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한국교회에 대한 제안 한 가지.

heojohn 2020. 3. 12. 12:31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연결하는 정신, 곧 영혼의 존재와 불멸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은 그 실상을 자세히 알고 보면 생명의 발생과 물질변화의 법칙을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자연발생론, 즉 위장된 과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이 유신론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윤리체계를 뒤엎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에서 나온 정치적 이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과학적 무신론자와 종교적 유신론자로 갈라져 생존을 걸고 정치적 투쟁을 하고 있다. 이 투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미래의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과학적 무신론의 허구성과 오류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들이 부정하고 탄압했던 종교의 윤리, 특히 기독교적 사회윤리조차도 수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생존을 위해 과학적 무신론과의 투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자연발생론적 증거를 찾기 위하여 각종 과학 분야에서 시행하고 있는 생명현상의 실험과 연구 결과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증거를 조작 발표하면, 일반인들은 이를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기독교가 과학적 무신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과학 분야에 대한 지식의 습득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과학적 무신론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적 소양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는 태초에창조된 우주가 언젠가는 새 땅과 새 하늘로 대체될 것이라는 예언을 가지고 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도 우주의 종말이 닥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태양 에너지의 소진으로 태양계에 종말이 올 수도 있고,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소행성과의 충돌, 대규모의 화산 폭발이나 핵전쟁, 대홍수, 대지진 등으로 인해 언제든지 멸종되거나 지구 자체가 분해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이론이다. 또한 우주의 모든 행성들은 알 수 없는 우주의 바깥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은하열차의 지구 칸에 탑승하여 미지의 목적지로 끌려가고 있고, 그곳에서 종말을 맞아야 할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수십억 년 동안 물질의 변증법적 비약으로 발생한 생명에서 최고로 진화해서 결국 인간이 된 것이라면, 이러한 종말을 맞이하는 인간은 다윈이 표현했던 장엄함이 아니라 비참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이 과연 우주와 인간의 실존적 모습일까? 인간은 창조주의 목적과 그의 섭리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서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과학적 무신론을 비판했고 결론적으로 인간은 과학적 무신론이 주창하는 자연발생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증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조주의 목적과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는 과학적 무신론에 대해서 더욱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대다수가 종교적 유신론자들에게 적대적 공격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는 특히 위험한 적그리스도적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과학적 무신론을 점점 확산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아직도 과학적 무신론 사고에 젖어 있는 자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선교할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독교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일이다. 특히 창조주의 특별한 은총을 입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을 가르쳐야할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 특별한 은총은 그에 따른 특별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효화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3:5-6)을 주장하는 사탄의 말의 역설적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그 말은 이제 선악을 알게 된 기독교인들이 선한 과학으로 악한 과학적 무신론을 이겨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선악을 아는 것이  타락이나 죄악이 아니라, 선과 악을 알면서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이 타락이고 죄이다. 선악을 모를 때 하나님은 죄를 묻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인간사회에서 악의 문제는 여자와 아담이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기독교리는 창조주와 인간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져 주는 명제이다. 예를 들자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인간을 지키지 아니하셨을까? 이 질문은 선한 과학을 아는 기독교인들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가 상징하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한다. 기독교인은 창조주의 태초의 창조새 창조의 창조목적을 탐구하는 선한 과학적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조주를 믿는 기독교인은 선한 과학을 배워 악한 과학을 물리치는 영적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과학적 무신론을 먼저 이해하고 오류를 비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뜻에서이다.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청지기이자 목자이다. 곳간에 도둑이 들고 양떼가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데도, 목회자가 이들과의 싸움을 회피하는 것은 스스로의 직무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선한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적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나서서 과학적 무신론의 오류를 검증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기독교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현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 자연주의 종교, 인본주의 또는 주술적 사이비 종교나 거짓 과학이론 등의 주장에 훨씬 끌리는 성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되긴 했지만,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야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하는 일은 아직도 미완성되었다.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적 무신론적인 것들로부터 유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학에서 과학적 무신론을 연구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선교대국을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그런 일에 앞장 서주기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