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개혁신학이 과학발전에 미친 영향

heojohn 2017. 11. 6. 06:48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1. 서론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은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95개조의 항의문 발표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1543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한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두 사람에 의하여 종교와 과학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중세에서는, 과학은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 불렸으며, 그 역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설명하는 일에 봉사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렇게 동시대에 일어난 두 개의 혁명을 통해 로마가톨릭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무너지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비로소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혁명의 결과는 언제나 사회적 힘의 역전을 가져오는 동시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혁명은 처음에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과학은 점점 모든 종교를 상대로 대립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말하자면 종교개혁 시대를 지나고 나자 과학은 로마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를 상대로 해서도 대적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과학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과학이 인간사회의 모든 분야를 압도적으로 선도하고 있다. 현대과학은 종교의 시녀가 아니라, 대담하게 종교 무용론(無用論)까지 주장하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은 이제 종교의 진영을 진멸하려는 적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동시대에 이루어진 이후, 이 두 개 분야의 발전에 관련해서는 많은 가설이 등장하고 있다. 스피츠(Lewis W. Spits)종교개혁사에서 종교개혁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과학과 기술이 유독 서양의 개신교 국가에서만 두드러지게 발전했다는 특징적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 (Maximilian Weber, 1864-1920)1905금욕주의적 칼빈주의는 과학적 방법에 필수적인 요소인 경험주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던 말을 인용하여, 과학자들 가운데서 칼빈(John Calvin, 1509-1564)파 신자들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한다. 맥그라스(Alister McGrath) 또한 그의 종교개혁사상에서 현대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던 많은 요인들 가운데 한 가지는 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인 것이며, 그 발원지는 존 칼빈에게로 돌려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종교개혁이 현대과학의 발전과 어떤 특별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렇게 제기되는 의문은 곧 이 두 혁명이 일어났던 16세기의 신학과 과학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과학은 루터와 칼빈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의 열풍이 지나간 다음 세기에서도 아직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현대적 개념의 과학을 살펴보자면, 이러한 시대에서는 철학의 부분을 분리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과거에서부터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어떻게 신의 존재를 그들의 학문에서 몰아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앞서의 스피츠의 주장이 맞는 것이라면, 현대과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종교, 특히 칼빈의 개신교는 치명적인 적을 키운 꼴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된 과정에서 과학과 신학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시대를 간략하게 먼저 살펴보고, 그 뒤를 이어 17세기 및 18세기까지의 발전상황에 한정하여 논술하기로 한다.

 

 

2. 16세기의 종교와 과학의 혁명

 

2.1. 루터의 종교개혁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시대, 16세기의 문턱을 넘어서는 무렵에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발흥하여 새로운 기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대의 원전을 읽으면서 그 원전의 의미, 곧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정신을 발견한 결과는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번역본의 오류를 제거하는 운동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흔히 후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인문주의 운동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으며, 모든 분야에 확산되고 있었다. 로마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중세의 암흑의 시대는 이렇게 새로운 시대의 여명에 물러나고 있었다. 루터 역시 로마 가톨릭의 사제이며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보면,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오류에 찬 것들이었으며,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에라스무스 역시 개혁주의자였으나, 그의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개혁 추진은 완고한 성직자들의 벽에 가로 막혀 작은 메아리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목숨을 건 루터의 전면적 개혁투쟁은 이런 시대의 조류에 부합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신을 소유한 인문주의자들의 지지와 협력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신학과 교회를 만드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에 의한 개혁세력의 확산과 뒤를 이어 개혁과업의 완성이라는 칼빈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2.2.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과학혁명

 

