의미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역주: ‘창조하신 실제 과정을 다루지 않으니까요는 팀 켈러가 창세기 1, 2장의 내용에 대해 진화창조론의 일반적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1, 2장이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고 창조라는 사실과 그 뜻을 다룬다는 것은 진화창조론의 일관된 입장이다. Alexander, Creation or Evolution?, 35; Walton, The Lost World, 17)

 

2. 진화가 인간의 독특성을 약화시키는가?

질문 2: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driven 동물에 불과하며 우리와 관련된 것들도 전부 자연 선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인가?”

: 아니다. 진화를 생물학적 과정으로 믿는 것은 진화를 세계관으로 믿는 것과 같지 않다.

오늘날 많이들 애써 주장하고 있는 한 가지는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믿으면 필연적으로 영속적 자연주의’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의 용어)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인간 본성에 관련된 모든 것 사랑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신념을 형성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도덕적 신념을 갖고, 하나님을 믿고, 예술과 철학을 하는 우리의 능력 이 전부 무작위의 유전적 변이나 다른 다양성의 원천에서 생겨나 오직 자연 선택 때문에 오늘날 인류에게 널리 퍼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은 보편적으로 옳아서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것들은 보편적으로 틀려 행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데 그런 행동이 우리의 생존을 증대하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속적 자연주의는 그런 느낌이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보편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 조상들의 생존을 도왔다는 그 한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신 무신론자들의 핵심 원리의 하나는 영속적 자연주의가 종의 생물학적 진화를 믿는 신념에서 자동으로 생겨 나온다는 것입니다. 한 보기로 샘 해리스Sam Harris는 최근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가 국립보건원 원장으로 임명되자 혹평을 날렸습니다. 해리스를 심히 불편하게 만든 것은 기독교 신자인 콜린스가 인간 본성 가운데는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측면들 (이를테면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직관)이 있다고 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콜린스는 과학이 인간 실존의 가장 절박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준다는 것을 부인하는 셈이지요. 이게 해리스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해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신경과학, 심리학, 인지과학, 행동 경제학 등에서 유래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콜린스 박사의 사고방식 때문에 심히 불편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확실하게 믿는 그런 사람에게 미국 생의학 연구의 미래를 정말로 맡겨야만 하는가?”

