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국내 공산주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

heojohn 2020. 3. 12. 11:13

1) 국내 공산주의 운동

 

코민테른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두 개의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창당 지도에서 부닥친 최대의 난제는 한민족 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 경쟁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동휘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유일정통성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할 수 없이 꼬르뷰로를 따로 조직해서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담케 했다(1922. 12.). 그러나 꼬르뷰로가 정재달을 공식적으로 국내에 파견하기(1923) 전에 이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국내에 조직을 따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동휘는 상해임정에 있을 때부터 김철수 등의 사회혁명당의 비밀조직을 만들어놓았다. 이르쿠츠크파는 김찬이 조직한 신사상연구회(화요회)와 비밀조직으로 국내 꼬르뷰로가 있었다. 이와는 달리 자생적 국내파 공산주의자 단체인 서울청년회가 있었으나 국외파와 협력하지 않았다.

 

(1)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시도와 배경

 

초기 한민족 공산주의 양대 흐름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1921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의 국내 정치적 환경은 3.1독립운동만세사건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군국주의적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뀐 시기였다. 말하자면 강압보다는 회유에 의해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였으며, 실제로 많은 효과를 거두기까지했던 시기였다. 이 기간에 동아일보조선일보등의 신문들과 신천지개벽등의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동아일보19216. 3-8. 31일까지 무려 73회에 걸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표제하에그의 일생과 활동 및 볼셰비키혁명 등에 관하여 보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풍조는 다른 일간지나 잡지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런 영향으로 차금봉에 의하여 국내에서는 최초의 노동단체로 조선노동공제회가 설립되는 등 사회주의운동에 필요한 기반들이 속속 만들어졌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꼬르뷰로가 발족하기 전에 이미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자파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르쿠츠크파는 19223월에 박헌영, 김단야, 김원봉 등 3인을 국내로 보냈다가 일제에 의해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조선공산당 조직은 수차례 시도되었으나 일제의 감시에 걸려 번번이 실패하고 이들이 출옥하기까지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같은 해에 국내 자생적인 사회주의자 김사국, 이영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서울청년회고려공산동맹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이들은 서울파로 불리면서 국내에서 처음 자발적인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코민테른에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코민테른의 계획은 조선공산당을 국내외의 모든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 창당을 직접 지도하려고 나섰다. 이 해 12월에 이르쿠츠크파에서 파견한 김재봉과 신철 등이 꼬르뷰로 국내부를 지하조직으로 만들었다. 한편 1923년에 이르쿠츠크파 김찬은 홍명희 등과 신사상연구회를 발족하여 강습회와 토론회, 출판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꼬르뷰로에서 파견한 정재달이 6월에 서울에 잠입하여 이들과 접촉했다. 정재달은 국내 사정을 살펴보고 9월에 돌아가서 국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갈등과 비협조로 조선공산당 창당이 어렵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정재달의 보고에 접한 꼬르뷰로는 위원 이동휘와 한명세가 사퇴하고, 고문 정재달마저 사퇴함으로써 기능을 잃고 아무런 성과 없이 19242월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만든 북풍회라는 사회주의 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는 일본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김약수를 중심으로 결성한 북성회가 국내로 옮겨온 것이다. 북풍회는 일월회라는 이름으로 동경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이외에도 일본 좌익계의 영향을 받은 무산자동맹과 스파르타쿠스당이라는 비밀조직을 가진 조선노동당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꼬르뷰로가 해체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꼬르뷰로를 대체하는 오르그뷰로가 조직되었다. 정재달은 오르그뷰로에서도 국내 공작원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1924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당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신사상연구회는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면서 출소한 박헌영 등이 가세하게 되었다. 이 해에 고려공산동맹(서울파)이 화요회, 북풍회, 상해파, 그리고 조선노동당을 포괄하는 13인회를 구성하여 통일적인조선공산당을 창립하려고 시도했으나, 꼬르뷰로가 오르그뷰로(조직국)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좌절되었다. 그동안 서울에 파견했던 꼬르뷰로 및 오르그뷰로 공작원들은 일제의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에 의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르그뷰로는 6월에 정재달을 다시 파견했으나 그가 9월에 일제에 검거됨으로써 또 다시 실패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11만의 노동자와 농민 회원을 자랑하는 조선노농총연맹에 침투하는 것을 비롯해서, 조선청년총동맹과 백정의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17만 명의 회원이 가입한 형평운동(衡平運動)단체에 침투하고 있었다.