한편 과학의 진영에서는-당시로서는 과학이 아직 로마가톨릭 신학의 시녀로서 독립된 분야가 아니었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확고하게 지지를 받고 있었던 천동설의 오류를 발견하고 있었다. 성당의 참사회원이기도 한 그는 교리에 반하는 그의 새로운 이론들을 즉시 발표하지는 않았다. 특히 신학교육까지 받았던 그는 교리에 반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단 혐의를 씌워 화형에 처할 수도 있는 당시의 종교재판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이론을 필사본으로 간략하게 만든 짧은 논문은 그의 친지들에게 회람되면서 지지를 얻기 시작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연구를 그의 생애 동안 계속 발전시켰으나, 신중한 그는 교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가 죽을 무렵에 이르러서야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을 로마교황 바울 3세에게 헌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교회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적 오류를 깨뜨리는 과학혁명의 포성이자, 현대과학의 시작을 알리는 진리의 종소리였다. 코페르니쿠스를 혁명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한 권의 책에 지동설 이론이 혁명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이로써 인류의 지적 사고에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가들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인 루터와 코페르니쿠스를 나란히 놓고, 한 사람은 종교개혁자로서, 다른 한 사람은 근대과학의 개척자로서 다 같이 높이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두 사람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뒤에 생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에서 나온 개혁적 업적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죽던 1543년에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64)가 출판한 인간 신체의 구조였다.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는 자기가 직접 해부실험을 하여 2세기 이래 절대시되어오던 갈렌(Claudius Galen 또는 Galenus, 129-199)의 인체의 사기질(四氣質) 이론을 뒤집어엎었다. 그는 이로써 일찍이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가 인류에게 제시한 숭고한 의학정신을 올바로 적용할 수 있게 했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로서는 금지된 인체해부를 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의 판결에 의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항해 도중에 죽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는 생전에 파리대학에서 함께 의학을 공부했으며, 그리스도교의 회복이라는 책을 쓰고,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처형된 친구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53)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어쨌든 이러한 인간적 또는 학문적 굴절과 연결들이 있었으나, 이들의 공헌으로 인하여 종교계와 과학계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들이 이룩한 개혁적 업적이 과학을 시녀로 거느렸던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에서 오류의 벽을 허물어버림으로써 후대의 신학과 과학에 얼마나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로마가톨릭교리의 오류를 발견하고 개혁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확실한 검증의 방법은 이성적 수학의 발전에 주로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과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겠다.

 

 

2.3.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과학에 대한 지식과 태도

 

  

오직 성경만으로를 주창하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자연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오직 인간에게만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주셨다(1: 28). 이러한 개혁자들의 자연법 사상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권 보유는, 과학자들에게 자연의 법칙 연구에 더욱 열의를 발휘함에 필요한 전제들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혁자들은 하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이성적인 법을 주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과학이론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경우에는, “‘진리의 이중성(double theory of truth)’에 의거해서가 아니고, 복수화법의 이론 또는 신적, 자연적, 이 두 가지 차원의 지식들이 있다는 이론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역시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과학적 이론들을 반론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때에 코페르니쿠스의 필사본에 대한 소문은 비텐베르크의 루터파에게도 전해졌다. 1539년 봄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수학교수 레티쿠스(Georg Rheticus)는 직접 코페르니쿠스를 방문하였다. 이 결과 지동설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레티쿠스는 돌아와서 멜랑히톤(Philip Melanchiton, 1497-1560)을 통해 이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었으며, 가명으로 된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의 서문을 얻어 천체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와 같이 루터 진영에서 지동설을 지지하는 신학자 또는 철학자들도 있었으나, 루터 자신은 지동설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먼저 누군가 달과 해가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는 새로운 점성가에 대해 언급했다고 완곡하게 화제의 서두를 떼고서는, “점성학을 거꾸로 세우고자 하는 이 자에 의해 아무리 점성학계가 혼란에 빠졌다고 해도 나는 성경을 믿는 바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령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루터를 따르는 멜랑히톤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에 등장한 칼빈은 코페르니쿠스와 지동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시편 931절을 이 땅은 움직이지 않도록 굳건히 세워졌다는 말로 인용하고는 칼빈이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에게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주었는가!’ 하고 외쳤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칼빈이 과학을 모르는 자라고 모욕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신론 철학자 러셀의 고의적인 오류라고 보아야겠다. 칼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친히 행하신 창조물(사역들, operibus)에 너무도 정확하고 뚜렷하게 새겨놓으셨기 때문에 무식하고 우둔한 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모른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나님이 전체 창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날마다 계시하신다고도 했다. 칼빈은 또 우주와 자연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극장”, “궁전”, “거울무언(無言)의 교사들과 같은 표현을 쓰면서, “하늘과 땅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를 입증해주는 무수한 증거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고 했다. 이런 말들은 칼빈이 신자들에게 날마다 성경뿐만 아니라, 우주와 자연을 연구해보라고 권면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어서 이러한 것들은 천문학이나 의학, 그리고 모든 자연과학들이 좀 더 세밀하게 연구해보고 싶은 대상들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아무 것도 배운 바 없고 무식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바라보면서 증거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버릴 수는 없는 것들이다고도 했다. 칼빈은 여기서 더 나아가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거나 그것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 그리고 간격을 측정하는 것, 그리고 그 특성 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보다 향상된 기술과 정밀한 도구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이렇게 천문학에 대해 언급한 말들을 보면, 칼빈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알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러셀이 말하는 것처럼 비난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칼빈은 오히려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관찰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기독교 강요를 바탕으로 하는 개혁신학이 과학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칼빈은 앞서 진술한 갈렌의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베살리우스의 혈류 순환이론이 기독교 강요최종판을 출판했던 1543년에 발표된 사실을 모르고 있는 정황을 보여주는 진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인체구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부적인 통일성, 아름다움, 용도 등을 자세히 알려면 무어보다도 갈레누스(Galenus)의 것과 같은 고도의 정확성을 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칼빈이 여기서 하는 말을 의미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그가 자연과학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과학에 대한 기술과 지식의 증진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2.4. 16세기 수학의 발전