논지는 분명합니다. 인간 생명이 생물학적 진화 과정 (여기서부터는 생진과)으로 형성되었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로 거대한 진화 이론 (여기서부터 거모이)을 인간 본성의 모든 요소에 대한 설명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주: 거모이를 앞에서는 Grand Theory of Everything으로 썼는데 여기서는 Grand Theory of Evolution으로 썼다. 영어 약자는 GTE로 똑같다.) 해리스는 인간에게는 신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불멸의 영혼, 자유의지, 도덕법에 대한 [지식], 영적 갈급함, 순전한 자선같은 것이 없음을 콜린스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해리스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허상임을 진화가 밝혔다는 것입니다.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이 자연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근거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생진과를 믿으면 거모이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거모이는 빠른 속도로 피터 버거Peter Berger개연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라 부른 것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개연성 구조는 너무나 기초적이고 또 권위 있는 인물이나 기관의 지지를 워낙 많이 받아 개인이 공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된 신념들의 집합을 가리킵니다. 개연성 구조는 엄청난 사회적 압력을 가진 당연한 것given입니다. 이 점에서 신 무신론자들의 저작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태도가 논지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을 존중하지 않고 경멸하는 것은 사실상 논리적으로 논박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태시키고 자신들의 관점을 개연성 구조로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지금 그들의 생각대로 잘 돼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평신도에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선생들이나 목사들에게 하나님이 생진과를 사용하셔서 생명체들을 만드셨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을 경우에 말입니다. ‘거대한 이론으로서의 진화는 오늘날 대중적 수준에서 인간 행동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평신도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특별 창조론fiat-creationism을 수용함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유지하고자 시도합니다. (역주: 특별 창조론special creation은 문자적으로는 명령 창조론으로서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현재의 상태로 생겨났다고 보는 전통적 기독교 입장. Cf. J. Daryl Charles ed., Reading Genesis 1-2, 18.) 신학적으로 또 철학적으로 복잡한 선택이 아닙니다. 그냥 본능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진화는 하나의 큰 덩어리one big ball of wax입니다. 이들이 볼 때 일단 진화를 믿으면 인간은 그저 유전적으로 생산된 내적 동력drives의 지배를 받는 동물일 뿐입니다. 창세기 1-2장 성경공부를 함께 하던 성도들 가운데 다음 글을 읽고 당황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진화..... 사물들의 존재방식에 관한 세계관의 수준으로 격상된다면 성경적 신앙과 직접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화가 과학적 생물학적 가설로 남는다면 창조주를 믿는 기독교 신앙에 내포되는 것들과 하나님이 창조과정에서 생물학적 차원에서 사용하신 방법들에 대한 과학적 탐구 사이에는 갈등이 생길 이유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앹킨슨Atkinson은 우리가 생진과는 믿고 거모이는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똑똑하고 교육 수준도 높은 평신도들이 앹킨슨이 한 이 구분을 못 해 정말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구분은 반드시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생진과의 중요성을 전혀 인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기원에 대해 생진과를 옹호하기 원하는 그리스도인 목사, 신학자, 과학자들은 그와 동시에 거모이를 논박하는 일도 아주 많이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길을 잘 닦아 놓은 덕에 철학적 자연주의에 대한 좋은 비판이 많이 있습니다. 앨빈 플랜팅가의 자연주의를 논박하는 진화론적 논증을 많이들 아시지요? 여기서 플랜팅가는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기적Miracles이라는 책에서 하는 것과 비슷한 주장을 폅니다. “진화론은 (소위) 적응적 행동에만 관심이 있지 참된 신념에는 관심이 없다. 자연 선택은 우리가 무얼 믿는지 관심도 없다. 그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만 관심이 있다.” 논증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자연 선택이 (혼자서) 우리에게 인식적 기능들 (감각 인식들, 그 인식들에 대한 이성적 직관, 그것들에 대한 기억)을 주어서 실재 세상에 대한 참 신념들을 낳게 할 수 있는가? 참된 신념이 생존 행동을 낳는 한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런지 누가 아는가? (역주: 참된 신념이 어느 정도로 생존 행동을 낳는지 알 수 없다는 뜻.) 어떤 이론이 우리 마음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면 결국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 대진화macro-evolution 자체를 포함한 - 그 어떤 것도 그리고 다른 모든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우리 마음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론은 전부 자멸적self-defeating이다. (역주: 또는 스스로를 논박한다.’)

거모이를 몰아내야할 다른 중요한 한 영역은 도덕적 직관을 설명해 없애려는explain away 노력입니다. 역시 기독교 철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최근의 탁월한 책은 제프리 슐로쓰Jeffrey Schloss가 편집한 믿는 영장류: 종교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철학적 신학적 성찰The Believing Primate: Scientific,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Reflections on the Origin of Religion (Oxford, 2009)입니다. 특히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가 쓴 자연주의는 보편적 자선과 인권에 대한 도덕적 신념을 보장하는가?Does Naturalism Warrant a Moral Belief in Universal Benevolence and Human Rights?를 보시기 바랍니다. (, 결론은 노우입니다) 그래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생진과를 믿는 정통 그리스도인이 그걸 안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거모이를 반대하는 공통의 명분을 가질 수 있다면 진화를 둘러싼 신자들 사이의 긴장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그리스도인 평신도들이 마음으로 생물학적 역학biological mechanism인 진화와 생명 이론Theory of Life인 진화를 구분하게 돕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주: 여기서는 생진과와 거모이 사이의 구분을 다른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3.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죄와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질문 3: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고 역사적 아담과 하와가 없었다면 죄와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진화에 대한 신념은 역사적 타락 및 문자적 아담 하와와 조화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답이 없는 질문이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하셨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서로의 관점에 열려 있어야 한다.

첫 두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입니다. 문의자의 생각의 흐름과 반대로 가지요. 저는 창세기 1장을 문자적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인간 생명이 생진과로 생겨났다고 믿는다고 해서 진화를 거모이로 지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번 질문에 담긴 염려들은 근거가 훨씬 더 분명하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그런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진과를 통해 인간 생명을 만드셨다고 믿는 정통 그리스도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창세기 1장을 역사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창세기 2장이 실제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도 부인합니다. 그들이 볼 때 아담과 하와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인류를 가리키는 우화나 상징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은 인류는 모두 하나님을 등진 존재요 죄인이라는 진리를 전하는 상징적 이야기 또는 신화가 되겠지요.

