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한국교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heojohn 2020. 3. 12. 12:01

이제까지 무신론, 특히 1948공산당 선언이후에 과학적 무신론의 형성과 발전과정, 그것에 내포된 오류, 그것이 초기 한민족 사회와 교회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영향 등을 연구하고 비판하였다. 또한 과학적 무신론에는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전통적 종교의 근거인 유신론의 타당성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과학적 무신론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와 다른 사상들을 수용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도 밝혔다. 나아가 과학적 무신론이 한민족 사회와 교회로 유입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자행한 반인륜적 폭행과 기독교 박해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 책은 탈()경계선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학적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타협적 유신진화론자들을 일깨우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특히 기독교계에서 과학적 무신론자와 타협하는 것은 결코 정당한 행위가 아니며, 그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무신론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유물론적인 자연발생론을 과학적 사실처럼 주장하여 창조주에 대항하는 기만적인 이론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과학적 무신론의 형성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검토해보면, 과학적 무신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다윈, 레닌, 스탈린, 그리고 오파린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그들 각자의 역할은 각각 달랐다. 과학적 무신론의 원형을 창시한 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다윈은 공동 창시자로 인정되어야 한다. 다윈은 생전에 그의 종의 기원이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에 의해 왜곡 해석 또는 오용되고 있음에도 한 마디의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추종하는 현대 다윈주의자들의 다수가 과학적 무신론자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사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그가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파스퇴르의 실험에 의해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유물론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과학적 사회주의와 결합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후기 저작물에서 다윈의 이론을 무신론적으로 수용하여 그들의 유물론에 진화론의 옷을 입힌 유물진화론, 다시 말해서 과학적 무신론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정권을 획득하는 것을 꿈꾸던 정치사상가였다. 그들은 인간의 기원에서부터 유토피아적 공산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총체적인 역사를 과학적 무신론의 토대 위에 세우려고 했다. 그들이 주장한 정치적 목표는 과학적 무신론에 기초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유토피아적 공산주의 사회건설이었다. 그들은 변증법적 필연성에 의하여 그들의 공산주의적 이상사회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무신론을 변증법적으로 더욱 발전시킨 것은 물론, 러시아 공산당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과학적 무신론에 현실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을 완성한 사람은 스탈린과 오파린이었다. 레닌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사회에서 스탈린은 러시아 공산당의 독재 권력을 이용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과학적 무신론을 기형적으로 진화시켰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논의한 DIAMAT를 저술하여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그의 과학적 무신론을 학습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DIAMAT 매우 유치한 억지 주장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무조건 믿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교조가 되었다. 오파린은 스탈린 치하에서 과학적 실험의 성공이나 증거도 없이 생명의 기원에 대한 화학적 진화론을 제안했다. 결국 이것이 과학적 무신론을 완성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론이 되었던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을 체계적으로 본다면,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유물진화론,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 그리고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연결되는 진화론의 조합인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하나의 일관성 있는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완성된 과학적 무신론은 다시 서구 과학계로 뿌리를 뻗어 나와 자라났다. 이것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54년 스푸트니크 1호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우주과학 경쟁에서 잠시 미국을 앞질렀던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놀라고 당황했던 미국이 소비에트 유물론 과학을 오히려 추종하게 되었던 사실은 이제 다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을 구성하고 있는 각 이론들을 과학적으로 검증해보면,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게놈(Genom) 프로젝트가 완성된 이후, 생물의 변이의 원인이 유전자(DNA)의 조합에 있다는 사실과 각 유전자의 특성이 밝혀짐으로써 오류임이 드러났다. 자연에서의 변이는 그저 종내(種內)에서 볼 수 있는 다양성의 발현에 그치는 것이며, ‘생식장벽이라는 절벽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종으로 진화할 수 없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자연발생론의 변종의 하나일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진화론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레닌에 의하여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으로 발전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생명체의 의식 또는 정신은 물질적 현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명체는 먼저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software)가 있어야 작동하는 것이다. 정신은 생명체에서 물질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또한 물질을 초월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신은 형이하학적 물질계와 형이상학적 비물질계의 경계에 존재하면서 양쪽을 연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최첨단 현미경으로도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을 물질에서만 찾는 과학적 무신론은 이 책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이론임이 자명하다. 생명의 기원은 오히려 물질적 자연이 만들어낼 수 없는 정신에 있는 것이다. 과학이 실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가시적 자연주의 범주에 바탕을 두는 것은 당연하지만, 검증 불가능한 생명의 기원을 허구적 이론으로 설명하면서

