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코민테른 동양부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heojohn 2020. 3. 12. 10:43

(1)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코민테른의 실천사업의 하나인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 19221월 말에 개최되었다. 이때 참가한 조선대표단은 김규식을 단장으로 각 단체를 대표하는 56명이었으며 여운형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동휘와 상해파 계열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회서기로 대회를 총괄하는 동양부 비서부장 슈미야츠키가 자유시참변 문제를 은폐하기 위하여 이르쿠츠크파만 참가할 수 있도록 공작했기 때문이다. 이동휘와 결별한 보이틴스키와 동양부 부장 등이 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조직적으로 이동휘와 상해파를 배제하는 데 협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르쿠츠크 한인 빨치산 부대 전권대표로 참석한 김동한은 코민테른이 아닌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자유시 참변을 폭로했다. 그의 보고서에 의하면, “국민의회의 이르쿠츠크파의 탄압과 학살로 빨치산 부대원들 가운데 400명이 죽고, 부상하고, 행방불명되었으며, “900명의 빨치산들이 반혁명분자로 낙인이 찍혀 군포로로서 러시아부대에 넘겨졌다.” 그리고 영웅적인 공훈자인 한인혁명가 약 70명의 사할린 빨치산 부대 장교들이 반혁명의 책임을 지고 이르쿠츠크의 감옥에 감금되었다.” “국민의회 회원들이 이들을 재판하였고, 이들은 오랫동안 열악한 군포로로 억류되어있다. 이렇게 피로 얼룩진 아무르 사건은 극동공화국 영내로 들어가려고 눈으로 뒤덮인 2천 베르스타를 걸어서 온한인 빨치산부대를 반혁명일본스파이라는 죄명을 씌워 러시아 군대의 지원하에서 사살한 것으로 러시아혁명가들이 한인혁명가들을 죽인 것이다.”

코민테른은 상해파가 불참한 대회를 마치고 이르쿠츠크파의 입장이 전적으로 반영된 보고서를 레닌에게 제출했으나, 레닌은 이동휘의 이름과 서명이 빠진 것을 지적했다. 이에 당황한 코민테른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이동휘에게 모스크바로 급히 와달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동휘는 곧 모스크바에 왔으나 코민테른의 서명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코민테른은 사태수습을 위하여 4월에는 지난해 11월의 1결정서에 이어 소위 2결정서를 하달했다. 이 결정서는 이르쿠츠크파에 의하여 축출된 당원들을 모두 복권시키며, 두 개의 고려공산당은 3개월 이내에 통합을 이루고, 그동안 양파에서 분파적인 행동의 주모자 4인은 통합될 때까지 당무를 정지하며, 중앙간부는 치타에 두고, 통합을 이룰 때까지 자금지원은 중단하며, 조선부를 국내에 둘 것 등의 6개항이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동양비서부 비서장 슈미야츠키가 경질되고 동양비서부도 10월에 해체되었다. 이것은 이동휘의 상해파가 승리했다는 것을 뜻했다. 코민테른의 제2결정서에 따라 이동휘는 두개의 고려공산당을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실천 작업에 착수했다. 5월에 임시연합간부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자유시참변 1주년이 되자 비판적인 여론이 고조되면서 이동휘측이 결정적으로 유리해졌다.

고려공산당연합대회는 192210월에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는 이 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탈퇴하여 상해파와 별도로 치타에서 고려공산당대회를 열었다. 또 다시 양파는 각자 대표단을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대회보고서를 제출하고 승인을 요구하면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전문들을 발송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양파의 대회보고서를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양파 대표단을 불러서 쌍방의 가부를 밝히지 않고 서로 타협하여 조선공산당을 완전히 성립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연합하지 못한 두 개의 고려공산당은 유산(流産) 처리되었다. 12월에는 양파 각 2명의 위원과 고문 1명으로 구성된 꼬르뷰로가 조직되어 조선공산당을 국내에서 직접 조직하기 위해 활동을 개시했다. 보이틴스키 휘하에 파인베르크가 꼬르뷰로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2) 초기 중국 공산당과 한민족 공산주의자들의 관계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코민테른의 지도에 의해 창당된 것은 19217월이었다. 이때는 이동휘가 코민테른에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 보고를 하기 위해 유럽을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항해하는 중이었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서 코민테른 대표 마링(Marling: 본명 Hendricus Sneevliet)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낭독했다. 여기서 마링과 보이틴스키 두 사람은 모두 코민테른에서 파견되었지만 서로의 역할은 다르다. 보이틴스키는 밀명을 수행하는 공작원이었고 마링은 공식 대표였다. 마링이 낭독한 테제는 레닌의 지시로 코민테른 2차 대회(1920)에서 채택한 것이다. 마링이 이 테제를 낭독한 이유는 이제 막 창당되는 중국공산당에게 단독적인 혁명의 능력이 없다고 보고 전략적으로 손문의 국민당과 합작하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이것은 공산당 세력이 약한 시기에는 민족주의 정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전략이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마링에게 지시하여 손문을 만나 합작을 요청하게 했으며, 결국 협상 끝에 국공합작에 이르게 된다(1924).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는 지역대표 13명이 참석하여 진독수를 초대 당위원장에 선출했다. 모택동도 이 대회에 참석했으나 아무런 직책을 얻지는 못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이렇게 출발하고 있었지만, 그에 앞서 한민족 공산주의자들과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다.