이 관점에 대한 제 염려를 말씀드리기 전에 분명하게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조금 약하게 표현했습니다) 기독교 작가인 씨 에스 루이스는 문자적인 아담과 하와를 믿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루이스 개인의 신앙의 실체나 견실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장기간에 걸친 교회의 성장 및 생명력입니다. 역사적 타락에 대한 신앙을 잃으면 어떤 핵심적인 요점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교리적 입장이 약화될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성경의 신뢰 가능성trustworthiness

첫째 염려는 성경을 신뢰 가능한 문서로 읽는 문제입니다. 전통적으로 개신교는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이해해 왔으며 따라서 인간 저자가 의도한 뜻을 알아내는 일이 하나님이 특정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을 말하는 창세기 2-3장과 로마서 5장의 저자들이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2-3장에는 고양된 산문 서술이나 시의 표지들이 없습니다. 실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역사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가 (또는 성경의 다른 본문이) 현대적, 실증적 의미에서 역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고대 저자들은 역사적 사건들을 말할 때 시대를 뒤섞고 시간 틀을 마음대로 압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 역사가들이 완전한 그림을 보여주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엄청난 양의 정보를 빼먹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묘사하는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났다고 여전히 믿었습니다.

고대의 저자들은 또 비유적 언어와 상징적 언어도 많이 쓸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브루스 월키Bruce Waltke가 지적하듯 시편 기자가 주께서......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39:13) 한 것이 자신이 완벽하게 생물학적 방식으로 발생한developed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서 인간 형성의 생물학적 과정을 실행하시고instituted 인도하셨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2:7)라는 표현을 볼 때 저자는 동일한 방식으로 비유적으로 말했을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이 정상적인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 사람을 지으셨음을 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서사는 극도로 여지가 많아서spare 독자들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아는 데 필요한 것만을 말합니다.

압축, 생략, 비유적 화법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이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신화라는 표시가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창세기 2-11장을 근동 세계에 있던 다른 고대 창조 신화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입장은 다른 문화들 역시 세계의 창조와 거대한 홍수 같은 사건들에 관한 신화를 썼으므로 창세기 2-3장의 저자도 십중팔구probably 같은 일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게 볼 경우 창세기 2-3장의 저자는 창조와 홍수 신화를 히브리 식으로 다시 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그런 사건들이 정말 일어났다고 믿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사람도 시대의 한계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렇겠지요.

하지만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은 그렇게 풀어선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키친은 저명한 이집트학 학자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인데, 홍수 이야기 (창세기 9)를 다른 문화에서 나온 다른 홍수 이야기들처럼 신화원역사proto-history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charge에 대응하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고대 근동은 신화를 역사로 만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신화를 상상의 역사로 읽지 않았다) 사실 정반대로 했다. 이들은 역사를 신화화하는경향 곧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신화적 용어로 기념하는 경향을 가졌다.”

무슨 말입니까? 증거에 따르면 근동의 신화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적 이야기로 진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사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적 이야기로 진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키친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창세기 2-11장을 고대근동 문서처럼 읽는다면 창세기 2-11장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많은 압축과 비유로 담은 고층high이야기라는 결론이 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창세기 2-3장을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을 책임 있게 읽는 방법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 논의와 관련된 다른 본문은 로마서 5:12이하로서 바울은 아담과 타락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담을 실존 인물로 믿었다는 것이 훨씬 더 명백합니다. 톰 라이트N. T. Wright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단일한 첫 쌍이 있었고 그 남성인 아담이 명령을 받았고 어겼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믿었다. 바울은 그 이야기에 담긴 소위 신화적 또는 비유적 차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이 역사적 첫 쌍의 존재와 최초의primal 죄를 의심하게 만든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아담 하와가 실존하지 않았다는not literal 입장을 견지한 가운데 창세기의 저자가 우리에게 아담 하와가 실제 사람으로 죄를 지었다고 가르치려고 하고 바울은 확실히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문제를 일으킬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글쎄, 성경 저자들은 시대의 사람들이었으니 독자들에게 가르치려 한 것 중에 틀린 것도 있어.” 그렇다면 문제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믿고 어느 부분을 안 믿을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아담 하와를 문자 그대로 안 믿으면 성경의 권위를 안 믿는 거야!” 하는 식의 유치한 주장을 하는 건 아닙니다. 성경 전부를 문자적으로 볼 수는 없다고 앞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해석의 열쇠는 성경 그 자체입니다. 제가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다고 믿는 이유는 저자가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다릅니다. 바울은 정말 확실하게 아담 하와는 실존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가르치고자 합니다. 성경 저자가 문자 그대로 보아 주기를 원할 때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다면 성경 권위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서 이미 떠난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그것 때문에 강력하고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변화는 교회 전체에도 해롭고 평신도들 역시 분명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화, , 구원

