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공산당의 종교 정책과 기독교에 끼친 영향

heojohn 2020. 3. 12. 11:50

해방 후에 한반도는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에 의해 남한에서는 미국적 자유민주체제가, 북한에서는 소비에트적 공산주의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서울에서 박헌영 등에 의하여 재창당(1945)되었지만, 남한에서 성공하지 못하자, 소련군 점령지역인 북한으로 월북하고 말았다(1948). 결국 이로 인하여 한민족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참극을 겪어야 했다. 북한은 이 전쟁에서 실패하자 박헌영 등 소위 월북 공산주의 인사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고 자유시 참변또는 스탈린 대탄압과 똑같은 방식으로 처형했다(1955). 소련군 점령 시절 및 북한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 북한 기독교 역시 처참한 핍박을 당하고 많은 순교자들을 내었다. 과학적 무신론의 본거지 소련에서는 이제 공산주의가 과거의 역사로 지나갔지만, 한반도 북쪽 절반은 아직도 공산주의 세력이 차지하고 있다. 그 이웃에 있는 중국은 일부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공산당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은 공산주의에 의한 박해를 겪었고, 지금도 그 위협을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한국교회에게 절대적으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공산당이 집권하면, 정부와 교회의 관계는 러시아정교회가 겪었던 것과 같은 유형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각국의 공산당 정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사례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공산주의 운동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방심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가 정치적으로는 실패하고 있지만, 변종인 과학적 무신론은 계속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에 대응하여 과학적 무신론의 실체인 공산주의를 더욱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마무리하기 전에 보충적으로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핵심기구인 공산당의 종교 탄압정책의 근거와 이유, 그리고 공산주의가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공산당의 기독교 탄압의 근거와 이유

 

어느 나라에서나 공산당의 기본 강령이 되는 것은 공산주의자에게 최고의 경전이 되는 공산당 선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이외의 모든 영원한 진리와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폐기하고 공산주의가 인간의 유일사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공산주의 사상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미신이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철학사상들을 게으른 부르주아지의 잠꼬대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영원한 진리까지도 폐기하고 과학이론도 허구적으로 조작한다. 공산당이 종교 중에서도 특별히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유는 천국이라는 아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의지를 마비시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종교 폐지 정책을 추진한 사례는 파리코뮌에서 최초로 있었지만, 파리코뮌 자체가 곧 붕괴되어버림으로써 현실적인 실천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인정되던 시기의 유럽에서 공산주의 파리코뮌이 내걸었던 종교폐지 정책은 곧 기독교 폐지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에 성공하여 공산당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반드시 가장 먼저 기독교 탄압정책이 추진된다. 기독교와 공산당은 유신론 진영과 무신론 진영의 투쟁에서 각각 사령탑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다.

 

그들이 이렇게 공산주의 유일사상을 주장하는 것은 이제까지 있었던 어떤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산주의가 유일하게 국가 종교적 교리가 되어야 한다는 독선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최대의 가치는 자유라고 인식하고 있는 근대 이후 인류 사상에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독재는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불허하고 절대적 유일사상인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확립하려고 한다.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에는 사상의 자유와 소유의 자유가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위해 근대 사상가들은 독재적 통치계급에 맞서 피를 흘리며 투쟁했었고, 우리는 그들의 유산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개인적 사상과 소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에게 인류사회는 공산주의적 집단사상으로 일원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공산당의 정책에 벗어나는 사상의 자유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 개인에게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적 세력이 싹틀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국제적 연대를 통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정치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의 진화론이 생물과학으로 인정받는 것과 같이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도 과학적 사회주의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당시 과학이라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험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 또는 진리를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사관은 물질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무신론이다. 유물사관이 과학으로 인정받게 되면 유신론적인 관념론이나 종교는 미신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적극적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끌어들여 유물사관을 유물진화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과학적이라고 강변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에다 레닌주의를 덧붙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실질적인 생명력을 얻었다. 레닌은 종교에 관련해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의 종교사상은 그의 저작에 잘 나타나있다. 사회주의와 종교(1905)에서 그는 종교는 일종의 정신적인 싸구려 술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과학적 무신론으로 확립했다. 또한 종교에 대한 노동자당의 태도에 대하여(1909)에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고 말하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종교문제에 있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전체의 주춧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종교와 교회에 대한 계급과 정당의 태도(1909) 등에서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학교를 교회로부터 각각 분리시키고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진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도 기독교적 전통이 뿌리 깊었던 서구에서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수정주의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1917)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 레닌의 말은 절대적 권위를 갖는 것이었다. 레닌의 말에 근거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세계를 과학적 무신론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종교폐기 정책을 실천하여 종교가 없는 공산주의 세계를 만들려는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는 논쟁이나 연구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그저 폐기되어야 할 낡은 미신일 뿐이다.