신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은 스탈린의 DIAMAT에 의하여 기형적으로 변형되었으나 마침내 오파린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에 의하면 최초의 생명체를 만들기로 사전에 계획한 존재는 없었다. 그러므로 최초 생명의 발생은 물질의 화합물에서 우연히 나타날 수 있는 수많은 현상의 하나였다. 생명의 발생은 물질의 진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변증법적 비약의 결과일 뿐이다. 오파린은 이렇게 과학적 무신론에 대한 의심의 소지를 거짓 과학이론으로 봉쇄해버렸다. 결국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은 이제까지 과학적으로 결코 규명되지 않은 허구적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DIAMAT의 부교재처럼 쓰였다. 변증법적 비약에 의하여 물질에서 생명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수학적 확률이론에서 보아도 우주역사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수학적으로 부정되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다. 오파린의 이론은 공산주의 선전용 구호에 불과한 허위 주장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과학적 무신론은 사실이 아니며 실체적 증거도 없이 추론에 근거하여 세워놓은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과학적 무신론을 과학적 진리처럼 선전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그동안 생명의 자연발생 실험에 성공한 것처럼 허위 과장 보도를 일삼았고, 일반인들은 여기에 현혹되어 맹목적으로 과학적 무신론을 신뢰하게 되었다. 자연에서 물질이 자기조직화(self-systemized)를 통하여 생명체로 완성되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생물이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중간종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제까지 과학적 증거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점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적 입장은 그런 기작(機作: mechanism)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물질의 조합만으로 생명현상이 발생되는 그런 기작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생명체는 물질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생명이 물질의 변증법적 비약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무신론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는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이라는 공산주의의 목표는 그저 하나의 선전용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과학적 무신론을 근거로 집권에 일단 성공한 러시아 공산당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그들은 공포정치를 통하여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그것들을 국가라는 공동체의 것으로 만드는 단계까지는 성공했다. 그들이 국유화한 공동재산이나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에 의하여 생산되는 물질적, 정신적 생산물을 공산당 권력층은 개인의 것처럼 필요에 따라사용했다. 그러나 일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최소한의 필요량조차 제대로 배분되지 않았고, 그들의 물질적 소외는 오히려 심화되었다. 또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일하는 사회가 아니라, 강제 배치되는 일자리를 겨우 가질 수 있을 뿐이었다. 공산주의 사회의 현실은 이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대(前衛隊), 즉 소수의 공산당원에게만 호전되었을 뿐 대다수의 일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오히려 혁명 이전보다 나빠진 것이었다. 특히 공산화된 국가의 기독교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재앙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적 생활의 조건은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었고, 마침내 스스로 붕괴하거나 서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공산주의 혁명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공산주의 사회는 실현 불가능한 허구적 유토피아라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지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에 불만을 표출하거나 비판하는 자는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되는 희생물이 될 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때로는 그들에게 선교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의 가면인 과학적 무신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안일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일제 치하에서 한민족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였던 이동휘, 여운형 등에 의해서 한민족 사회와 교회에 유입되었다. 그들이 당시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민족독립에 목매고 있었던 그들은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공산주의 혁명은 일본 제국에 대한 독립운동의 방법으로는 최상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과학적 무신론은 한민족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도 없이 막대한 피해만 안겨주었다. 한민족 사회에 초기 공산주의의 유입과정에서 공산주의자 사이의 주도권 경쟁 때문에 자유시 참변같은 사건이 벌어져 한민족 무장 독립군 부대가 괴멸되는 참상은 바로 그런 사례이다. 그리고 ‘40만 루블 레닌자금사건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놓고 공산주의자들끼리 벌어진 음모와 파쟁들도 한민족 독립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과학적 무신론자의 비인간적 잔학성과 독선적 당파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김구는 온갖 고초를 감내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대표기구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방의 때까지 끝내 지켜냈다. 그에게 그런 힘을 준 것은 그가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터득했던 초기 신사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신교심(信敎心)과 애국사상이 바탕이 된 그의 초기 신사상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야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이라는 신민회의 목적이 추가되었고, 일제의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사상은 민족을 대표하는 애국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김구의 신사상은 또 다른 신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과학적 무신론 사상이 한민족에게 유입될 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의 것이다. 그 다른 신사상인 과학적 무신론은 바로 신민회의 발기인으로 초기에 김구와 동일한 신사상을 가졌던 이동휘와 유동열을 통해 유입되었다.

 

두 가지 신사상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신민회의 망명자들을 분열시켰고, 상해임시정부에서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두 개의 신사상은 한민족 항일 독립운동가들 전체를 분열시키고 말았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과학적 무신론에 의하여 양분된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자유시에서 궤멸적 참변을 당했고, 이후에는 소규모 단위로 분열된 무장 독립운동에서 입은 피해가 누적되면서 임시정부가 독립군을 조직할 수 있는 자원까지 고갈시키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는 조각(組閣)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었고, 중일전쟁이 겹치면서 피난처를 찾아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한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이 국제적으로는 역사적 실적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결국 한민족의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를 패망시킨 미소(美蘇) 양국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양분된 독립운동가들은 통일연합되지 못한 채, 미소가 분할 점령한 한반도에 남북분단을 가져오는 결과를 막지 못했다. 그런 분열의 양상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져서 오늘날 우리는 그 후과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아직 김구가 상제께 기도했던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민족주의적 사상은 이미 서술했던 바와 같이 그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쓴 백범일지하권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의 분열로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정세를 살펴보면, ‘남북한 정부의 정치가 외국으로부터 독립국으로서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기나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준다. 남북한 정부는 아직 김구의 완전한 독립국이나, 그것과 동일한 신민회의 유신한 국민들이 통일연합하는 자유문명국으로서 인정받기에는 아직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의 정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기독교인들이 신민회를 설립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목적은 자유문명국의 건설이었고, 신민회 간부였던 김구의 민족주의적 애국사상은 완전한 독립국이다. 한민족 가운데 매국노가 아니라면 우리나라가 김구의 바람이었던 완전한 독립국’, 그리고 신민회의 목적이었던 자유문명국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목적에 온 민족이 동의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상의 바탕이 된 기독교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그 목적을 계속 추진해야 할 책임은 없는가? 신민회의 조직을 설계했던 안창호는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원인과 독립을 쟁취하는 문제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고, ‘내 자신이 반성하면 파벌이 생길 이유가 없다고 단합을 강조했다.

 

이제 신사상을 가진 기독교는 유신한한민족의 민족종교로 거듭나고, 기독교인들은 자유문명국을 건설하기 위해 민족의 통일연합을 주도하는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적 무신론의 발생과 그것에 관련된 과학적 이론의 왜곡과 오류, 그리고 그것이 항일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한민족 교회에 유입되면서 초래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등의 문제점들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