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초기 러시아 정교회와 공산주의의 유입

heojohn 2020. 3. 11. 21:43

 

 

1) 러시아 한민족 사회의 형성과 정교회의 선교

 

만주와 한반도에 인접해 있는 러시아 극동 연해주 지역은 불을 사용하지 못하고 동굴에 살던 고대 인류의 유적까지 발굴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 기록에 의하면,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로 이어지는 고대 한민족이 다른 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은 발해가 멸망된 이후 중국 영토였으나, 러시아가 1860년에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것이다. 러시아는 1870년대에는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까지 지배하였다. 그런데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이후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이곳으로 새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이주민들은 함경도 지방에서 계속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로 인한 흉년을 피해 들어온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였지만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 이렇게 고난을 겪고 있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이 지역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피난처였다. 그리하여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뽀시엣 지방 찌진헤에 1864(135채의 집이 있는) 조선인 마을이 최초로 생겨났고 이후 이주민들이 쇄도했다.

 

한편 러시아정교회 신성종무원에서는 1856년 러시아 극동 아무르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 체류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허용했었고, 조선 이주민들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 결과 1865년 노브고르드 항구 인근에 살던 한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민족 이주민들에 대한 러시아정교회 선교는 처음에는 매우 천천히 이루어졌다. “한국 사람들의 종교적 필요를 위해 1860년대 니즈니 양치헤에 정교회 예배당이 지어졌다.” 그런데 한반도에 기근이 심했던 1869년부터 이주민들이 러시아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주민들이 곳곳에서 늘어나는 가운데 러시아정교회 두 번째 예배당이 1872년에 최초의 한민족 이주 마을인 뽀시엣 찌진헤에 세워졌다. 이후부터 한민족 이주민들은 스스로 정교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교회와 선교사들의 처소와 학교를 짓는 데 물질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이렇게 해서 한민족 이주민 마을에서는 러시아 사람들의 거주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좋은 학교 건물이 세워졌다. 1871년부터 한민족 이주민 마을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사역한 요한 곰자꼬프 사제의 보고에 의하면, “특히 젊은이들은 스스로 세례를 받기 원해서 나왔고, 노인들은 본인이 세례 받는 것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자식들이 세례 받는 것은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러시아 정부는 1884725일까지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에게는 영주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1894년에는 이들에게 러시아 국민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신문 아무르 소식1909년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지 15-20년 후면 기독교 국가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 본다.” 이러한 예측은 일제의 침략만 없었다면 성공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일제통치를 거부하는 한민족 수만 명이 러시아 극동지역에 살기를 택해서 이주민이 급증했다. 러시아 정교회가 한민족과 특별히 교제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1911년부터 잡지 쁘라보슬라비예가 한국어로 500부씩 정기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요가 많아서 500부로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형편상 더 많이 찍어낼 수는 없었다. 이 당시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하바롭스크 지역의 한국인들이 러시아 국적을 얻기 위해 청원서를 냈다는 신문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1913년 한민족 이주민 노동자들과 농부들에 관련하여 쁘라보슬라브늬 블라고베스뜨닉(정교회 종소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던 황폐한 땅이 부지런한 한국 사람들의 굳은 살 박힌 손 덕분에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 결과적으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러시아 시민이 되었다.” 이러한 기사는 선교사의 관점에서도 보도되고 있다. “극동의 여러 민족 중 한국 사람들이 가장 빨리 러시아화되어 가고 있다. 흔쾌히 러시아 시민이 되며.......이런 과정은 일본의 영향이 커지면서 한국의 기독교화와 비례했다.” 이와 같이 러시아 극동지역 사회에서 한민족 이주민들은 성공적인 정착을 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열렬한 신자가 되고 있었다.

 

2) 러시아정교회 서울선교회

 

러시아 슬라브 민족에게 정교회가 국교로 된 것은 키에프공국 블라디미르1(Vladimir I, 980-1054)에 의해서였다. 그의 할머니 올가(Queen Olga)955년에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나, 그의 아버지 스비아토슬라브(Sviatoslav)는 오히려 이슬람으로 기울었다. 이런 혼란을 겪었던 블라디미르1세는 즉위하자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에서 참 종교를 찾아주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알아보았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대성당에서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는 보고를 받고, 콘스탄티노플 동방정교회를 참 종교로 받아들였다. 그는 왕의 종교가 곧 국교가 되는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이로부터 동방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로 굳어졌다. 러시아정교회는 1589년에 총대주교좌를 설립하여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1721년 로마노프 왕조의 표토르대제(1672-1725, 재위 1682-1725)는 러시아정교회를 견제하기 위하여 교회법을 제정하고 황제의 관할 아래 신성종무원(Holy Governing Synod)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종교가 점차 황제의 관심에서 밀려나면서 러시아정교회는 실질적으로 신성종무원에 예속된 하부기관이 되었다.