 

(2)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해체

 

국내에서 제1차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것은 오르그뷰로가 해체되고 2개월이 지난 19254월의 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지 않고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창당대회(1차 당대회) 개최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코민테른 동양부에서 직접 파견한 국제공산청년회원 조훈(趙勳)이 이르쿠츠크파에서 밀파했던 김재봉과 신철, 그리고 김찬 등 화요파와 합작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김재봉은 책임비서가 되었고, 박헌영은 공산당의 청년전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미래의 공산주의 혁명운동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21명의 유학생을 보냈다. ‘1차 조선공산당은 화요회를 중심으로 하였으므로 참여하지 못한 각 지역 공산주의 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반대투쟁을 벌였다. 서울파나 북풍회도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항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은 제1차 조선공산당을 1926년에 정식 지부로 승인하였다. 코민테른은 승인 전에 이동휘에게 찬반여부를 물었고, 이동휘는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한 것에 불만이었으나, 국내 자파 조직원인 김철수의 의견을 들어 찬성했다. 그러나 11월에 신의주 사건이 일어나서 일제에게 당의 조직이 발각되고 지도부가 전원 검거되었다. 그래서 코미테른의 승인서가 도착되기도 전에 ‘1차 조선공산당은 궤멸되었다.

 

이렇게 되자 192512월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어 ‘2차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고, 강달영이 책임비서가 되었다. 2차 조선공산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여러 곳에 해외지부를 설치하고 좌우협력 기관으로 신간회 조직을 추진하는 실적을 남겼다. 이들은 1926년 순종의 장례식과 관련된 6.10 만세 사건에 참여하면서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되어 조직이 와해되었다. 조선공산당 조직이 두 차례나 무너지자 이를 주도했던 화요회도 궤멸 되었다.

 

19269월 당 조직의 주도권이 바뀌면서 서울파를 중심으로 상해파와 일본 유학생 출신의 ML파가 연합한 통일조선공산당 또는 ML당이라고 불리는 ‘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통일적인노선을 주장하면서 상해파 김철수를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3차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에 보고하러 갔던 김철수가 반대파의 공작을 극복하고 1927년에 승인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3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는 안광천, 김준연을 거쳐 김세연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조선노농총동맹의 노()와 농()을 분리했으며, 2차 조선공산당에서 추진하던 신간회를 발족하여(1927. 2.) 비민족주의 진영과 결속을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독교 여성계를 포섭하여 근우회를 발족시켰다(1927. 5.). 기관지 이론투쟁을 발행하고 지방 당부와 만주, 상해, 일본 등에 해외부도 조직했다. 그러나 ML계가 당중앙집행위를 자파일색으로 구성하자 반발이 일어났다. 192710월에는 권태석 일파가 비이론파 조선공산당, 그리고 12월에는 서울파가 신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이 두 개의 비정통파 조선공산당이 출현하면서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823차 조선공산당의 간부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4차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당원들은 3차 공산당에서 체포를 면하고 남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3주일 뒤에 3차 당대회를 열어 당 규약을 개정하고 코민테른으로부터 내려온 결정서를 접수했다. 코민테른은 이 결정서에서 ML파가 주도했던 3차 조선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과거 파쟁이 당뿐만 아니라, 국민혁명까지 마비시켰고, 한국의 모든 혁명조직을 일제의 헌병과 경찰에 제물로 바쳤다고 비난하고 있다. 3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전형위원 3명 중 2명이 다음날 체포되었으나, 이들은 옥중에서 회합하여 조선노동공제회출신 차금봉을 책임비서로 지명했다. 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내 정세에 관한 보고서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論綱)](약칭 2월 테제)을 코민테른에 보내기로 승인했다. 이 논강에는 조선의 민족해방에 관한 정세를 분석하고, 조선은 소비에트공화국도 아니고 의회민주주의도 아닌 혁명적 인민공화국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 당시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주도했으며, 노동계급은 아직 소수였다. 그러므로 이 논강은 조선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혁명은 80%에 달하는 농민을 먼저 해방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러자면 지주 계급을 분쇄하는 농업혁명이 최우선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이 완전 독립되어야 하는데, 당이 모든 혁명운동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진술되었다. 그러나 4차 조선공산당도 19287월에 책임비서 차금봉과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김재명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이 창당과 와해를 반복하는 사태가 이어지고, 파당적 분쟁까지 다시 발생하자 192812월 코민테른 중앙집행위는 조선의 혁명적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약칭,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 승인을 취소하고, 새로운 운동방침을 지시했다. 이 지시에 의하면, “당의 작풍을 개조하는 문제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없으며, 조선에서 당 조직이 소부르조아 및 지식계급으로 이루어지고 노동자와의 관계를 소홀히 한 점이 현재까지 조선 공산주의의 항구적 위기를 낳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코민테른이 지시한 일국 일당 원칙에 따르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계파별로 당재건을 시도하던 모든 움직임이 중지되었고 해외 지부들도 청산되었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국내에 활동 근거지가 없어지면서 활동을 포기하거나 각자 살 길을 찾아 국외로 떠나야 했다. 이들은 다시 중국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이들에게 거주지 국가의 공산당에 입당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에 망명해있던 한인 공산주의자 대부분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소련지역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민족 공산주의자들 스스로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다. 중국이나 러시아 망명지에서 거주 국가의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고 국내로 다시 돌아온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아 있던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혁명적 노동자조합과 농민조합의 결성에 힘을 쏟았다. 코민테른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수료자들을 국내에 보내면서,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 방향을 지하운동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그동안에 결성되었던 하부 조직의 유지와 반일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활동을 모색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의 때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은 1945년 해방이 되어 박헌영이 책임비서로 선출될 수 있을 때까지 일제치하의 암흑기에서 동면(冬眠) 상태로 기다려야 했다.

