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신민회의 망명과 ‘105인 사건’

heojohn 2020. 3. 11. 22:20

 

 

(1) 항일 사건들과 신민회의 망명회의, 그리고 제1차 망명

 

일제는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가 주관하던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재무 담당 양기탁이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양기탁은 19093월에 그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회의(1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일제의 강력한 무단통치에 의해 국내에서 활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므로 신민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면서 기회가 왔을 때에 독립전쟁을 수행하려는 계획이었다. 그해 5월에는 양기탁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설립자이자 반일적인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사망했다. 일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대한매일신보를 아예 매수해버렸다. 양기탁은 이때 신문사를 사직했다. 이로써 신민회는 대변지를 잃게 되었다. 일제는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꿔 신문을 발행했다. 신민회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돌아다니며 국외 독립운동 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0월에 황해도 해주 출신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을 폭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와 관련하여 안창호, 양기탁, 이갑, 유동열을 비롯하여 반일 계몽운동을 이끌던 신민회 간부들이 대부분 체포되었다. 이들 외에도 김구(金九, 1876-1949)를 비롯하여 안중근의 출신지인 황해도 출신 인사들도 이때 대거 체포되었다. 이어서 12월에는 평양 출신인 이재명(李在明, 1890-1910)의 을사오적 괴수 이완용 척살 미수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때에는 평안도 출신인사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아직 신민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일제는 신민회 인사들이 두 사건에 직접 연루된 증거를 찾지 못하자, 다음 해 19102월에 체포했던 인사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러나 신민회 간부들은 풀려나자 일제의 감시로 인해 국내활동에 닥친 위기와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때 신민회는 약 800명의 회원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19103월 신민회 간부들이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 모여 긴급전략회의(2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극한점에 도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망국이 임박한 것으로 보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신민회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전쟁론은 국외에 신영토를 마련하여 신한민촌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기회를 맞아 일제와 독립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민회는 팽창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는 일제가 중국이나 러시아, 또는 미국에 전쟁을 도발할 때, 그런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국외에 망명해서 독립군기지를 서둘러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군 기지인 신한민촌에는 반드시 학교와 교회와 기타 문화시설도 세우기로 했다. 이 회의에서 독립전쟁론이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하면서 동시에 망명과 집단이주의 방법도 결정되었다. 망명의 순서는 일제에 구속된 경력이 있는 간부들부터 먼저 떠나기로 하고, 각 지역의 동포들을 관리할 책임자를 정하여 준비되는 대로 집단이주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국내 사업을 진행하면서 국외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 회의가 있은 직후 4월에 안창호, 이갑, 유동열이 이종호(李鍾浩, 1885-1932)와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등을 대동하고 제1차 망명을 떠났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를 이어 3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통감이 5월에 새로 착임하자, 통감부는 식민지화 야욕을 더욱 노골화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한층 더 높였다. 8월에 일제와의 합병을 주장하는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일제는 마침내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대한제국은 망국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제에 의해 망국이 된 대한제국의 땅에 일제가 식민지를 통치할 조선총독부를 세웠다. 데라우찌 통감이 제1대 총독으로 신분을 바꿨다. 9월에 이동녕은 이회영 등과 함께 망명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가 서간도에서 후보지를 확정하고 11월에 돌아왔다. 서간도 지역은 양기탁을 비롯해 여러 명의 간부들이 이미 탐사를 했던 지역이었다.

 

12월에 양기탁은 국내에 남아 있는 간부들을 모아 서간도 이주회의(3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외국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신영토를 마련하고, 그곳에 집단이주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계획들을 결정했다. 이와 같이 독립전쟁론을 추진하기 위해 채택한 신영토의 후보지는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였다. 서간도 이주는 이시영(李會榮, 1867-932)6형제 중 5형제가 명동 일대의 토지를 정리하여 이주자금을 마련한 덕분에 12월말부터 이동녕의 주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회영 형제 가운데 장남은 조상 봉사를 위해 남기로 했다. 서간도 이주에 소요된 자금은 대부분 이씨 일가의 재산을 처분한 것이었다. 이동녕과 이회영 형제 등은 각자의 가족들과 모집한 이주민들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었다. 신민회는 처음에 유신한 자유문명국이 성립케 함을 목적으로 유신한 국민의 양성에 치중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한 이후 신민회의 목적은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군 양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2) ‘105인 사건과 신민회 국내 조직의 와해

 

