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상해임시정부의 혼란과 분열

heojohn 2020. 3. 12. 10:54

1. 대통령 이승만과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임정 유지파인 민족진영은 곧 국무총리 노백린과 내무총장 김구 등을 중심으로 상해임정 유지에 주력하면서도 현실적인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재하므로 그 직무를 대행하기 위하여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하였다.(1924. 6.)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이승만을 해임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임시의정원의 이런 비상조치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반대했으나 임시의정원은 19253월에 정식으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체제개편을 서둘렀다. 처음에 국무령제로 출발했다가 통합을 위한 1차 개헌(1919)을 통해 대통령제를 도입했던 상해임정은 2차 개헌(1925. 4)을 통해서 다시 출발선으로 되돌아갔다. 그 해 11월에 박은식은 지병으로 사망했다. 임정은 첫 국장으로 박은식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재정난과 인재난이 겹친 임정의 혼란은 헌법 개정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년 동안에 국무령으로 선임되었던 이상룡, 안창호, 홍진이 내각구성에 실패하고 취임을 거부하거나 중도 사퇴하므로 마침내 김구가 국무령이 되었다(1926. 12.). 그러나 국무령제의 한계를 절감한 김구는 국무위원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는 3차 개헌(1927. 2.)을 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는 3차 개헌을 할 때 이당치국(以黨治國)의 국가 정치제도를 일당독재(一黨獨裁) 체제로 시도한 적이 있었다. 3차 개정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은 임시의정원이 이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장차 독립운동자들의 대동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은 당에 있다고 규정했다. 이것은 독립운동자들이 일당을 만들어 해방된 조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민족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자들의 힘을 결집하려는 목적과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일당독재 체제와 다를 바 없는 발상이었다. 이 헌법에 따라서 한국독립유일당이라는 이름으로 단일정당 결성운동이 실질적으로 추진되었다. 19271월에 한국유일당촉성회 각지 대표연합회 예비회담이 열렸고, 각 지역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총역량을 결집하려는 촉성회 조직은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책동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김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상해에서는 공산당들의 운동이 국민대회에서 실패한 뒤에도

통일의 미색(美色)으로 끊임없이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는가

하면, 공산당 청년들은 여전히 양파로 갈라져서 동일한 목적,

동일한 명칭의 재중국청년동맹(在中國靑年同盟)과 주중국청년

동맹(住中國靑年同盟)이 각기 상해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며,

처음 주장이던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하자고 절규해댔다.

 

그러다가 레닌이 공산당 사람들에게 발론하기를,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는 말에 따라,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조롱하며 비웃던 공산당원

들이 졸지에 변해 독립운동·민족운동을 공산당 당시(黨是)

주창했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찬동하고 나서 유일독립당

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여전히 양파 공산당의 권리 쟁탈전이 안팎으로

치열하게 일어나 한 걸음도 나아가기가 어려우므로 민족운동자들도

차차 사태를 알아차리고 공산당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안 공산당의 음모로 유일독립당촉성회 역시 해산되고 말았다.

 

