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임시정부 2

상해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상해임정은 27년 동안 5차례의 개헌을 하고 8번을 이사하면서 존속했으나, 상해시대 초기를 제외하면 열악한 재정으로 행정비용을 충당하기에 허덕였고, 내각 인선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하자면 사실상 이름뿐인 정부였다. 임정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주원인은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금조달의 어려움과 지도적 인사들의 참여 거부, 그리고 공산당 진영의 분열책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내전, 일제에 의한 상해사변(1931)과 중일전쟁의 발발(1937-1945) 등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임정을 보따리장수처럼 옮겨 다니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이렇게 고난에 찼던 임시정부 시대의 지도자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 5인..

상해임시정부의 혼란과 분열

1. 대통령 이승만과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임정 유지파인 민족진영은 곧 국무총리 노백린과 내무총장 김구 등을 중심으로 상해임정 유지에 주력하면서도 현실적인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재하므로 그 직무를 대행하기 위하여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하였다.(1924. 6.)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이승만을 해임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임시의정원의 이런 비상조치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반대했으나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에 정식으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체제개편을 서둘렀다. 처음에 국무령제로 출발했다가 통합을 위한 1차 개헌(1919)을 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