신민회의 서간도 망명이 진행되는 중에 1910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신민회 7인 발기인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인사는 양기탁, 전덕기 목사, 그리고 이동휘 3명뿐이었다. 그런데 이무렵 안악에서 독립군 양성 군자금을 모금하던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이 일제에 체포되는 안명근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안악지역 애국지사 160여 명이 체포되었다. 19111월이 되어서는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계획이 발각되어 소위 양기탁보안법 위반사건의 혐의로 양기탁 등 20여 명의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이 무렵에 1차 망명을 떠났던 유동열은 중국 연태에서 독립군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동휘는 북간도에서 선교활동과 항일운동단체인 광복단을 설립하고 3월에 성진에 돌아왔으나,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에 연루되어 곧바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덕기는 목사의 신분이기에 망명의 이유가 없다고 보아 체포되지는 않았다. ‘안명근 사건양기탁보안법위반 사건으로 체포된 자들에 대한 처분은 3가지로 나눠졌다. ‘안명근 사건으로 기소된 황해도 지역 인사들에게는 7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관련자들은 대개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았다. 두 개의 사건들은 당시 경성지방법원에서 1911722일 같은 날에 선고 공판이 열렸다.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에서 양기탁은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동휘 등 기소되지 않고 예심에서 방면된 18명에 대해서는 데라우치 총독의 명령으로 1년간 각 섬에 안치(安置)되었다. 이동휘는 대무의도에서 안치 기간을 보냈다. 이때까지 일제는 신민회를 안창호와 양기탁이 재미 한인국민회의 국내지부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경은 그동안에 일어났던 안중근, 이재명, 안명근 등 반일운동가들의 출신지역이 대개 서북지방 기독교인들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일경은 그 사건들의 배후에 어떤 비밀결사체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일제는 있지도 않았던 데라우치 마사다께 총독모살미수사건”(寺內正毅總督謀殺未遂事件)을 조작해서 발표했다. 조작된 사건은 데라우찌 총독이 191012월 압록강 철교 개통식 참가 등 서북지방을 순시할 때에 총독 암살을 모의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 바 일제 치하에서 유명한 “105인 사건이다. 일경의 발표에 의하면 우연히 신민회가 데라우치 총독모살을 기도했던 단서를 포착하게 되었다. 정주 납청정에 거주하는 이재윤(李載允)이라는 사람이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정보가 있어 조사해보니, 신민회가 관련된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밝혀진 바와 같이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런 허위 사건을 날조한 일경은 신민회 조직 전체를 파괴하기 위해 사건을 그럴 듯하게 부풀려서 신민회에 항일 불령선인(不逞鮮人) 집단의 혐의를 씌웠다. 더욱이 그 배후에는 평북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인 미국 선교사 맥큔(George S. McCune, 尹山溫) 등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들어있었다.

 

어쨌든 일제는 이미 지난해에 있었던 데라우치 총독의 서순 일정에 맞춰 조작한 사건의 혐의를 씌워 대대적으로 신민회 관련자들의 체포 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약 600여 명을 검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 중 양기탁 등 123인을 기소했다. 이 사건 기소자 명단에는 중국 연태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나 조사 후 석방되었던 유동열이 다시 포함되었다. 전덕기 목사도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기소된 자들이 재판과정에서 이구동성으로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전덕기 목사는 고문으로 지병이 악화되자 석방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신민회원들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이겨내고 비밀유지에 성공함으로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았다.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으로 대무의도에서 유배 중에 있던 이동휘는 이 사건에서 제외되었다. 이 사건으로 1심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105명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105인 사건으로 더 알려졌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하여 당초 예상보다 신민회의 실체가 거대하다는 것과 신민회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신민회는 발기인을 비롯하여 입회심사를 통과한 회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사실은 안창호가 기독교를 유신한 국민이 되기 위한 필수적 요소로 여기고 있었음을 함의한다.

 

신민회는 ‘105인 사건을 계기로 전덕기 목사를 제외한 국내 지도부가 모두 구속된 상태에 빠짐으로써 국내조직의 활동은 거의 마비되었다. 이후 일제가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것에 대해서는 ‘105인 사건에서 드러난 신민회와 기독교의 관련성이 근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기독교회가 부흥운동으로 추진하고 있던 “100만명 구령운동이 일제의 눈에는 ‘100만 명의 십자군병을 양성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연구자들의 관점은 방향이 다소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경은 미국 선교사 다수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보고했지만, 검찰에서는 기소장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외국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과 관련한 보고서를 자국의 선교본부와 세계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이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이로써 한민족과 한국기독교가 일제에 의해 박해를 당하고 있는 실상이 세계에 폭로되었다.

 

전덕기는 그동안 신민회 발기 인사들은 물론 많은 애국동지들이 망명하거나, 체포되어 구속되거나 심지어는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상동교회 담임목사로서 교회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홀로 남은 그는 어려운 일을 비밀리에 혼자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그는 일제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애국적인 설교를 하고 글을 발표했다. 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19113월부터 객혈하기 시작한 폐질환이 ‘105인 사건에 공모자로 체포되어 일제의 고문을 당하면서 악화된 것이었다. 다행히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지만, 전덕기의 애국심과 종교적 열정은 이후에도 건강을 돌보지 않음으로써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구속되었던 인사들은 석방되자 곧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이동휘는 19126월 대무의도에서 유배가 해제되자 그리어슨 선교사와 다시 전도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되면서 전도활동도 제약을 받고 있고, 북간도를 왕래하는 것도 전처럼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동휘는 1913년 봄 어느 날 밤에 혜산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19133‘105인 사건의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은 6명뿐이었고, 1심에서 10년형을 언도받았던 유동열을 포함하여 나머지 인사들은 무죄 방면되었다. 6명이 상고한 3심 재판은 기각되었다. 유동열은 무죄로 석방되자 곧 자신의 제2차 망명을 결행하여 북경으로 갔다. 전덕기 목사는 병환이 악화된 중에서도 병상목회를 이어갔지만, 결국 19143월에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일제의 감옥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양기탁이 감형되어 출옥한 것은 19152월이었다. 양기탁도 출옥 후 국내활동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6개월이 지난 11월에 동지들의 도움으로 북경(北京)을 거쳐 봉천성(奉天省) 류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신민회의 국내 조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