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국내 기독교 비판 및 선교지 공산주의자의 교회 박해

heojohn 2020. 3. 12. 11:24

(1) 국내 기독교 비판

 

공산주의 과학적 무신론 사상이 한민족에게 전래된 이래 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이광수(李光洙, 1892-1950)로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이광수는 교역자들이 신학 이외의 학문에는 무지하여 정통(正統)의 폭군(暴君)”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광수의 비판은 기독교를 전적으로 배척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과는 다르다. 이광수는 목사와 전도사들이 신앙 이외의 사상이나 과학을 경시하여 교인들을 미신으로 이끌고 문명의 발전을 막는다고 비판했다. 서양의 신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였던 기독교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기독교 자체의 안일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1928년 김활란(金活蘭, 1899-1970)이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한민족기독교계에 종교생활이 실제화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되지 못한것을 각성해야 한다는 비판적 기고문을 발표했다.

사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국내 청년들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였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1921년부터 공산주의 사상은 언론 등을 통해서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는 과학적 무신론 사상의 확산을 가져옴으로써 기독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에 자생적 국내 공산주의자 그룹인 서울파 고려공산동맹의 주도에 의하여 열린 조선청년당대회에서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향후 국내에서 청년회의 운동방향을 사회주의 운동쪽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는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과학적 무신론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기독교의 교리적 입장과 공산주의를 탄압하는 일제의 정책이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도록 선동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일제와 유착했다는 혐의를 덮어쓰게 함으로써,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이 반일 청년들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당하는 사태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운동은 일제가 1925치안유지법을 시행하면서 단속이 심해지자 표면적으로는 활동하지 못하고 합법적인 민족운동 단체 안에서 잠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이 시기의 한민족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 중에는 미국으로부터의 지원이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하자 러시아에 기대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은 미국적인 기독교에 실망하고, 차라리 러시아 공산주의로의 전환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은 일부 기독교계 학생들에게서 성경과목 수업거부와 선교사 배척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이 무렵에 안창호는 국내에서 재판을 받고 4년의 징역형을 받고 1932년부터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2) 중국 만주 지역 교회의 수난

 

일제 치하에서 공산주의자의 반기독교적 움직임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단속이 철저했던 국내보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더욱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 지역에서는 자국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이주한 한민족 교회에 대한 박해도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중국에서 한민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 지역에서 한민족 개신교회가 처음 세워진 것은 1898년 남만주 즙안현 이양자(裡楊子) 장로교회였다. 이때부터 만주지방 각 지역의 한민족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각 교파가 구역을 나누어 선교사와 전도인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고 이 교회가 파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교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1901년에 휘트모어(N. C. Whittemore) 선교사와 안승원(安承源)이 선천에 있던 선교기지에서 파견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대청제국이 무너지면서 급진적 혁명의 물결이 넘치게 되었다. 원세개의 황제 등극의 야심이 혁명의 분위기와 맞부딪치는 혼란의 시기에 신지식인들의 계몽운동은 반기독교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1919년 한민족의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중국인들이 5.4운동을 일으키자, 중국기독교는 12월에 상해에서 중화귀주(中華歸主) -중국을 주께로- 운동에 돌입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의 기독교는 곧 반기독교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한민족 교회의 선교활동도 반기독교 세력인 공산주의가 침투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부터 수난이 시작되었다. 1921년 장로교회 남만노회의 과거 1년간에 남북만 각 교회의 사역자가 토인의 압박이며 도적의 위험이며 로시아로부터 넘어 오는 무신(無神)유물(唯物)론의 혼잡한 사회사조가 한민족 교회를 압박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런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혼란한 시기를 당하여 초기에 활발했던 산동과 상해와 남경, 그리고 그 외 지역의 한민족 교회들의 사정도 이곳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구체적으로 자료가 발견되는 사례는 중국공산당의 활동이 만주지역에서 활발해지기 시작한 192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고 있다.

 

1925년 침례교회에서 파견한 윤학영, 김이주 등 4명이 길림성에서 한민족 공산당원에 의해 일본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침례교회 김영진 목사와 김연국 장로는 연길현에서 목회하다가 1932년 공산당 도당들에 의하여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고 말하자 가죽을 벗기고 죽임을 당하였다.

기독신보(1932.11.9)에는 당시 동만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전하는 서창희 목사의 편지를 싣고 있다. 그는 동만주 연길현 와룡동 예배당이 공산당 방화로 소실되었고, 각 교회에서 교인의 살상피해가 너무도 극하다고 적고 있다.

1933년 북만주 교회순방과 전도여행을 하던 목사 일행이 공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보가 전해지자 장로교회 총회는 송창근(宋昌根) 목사를 파견하여 조사를 하게 했다. 그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을 김인서(金麟瑞) 목사는 신앙생활(1936.4.)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잔악을 극한 공산당에게 몽치에 맞아 죽은 순교자, 정수리에 못 박혀

죽은 순교자, 머리 가죽을 벗겨 죽은 순교자, 말 못할 학살을 당한

여 순교자, 기십기백에 달하였다 한다......우리는 엇지 무심하겠느냐?

 

기독교 신자로서 중국의 국부로서 추앙받게 된 손문이 죽은(1925)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깨지고(1927), 만주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정세는 만주지역에 있는 한민족 교회에 공산당에 의한 악영향이 점점 크게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3) 러시아 지역의 교회 박해

 

앞에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러시아 한민족 교회는 일찍이 러시아정교회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개신교의 선교는 1909년 장로교 독노회 당시에 최관흘(崔寬屹) 목사를 선교사로 파견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1912년 현지 사정과 본부의 부결로 사역을 중단하고 말았다. 공산당 혁명 직후 1918년 김현찬 목사가 다시 파송되어 1922년에 시베리아노회를 조직하고 최흥종 목사가 합류하고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하는 등 잠시 부흥했으나 공산당의 박해를 받아 1923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볼셰비키 공산당 정부가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러시아에서 한민족 개신교회에 대한 박해 자료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장로교 시베리아노회 최흥종 목사가 공산당의 거주제한 조치로 1923년에 귀국하여 교회는 위축되었다고 총회에 보고하고 있다.

1924년에 오소리 지방에서 선교하던 권승경 전도사가 공산당에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은 일이 있었다.

1925년에는 사찰목사로 파송되었던 박정찬 목사와 안내인 신 빠벨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26년 최일형, 권순경, 최흥종, 한가자 등이 다시 전도인으로 파송되었으나 투옥, 추방당하기 일쑤였고, 조사 박문영과 전도부인 한가자가 8개 교회 900여 신자를 돌보고 있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시베리아 선교에 종막이 내려졌다.

감리교에서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한 김영학(金永鶴) 목사는 신한촌에서 목회하다가 1930년에 체포되어 반동분자라는 혐의로 10년 중노동형에 처해져 시달리다가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