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공산주의의 한민족 사회 유입과정

heojohn 2020. 3. 11. 22:58

 1) 유물론 철학 및 계몽사상의 유입

 

 가 편찬한 세계철학사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의 철학사상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한국의 철학은 처음에 원시적인 하늘() 숭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존재자를 두 개의 대립하는 원소(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봉건제 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유교가 15-16세기 신유교 발생기까지 한국 철학사상을 지배했으나, 주희(朱熹)의 신유교 학설이 이식되면서 여러 가지 유물론 철학도 발생했다. 한국의 독창적 유물론 철학이 17세기 조선시대에 실학파(實學派)의 등장으로 탄생하였으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반봉건제 부르주아 철학이 침투해서 서유럽의 부르주아적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이론, 특히 실증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으며,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등의 번역물에 관심이 주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스펜서의 1원리와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1834-1901)서양사정문명지개략(文明論之槪略)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동 아카데미는 한국에서 계몽운동이 고양된 시기는 미국 기독교 포교단과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신유교가들의 좌파 그룹으로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을 꼽으면서, 좌파 그룹은 반일 무장투쟁과 반봉건 투쟁을 했으나, 우파 그룹은 일제의 협력자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특히 박은식(朴殷植, 1850-1926)과 단재 신채호(申采浩, 1879-1936)를 시대적 대표 사상가로 소개하고 있다. 박은식은 유교적 학식이 실학파의 유물론적인 진보사상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의 자연 및 사회에 대한 발전관은 변증법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박은식은 왕양명의 정신으로 유교를 해석하면서 부르주아적 개량운동의 선두에 섰으나, 대중의 혁명투쟁이 누적되는 조건을 배척함으로써 성공할 수 없었다. 특히 박은식이 중국의 개량주의자 강유위와 양계초의 학설, 일본 철학자들에게서 빌려온 사회다윈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박은식이 스펜서의 자연진화의 원리라는 사회학적 견해가 다윈의 생물계 발전의 합법칙적 학설을 인류사회로 확장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을 한 이론의 두 개의 구성부분으로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동 아카데미는 박은식이 계몽주의자임에도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보여주는 모순은 그 자신이 부르주아이면서 미성숙하고 허약한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한계에서 오는 것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신채호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봉건적 민족해방운동과 연결시키려고 한 점에서 다른 계몽주의자보다 앞선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 아카데미는 신채호가 고대, 서유럽, 중국, 일본의 철학을 잘 알고 있음에도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고, 역사를 계급투쟁의 입장에서 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신채호는 신민회를 따라 망명해서 조선상고사를 쓴 역사가이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후에 좌익그룹인 창조파에 가담했다. 박은식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냈고, 한국통사를 집필하여 민족의 역사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 이후 상해임시정부까지를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를 출판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러시아 공산당은 선두에 적기를 내걸고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제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다고 써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박은식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이승만에 이어 제2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재임 중에 사망하여 그의 장례식은 임시정부 최초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신채호와 박은식은 이 당시에 중국에 망명해서 나름대로 독립운동과 저술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2)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영향과 이동휘

 