이렇게 대응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자적 아담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창세기 2장과 로마서 5장의 가르침은 수용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지요. 따라서 아담 하와 이야기의 역사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변함이 없지요.” 제가 보기에 그런 주장은 너무 단순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좋은 조언이 아니라 좋은 소식입니다. 자신을 구원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알려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역사에서 무언가를 하셨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되면 그가 이루신 것의 혜택을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하신 것에서 유익을 얻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답은 현대인들에게 납득이 안 될지 모르지만 고대인들은 완벽하게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기본 개념은 누군가와 연대federation관계를 맺는 것 즉 아버지, 조상, 다른 가족, 부족의 다른 사람 등과 법적 역사적 유대solidarity를 맺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는 (또는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누군가와 언약covenant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한 보기가 아간인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전 가족이 벌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 7). 고대와 성경이 이해하는 바로는 개인이 어떤 사람what he is이 되는 것이 자신의 개인적 선택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개인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공동체와 가족의 환경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내가 무슨 끔찍한 죄를 저지르거나 아니면 훌륭한 업적을 세우면 연대에 속한 (또는 유대나 언약 관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치 자신들이 그 일을 한 것처럼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은 그렇게 작용한다고 바울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매우 성경적인 문구)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과 언약 관계에 있는 것은 생물학적 연줄이 있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역사에서 하신 일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모든 이야기가 아담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해 로마서 5장에서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1-22) (개역개정)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구원받았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언약적 연대적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역사에서 하신 일이 우리 것이 되었습니다laid to our account. 그렇지만 바로 그 문장에서 바울은 마찬가지로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 (바울은 같이을 사용해 이 점을 강조합니다)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아담이 모든 인류의 언약적 대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언약 관계에 있어서 그가 역사에서 한 일이 우리 것이 됩니다.

누구 안에있다는 바울의 표현은 그 사람에게 언약으로 연결되어 그 사람의 역사적 행동이 우리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 안에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죄와 은혜가 다 언약적으로작동한다는 바울의 논리 전체가 무너지고 맙니다. ‘바울은 시대의 사람이었지만아담에 관한 기본적인 가르침은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역주: ‘시대의 사람은 신화를 실제 역사로 착각하는 사람) 바울이 아담에 대해 믿은 것을 우리가 안 믿는다면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을 단일한 역사적 사건으로 안 믿는다면 무슨 대안이 있을까요? 인류 가운데 몇 사람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활용해 하나님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죄가 어떻게 퍼졌습니까? 나쁜 보기에 의해서만입니까? 그런 건 기독교의 원죄 교리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과 아주 거리가 멉니다. 죄는 남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의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앨런 제이콥Alan Jacob원죄: 문화적 역사Original Sin: A Cultural History라는 훌륭한 책에서 잘 말했습니다. 누구든 원죄에 대한 고전적 아우구스티누스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죄와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음hard-wired을 믿어야 한다고요. (역주: 어떤 특성이 본성적으로 고착되어 있다는 뜻.) 우리는 죄를 그저 나쁜 사례들을 보고 죄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리는 또 처음에는 죄짓는 것이 우리 본성에 없었는데 우리가 최초의 순수함에서 떨어졌다고 가르칩니다.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면 다른 문제도 생깁니다. 인류의 일부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면 다른 일부가 저항해 몇 집단은 다른 집단보다 죄성을 덜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앨런 제이콥은 원죄에 관한 책에서 모든 인류가 똑같이 죄성을 가졌다는 것이 전통 관점의 토대라고 주장합니다.