 

 

16세기 과학혁명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요소인 수학의 발전에 대해 살펴보지 않으면, 과학의 발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의 오류를 발견한 것도 지구 위도의 측정과 천문의 관측 결과를 수학적으로 조정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는 이미 1510년경에 지동설 이론을 거의 완성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수학원리를 이용해 천동설에서 이용된 원과 주전원 이론들의 오류를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탈리아인에 의한 3차방정식의 해법과 대수학 이론의 발전은 근대 수학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니콜로 타르타글리아(Niccolo Tartaglia, 1500-37)는 최초로 3차방정식을 풀어내었다. 이것은 이때까지 뒤처져 있던 서양의 수학을 인도와 이슬람보다 앞선 수준으로 이끄는 업적이었다. 또한 지롤라모 카르디노(Girolamo Cardano, 1501-76)는 대수학의 종합이론을 만들어내었다. 한편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니피에르(John Nipier, 1550-1617)에 의해 삼각함수가 발견되었다. 이런 수학의 발전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것이 17세기에 들어가서 자연현상의 설명과 이해의 방법이 이제까지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이유이다.

 

 

3. 17세기의 과학발전

 

3.1. 17세기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과학적 개념

 

 

그동안 개혁교회의 세력이 확산되었지만, 신앙의 열의는 대개 일상적인 생활의 수준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그 대신에 철학의 발전은 눈부시게 진전되었다. 이런 배경에는 철학적 신학자 또는 신학적 철학자라고 불러도 좋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시대적 공헌 또는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현대의 과학 발전에 필수요소인 정밀한 수학적 응용 방법을 활용하였고,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과학적 개념과 방법들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1620신논리학을 출판하여 이론과 실제의 결합을 강조하고 모든 이론은 체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다시 새롭게 썼다고 하는 이 책에서, 진리는 귀납적으로 확증되어야 하며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실험과 관찰이 불가능한 종교의 문제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천문학의 발전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자연의 법칙을 알게 되면서 힘을 얻게 된 과학자들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진리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이들은 점차 불가지론 또는 이신론으로 기울어졌으며,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베이컨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나, 그의 신논리학이 나온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 업다.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그의 명제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1637년에 방법론서설을 출판하여 자신의 직관만이 확실한 지식의 통로임을 주장했다. 이 책은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과학상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 및 이 방법의 시도로서 광학, 기상학, 기하학을 붙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과 연장(延長)을 본질로 하는 물질을 구분함으로써, 이원론적 체계를 펼쳤다. 그에게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신론자는 아니었으나, 기독교적 신에 대해서는 회의주의자였으며, 이신론적 자연주의로 기울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물체가 역학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자동기계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동물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육체는 송과선(松果腺)에서 자유의지와 정신에 의해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두 실체의 통일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1649정념론에서는 인간의 육체적 작용은 대부분 물질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적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논리적 모순이 잔존하고 있기도 하나, 이제까지 신의 섭리에 의해 우주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점차적으로 축소 또는 제거하는 과학사상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은 프랑스의 요절한 천재 수학자로서 근대 확률이론을 창시했고, 압력에 관한 파스칼의 원리를 체계화했다. 그는명상록에서, 인간은 위대함과 비천함이 뒤섞인 혼합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진리와 최고선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곳에 도달할 수는 없는 존재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에게 종교는 철학이나 세속주의가 설명하지 못하는 이런 모순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론자에게 제안한 그의 유명한 내기 이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믿어도 손해될 것이 별로 없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삶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의 존재를 믿는 내기에서, 믿는 것이 안전하다는 논증이다. 