1차 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1917년에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군인과 시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러시아 국내 사정은 혼란이 극심했다. 황제가 갑자기 퇴위하면서 2월혁명에 의해 멘셰비키파가 보수파와 연정을 꾸렸으나 결국 10월혁명을 통해 볼셰비키가 승리했다. 이것은 러시아정교회에는 날벼락과 같은 재앙이었다. 곧바로 러시아정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앞에서 이런 소식을 러시아정교회 서울선교회장을 지냈던 대수도사제 빠벨 이바놉스키가 후임자인 페오도시 뻬레발롭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무렵 러시아와 만주지역을 넘나들면서 독립운동과 기독교 전도활동을 하고 있던 이동휘는 러시아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되는 험난한 과정을 몸으로 직접 겪고 있었다. 19174월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일 밀정으로 오인되어 체포되었다. 러시아 케렌스키 임시정부군이 일제의 요구에 의해 이동휘를 체포한 것이다. 그는 체포되기 전날에도 이곳에서 연합기독교전도집회를 이끌었다. 이동휘가 체포되고 하바롭스크 군대 감옥으로 이송되자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들은 이동휘를 구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하바롭스크 지역에서 때 마침 케렌스키 임시정부군대가 패퇴하는 극적인 정치, 군사적 반전으로 12월에 구출될 수 있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대종교인 이상설이 주도하던 권업회는 권업신문이 폐간된 이후에 한인신보를 새로 발간하기로 결정하면서 양기탁을 편집인으로 초빙했다. 양기탁은 이 초빙을 수락하여 그 해 12월에 그곳으로 갔다. 이 사실은 미국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에도 보도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양기탁 환영회에 참석했다. 신민회는 이렇게 105인 사건과 망명 등의 고통과 수난을 겪으면서 내부에서는 물론, 그동안 따로 움직이고 있었던 비기독교 진영 독립운동가들과도 일치된 인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민족은 고난을 통해 보다 성숙한 민족정신을 갖게 되는 전통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905년경부터 나라 안팎에서 개별적 또는 소규모로 항일운동을 했던 개인 독립운동가들이나 단체들의 행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앞에서 언급한 안중근과 안명근 형제들을 비롯하여,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1908)를 사살했던 장인환(張仁煥)과 전명운(田明雲),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찌른 이재명(李在明)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민족독립운동을 하던 기독교인들 중에는 1917년 레닌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하자, 공산주의를 수용하면서 기독교를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을 민족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선택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들은 결국 기독교를 버렸거나 사상적 방황을 겪어야 했다. 그런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한인사회당 창당을 둘러싼 이동휘와 양기탁 등 신민회원들의 인생 역정(歷程)에서 볼 수 있다.

 

 3) 한인사회당의 창당 배경과 경과

 

