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상해임시정부의 지도자들

heojohn 2020. 3. 12. 11:04

상해임정은 27년 동안 5차례의 개헌을 하고 8번을 이사하면서 존속했으나, 상해시대 초기를 제외하면 열악한 재정으로 행정비용을 충당하기에 허덕였고, 내각 인선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하자면 사실상 이름뿐인 정부였다. 임정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주원인은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금조달의 어려움과 지도적 인사들의 참여 거부, 그리고 공산당 진영의 분열책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내전, 일제에 의한 상해사변(1931)과 중일전쟁의 발발(1937-1945) 등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임정을 보따리장수처럼 옮겨 다니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이렇게 고난에 찼던 임시정부 시대의 지도자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 5인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이동녕은 상해임정이 설립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1932. 4.)으로 일경의 체포를 피하느라 직책을 맡지 않았던 기간(1932-1935)을 빼고는, 임시정부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적이 없었다. 이동녕은 신민회 발기인으로 기독교인이었으나 대종교에도 입교했다. 그의 삶은 그대로 임시정부의 역사였다. 한민족 독립운동의 중심기구인 임시정부에 고난이 끊이지 않았듯이 그에게도 고난은 일상사였다.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출발하여 그의 전 생애를 바쳐 임정을 지켰다. ‘임정의 터줏대감이동녕은 19403월 사천성 기강현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의 유언은 각 정당의 격의·조건없는 대동통합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초라했지만 임시정부로서는 국장으로 치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는 이동녕에 이어 김구가 있었으므로 해방이 되기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구는 경무국장을 맡았던 초기 상해시절부터 이동녕과 함께 임정을 떠맡아 피난살이를 하는 내내 임정을 지켰으며, 이동녕의 사후에도 임정에 닥치는 모든 시련과 온갖 고초를 특유의 뚝심으로 혼자 이겨냈다. 이동녕 사후에 김구의 헌신이 없었다면,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명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가 해방될 때까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김구는 초기에 동학당 접주로 의병 활동을 했으며, 국모시해(國母弑害)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 헌병 한 명을 때려죽인 죄로 체포되었다.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할 위기까지 몰렸으나,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광무황제의 특명으로 중지되었다. 그는 탈옥하여 마곡사에서 승려로 변성명하여 살다가 환속하여 글방을 차리고 훈장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감리교에 입교한 이후에 전덕기 목사가 지도하는 엡웟청년회의 진남포지회 총무로 활동했다. 그가 애국운동을 하면서 처음 이동녕을 만나게 된 계기는 1905엡웟청년회에서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도끼상소에 참여했을 때였다. 그는 신민회의 설립 이후에 참여하여 곧 신민회의 초기 애국운동의 방식에 따라 신교육사업과 농촌개략사업에 매진하면서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했다. 그는 황해도 지역에서 벌어진 안명근 사건으로 19111월에 체포되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안기탁보안법위반사건으로 2년형이 추가되었다. 수감생활을 하던 중에 2차에 걸쳐 13년의 감형을 받고 1914년에 가출옥했다. 김구는 출옥 이후에도 일제의 눈을 피해가면서 국내에서 그의 항일 애국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난국과 험로에서도 그를 끝까지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살아가게 만들었던 그의 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에 모든 것을 고백하고 있다. 김구에 의하면 그는 수감 중에 다년 연구에 의해그의 이름()과 호(蓮下 白凡)를 바꾸었다. 그는 특히 그의 호를 백범으로 바꾼 이유를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전(白丁) · 범부(凡夫)들이라 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을 가지자는 뜻에서라고 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문도 잘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주소서라는 생각을 하면서 상제(上帝)께 기도하곤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감옥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상제께 기도했던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은 신민회의 목적이었던 유신한 국민들이 통일연합하야만들고자 했던 자유문명국의 국민에 다름 아니다. 김구의 완전한 독립국에 대한 구상은 그의 초기 신사상인 기독교적 신교심(信敎心)과 애국사상에서 시작하여 신민회와 연루되어 감옥 생활을 거치면서 임시정부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의 고난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쓴 그의 백범일지하권의 나의 소원 2.: 정치이념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적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김구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구사상에서 신사상으로 전환한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애국운동을 하는 동안에 더욱 높은 경지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김구의 초기 신사상은 한민족에게 또 다른 신사상이 유입될 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그 다른 신사상은 바로 신민회 발기인으로 초기에는 김구와 동일한 신사상을 가졌던 이동휘를 통해 유입된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과학적 무신론으로 불리는 사상이다. 이 두 가지의 신사상이 신민회 독립운동가들을 분열시키면서 상해임시정부에서 충돌하였고, 결국 한민족 항일 독립운동가들 전체를 분열시키고 말았다. 김구는 초기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러시를 주창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또는 과학적 무신론자에 의하여 양분된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소규모 단위로 분열된 독립운동에서 누적된 피해와 자유시 참변 사건에서 궤멸적 재난을 당했다. 그로 인하여 무장 독립군을 조직할 수 있는 자원이 고갈되었고, 이후 항일 독립운동은 사실상 소멸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일전쟁이 겹치면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범위는 점점 좁아졌고, 임시정부는 피난지를 전전하면서 간판을 거는 것조차 급급하게 되었다.

 

김구는 그의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19193.1독립운동만세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상해로 건너갔다. 그는 이동녕을 만나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면, 문지기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내무총장 안창호는 그를 경무국장으로 발탁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숱한 고난과 애로 속에서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각료들은 각자의 분열된 계열을 좇아 떠나거나 죽거나 했다. 임정의 기둥이었던 이동녕의 사후에도 김구는 혼자서 임정에 닥치는 모든 시련을 이겨냈다. 일제가 패망할 무렵에 그는 주석으로 임정을 이끌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임정 주석의 신분으로 돌아왔지만, 외세에 의하여 해방된 조국은 그에게 아무런 영광을 안겨주지 못했다.