이동휘는 상해임정 국무총리 시절 보이틴스키와 동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동아시아 공산주의 지도자회의, 곧 동아총국 추진문제를 논의했었다. 이동휘는 이에 따라 19206월경 이춘숙을 일본으로 보내 일본인 사회주의자 오스기 사카에를 초청했다. 그리고 이동휘는 12월 상해에 온 오스기 사카에를 보이틴스키와 함께 진독수의 집에서 함께 만났던 일이 있었다. 이때 이들의 회동 목적은 코민테른이 극동지부 보이틴스키에게 위임했던 동아총국 결성 문제였다. 동아총국 문제는 김립과 한형권과 박진순이 레닌자금을 받기 위해 치타에서 만났을 때와 그 이후에도 김립이 언급했던 문제였다. 상해에 온 오스기 사카에는 나중에 이동휘를 가리켜 조선인 동지는 명확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평했다. 그리고 오스기 사카에는 이동휘와 이춘숙을 따로 만났던 사실도 증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회합에도 불구하고 동아총국은 결국 결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상해임정에서 사퇴한 후(1921)에 이동휘는 광동으로 내려가서 당시 광동성정부 수반 손문과 군무총장 진형명(陳炯明)을 만나 동양혁명을 논하고 특히 장래 조선혁명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 국민들이 통일전선을 맺을 필요성에 대해 합의를 했다고 한다.

여운형이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 1866-1925)과 관련을 맺은 것은 1916년에 자림보(字林報) 중국인 기자 진한명(陳漢明)의 소개로 알려져 있다. 손문이 중국 본토나 대만 양쪽 국민 모두에게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신해혁명(1911. 10. 10)으로 만주족의 대청제국을 무너뜨리고, 한족의 중국 지배권을 회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손문은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국공합작을 통해 양당의 초기 형성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손문은 홍콩에서 수학 중에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신해혁명 후 원세개의 계략에 속아 정권을 넘겨주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원세개가 죽자(1916) 돌아왔다. 이듬해 광동성정부의 총통으로 취임했다가(1917) 사직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와서 머물고 있었다(1918). 이 시기에 여운형은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문제를 상의하는 일로 손문을 만나 가까워지게 되었고, 가끔 혁명의 일을 상의하였다고 한다. 여운형은 손문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도 참여했다. 손문은 신해혁명 이후 중국내 신문화운동에서 나타난 비기독교 운동과 5.4운동(1919), 그리고 공산당과의 국공합작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 신앙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인지, 점차 기독교인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관을 가진 현대 중국 사가들은 손문은 기독교를 믿은 것이 아니라, 혁명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손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여운형도 그와 비슷하게 기독교와 멀어지고 있었다. 여운형은 보이틴스키의 소개로 한인 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 공산당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독일인 Otto Braun, 중국명: 李德)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여운형은 국공합작(1: 1924-1927)이 이루어지면서 자연히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양쪽에 관여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또 동아일보와 소련의 타스통신 상해주재원으로도 일했다.

손문이 죽고(1925) 장개석이 국민당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는 상해쿠데타(1927)를 통해 국공합작을 파기하고 공산당원을 축출하는 국공내전을 일으켰다. 상해쿠데타에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 군사고문 브라운의 군사전략이 실패함으로써 공산당군이 거의 궤멸되었고 브라운도 소환되고 말았다. 브라운이 소환되자 그와 친교를 맺고 있던 여운형은 중국공산당과 관련된 정치적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에 그는 상해 복단(復旦)대학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동남아를 여행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는 필리핀에서 영국과 일본 등의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약소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다가 구금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1929년에 영국 조계지역 경마장에서 일본의 모략에 의해 영국경찰에 체포되었다. 영국 경찰은 여운형을 풀어주려고 했으나, 일본영사관이 필리핀에서 여운형이 영국 제국주의를 비난했던 사실을 알려주자, 영국 경찰은 그를 일본 영사관에 넘겨주었다. 일제는 그의 신병을 인수하자 즉시 국내로 압송했다. 여운형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소 이후 그는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다. 공판기록(1929)을 보면 여운형은 그의 입장을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신자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볼 때는 유물론자가 될 수 없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싸운다는 입장에서라면 공산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운형의 말은 한민족 독립운동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조직했던 신민회의 회원들이 공산당을 가장 먼저 수용했던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 독립운동이 민족의 지상과제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그들이 공산주의를 쉽게 받아들인 것은 그 사상의 기본적 이론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공산주의가 내건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이라는 슬로건이 한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의 방향과 잘 맞았다는 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해임정에서 공산주의를 철저히 반대하고 저지했던 인사들 또한 신민회 회원들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만난 한민족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은 초기에는 상해한인교회에 함께 출석하고 있었다. 후에 이들 중에서 기독교를 떠나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인사들이라 할지라도 그들 대부분의 행동은 당시 한민족 독립운동을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꼬르뷰로와 오르그뷰로의 실패