그는 또 인간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에게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알리러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이신 신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유대교로부터 파문되고 암살 위협까지 받았던 유인이었다. 네델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 유대교 랍비가 되려고 공부했으나, 점차 유대교리에 배치되는 범신론적인 신관념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과 정신과 물질의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한 데카르트로부터 유물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요소를 받아들였다. 파르메니데스의 형식과 같은 그의 철학체계에서 신은 곧 자연이며, 하나의 실체로서만 존재한다. 그는 결정론자로서 모든 사물은 필연적인 논리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으며, 우연은 물론 정신계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신은 모든 속성을 소유한 무한자(無限者)이다. 그러므로 신에게는 선과 악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그의 형이상학은 범신론을 넘어 심지어는 무신론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깎는 일을 한 탓으로 진폐증에 걸려 일찍 죽고 말았다. 그는 그의 윤리학에서 어떠한 덕행(德行)도 자기를 보존하려는 노력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명제와 이런 류()의 주장에 대해 연역적 방법에 의한 엄격한 증명을 하고 있다. 그가 이 시대의 철학자로서 특히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현대의 심리학 또는 생물학과 물리학에서는 물론 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런 것들에 대해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존 로크(John Locks, 1632-1704)는 의사로서 라이프니츠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베이컨의 경험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인간오성론은 명예혁명 직후 1690년에 출판되어, 인간의 인식은 외부로부터 감관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결국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지식을 얻게 된다는 그의 이론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적용되어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이론은 더 나아가 국가의 성립은 국민의 합의에 기초한다는 사회계약설로 발전하였다.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에 따라 개인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정부는 책임을 가진 계약의 당사자로서 잘못하면 물러나야 된다. 이런 사상은 후에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근대적 정치사상으로 발전하는 토양이 된다. 이리하여 로크는 1651년 무신론적 경험주의자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레비아단(Leviathan)에서 주장한 무제한적 절대권력을 가진 정부의 출현을 저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신론적 경험주의가 결국 무신론적 과학의 싹을 키워내고 있음을 홉스에게서 보게 된다. 그는 신이 없는 자연 상태에서는 사회계약에 의한 절대 권력의 출현이 인간의 질서 있는 생존을 보장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독실한 루터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뉘른베르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에 갔다. 여기서 그는 가톨릭 논증을 쓰고 개종하여 교회재통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를 지원하던 후원자를 잃자, 그는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는 그의 학문에 몰두하고자 했으나, 생계비를 벌어야 했으므로 곧 여기저기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학과 철학의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스피노자를 비밀리에 만나 그의 철학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수학에서 미적분학을 세웠고, 2진법 체계를 세워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실제로 자신이 계산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철학자이지만, 신학에 관련해서도 회의주의자인 데카르트주의에 반대하여, 신이 사물의 궁극적 근원임을 증명하려는 궁극적 근원에 관하여를 저술했고, 자연과 은총의 예정조화사상을 담은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와 신의 정의(正義)에 관한 변신론을 발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1714년 그의 철학을 집대성한 단자론을 발표했다. 그의 단자(monad)는 순수한 에너지의 단위로 더 이상 분할될 수 없으며, 서로 다르고, 독립되어 있고, 불멸한다. 신의 창조물은 모두 이러한 단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단자에는 계층이 있다. 인간은 단자의 최상위에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엄밀한 수학적 논리를 추구하는 그의 특성에서 나온 결과이며, 그래서 그는 오히려 근대과학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수학적 논리학의 개척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대에 이렇게 등장한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는 과학적 방법으로써 다음 세기의 과학 발전에 다 같이 기여하게 된다

 

 

3.2. 17세기의 주요 과학자들

 

 