러시아정교회의 서울선교회는 1900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발단은 1889년 서울 주재 러시아 외교사절단 공무원 니꼴라인 슈이스끼(Nikolain Shuiskii) 가 당시 러시아정교회 북경 주교에게 서울선교회 설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는 편지를 보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이 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이권에 큰 의미가 있으며, 아시아의 강국인 중국과 일본이 더 강해지면서 그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인 영향력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화적인 영향력을 끼칠 방법으로 러시아정교회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서 러시아 종교와 문화의 전파 외에도 당시 이미 조선에서 활발한 선교를 펼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제시하고 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불란서 신부들이 선교하고 있었으며, 개신교는 미국과 영국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정교회의 조선 선교의 제안 동기는 외교적인 계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의 제안은 러시아 정부에 보고되었으나 묵살되고 있다가 청일전쟁(1894-1895) 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 2.-1897. 2.) 시기에 러시아 공사 폴랴노프스키(Z. M. Polyanovskii)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그는 서울에 러시아정교회를 세울 필요성을 긴급히 호소했고, 러시아 외무부와 금융부가 협력하여 황제의 승인을 얻어냈다. 러시아 신성종무원은 이런 사실을 니꼴라이 2세 황제의 허락 아래 모든 해외 선교회의 계획에 따라 서울에서 러시아정교회 선교회를 열도록 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97). 러시아정교회는 암브로시 장수도사제 등 3명으로 구성된 첫 번째 선교회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일본의 정치적 방해 공작으로 러시아 국경에서 발이 묶였다. 2년이 지난 1899년에 겨우 부사제 1명만이 1차로 서울에 도착했다. 새로 보충된 장수도사제 호리산프 쉐뜨꼽스키 등 2명이 2차로 서울에 도착한 것이 1900년이었고, 이들에 의하여 어느 러시아 외교관의 집에서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2차선교회는 덕수궁 옆 러시아 영사관에 붙은 땅을 매입하였다. 원래 이 땅은 고종이 아관파천 기간 중에 러시아 대사관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하여 기증한 것이었으나 러시아 황제가 돈을 보내 매입대금을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서울선교회는 이 땅에 니콜라스 성당을 짓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6년에 7명으로 구성된 3차 선교회가 서울에 들어와서 사역을 재개했다. 이 선교회의 지도자는 장수도사제 빠벨 이바놉스끼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 폐허가 된 니콜라스 성당을 다시 세웠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울에 오기 전에 교회를 세우려던 계획을 1908년에 완성하는 일도 했다. 러시아정교회 서울선교회는 행정적으로 1897-1908년 사이에는 페테르부르크 대주교 관할이었고,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장주교 관할에 소속되었다. 빠벨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시기(1910)를 겪으면서 1912년까지 러시아 정교회 서울선교회장으로 일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 교구로 옮겨갔다. 그의 후임 선교회장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3번이나 바뀌는 동안에 191710월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공산당 혁명이 일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 고위 사제직을 맡고 있던 빠벨은 혁명 후인 19181월 새로 임명된 서울 선교회장 페오도시 빼레발롭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한다는 법령으로 서울선교회에 후원금을 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교회와 학교 건물을 세를 놓아서 비용에 쓰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이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은 집권하자마자 3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 곧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 편지에서 드러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장주교 관할에 속해 있던 서울선교회는 1923년에 일본정교회 세르기 찌호미롭 장주교의 관할에 넘겨졌다. 페오도시는 일본의 세르기 장주교에 의해 서울선교회장으로 재임명되었다. 페오도시는 1930년에 서울선교회장직을 떠나 동경에서 머물다가 1933년에 죽었다. 페오도시 이후에는 세르기 장주교가 직접 서울선교회를 운영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는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 세르기는 일본정교회를 떠나야 했고 서울선교회장도 볼리까르쁘 쁘리마끄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세르기는 일본에서 사역을 계속하다가 1945년 일본 패망을 며칠 앞두고 죽었다. 해방이 되자 러시아정교회 서울선교회는 일본정교회 관할에서 벗어나서 러시아정교회 관할로 복귀했으나, 공산주의 국가에 있는 러시아정교회와는 더 이상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러시아정교회 서울선교회는 이제 교회 조직상 소속 교구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볼리까르쁘는 공산주의 러시아와 정치적 관계를 끊고 종교적으로 러시아정교회 서울선교회를 지키려고 버티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96월에 그는 남북 경계선인 38선으로 끌려가서 러시아의 동맹국가인 북한으로 추방되었다. 결국 러시아정교회 서울선교회는 이렇게 하여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에서 러시아정교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3) 공산당 정부에 의한 러시아정교회의 수난 사례

 