 

아담 하와와 진화: 모델 하나

만약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인물이라면 그들이 생진과의 산물일 수 있을까요? 데릭 키드너Derek Kidner가 쓴 오래된 복음주의적 창세기 주석이 제공하는 모델에는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첫째, 키드너는 욥기 10:8-9이 도공이 땅의 흙으로 진흙을 뭉치듯 하나님이 욥을 으로 지으셨다고 말한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는 자궁에서 자연적 형성과정을 통해 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키드너는 창세기 2:7에 나오는 똑같은 도공 용어가 진화 같은 자연적 과정을 의미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성경의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곧 도구 제작자들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숨결에 의해 사람으로 구성되었으며constituted 그 이하일 수 없다..... 오랜 옛날의 지적 존재들은 비록 육체적 문화적 유물 덕에 인류학자로부터 현대인이라는 뚜렷한 지위를 부여받긴 했지만 아담의 창조로 확립된 그런 삶의 차원보다 분명 아래에 있었다....... 하나님이 인간 생명을 불어넣으신 그 피조물이 인간을 위해 모든 면에서 준비된 어떤 종이 아니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이 모델에는 인간의 진화를 논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구 제작자들의 무리에서 하나를 골라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삶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이....... 대안에 인류의 연합에 대한 의심이 담겨 있다면 당연히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하나로부터만드셨다 (사도행전 17:26). (역주: 개역개정은 한 혈통으로라고 번역해 결과인 듯 보이나 헬 원어는 ejx eJnos로서 하나로부터라는 뜻이다. KJV: of one blood; NIV: from one man).......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와가 특별하게 창조되어 최초의 인간 쌍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확립되고 (1:27-28)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어지는 자연적 고리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다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아담의 방계 사람들collaterals에게도 부여하셔서 그들을 동일한 존재 영역으로 불러들이셨을 가능성이다. 그 경우 아담의 연대적federal인류 대표성은 자신의 후손들뿐 아니라 바깥으로 아담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확장되고 아담의 불순종은 동시대 사람들과 후손들 모두의 상속권을 박탈했다disinherited.” (역주: ‘방계 사람들은 아담의 직계가 아닌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 곧 비슷한 시기에 유인원에서 진화된 다른 인간들을 가리킨다.)

여기 키드너는 기발한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의 손 아래서 아담이 된 그 존재는 처음 진화했지만 하와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둘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과 그들의 타락은 자신들의 후손뿐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키드너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동물과 사람 사이의 연속성도 설명하고 성경이 묘사하는 불연속성도 설명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타락해 죄인이 되었고have fallen into sin, 은혜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역주: ‘have fallen into sin’죄에 빠졌다고 옮길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떨어졌다는 뜻의 타락을 추가하는 것이 본 취지에 맞다. ‘죄로 타락했다고 옮기기도 하지만 죄가 타락의 원인이라는 혼동을 초래하므로 좋은 번역은 아니다.)

이 접근법은 성경의 영구 난제들도 설명해 줍니다. 이를테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데 대한 보복으로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4:14),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으며 가인은 어떻게 주민으로 가득한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4:17) 하는 것들입니다. (역주: 개역개정 구약은 도시으로 번역한다. 신약은 도시가 오락가락한다.) 우리는 심지어 창세기 2:20이 아담이 주위에 동물밖에 없었는데도 왜 배우자를 찾으러다녔다는 암시를 주는지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역주: 개역개정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번역된 부분의 원문은 그러나 아담을 위한 돕는 짝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영어 번역에는 잘 나타나 있다. KJV: ‘but for Adam there was not found an help meet for him’; NIV: ‘But for Adam no suitable helper was found’) 키드너의 접근에서는 세상에 아담과 하와만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이 모든 문제가 설명됩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들 위로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등장합니다. 이 모델에서는 타락 전에 고통과 죽음은 어떻게 있을 수 있었을까요? 창세기 두 번째 절에 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어둠과 혼란으로 덮여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통적 해석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이렇게 혼돈한상태로 창조하셨고 그런 다음 창세기 1장에 묘사된 분리, 세부 작업elaboration, 발전 등의 창조적 과정을 통해 혼돈을 제압하셨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 전통적 해석조차도 창조에는 애초부터 완벽한 질서와 평화가 없었다는 입장입니다. 또 사탄이 타락 전의 세계에 이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탄과 악마들이 뱀이 등장하기 전에 세상에 없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신학적으로 답을 얻지 못한 (그리고 얻지 못할) 가장 큰 질문은 사탄이 거기서 뭘 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만약 사탄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다면 온 세상이 완전한 장소가 될 수 없습니다.