 

2) 기독교 신학에 끼친 공산주의의 영향

 

러시아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해 기독교가 수난을 받고 있는 동안에 서방에서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공산주의를 수용 또는 융합시켜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입장은 대표적으로 스위스의 노동자 출신 목회자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 1868-1945)에 의해 시작되어 독일 출신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1-1977) 등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은 판이하게 달랐다. 라가츠는 1906년부터 Neue Wege(새로운 길)을 창간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 종교사회주의를 모색했다. 그는 1929년에 그리스도로부터 마르크스에게로, 마르크스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를 출판하여 진정한 기독교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 없이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에 접붙여서 하나님 나라 아닌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적 입장에 서있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에 접목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제안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기독교는 사회주의가 하나님의 뜻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적 무신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그리스도의 제자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 서있었다. 블로흐는 일찍이 23세의 나이로 철학박사를 취득했으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때마침 득세한 나치를 피해 전전하다가 결국은 미국으로 망명(1931)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하고 소련에 분할된 동독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라이프치히대학의 청빙을 받아 동독으로 돌아갔다(1948).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저술한 희망의 원리(1959)를 이곳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으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동독 정부를 비판하다가 쫓겨나서 다시 서독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는 서독에서 기독교에서의 무신론(1961)을 저술하여 진정한 무신론자만이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이상한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중간 어딘가에서 그의 희망으로만 떠돌고 있을 뿐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책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에게 영향을 주어 그를 희망의 신학자로 만든 업적은 남겼다.

 

얀 밀리치 로흐만(Jan Milic Lochman, 1922-2004)은 체코에서 태어나 학생 때 독일 나치의 침공(1939)을 겪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를 물리친 틈을 타서 체코는 해방되었으나(1944), 곧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로흐만은 잠시 있었던 해방기를 틈타 영국으로 유학했다. 여기서 만난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6)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신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신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 체코로 돌아와서 프라하대학 신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박사학위 논문과 교수자격 논문을 쓰고 약 20년을 지냈다. 그리고 1967년 바젤대학교 교수로 청빙되어 총장까지 지냈고, 그동안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해서 설교와 강의를 했다. 그의 신학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냐를 선택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프로메테우스적인 유사(類似) 메시아적 구원론으로 본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류사회에서 혁명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해야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화는 계속해야 한다. 이러한 그의 신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참여하여 세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기독교가 마르크스주의와 대화하기 위한 우회 통로를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우회통로를 통해 가는 사람은 있어도 오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쾌락은 사람을 프로메테우스의 사슬에 묶어놓기 때문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종교관에 대한 연구를 하고나서 이렇게 지적했다. 보수적 종교 세력들은 내세(來世)에의 희망을 이용하여 역사의 부당함을 사기 치려고 했던 반면에,” 마르크스주의는 메시아주의를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니버는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적 반종교가 다시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종교로 변화하는 단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니버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뒤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그들의 저작들이 마치 경전처럼 읽혀지고 혁명적 사회변혁이라는 기각할 수 없는 교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또한 상황에 따라 필요한 교리로서 발전되어 간 것이다. 니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메시아주의를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17세기 청교도혁명을 이끌었던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의 지적에 유의하고 있다. 그러나 니버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주장한 휴머니즘은, “처음부터 절대적인 의미를 가졌으나 경험적 검증이 충분하지 못하였고”, 무신론을 새로운 종교로 변형시킨 혁명적 예언자의 수단이자 계급투쟁의 무기로 삼았으며, 노동자의 소외가 산업기술 과정 자체 내에 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사회 체제 안에 잠재하는 것인지를 경험적으로 구분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에 불과했다.

기독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영향의 또 다른 현상의 하나는 남미에서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 1928- )해방신학(1971)을 발표함으로써 이름 붙여진 해방신학이 있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 신학에 수용한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가난한 자와 피압박 민중에 주목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해방을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의 방법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해방신학은 1980년대에 발생지였던 남미 가톨릭에서 로마 교황청의 탄압을 받아 주춤했으나, 이후 세계경제의 양극화로 빈곤국으로 분류되는 제3국가들에서 소생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해방신학의 실천적인 면은 가톨릭 지학순 주교가 1974년 유신체제를 반대하면서 결성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보여주고 있다. 이 단체의 함세웅 신부는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를 저술하여 해방신학을 소개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김재준의 자유주의적 신학을 토대로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 시기에 안병무와 서남동 등에 의하여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고, 분단된 남북한의 통일운동을 신학에 접목하려는 움직임이 문익환, 문동환, 박순경 등에 의해서 통일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통일신학 등에 관련해서는 연구서들이 여러 가지 나와 있으나, 이 책에서는 이렇게 개략적인 흐름의 소개로 그치고자 한다. 그러나 이상에 열거된 신학적 그룹은 해방신학의 경향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신학적 연구보다는 가난한 자와 피압박 민중을 위한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신학자들이 사회와 개인의 구원을 기독교적 구원론보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실천론에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