공산당 정부에 의하여 기독교가 탄압을 당했던 첫 사례는 러시아정교회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러시아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에 성공한 직후 국교였던 러시아정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 1721년 설립한 신성종무원을 먼저 해체했다. 러시아정교회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589년에 설치되었다가 신성종무원 설립으로 폐지되었던 총대주교좌를 부활하고, 티혼(Tikhon)을 그 자리에 선출했다. 그러나 공산당 정부는 티혼 총대주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공산주의 혁명의 과정에서 러시아정교회는 당연히 무신론 공산주의 세력에 반대해야 할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변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말았다. 러시아제국에서 유일한 국가종교로서 국민 대부분을 신자로 포용하고 있던 러시아정교회였지만, 수장인 황제가 퇴위하자 그것은 어쩔 줄을 모르는 오합지졸의 집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1917년 니콜라이2세 황제가 퇴위하고 2월혁명에 의한 멘셰비키의 임시정부 수립, 10월혁명에 의한 볼셰비키 집권, 그리고 1921년까지의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혁명을 반대하는 백군과 극동지역의 일본군과 국제 연합군 등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정교회가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러시아 역사와 기독교의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을 살펴보면 러시아정교회는 러시아 제국시대에는 신성종무원에 의해 관리되는 하나의 국가기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수장인 황제가 갑자기 물러나고 공산주의 혁명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동안 황제의 시녀 역할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정교회 지도부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정교회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서 부귀를 얻고 그를 섬겼기 때문이다. 1922년 공산당 정부는 갱신교회(Renovated Church)를 만들어 러시아정교회를 무력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신자들은 성서 대신에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교재들을 읽어야 했고, 러시아 공산당의 무신론 이념은 이제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조차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종교의 교의가 되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연구소가 레닌에게 바친 헌사를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 전체의 발전과정에서 새로운 단계의 획을 그은 레닌의 천재적인 노작들은 과학으로서의 철학의 역사, 미학, 윤리학, 무신론의 발전에서 새롭고 보다 높은 단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스탈린은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7년 만에 사망하자(1924), 강력한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를 레닌의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물리치고 소비에트연방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권력투쟁 과정에서 처음에는 철저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추종자로 행세했으나, 정권을 획득하자 곧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총대주교 티혼이 죽자(1925) 공산당 정부는 후임 총대주교 선출을 금지하고 갱신교회로 하여금 신성종무원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수도 대주교 세르기우스(Sergius)1927년 교회를 존속시키기 위해 정부와 타협하고, 일체의 정부 비판을 중단하는 충성맹세를 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세르기우스의 굴복에 반발해서 러시아정교회를 떠났다.

스탈린은 과학적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유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러시아정교회를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활용했다. 그는 1930년대에 악명 높은 스탈린 대탄압을 자행하면서 공산당 내부의 적은 물론 의심스러운 일반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암살하거나 처형하고 또는 반혁명분자로 몰아 강제수용소나 유배지에서 강제노역에 동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심각한 탄압을 받으면서 신자들이 바친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1943년 세계 제2차 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자 징병을 위해서는 친종교 정책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러시아정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설정했다. 신자들은 러시아정교회로 되돌아왔고 이 바람에 갱신교회는 몰락했다. 그러나 종전 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체제에 접어들면서 1948년 러시아정교회 지도자 회의는 스탈린 정부의 정책에 굴복하여 로마가톨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를 비난하는 입장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정교회는 스탈린의 정책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자(1953)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1971)가 후임자로 집권했다. 그는 스탈린을 비판했으나 러시아정교회에 대해서는 폐기를 공언하면서 새로운 탄압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서구와 평화공존 정책으로 전환하면서부터 러시아정교회로 하여금 세계교회협의회의 가입을 허용했다(1961).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1962)에 러시아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도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1964) 브레즈네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구시대로 돌아가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가 성직자를 지방 관료의 지배 아래에 두는 교구법령을 추진하자(1965), 러시아정교회는 이를 반대하면서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다시 긴 암흑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브레즈네프는 1968년 체코의 인간의 얼굴을 가진 공산주의 운동’,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으로 서방세계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면서도 미국과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등 일련의 양면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중국과는 국경문제로 무력충돌까지 일으켰고, 아프카니스탄 침공(1979)을 계기로 서방과는 다시 냉전 상태로 돌아갔다. 그는 폴란드의 자유화운동을 진압하였으며(1980), 죽어서야 권좌에서 내려왔다(1982). 안드로포프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1년 만에 죽고, 그의 뒤를 체르넨코가 물려받았으나 그도 역시 1년 만에 죽었다. 두 사람 모두 최고 권력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고령이었다.

1985년 젊은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1931- )가 정권을 잡으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공산당 독재체제를 철폐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프카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했고, 중국과도 화해했다. 1990년 대통령제가 도입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에 공산당에 의한 고르바초프 축출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이 여파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공식 폐기되었다. 그리고 이 해 연말 러시아 사회주의소비에트연방(USSR)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러시아연방공화국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러시아정교회는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