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일제 초기 한민족 독립운동과 사상적 동향-신민회의 발기

heojohn 2020. 3. 11. 22:10

1910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조국을 잃은 한민족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특히 만주 지방), 러시아 극동지역, 미국 및 일본 등 곳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망국의 한을 품은 한민족의 국권회복 운동은 세계 각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일본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한민족의 근거지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염원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한민족은 누구나 독립운동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과 만주에는 한민족 이주자들이 많았고, 독립운동가들도 망명하여 살고 있었다. 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먼저 이곳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병이었거나 무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제가 국내에서 이들의 반일활동을 철저히 봉쇄하고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망명객과 이주민들은 줄을 이었다. 경술국치(1910) 이후 이곳에서 한민족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을 독립운동의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급진적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문제 삼지 않았으며, 공산주의 이론이나 내용은 따지지도 않았다.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공산주의를 민족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수용했다. 공산주의는 이런 경로로 러시아 한민족 사회를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항일 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항일독립운동 초기에 가장 크게 공헌을 했던 단체가 신민회였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신민회를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사람은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로 알려지고 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안창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창호는 일제의 지배야욕에 맞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국민 계몽과 교육을 실시할 비밀단체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07년 안창호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주필로 있던 양기탁(梁起鐸, 1871-1938) 등과 협의하여 4월경에 신민회 창립을 발기했다. 신민회는 이때부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 애국계몽운동을 목적으로 공개적으로 설립되었던 대한자강회는 이 무렵 1년 만에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신민회의 창립목적은 [대한신민회통용장정]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아한(我韓)의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야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발육과 산업을 개량하야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야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이다. [대한신민회취지서]에는 자유문명국을 건설하는 길은 신정신을 환성하야 신단체를 조직한 후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고 명시하고 있다.신민이란 한민족이 자유문명국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유신한 국민’(줄여서 新民)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따라서 신민회는 국민을 가르쳐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신민(新民)”을 만드는 단체이고, 자유문명국인 신국을 성립케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직한 단체인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을 유신케 하기 위하여 신교육으로 가르치고, 신교육을 통해 유신한 국민들이 통일연합하여 자유문명국을 세우면,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논리이다. 이것이 이른바 항일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던 실력양성론이었다.

 

신민회의 발기인은 7인이며 총감독 양기탁을 비롯하여 총서기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집행원 안창호, 재무 전덕기 목사(全德基, 1875-1914)가 본부를 구성했다. 이동휘(李東輝, 1873-1935), 이갑(李甲 1877-1917), 유동열(柳東說, 1879-1950)은 서북지역 각도를 책임지는 도총감으로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도총감은 각도에 1명을 두기로 한 규정에 따른 것이고, 그 지역 출신자를 선정했다. 신민회의 초기 활동은 비밀리에 조직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발기인은 물론 창립 이후에 가입한 회원들도 대부분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신민회 간부들은 당시 선교사들이 전도했던 무조건예수를 믿는 기독교가 아닌 민족주의적 기독교를 신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가 미국 북장로교 마펫(S. A. Moffett) 선교사가 전도사로 청빙하는 것을 거절하고, 신민회의 조직과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 매진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사례에 속한다. 신민회는 겉으로 반일단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각지에서 선교, 교육, 그리고 실업활동 등을 통하여 조직과 사업을 확장했다. 그래서 안창호는 먼저 평양에 대성학교와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고, 태극서관을 평양, 서울, 대구 등지에 설립했다. 발기인들의 이력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안창호는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안창호는 그 무렵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관서지부를 맡았다. 그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활동에 참여하면서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는 한편,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유명해졌다. 1899년에는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했다. 교명에 쓰인 점진은 안창호의 행동철학이 담긴 말이다. 그는 1902년에 유학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안창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기독교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이 한민족을 미개인으로 취급하고, 독립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재미 한인들을 상대로 민족교육과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 조직했던 한인친목회를 공립협회로 개편하고 공립신문을 발간했다. 그는 19072월에 귀국했다.