 

한국공산주의 운동사를 보면,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조직이 일제의 검거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때로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서도 한 순간에 해체되기도 했다. 공산당과 그 하부조직은 결코 코민테른의 지도를 벗어나 단독으로 운영될 수 없는 종속적 기구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2차 조선공산당이 민족주의 진영과 협동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발족시킨 신간회와 3차 조선공산당이 만든 근우회를 들 수 있다.

 

(3) 신간회와 근우회

 

19272월 홍명희, 신석우 등 27명이 발기한 신간회는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를 회장으로 기독교청년회(YMCA) 강당에서 창립되었다. 신간회는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과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이 공동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조선일보민족주의 좌파적 독립운동 노선을 추진하는 조직이다. 신간회는 일제와의 타협을 배제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구성한 반제(反帝), 반식민(反植民), 반봉건(反封建)의 민족운동 집합체였다.” YMCA 운동으로 명망이 높았던 이상재는 이런 뜻을 가지고 민족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신간회의 초대 회장 취임을 수락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하던 조병옥(趙炳玉, 1894-1960)도 신간회에 참여했다. 비교적 온건하게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여 민족주의 우파로 불렸던 동아일보그룹은 여기에서 배제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몇 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감리교파 인사들과 YMCA 운동에 관련한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그렇지만 이상재가 한 달 만에 급서하고 허헌(許憲)이 회장을 이어받으면서 사실상 공산주의자들이 신간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일제에 포착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비타협 민족주의운동을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2차 조선공산당 강달영이 주도하여 공산당원이 비밀리에 다수 참여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신간회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 사건에 개입한 것을 계기로 19303.1절에는 대규모 시위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던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공산주의자 간부들이 대부분 검거되어 주도권이 민족주의 진영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코민테른은 1931년에 신간회를 자진해산하도록 지시했고 신간회는 민족주의 진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해체를 강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신간회보다 3개월 늦은 19275월에 여성해방을 주장하며 여성 기독인들이 창설한 근우회도 신간회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발족했다. 그러나 허헌의 딸 허정숙이 집행위원장이 되는 등 정체성이 변질되면서 신간회보다 먼저 1930년에 해체되었다. 결국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이질적인 연합운동은 3년 남짓 활동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공산주의 계열은 지하운동 세력으로 잠적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 계열이 참여하는 연합조직은 어떤 것이라도 결국 그들의 공작에 의해 주도권이 넘어가거나 아니면 와해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까지 우리는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정체와 한민족에게 유입되는 초기의 경로를 검토하였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있었던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의 활동에 대해 국내 기독교는 과연 어떻게 대응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