 

이동휘는 꼬르뷰로에서 배척되자 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와서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옛 동지들과 적기단(赤旗團)이라는 공산주의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동휘는 당시 한민족 공산주의와 독립운동의 거두로 인정받고 있었으므로 어떤 사태에서도 개인적인 활동과 권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적기단은 국제혁명자후원회(MOPR) 사업을 돕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앞으로 이동휘가 주로 해야 할 몫이었다. 적기단이 표방하는 목적은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혁명운동이라면,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느 것이라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기단이 무장 독립운동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동휘의 무장 독립운동단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국내에서 책을 들여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도서관을 만드는 등, 한편으로는 한민족 독립운동가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자로서 러시아와 중국에서 불굴의 행보를 계속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눈보라 속에서 독감에 걸렸고, 블라디보스토크 집에 돌아와서 1935년에 죽었다. 그는 유언으로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유언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선 위임통치 후 독립을 청원했으므로 축출해야 한다고 공격했던 이동휘의 이율배반적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동휘는 마침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과학적 무신론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승만의 외교적 방법에 의해 단계적 독립론을 공격하고 불신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에는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의 연방국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의 목적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소비에트러시아연방의 일개 공화국이 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기독교의 조직이었던 신민회부터 시작해서 공산주의 조직인 고려공산당, 그리고 한민족 독립의 염원이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분열의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한민족이 세계2차대전 승전국 미국과 소련의 도움으로 일제로부터 겨우 독립을 이루긴 했으나,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만 것도 결국 그의 탓이 아닐까?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이후 상해임정은 1925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직무불이행을 탄핵하고 제2대 대통령 박은식을 선출했으나, 곧 제2차 개헌을 단행하여 국무령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상호불신과 분열, 그리고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이유로 국무령에 선임된 인사들이 참여를 거부하여 조각을 하지 못했다. 초대 이상룡(李相龍), 이동녕, 양기탁을 거쳐 임시정부를 떠난 안창호에게 국무령이 제안되었으나, 안창호는 취임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이 무렵 만주에서 신민회의 신한민촌 건설계획을 이상촌 건설계획으로 바꿔서 추진하고 있었다. 만주에는 당시에 3개의 항일 독립운동 군정기관이 설립되어 있었다. 안창호는 1927년 북만주 길림시에 와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침략 당한 이유는 침략자 일본이나 매국역적 이완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시의 우리 국민들에게 원인이 있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앞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문제도 역시 우리민족의 마음과 노력여하에 달려있고, 내 자신이 반성할 때 우리끼리의 파벌이 생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단합을 강조하여 환호를 받았다. 이후 안창호는 남만주 방면의 참의부(백광운, 윤세용 등), 북만주 방면의 정의부(이택, 양기탁, 김동삼 등), 북간도 지역의 신민부(김좌진, 조성환 등)를 차례로 만나 3부 통합을 논의하였다. 1928년 상해로 돌아와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반영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임시정부의 지지 정당을 마련했다. 이때 그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항일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대공주의를 강조했다. 대공주의는 1929년 만주의 3부를 국민부로 통합하는 성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민부는 결국 개인별로 가입을 주장하는 자들이 혁신의회(또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로 분열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만주에서 진행되었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모든 활동은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에 의한 만주사변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안창호는 이상촌 건설계획을 다시 남경으로 옮겨 추진하던 중에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안창호는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안창호는 국내에서 4년 형기의 절반을 채운 후 1935년 가석방되었으나, 수감생활 중에 얻은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급했다. 그는 평남 대보산 천태산장에서 요양하고 있으면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독립을 위해 흥사단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예비검속 차원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재수감된 그를 일제는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간경화증이 악화된 그는 회복하지 못하고 19383월 경성대학 부속병원에서 서거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사실 임시정부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자신의 정치신념인 외교독립론을 밀고 나갔다. 그는 임시정부 초기에 우파 민족진영의 구심점으로서 이동휘의 공산주의식 체제전복의 기도를 막아내는 방패의 역할을 했다. 그는 다시 미국에 돌아가서 그의 신념대로 외교적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비우호적인 국제외교 환경에서 크게 성과를 얻을 수 없었고, 결국에는 임시의정원의 탄핵을 받아 대통령직을 잃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함으로써 한민족은 해방될 수 있었다. 이승만은 해방된 조국에 귀국해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결국 이승만은 이겼다. 비록 그것이 남북으로 나누어진 반쪽짜리 영광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미국 프린스턴 정치학 박사학위를 가진 그가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적 성과에서 얻어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동녕, 김구, 이동휘, 안창호, 그리고 이승만은 한민족 독립운동의 중앙기구였던 상해임정에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결코 소홀히 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신념과 행동에 따라 대의를 지킨 자와 버린 자, 그리고 이긴 자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사회에서 사람들의 처세 유형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 가지 유형은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의 유형과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었던 기독교인들의 유형 분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돌이켜보면 한민족 독립운동사에서 독립운동을 결정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이 없었다는 사실은 아쉽다. 이것은 한민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분열에 크게 원인이 있다. 이 때문에 한민족 독립운동은 결과적으로 별 성과를 남기지 못했고, 외세에 의하여 해방됨으로써 반쪽을 과학적 무신론자들에게 내주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온전히 통일국가에 이르는 민족독립의 염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하고 온전한 독립을 이룩해야 할 책임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기독교회에 맡겨진 책임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