 

양기탁은 1886년 제중원 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으나 6개월 만에 퇴교하고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는 게일(James S. Gale, 1863-1937)한영자전, 韓英字典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1899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시위운동으로 이승만 등과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궁내부(宮內府) 소속 번역관보에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1904년에 영국 언론인 베델(Ernest Bethell)과 함께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1905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번역관직을 사직하고, 신문 업무에 전념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열사들의 자결사건들과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활동 등에 관련한 기사들을 애국적인 관점에서 보도했다. 1907대한매일신보신문사 내에 국채보상운동 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이동녕은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898년에 출옥하였다. 그는 출옥 이후 제국신문에서 사설을 집필하고,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와 손잡고 YMCA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일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감리교 상동교회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의 전덕기, 양기탁 등과 상동청년회를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으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했다가 190710월에 귀국했다.

 

전덕기 목사는 어린 시절에 남대문 시장에서 숯장수를 하는 삼촌을 도와 일했었다. 그는 미국 감리교 의료 선교사이며 상동교회를 설립한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목사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다가, 1896년에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전덕기는 이승만 (李承晩), 주시경(周時經)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전덕기는 1900년에 미감리회 목회자 양성과정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엡웟청년회 결성에 참여했고, 고종폐위음모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이승만이 1904년에 석방되자,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그를 교장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곧 광무황제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전덕기는 1905년에 상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전덕기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가 주도하는 전국 엡웟청년회를 동원하여 도끼상소를 올리는 등 을사조약반대운동을 했다. 이때 김구(金九)는 엡웟청년회 진남포 총무로 도끼상소운동에 참가했다. 김구는 당시 애국운동가들의 사상의 조류를 신구(新舊)사상으로 양분하여 보고 있다. 그는 백범일지에서 그때 각 도의 청년회 대표가 모여 겉으로는 교회 일을 토의하는 척했으나 사실은 순전히 애국운동이었다. 우선 싸움을 일으킨 산림학자들을 구사상이라고 하면, 예수교인들은 신사상이라 하겠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김구는 선교사의 숙달하지 못한 반벙어리 말을 그래도 많이 들은 자였으므로 신교심(信敎心) 외에도 애국사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전덕기는 스크랜턴이 통감부의 압력에 눌려 엡웟청년회를 해산하자, 상동청년회를 조직했다. 전덕기는 목사가 된 이후 애국적인 설교와 강연을 많이 했다. 1907년 신민회가 상동교회 지하에서 발족되었으며, 이후 상동교회는 신민회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신민회 발기 직후인 7월에 전덕기가 상동교회 지하에서 이준(李儁)을 위해 환송예배를 집전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면서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를 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전덕기 목사와 감리교 상동교회, 그리고 상동청년학원은 신민회의 초기 조직과 활동에 바탕이 되었다. 그래서 초기 신민회원들은 대부분 감리교 상동교회에 출석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인으로 상동청년회에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이동휘는 대한제국 무관(참령) 출신으로 강화도 진위대장을 지냈다. 그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울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광무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직후였다. 강화도에서 감리교 전도사인 김우제가 이동휘를 입교하게 했다. 이동휘가 기독교에 입교한 동기는 기독교야말로 쓰러져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무렵 이동휘는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자결할 것을 밝히는 [유고이천만동포형제서]에서 기독교가 독립단합의 기초라고 권고했다. 이동휘는 이때 일본군 하세가와(長谷川) 대장에게 보내는 [유고장곡천대장서](遺告長谷川大將書)도 작성했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한국지배 정책의 진행이 용이하게 진행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여러 나라의 관계 중심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장차 이해가 오로지 한 나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동휘의 견해는 앞으로 그의 독립운동에서의 행보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이때 이동휘는 총 8통의 유고를 작성했지만, 실제로 을사오적을 처단하거나 자결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강화도와 전국 각지에서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전도와 애국을 위한 교육에 헌신했다. 그리고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과 감리교 엡웟청년회가 중심이 된 군사훈련과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동휘는 교육과 기독교 선교활동에 더욱 매진하여 강화도에는 면단위로 보창학교를 세우고, 전국 각지에도 직접 또는 그의 추종자들이 보창학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학교를 세우게 했다. 이 시기에 이동휘 한 사람이 세운 학교가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고, 일제의 헌병대가 치안을 장악했다. 이때 해산된 군인들이 중심이 된 의병활동 등의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강화도에서도 항일운동이 전개되어 진위대와 기독교인들이 봉기의 선봉에 나섰다. 일제는 자국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는 한편, 이동휘를 봉기의 수괴로 지목하고 체포했다. 이동휘는 구금되었다가 4개월이 지난 연말에야 풀려났다. 이동휘는 평양 대부흥운동에 힘입어 백만명구령운동이 시작되던 이 무렵에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son, 한국명: 구례선 具禮善)을 만나, 그의 조사가 되었다. 이동휘는 함경도 지방과 북간도에서 전도활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병행하였다. 이동휘의 선교활동에는 그리어슨 선교사가 소속된 한아청삼국전도회(韓俄淸三國傳道會)가 후원하였다.