 

코민테른은 두 개의 고려공산당을 통합하는 데 실패하자 모두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1922년말 양파에서 동수로 구성된 위원들로 꼬르뷰로를 조직했다. 양파의 위원으로는 이동휘와 한명세가, 고문(국내 공작원)으로는 국내 사정에 밝은 정재달이 임명되었다. 여기에 파인베르크도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꼬르뷰로는 조선공산당 조직을 국내에서 직접 지도하기 위하여 19234월에 비밀리에 정재달을 파견했다. 정재달은 일본을 경유하여 서울에 잠입했다. 정재달보다 앞서 김찬(金燦, 일명 金洛俊)이 서울에 먼저 왔다. 김찬은 한명세가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이다. 그는 꼬르뷰로에서 파견한 김재봉과 신철(辛鐵, 일명 신명기)을 만나 국내 꼬르뷰로를 조직했다. 이것은 비밀조직이었으므로 김찬은 표면조직으로 신사상연구회를 만들었다. 신사상연구회는 화요회로 개칭되어 제1차 조선공산당의 모체가 되었다. 신철이 7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국내 꼬르뷰로 설치를 보고했다. 그러나 꼬르뷰로 공식 파견원 정재달은 9월에 돌아와서, 국내에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비상한 알력관계에 있어 양파의 전통적인 알력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보고했다. 말하자면 그동안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주도권 쟁탈전이 국내에서 연장전을 치르고 있는 꼴이었다.

한편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하자 창조파는 러시아 대한국민의회 이동휘 반대파를 중심으로 33인의 국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헌법과 정부형태를 만들었다. 국민위원회는 김규식 등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하고,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화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코민테른이 발족시킨 꼬르뷰로의 지시로 국민위원회는 정부형태가 아닌 한국독립당으로 바꾸어야 했다. 당초 국민위원회는 한명세가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꼬르뷰로는 이를 불허했다. 이런 상태에서 이동휘와 한명세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꼬르뷰로의 국내 공산당 조직계획은 진전이 없었다. 보이틴스키는 한국독립당을 국내로 보내 조선공산당으로 개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동휘는 국민위원회뿐만 아니라 한국독립당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결국 한국독립당은 꼬르뷰로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동휘와 정재달이 꼬르뷰로에 불만을 제기하며 사퇴하자 꼬르뷰로는 기능이 정지되었다. 더욱이 한명세마저 모스크바 당 정치학교에 입학한다는 핑계로 떠나버리자, 꼬르뷰로는 아무런 실적도 남기지 못하고 19242월에 이르러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조직계획이 포기된 것은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난 3월에는 이름을 오르그뷰로로 바꿔 다시 설립된 것이다. 파인베르그가 소환되고 이델손이 대신 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꼬르뷰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구성원은 완전히 달라졌다. 오르그뷰로에 있었던 고려공산당 양파의 지도적 인사들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다. 특히 이동휘의 상해파는 대부분 배제되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정재달은 공작원으로 파견하기 위하여 다시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오르그뷰로는 5개의 실천사항을 결정하였는데,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다. “창조파와 개조파를 모두 부인한다는 표현과 당기관의 설치는 러시아 영내의 한인당원을 중심으로 하여 설치하도록 진력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여기서 앞의 것은 한민족의 독립운동 지도자 모두를 부정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한민족 독립운동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여 상해임시정부를 놓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논쟁을 했었기 때문이다. 뒤의 것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러시아 중심적 코민테른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국내 지도적 인사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19251월에 양국의 치안을 해치는 행동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는 러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일본과 국내에서는 치안유지법이 발효되었다. 이런 것들은 공산당 조직활동에 엎친 데 덮친 악재였다. 마침 이 무렵에 일제가 소련 내에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단속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코민테른은 이 해 2월에 발족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오르그뷰로까지 해체해버렸다. 레닌이 죽고 막 집권한 코민테른 지도자 스탈린으로서는 더 이상 일본과 싸울 이유가 사라졌고 내정에 치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본과 싸우는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국내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직접적인 지도를 추진했던 코민테른이 공식적으로 업무를 중단한 것이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결국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의 기본원칙인 국제주의 강령조차 언제든지 내팽개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은 공산당원들조차 추방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국적을 가지고 추방을 면한 한민족 러시아공산당원들도 1930년대에 내부의 적을 숙청하는 스탈린의 대탄압시기에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테러를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