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한 신민회

heojohn 2020. 3. 11. 23:09

 

 

19193.1독립만세사건은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 인사였다. 일제의 정보기록에 의하면 이 운동은 국내에서 단독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중국 상해(上海)의 거류민과 연결되는 통로를 갖고 있었으며, 28일 동경의 한국인 YMCA에서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동경 유학생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받은 것이다. 이 당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독립청년당은 9명의 실행위원 중 7명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었다. 국내에서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 지역 대한국민의회는 3월 하순에 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명단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3.1독립만세사건에 뒤이어 4월초에 한성임시정부가 조직되었으며, 이에 관련된 문서가 상해에 모인 독립지사들에게 전달되었다. 상해의 독립지사들은 이런 소식에 자극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발족하고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목사, 서기에 이광수와 백남칠을 선출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이들 외에 신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신한청년당원들이 참여하여 29인으로 발족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철야논의 끝에 이시영과 조소앙이 기초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가결했다.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임시헌장을 보면, 국호는 대한민국이며, 국체는 민주공화제이다. 임시정부는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로는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와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이동녕에 의하여 413일 선포되었다. 김구도 가출옥(1914) 이후 국내에서 잠행하다가 바로 이날에 상해에 도착해서 곧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을 맡았다. 명목상의 임시정부는 이렇게 출범했으나 실질적으로는 5월에 안창호가 미화 5,000불을 가지고 도착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뿐만 아니라 국내외 각지에서도 기독교 인사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고 보면 국내의 3.1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신민회 인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은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민족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이 사건들이 따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사건은 이렇게 목적과 진행과정이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여 연결된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와 3.1운동을 계기로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난립해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는 대한국민의회에 의해 소비에트 체제로 설립된 러시아임시정부, 국내에서는 13도 대표 23인이 423일자에 이승만(李承晩, 1875-1965)집정관총재로 하여 설립한 한성임시정부, 그리고 상해에서 설립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설립된 것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이들을 하나로 묶는 통합기구가 필요했다. 통합 논의의 핵심은 이승만과 이동휘의 문제였다. 러시아, 중국, 미주, 국내 그리고 상해 지역대표들이 8월초 상해에서 국민대리대회를 개최하였다. 안창호의 주도로 통합을 위해 열린 이 회의에서는 각 지역 임시정부는 모두 해산하여 한성임시정부를 봉대하되, 위치는 상해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상해 임시의정원에서는 한성임시정부와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을 절충하여 집정관총재와 국무령을 대통령제로 고치고, 나머지는 한성임시정부 직제에 맞추어 헌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상해임시정부의 직제를 한성임시정부의 직제로 개편하여 통합한 것이다.

 

이승만은 국내외 한인사회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한민족 독립운동을 위한 활약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에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통합임시정부안은 여기에다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한인사회당 당수 이동휘가 초대 국무총리에 추대된 것은 이미 통합임시정부의 주류를 구성하고 있는 우파 진영이 만주와 소련 극동지역에 있는 좌파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임시정부에 끌어들이기 위한 대타협의 산물이었다. 이동휘가 한인사회당의 지지를 얻어 통합임정에 참여하기로 하자 러시아 지역의 대한국민의회는 해산하기로 결의했다. 한성임시정부 요원들은 각자 상해로 왔다. 이 과정에서 지역끼리 논란이 있었으나, 19199월 이동휘가 한인사회당을 이끌고 상해로 옮겨와서 그해 11월에 국무총리에 공식 취임하여 집무를 시작하자 일단락되었다. 결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 세워진 것이다. 국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도 이에 호응하여 상해임시정부를 공식 인정하고 상해로 모여들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아직 취임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상해에 모인 주요 인사들을 보면 대부분 옛 신민회 동지들이었다. 통합 전에 이동휘가 참여했던 러시아 대한국민의회의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체제로 상해임정 공화정 체제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동휘의 좌파진영은 나름대로 상해임정의 주도권을 장악할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동휘에 반대하는 러시아 국민의회 중심의 창조파는 상해임정을 해체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상해임정에 참여하여 개조할 것을 주장하는 인사들과의 사이에 창조파와 개조파의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외교부 차장으로 선임되었고, 신한청년당원들 대다수가 임정에 참여함으로써 신한청년당은 해산되었다. 여운형은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으로 있던 1919년 말에 일본정부의 방일 초청을 받았다. 여운형은 일본의 초청에 응해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을 사임하고 개인 자격으로 동경에 갔다. 일제가 그를 초청한 것은 그를 회유하여 한민족 자치정부안을 추진하기 위한 정치공작이었으나, 그는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완전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일본을 경악케 했다. 일본정부의 회유를 뿌리치고 돌아온 그의 활약이 신문보도를 통해서 알려지자 그는 일약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3) 사상적 미아 양기탁

 

양기탁은 1918년 중국 천진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고금도에서 구금되었다가 191912월에야 석방되었다. 그는 이듬해인 19204월에 창간된 동아일보의 고문 겸 편집감독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다시 언론사에 돌아오게 된 것은 3.1독립만세 사건에 놀란 일제가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소위 문화통치로 바꾸어놓은 덕을 본 것이다. 일제는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薺藤實) 총독에게 국제적 여론을 고려하여 한민족에 대한 압제를 어느 정도 풀어놓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3.1독립만세 사건 이후 국내에서는 외형적으로는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다. 양기탁은 이런 분위기에서 출옥하자 느닷없이 군소 민족종교의 통합을 명분으로 통천교(統天敎)를 창시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통천교를 창시하는 선언서에서 기독교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가 모든 종교의 폐지를 주장하는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사실과 동시에 기독교도 떠났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민족 독립운동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는 국내에서 일제의 감시가 다시 강화되자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요청에 따라 1921년 비밀리에 다시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 그는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의 무장독립군 단체를 통합하려고 시도하면서 처음에는 임시정부 참여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는 192910월 상해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좌파와 민족주의 계열의 우파가 결별하였을 때, 안창호와 이동녕 등과 함께 상해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의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상해임정 주석으로 선출되는 등 민족주의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피난을 다니던 임정과 결별했다. 그는 홀로 중국의 강소성 표양의 시골 암자인 고당암에서 생활하던 중 19384월 어느 날 화병으로 서거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양기탁의 생애에서 보듯이 이 당시의 한민족에게는 민족독립이 최우선 과제였으며, 종교나 사상은 오직 독립운동의 추진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쓰거나 버릴 수 있는 선택사항일 뿐이었다. 이러한 조류는 사회주의 사상이 여러 갈래로 한민족 독립 운동가들에게 흘러 들어오는 길을 터놓고 있었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한민족 사회주의 단체들이 여러 개가 생겨나서,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세력과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담당자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