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일제 치하 교회의 양면적 변화

heojohn 2020. 3. 12. 11:36

 일제는 3.1운동 직후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면서도 1925년부터는 치안유지법을 시행하여 한민족의 사상 활동을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특히 일제는 교회를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보고 감시와 탄압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한민족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종교보다 민족독립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인들 중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예로서는 기독교인으로서 전도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했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이동휘를 비롯한 다수의 신민회원들, 여운형, 선우혁 등 상해한인교회 인사들, 이동녕과 김구 등 상해임시정부 인사들, 그리고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통천교를 만들었던 양기탁 등의 종교적 방랑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은 기독교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민족의 독립에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던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고뇌를 보여주는 사례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1920년대에는 제2세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제1세대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적 성서관과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으로 구축해놓은 토착 기독교와는 신학적으로 확연히 다른 색채의 기독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로 인한 영향은 장로교 목사였다가 이단자로 제명당하고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했던 김장호(金庄鎬 또는 金章昊) 목사에게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재령 주재 공위량(Rev. W. C. Kerr) 목사에게서 자유주의 신학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종교는 과학적이어야하며,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믿는것은 과학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과학을 알았다면 진화론을 믿을 것이라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한 이상재(李商在, 1850-1927)1923년 새로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문화적 우월주의를 경계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이러한 우려를 증명하는 만행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1925년에 미국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C. A. Haysmer)가 사과 하나를 훔친 학생의 이마에 염산으로 됴뎍”(도적)이라고 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특히 사회주의 청년·학생조직에 의하여 반 선교사·반 기독교운동의 꼬투리가 되었다. 이외에 기독교 안에서도 1926년 내한한 구세군 사령관 부스(B. Booth)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구세군 사관들의 항명사건, 동양선교회 소속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비롯하여 선교사 자신들의 비행과 추문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앞에서 언급한 김규면 목사가 성리교를 창립하고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참여하게 된 것도 선교사들의 비행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의 공산주의 단속이 기독교와 야합했기 때문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등, 공산주의자들의 교묘한 속임수 공작이 일반인들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기독교를 오해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민족 독립운동단체들을 주도하던 기독교 인사들도 체포되거나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동안에 이미 토착적인 체질을 갖추게 되었던 기독교는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두 가지 양면적 대응이 나타나게 되었다. 내적인 신앙운동이나 외적인 실천운동의 한 쪽을 강조하는 경향이 그것들이다. 교회내적인 신앙운동은 (1) 김익두, 이용도, 길선주 등에 의한 부흥운동(2) 선교사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축출된 이만집 목사와 박승명 목사, 그리고 변남성 목사 등에 의하여 주도된 독립적 자치, 자유교회의 설립, (3) 일본인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영향에 의해 김교신 등이 도입한 무교회주의 운동 (4) 최태용의 복음 교회 창설 등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의 내적 신앙운동은 교회 밖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개인 신앙과 교회활동에만 몰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익두의 부흥 사역에 나타났던 치유 이적은 당시의 한민족에게 큰 화제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는 위로의 메시지가 되었다.

 

이와 달리 기독교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외적인 사회운동에 뛰어든 기독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3.1운동 직후의 민족적 현실을 직시하고 있던 민족주의적 기독교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의 현실인식과 투쟁방법론은 이상재가 강연에서, ()세계의 개조를 뜻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앞에 당하야 받을 바 실적이올시다고 한 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현재의 세계를 개조하여 한민족을 독립시킬 뜻을 가지셨으며, 기독교인들은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연합운동의 대표적 실례는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신간회와 근우회가 있다. 조병옥의 비밀조직 기독신우회는 미국에서의 사회복음(social gospel)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1926YMCA의 신흥우(申興雨, 1883-1959)를 중심으로 하는 적극신앙단이 표방한 이념도 기독교의 민중화 및 신앙의 실제화였다. 비록 적극신앙단이 이승만이 주도했던 동지회와의 관련성 때문에 정치성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1920년대의 한민족 기독교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의식의 변화는 한국교회의 신경(信經) 또는 장정(章程) 등에도 반영되면서 1930년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기독교도연맹이 1928년에 채택한 사회신조를 검토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이와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12개조 사회신조1932년에 채택했다. 여기에는 일체의 유물교육(唯物敎育), 유물사상(唯物思想), 계급적 투쟁, 혁명적 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한다는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노선이 분명하게 표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