이를 보면 백범이 공산당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자의 이러한 행태는 국내 조선공산당이 신간회와 근우회의 설립과 해체과정에 개입하면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뒤에서 볼 것이다. 유일독립당촉성회가 좌절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1930). 이후 각 정당의 역사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3차 개헌 후 집단지도체제로 14년을 지나는 동안 국무위원의 의견대립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주석제(1940)로 바꾸는 4차 개헌을 하여 김구가 주석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석-부주석제의 5차 개헌(1944)을 하여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참모총장 유동열 등이 해방을 맞았다.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012월이었다. 이승만은 상해에 도착하여 취임식을 거행하고 집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상해임정 상주(常駐)와 임정 개혁을 요구하는 국무위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상해임정에서 체제개편론은 이승만이 외교 독립론을, 이동휘가 무장투쟁론을, 안창호가 실력양성(준비)론을 주장하여 독립운동의 방법에 따라 3각 편대로 갈려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주도권을 둘러싼 좌우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이동휘가 19211월에 임정 탈퇴를 선언한 것을 시발로 좌익 계열의 김규식, 유동열 등이 동반 사직하였다. 이동휘의 사퇴원인은 체제개편론이나 좌우의 정치적 갈등이 전부는 아니다. 이외에도 이동휘가 레닌의 임시정부 지원자금을 횡령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남아있던 민족진영 인사들은 공산주의 정치이념을 거부하고 민주주의적 공화정체를 유지하고자 진력했다. 그러나 자금줄이었던 연통제가 일제의 단속으로 막히면서 임시정부는 재정난에 부딪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그의 휘하에 구미위원부가 미국 교포자금을 독점하고 있는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의 아집과 독선에 반발하여 5월에는 우파의 기둥이었던 내무총장 안창호마저 사퇴하였다. 이제까지 통합적 상해임정을 지탱하고 있던 세 축 가운데 두 축이 빠져나감으로써 그동안 유지되었던 통합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동안 비밀에 묻혀 있다가 이동휘의 사퇴를 몰고온 레닌자금 ‘40만 루불 사건의 전말은 대강 이렇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한영의 보고를 받은 이동휘는 임정특사 한형권이 레닌정부로부터 받은 자금 40만 루블을 중도에서 비밀리에 받으려고 했다. 이동휘가 밀파한 김립과 계봉우는 10월에 옴스크에서 전로고려인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한형권과 박진순을 치타에서 만났다. 이들은 회합하여 이 돈을 상해파 한인공산당이 받아서 동아시아 각국에 공산주의 선전과 공산당 조직을 위한 동아총국(東亞總局)의 결성에 쓰기로 결정했다. 한형권은 활동비 6만 루블을 제하고 나머지 34만 루블을 김립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가기 전에 치타에서 김규면을 만나 4만 루블을 건네주었다. 김립과 박진순은 레닌자금을 나누어 운반하기로 했다. 김립과 박진순은 각자 따로 가기로 하고 김립이 먼저 떠나서 1920. 12월에 상해로 돌아왔다. 김립은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 요원이 되는 장국도(張國燾)를 만나 “40만 루불과 원동 각국에 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갖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립은 한인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계열 인사들에게는, 다만 “1만 원을 교부받아 3천원은 여비로 사용하고 7천원은 소지하고 있지만 임시정부에 교부할 필요가 없고, 고려공산당(한인사회당)에서 사용하여야 한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김립은 사임한 상태이므로 상해임정에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박진순은 19213월에야 상해에 돌아왔다. 두 사람이 상해로 가져온 레닌자금에 대해서 이르쿠츠크파가 문제를 제기하자 이동휘, 박진순, 김립 등 상해파는 한인공산당에서도 탈퇴했다. 상해파가 탈퇴하자 한인공산당에 남게 된 여운형 등은 저절로 이르쿠츠크파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나머지 돈을 인출하려고 했으나 겨우 20만 루블만 받을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파가 이동휘와 상해파의 대표성을 부인하는 보고서를 코민테른에 접수하고 모함한 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형권은 1921년 말경에 상해에 돌아와서 임시정부에 레닌자금에 대한 보고를 했으나 20만 루블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한인사회당에도 레닌자금을 내놓지 않고 있다가 이르쿠츠크파에 합류하고 말았다. 이동휘 등 상해파는 레닌 자금 34만 루블을 쓰면서 한인공산당 대신 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형권 대신에 주러시아 대사를 새로 임명했다. 이들이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정부가 상해임정에 약속한 지원금 잔금 140만 루블 등에 대하여 외교적 교섭을 진행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사퇴한 이동휘 국무총리 후임으로 법무총장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겸직케 하였다. 안창호 등 사퇴한 각료들의 빈자리에는 이동녕 내무총장 등 남아 있는 각료들이 겸직하거나 주변 인사들 중에서 새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와해의 위기에 직면한 상해임정 내각을 가까스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상해임정의 위상은 이전에 비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내각을 정비한 다음날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해 연말에 열릴 예정인 태평양회의 준비를 위하여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상해를 떠났다(1921. 5.). 이승만이 상해입정에서 대통령으로 집무한 기간은 6개월이 채 안 되었다. 이승만이 떠나버리자 구심점을 잃은 상해임정의 상황은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상해임정에서 삼각체제의 통합정부를 이루고 있던 이동휘의 급진적 무장투쟁론 세력과 안창호의 실력양성론 세력이 빠져나간 자리는 다른 사람이 메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각지에서 오던 지원금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오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무능한 상해임정을 반대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통일정부기구 설립을 추진하자는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은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임정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신규식은 192110월에는 임정 대표단을 이끌고 손문의 중화민국 광동성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 참석하여 국가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임정 유지파인 민족진영은 곧 국무총리 노백린과 내무총장 김구 등을 중심으로 상해임정 유지에 주력하면서도 현실적인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재하므로 그 직무를 대행하기 위하여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하였다.(1924. 6.)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이승만을 해임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임시의정원의 이런 비상조치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반대했으나 임시의정원은 19253월에 정식으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체제개편을 서둘렀다. 처음에 국무령제로 출발했다가 통합을 위한 1차 개헌(1919)을 통해 대통령제를 도입했던 상해임정은 2차 개헌(1925. 4)을 통해서 다시 출발선으로 되돌아갔다. 그 해 11월에 박은식은 지병으로 사망했다. 임정은 첫 국장으로 박은식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재정난과 인재난이 겹친 임정의 혼란은 헌법 개정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년 동안에 국무령으로 선임되었던 이상룡, 안창호, 홍진이 내각구성에 실패하고 취임을 거부하거나 중도 사퇴하므로 마침내 김구가 국무령이 되었다(1926. 12.). 그러나 국무령제의 한계를 절감한 김구는 국무위원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는 3차 개헌(1927. 2.)을 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는 3차 개헌을 할 때 이당치국(以黨治國)의 국가 정치제도를 일당독재(一黨獨裁) 체제로 시도한 적이 있었다. 3차 개정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은 임시의정원이 이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장차 독립운동자들의 대동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은 당에 있다고 규정했다. 이것은 독립운동자들이 일당을 만들어 해방된 조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민족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자들의 힘을 결집하려는 목적과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일당독재 체제와 다를 바 없는 발상이었다. 이 헌법에 따라서 한국독립유일당이라는 이름으로 단일정당 결성운동이 실질적으로 추진되었다. 19271월에 한국유일당촉성회 각지 대표연합회 예비회담이 열렸고, 각 지역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총역량을 결집하려는 촉성회 조직은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책동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김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상해에서는 공산당들의 운동이 국민대회에서 실패한 뒤에도