스피츠는 이 시대의 유럽의 과학자들을 조사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1640년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이 과학자들 사이에 지도적 위치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과학자들 중에서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09)는 케플러의 망원경을 스스로 개량하여 보다 정밀한 천문관측을 실시하면서 17세기 과학의 문을 열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충실한 신자였으며, 당시 교황 우르바노 8세와는 어릴 적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1632년에 출판한 두 가지 중요한 세계관에 관한 대화에서 지동설에 대한 지지와 천동설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나, 로마교황청의 종교재판의 결정에 따라 철회해야 했으며, 가택연금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용기 있게 과학적 진리를 위해 로마교황청과 싸우지 못했으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과 함께 천문학과 수학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중력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케플러의 행성의 타원궤도운행 이론을 무시하고 원운동을 고집한 것은 그의 한계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그는 물체의 낙하운동을 실험하여 등속도의 원리를 발견하는 등, 관측에 의한 실증적 연구방법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역학이론에 초석을 제공했으며, 우주는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는 견해를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가 우주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있다는 칼빈의 말에 연관되어서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겠다. 즉 우주에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우주를 놓고 보면, 결국 과학과 신학은 대화가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천문학자로서 갈릴레오는 성경과 자연을 동일한 하나님이 다른 언어로 지으신 두 개의 책이라고 보았다. 다만 읽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루터교 성직자가 되고자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수학교사가 된 것을 기화로 과학자로 변신하였다. 그는 망원경을 발명하여 갈릴레오의 연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천문학을 연구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하여 매장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개요를 써서 다시 살려냈고, 유명한 행성운동의 3법칙을 발표했다. 한편으로 윌리암 하아비(William Harvey, 1578-1657)1628년에 먼저 인체의 동맥과 정맥을 발견하여 혈류의 순환이론을 보다 발전시킨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를 출판하였다. 레벤훅(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은 현미경을 이용하여 박테리아, 혈구, 정자 등을 발견하였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의 과학자이며 영국인으로서 열렬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91)을 빼놓을 수 없다. 보일은 기체의 양과 온도가 일정하면, 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실험으로 입증해보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비판하고, 물질을 연구하여 입자로 구성된 것이라고 봄으로써 화학을 물리학에서 독립적인 분야로 개척했다. 1690년에는 자연에 대한 연구가 주요한 종교적 의무임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의 거장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진술했던 칼빈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연이 태초에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견해에서 더 나아갔다. 그것은 자연이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서, 이런 사실은 과학에 의해 탐구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형태는 없으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보다는 더 귀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큰 열의를 가졌으며, “물리적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이들이 그들의 업적을 자연의 창조자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하기를 기원한다고 유언했다.

뉴턴(Sir Issac Newton, 1642-1717)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는 1687년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고전역학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였고, 이 책은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책에서 뉴턴은 역학(중력 또는 만유인력)3법칙을 진술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체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에게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였으며, 수학의 원리로 이해되는 자연 철학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그의 철학적 방법은 이때까지 자연철학에서 전제되었던 물질론의 영향에서 벗어나 근대과학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는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인 케플러의 제3법칙의 오류를 해결하였다. 뉴턴의 이론은 법칙이 지배하는 현대의 기계론적 자연과학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수학적으로는, 라이프니츠를 상대로 미적분학의 개척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논쟁했다. 그렇지만, 그는 열렬한 개신교도로서 영국의 왕으로서는 마지막 가톨릭 신자였던 제임스 2(James II, 1633-1701, 재위 1685~88)의 친 가톨릭정책에 반기를 들어 그를 퇴위시킨 명예혁명회의 멤버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유명한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로부터 비길 데 없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밤에 자연과 자연의 법이 밤에 숨겨져 있었네. 하나님이 뉴턴이 있으라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네.” 이것은 명백하게 창세기 13절의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신 말을 뉴턴에게 빗댄 것이다. 그러나 이 빛은 과학에만 비추는 것이며, 신학에는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따르는 역사가 증명하게 된다.

 

  

3.3. 17세기 과학 발전에 대한 평가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1640년대를 전후로 구분해서 그 이전에는 위대한 과학자 대부분이 로마가톨릭 사제 또는 신자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프로테스탄트 과학자들이 훨씬 많이 배출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초기에, 과학자들의 자연에 대한 탐구열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발전하고 배우고자 한 경건한 이들의 신앙적 열정이 숨어 있었다는 스피츠의 평가에 동의할 만하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이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바라보면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깨닫기를 권면했던 의도는 종교개혁 시대에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열풍이 식어가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기계주의적 자연과학이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에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서 나타난 현상을 보면, 종교개혁자 칼빈의 권면은 점점 퇴색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풍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 1872.-1970)서양철학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는 17세기 과학의 결과를 언급하면서, 첫째는 모든 물활론(物活論)의 흔적이 물리학의 법칙으로부터 거의 다 제거되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신론자인 러셀의 이 말은 그동안 인류의 사고방식에서, 특히 과학계 안에서 무신론적 주장의 장애요소가 되었던 것이 물활론이었음을 암시한다. 물활론에서 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기준은 물질의 동인(動因)이 내재적 또는 능동적이냐, 아니면 외재적 또는 수동적이냐 하는 것이다. 러셀에 의하면,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자연과 신의 관계를 분리하여 자연현상은 물질의 내재적 동인에 있다고 주장했던 에피큐로스(Epicuros, B.C. 341-270)학파의 견해조차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에피큐로스의 때로부터 자연의 연구자에게서 점차 떠밀려났던 신은, 이제는 그가 창조한 우주에서 인간에 의해 아예 발 디딜 땅조차 빼앗기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18세기 과학의 발전에서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4. 18세기 유럽 사회와 과학의 발전