한인사회당은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에 성공한 이듬해 19185월에 창당되었다. 그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에 이주한 한인들은 귀화인들과 비귀화인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19172월 혁명이 일어나서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그 해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대표자회가 열렸다. 이때 이동휘는 하바롭스크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군에 의해 구금되어 있었다. ‘귀화인들은 일방적으로 비귀화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등의 차별적인 결의를 했고, 또한 비귀화인들이 제안한 이동휘의 석방요구 청원안도 무시해버렸다. ‘비귀화인대표들이 이에 항의하여 퇴장해버리자, ‘귀화인들은 그들만의 투표로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결의를 했다. 그런데 10월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면서 귀화인들이 역풍을 맞는 상황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케렌스키 임시정부군은 일제의 요구에 따르고 있었다. 일본이 이동휘를 양국에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일본으로 추방해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금하고 있던 이동휘의 신병을 일본에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마침 그해 11월에 하바롭스크 지역에서 볼셰비키파가 승리하면서 이동휘는 극적으로 구출될 수 있었다. 이동휘의 구출에는 한인 2세 볼셰비키 여류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의 역할이 컸으며 그녀는 이동휘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반전되면서 비귀화인들19183월에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는 옛 신민회 동지들인 이동휘, 양기탁, 이동녕, 유동열 등이 참석하였다. 시베리아와 만주 각 지방에서 온 한인 대표들과 이동휘의 후원자인 볼셰비키 여류 혁명가로서 하바롭스크 볼셰비키당 서기장인 된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도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신민회 간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이동휘와 유동열은 볼셰비키주의에 찬동하여 고려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동녕은 소비에트정부로부터는 후원만을 얻자는 주장으로 맞섰다. 결국 이동녕측이 퇴장하고 이동휘 계열 인사들만으로 한인사회당이 발기되었고 5월에 창당대회를 열었다. 한인사회당은 이동휘를 중앙위원장에, 오 바실리를 부위원장에 선출했다. 당서기에는 김립(金笠)을 선출했다. 이를 계기로 이동휘는 신민회와 결별했다. 동시에 열렬했던 기독교 신앙도 버린 것이 되었다. 양기탁은 이동휘의 창당에 동조하지 않고 당 직책도 맡지 않았지만, 이동녕보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양기탁은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주에서 선발한 독립군들을 한인사회당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 유동열에게 교육을 받게 하도록 협조하기로 했다. 양기탁은 북간도로 돌아와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세운 백서학교에서 독립군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한민족 기독교인이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사건이 러시아 영내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동휘의 배교 사건은 신민회의 분열과 함께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이 좌우로 분열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한인사회당의 창당은 아직 레닌이 코민테른’(Comintern)을 설립하기도 전에 한민족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사건이며, 그 성격에 대해서는 정식 정당이라기보다 처음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좌익적 혁명운동 단체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후 한민족 사회와 교회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극심한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는 일본군, 체코군, 연합국의 지원을 받는 콜챠크(Aleksandr Vasilyevich Kolchak, 1874-1920) 정부의 백러시아군 등의 반볼셰비키군이 새롭게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한인사회당 창당 다음 달인 6월 제2차 전로한족대표자회가 열렸다. 한인사회당은 이 대회에서 귀화인들의 반볼셰비키적인 분위기에 반대하여 탈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7월에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가 반볼셰비키군의 공격으로 연이어 함락되고, 유동열이 지휘하는 한인 적위군도 궤멸되는 큰 희생을 치렀다. 한인 적위군에는 양기탁이 훈련을 위해 보냈던 백서학교 학생들도 다수가 희생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동휘와 유동열은 물론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각자 목숨을 건 도피에 나서야 했다. 이 혼란 중에 이동휘의 강력한 후원자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반볼셰비키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동휘와 유동열 등 한인사회당 간부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져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동휘는 구사일생으로 겨우 도망쳐서 북만주 요하에 머물렀다. 이후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지역은 반볼셰비키군과의 내전이 끝날 때까지 도시를 서로 뺏고 빼앗기는 혼돈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는 한민족 귀화인들이나 비귀화인들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가 전개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191811월에 종전되고 19193월에 코민테른이 설립되었다. 한인사회당은 러시아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설립과 국내에서 3.1독립운동만세사건, 그리고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 극동지역 내전에서는 결국 볼셰비키당의 적군이 백군에 승리했다. 이 무렵에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동휘는 19195월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서 비밀리에 대표자대회를 열었다. 한인사회당은 이 대회에서 대한신민단과 합동을 결의하여 이동휘를 총의장, 김규면(金奎冕, 1880-1969) 단장을 부의장 겸 군사위원장으로 선출하여 당을 재건했다. 함경도 출신인 김규면은 일찍이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했으나, 일제의 지역차별 정책으로 무관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원산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 펜윅(Malcolm C. Fenwick)을 만나 침례교에서 목사로 활동하면서 신민회에 가입했다. 그는 서양선교사들의 친일행위와 1914년 침례교단이 분열되는 것에 반발하여 한중로(韓中露) 접경지역인 훈춘에서 성리교(聖理敎)라는 독립교단을 창설했던 인물이다. 성리교는 한때 신도수 3만에 이를 정도로 교세를 확장했었다. 신민단은 김규면이 신민회의 취지를 계승하여 성리교회 핵심교도 2-3백여 명을 주축으로 조국의 독립과 당파를 초월하는 민족대동주의를 내걸고 조직한 비밀군사조직이었다. 신민단은 한인사회당과 통합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본부를 옮기고 교세를 강화했다. 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이 통합을 이룸으로써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한인사회당의 사회적 활동기반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자들의 통합될 수 없는 통합이었다. 기독교 목사와 공산주의자라는 공존할 수 없는 이념을 가진 자들의 통합을 이해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단서는 한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결정은 독립운동을 취해 종교와 민족의 비교가치와 우선순위 평가는 하지 않은 것이었고, 결국 어느 한 쪽은 버려져야 하는 이념갈등의 미래는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다. 양측의 통합을 성사시킨 인물은 김립이다. 김립도 신민회원이었으며, 1910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는 일제첩보문서에서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능력과 지식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파괴도 잘하고 건설도 잘하는 수단을 가졌다고 평할 정도로 정치수단이 뛰어났다. 그는 당총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이후 이동휘에게는 최측근 참모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 대한국민의회에서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통합할 것을 결의하자, 다음 달 6월에 한인사회당도 이동휘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참여를 결정했다. 한인사회당은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지부를 남겨두고 김규면이 총괄적 운영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러시아 코민테른에 당무를 보고하기 위하여 박진순 등 3인을 대표단으로 파견하는 것도 결정하였다. 한인사회당 초기과정에서 이를 주도했던 이동휘와 김규면, 김립 등을 보면, 이들은 모두 신민회원들이었고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이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민족 독립운동을 위한 목적이었지 당시 공산주의 유물론을 이해하고 한 행동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