통일의 미색(美色)으로 끊임없이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는가

하면, 공산당 청년들은 여전히 양파로 갈라져서 동일한 목적,

동일한 명칭의 재중국청년동맹(在中國靑年同盟)과 주중국청년

동맹(住中國靑年同盟)이 각기 상해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며,

처음 주장이던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하자고 절규해댔다.

 

그러다가 레닌이 공산당 사람들에게 발론하기를,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는 말에 따라,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조롱하며 비웃던 공산당원

들이 졸지에 변해 독립운동·민족운동을 공산당 당시(黨是)

주창했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찬동하고 나서 유일독립당

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여전히 양파 공산당의 권리 쟁탈전이 안팎으로

치열하게 일어나 한 걸음도 나아가기가 어려우므로 민족운동자들도

차차 사태를 알아차리고 공산당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안 공산당의 음모로 유일독립당촉성회 역시 해산되고 말았다.

 

이를 보면 백범이 공산당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자의 이러한 행태는 국내 조선공산당이 신간회와 근우회의 설립과 해체과정에 개입하면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뒤에서 볼 것이다. 유일독립당촉성회가 좌절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1930). 이후 각 정당의 역사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3차 개헌 후 집단지도체제로 14년을 지나는 동안 국무위원의 의견대립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주석제(1940)로 바꾸는 4차 개헌을 하여 김구가 주석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석-부주석제의 5차 개헌(1944)을 하여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참모총장 유동열 등이 해방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