 

4.1. 계몽주의 등장의 사회적 배경

 

18세기의 유럽은 계몽주의에 의해 지배된 시기였다. 계몽주의 사상은 뚜렷하게 통일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의 이성과 자연을 근간으로 하는 이신론적 관점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항해술과 지리적 발견에 의해 중국에서 유입된 이신론적 동양사상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독립한 네덜란드는 스피노자와 이곳에 와서 살게 된 데카르트에 의해 계몽주의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다. 그들의 저술은 이곳에서 인쇄되어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고, 신학의 지배가 아닌 인간의 이성에 의한 계몽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의 주역은 자연적 체계를 발견하는 근대과학이었다. 과학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지배력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점점 미신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믿고 있었다. 영국이 이러한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1688년 영국에서 위대한 근대과학의 개척자 뉴턴이 참가한 명예혁명의 성공은 왕과 종교의 갈등을 영구히 종식하고, 18세기 영국에서 두드러진 근대과학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명예혁명은 1634년 헨리 8세에 의한 국교회로의 전환 이후 몇 번이나 복고운동을 시도했던 로마가톨릭 세력을 완전히 꺾고 개신교의 승리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완전히 통일을 이룬 바탕위에서 성취한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은 근대과학의 발전을 위한 견고한 사회적 토대를 구축하면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이14(Louis XIV, 1638-1715, 재위 1643-1715)가 불과 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서 태양(the sun)과 같은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던 시기에 18세기를 맞았다. 그는 그동안 이웃 국가들을 침략하여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위그노로 불리는 개신교신자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가 1685년에 이르러서는 낭트칙령을 폐기함으로써 프랑스는 전통적인 로마가톨릭 국가로 되돌아갔다. 이로 인해 개신교 지식인들은 프랑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남아 있던 자들은 처형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영향으로 프랑스는 근대과학의 발전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합리주의의 계승자인 베일리(Pierre Bayle, 1647-1706)1682역사와 비판 사전을 펴냄으로써, 적어도 사상적으로는 프랑스에 계몽주의 시대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태양왕의 절대 권력의 치하에서 자연과 계시의 불일치 문제에 대해서는 이중의 진리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의 교회신학과 자연신학을 동등한 위치에 병렬하려는 제안에 지나지 않았으며, 세속에서 종교와 도덕성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단과 마녀를 처형할 수 있는 종교재판의 권위는 회의적인 것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계몽주의는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발전상을 보고 귀국한 볼테르(Volaire, 1694-1778)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그가 활약했던 백과사전(1751-65년 사이에 35권 편찬)를 거쳐 루소(Jean-Jacqes Lousseau, 1712-78)에게 계승되는 동안 계몽주의는 유물론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루소는 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될 수 없으나, 종교는 마음에 근거한다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나타냈으나, 교회는 이를 무신론으로 간주했다.

종교개혁의 성지 독일은 30년 전쟁(1613-1648)으로 국토뿐만 아니라, 종교마저 황폐화되었다. 독일은 이것들을 복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동안에 영국의 청교도 및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로부터 루터교에 전입된 칼빈주의적 영향은 필립 슈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에게 경건주의 운동을 불러왔고, 이것이 독일에서 계몽주의의 등장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적이지는 않았다. 독일에서의 계몽주의는 라이프니츠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의 철학에는 이신론적인 동양사상이 깔려 있으면서 계몽주의의 낙관성이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후대 독일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계승되어 계몽주의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헤렌후터의 창시자 진젠돌프(Nikolaus Ludwig Grafvon Zinzendorf, 1700-1760)가 죽은 후, 실천에 치우친 경건주의는 교리의 발전에는 무관심하였다. 이렇게 해서 독일에서의 경건주의는 계몽주의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사적인 사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 1776년에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일어났다. 1602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의 후예들과 그동안 유럽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계몽주의 시대의 와중에서 13개 주의 연방인 아메리카합중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이 나라는 애초에 계몽주의 사상을 반영한 독립선언서를 1776년에 발표하였고,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1787년 제헌의회에서는 이를 기초로 하여 헌법을 제정하였다. 독립선언서에는 자연법과 자연의 신의 법이 부여한 독립, 평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는 독립을 요구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사회계약설에서 주장하는 대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위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4.2. 18세기 서양사회의 동향