전통 신학은 창세기 2-3장의 인류와 세상이 영광스럽고 완벽한 상태에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하와가 포쎄 논 페카레posse non peccare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지만 논 포쎄 논 페카레non posse non peccare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구원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우리가 논 포쎄 페카레non posse peccare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에덴은 미래의 완성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는 에덴동산에는 일종의 죽음과 부패가 반드시 있었어야지 안 그러면 과일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조건부 불멸성을 받았을 수 있고 그래서 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인간들이 하나님과 또 당신의 피조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 경우 어떤 삶이 될지 미리 맛보았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해 땅을 정복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1:28). 어떤 관점을 취하든 다스림과 땅의 정복이라는 개념은 창조가 적어도 상당히 미개발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타락 이전에도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신 모양을 아직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일해 땅을 경작하고 개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타락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세상 그 누구도 몰랐던 까닭은 아무도 하나님의 형상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동시에 다른 피조물보다 훨씬 크고 훨씬 악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적으로 죽을 때 영원히 죽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은 타락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을 방식으로 어둠의 능력들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물리 세계는 지금 붕괴disintegration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데 인간이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청지기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큰 자연의 악이 인간의 도덕적 악과 결합되어 정말 어둡고 혼돈스러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끝에 가서는 세상이 새로워질 것이고 애초에 의도했던 그런 세상이 되겠지만 (8:19-23) 오직 우리가 둘째 아담의 사역을 통해 본디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회복할 때만 그리 될 것입니다 (고전 15:42-45).

 

다른 모델들

역사적 타락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진화를 이용해 땅에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델은 이것밖에 없을까요? 아닙니다. 유신 신화를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진화의 산물이면서 하나님의 형상과 숨결을 부여받았다는 입장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점진적 창조를 믿는 것이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일반적 진화를 이용해 생명을 주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특별한 행동을 통해 창조하셨고 그래서 다른 동물들과 공통조상을 갖는다는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고 봅니다. 키드너 모델은 유신 진화론, 오랜 지구 점진적 창조론의 혼합입니다.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어떤 모델로 연결하든 키드너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 장들을 성경 다른 부분에 비추어 볼 때 거기 나오는 교리들 곧 인류는 한 단위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아담 안에서 한 불순종의 행동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 이해는 이 모든 것들을 다른 그 어떤 것 못지않게 강하게 주장한다.”

 

결론

과학 데이터를 성경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할까요? 과학자들은 아주 간단하게 성경이나 신학에 누가 신경 쓰나?’ 하고 답할 수 있겠지만 그 경우 성경의 권위를 짓밟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극도로 무겁게 대하시지 않았습니까? 신학자들이 할 가장 간단한 답은 과학에 누가 신경을 쓰나?’ 하는 것이겠지만, 이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시편 19편과 로마서 1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revealed 가르치지만 두 구절 모두 끝에 가서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완벽하게계시한다고 말합니다 (19:7). 하나님의 책으로 자연의 책을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완벽한 매체vehicle라는 점은 참으로 중요하고 중요하다....... 위대한 회화 작품 같은 대담한 선택성이 성경의 힘이다. 다른 이야기에 한눈을 팔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그림이 흐려지고 성경의 지혜도 놓치게 된다.”

결론입니다. 성경과 과학을 조화하고자correlate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반과학적 종교인들이나 반종교적 과학자들보다 더 큰 텐트bigger tent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아담 하와를 문자 그대로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주장합니다만, 그 입장을 지키면서 생진과를 이용하시는 하나님도 믿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역주: 한 비판자는 -과학적 종교인이라는 표현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E. B. Williams, “Keller’s Confused Theory of Theistic Evolution” on The New Calvinist webpage) (역주: a bigger tent는 양쪽을 다 품어주는 그런 모집단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

데릭 키드너는 인간 기원에 관한 자신의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견해는 탐색적 제안으로...... 잠정적일 뿐이며, 개인적인 견해이므로 교정과 더 나은 종합이 있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이 영역에서 일하는 우리가 다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