 

이갑의 집안은 아버지가 당시 평안감사 민영휘에게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40()이나 되는 전답을 빼앗기는 바람에 몰락했었다. 이갑은 1896년 상경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활동했다. 이후 한국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육군사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했다. 이갑은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종전이 되자 1904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참령(參領)이 되었다. 이때 이갑은 육혈포를 들고 민영휘를 찾아가서 아버지가 빼앗긴 재산을 도로 찾았다. 그는 그 돈을 오성학교를 세우고 애국계몽운동에 썼다. 그래서 이갑에게 조선의 몬테크리스트 백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군직을 사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유동열은 1898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의 한 중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동열은 예비과정을 거쳐 1903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이갑과 동기로 졸업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했다. 이후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그해 8월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귀했다. 무관학교 교관, 시위대 기병대장 등을 역임하다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사직했다.190610월에는 이갑, 양기탁 등과 함께 계몽운동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여 학교설립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신민회는 신입회원 가입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매우 엄격하게 심사하여 비밀을 유지했다. 신민회의 규모는 기독교 교세 확장 등이 작용하여곧 전국적인 지부를 조직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평안남북도 지방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 무렵 대한제국은 광무황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퇴위 당하는 등 망국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신앙적인 교인들까지 들어오면서 기독교회는 넘쳐나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개인 신앙과 교회활동에만 치중하는 보수적 신자들과 신앙보다는 독립운동에 교회를 활용하려는 민족주의적 신자들로 나눠지게 되었다. 1907년 신민회를 창립했던 기독교 인사들도 점차 민족적인 운동노선과 종교적인 운동노선으로 양분되는 역사적 분기점에 이르러 있었다. 선교사들도 이렇게 급변하는 종교적, 정치적 환경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측과 친일적인 자세를 보이는 측으로 각자 나눠지게 되었다. 후자에 속하는 다수의 미국 선교사들은 외견상으로는 초기부터 강조해오던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점차 미국과 일제의 국익에 따른 정치적 밀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와는 달리 이때부터는 기독교의 정교분리 원칙의 본질적 의미가 변질되고 있었다. 어쨌든 1907년은 신민회의 발족과 함께 평양 등지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 그리고 이 해에 체결된 정미7조약 등의 사건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대한제국과 기독교의 앞날에 커다란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민회의 초기 활동에는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구국계몽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주요 간부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양기탁신채호박은식장지연임치정옥관빈장도빈 등 대한

매일신보사와 황성신문사 등에 종사하던 언론계 인사들.

전덕기이동녕윤치호이상재이준 등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

그리고 기독청년회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

안창호김구최광옥 등 학교 설립자와 교육계 인사들.

이종호안태국이승훈 등 서북지방의 상공업에 종사하던 실업계

인사들.

이동휘이갑유동열노백린조성환김희선 등 무관 출신자들.

 

여기서 나타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은 모두 이후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축 인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앞에서 서술한 김구와 이동휘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당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사상적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