 

 

미합중국은 당시 유럽에서 발전한 계몽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건국하였으나,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는 특이하게도 신학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명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하는 선언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건국 후에는 대다수의 주에서 권리장전(bills of rights)을 발표하여 종교에 대한 국가의 불간섭, 그리고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에 종교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미합중국의 독립은 인류의 인권사상을 크게 부각시켰으며, 그것은 계몽주의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신대륙의 계몽주의가 이러한 형태로 발전한 이면에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에 의해 1734년부터 시작된 대각성운동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와 감리교파를 창설한 웨슬리 형제(John Wesley, 1703-91; 동생 Charles Wesley, 1707-88) 등 유럽에서 들어온 각 교파의 지도자들이 가세하여 교회의 세력이 크게 부흥하였기 때문이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독립선언서와 헌법의 초안을 만들었다. 미합중국은 종교의 자유를 1791년에 헌법에 반영했고, 새로운 세기의 첫해인 1801년에 그를 제3대 대통령으로 뽑아 세계 최강 문명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89년부터 계몽주의자들의 도전과 삼부회의에 의해 혁명전쟁을 겪은 프랑스에서는 교회는 물론 교황권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794년 국민의회에 의한 국민헌법은 루이 16세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가톨릭교회의 행정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사제를 지역구민의 선거로 선출하도록 했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18세기말의 시기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무신론 또는 이신론이 대세를 이끌었고 기독교는 몰락했다. 이와 유사한 계몽주의적 흐름은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위스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유럽 대륙의 불안정은 1799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등장을 맞아 19세기에 또 한 번의 격변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교회 제도의 영국은 개혁교파들이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탈출함으로써 비교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건너간 청교도들이 주도적으로 건국한 미합중국에서 감리교는 영국인 존 웨슬리에 의해 1784년에 설립되었으나, 정작 영국에서는 웨슬리가 국교도로서 죽고 4년이 지난 뒤인 1795년에야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독일에서는 경건주의가 계몽주의에 의해 대치된 이후, 관념론의 철학을 확립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계몽주의의 극복자이다. 그는 1755일반 자연사와 천계의 이론에서 과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성운설을 주장하는 등 과학에 관심을 보였으나, 1781년 계몽주의를 철저히 분석한 순수이성비판에서부터 그는 통속적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물 자체는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선포했다. 그는 1786년에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정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으므로 신과 내세는 존재하며, 영혼은 불멸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자연에서 형이상학적 이론의 근거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윤리에서 종교로 넘어가게 된다는 종교적 견해를 표명한다. 그렇다고 그가 교회에 다닌 것은 아니다. 그의 신은 그의 관념에 있으며 그에 따라서 종교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관념론에서 신의 실체는 인간의 도덕적 필요성에 의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신학적 측면에서 계몽주의를 마감한 것은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7-1834)가 익명으로 종교강론을 출간해서였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은 감정을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며, 종교는 관점들과 감정이고 무한한 것에 대한 의미와 음미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4.3. 과학의 발전에 의한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인간의 문화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발전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점점 발전된 도구를 발전시켜온 인류는 기계를 발명하기 시작했다. 도구를 조직화하면 기계가 된다. 1733년 영국의 케이(1704-610가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 자동북)을 발명하여 직포(織布) 기술을 대폭 개량한 결과는 섬유산업에 큰 이익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이는 곧 1770년대에 이르러 영국의 산업혁명에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이때까지는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었다. 동물은 주로 마차나 전차 또는 연자방아 등에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처음에는 사람과 동물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점차 자연에서 발견한 힘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학은 힘을 자연에서 발견한 것에 머물지 않고, 물리적인 힘을 발명하게 되었다. 먼저 화약이 발명되었지만, 이것은 일회적 폭발력을 이용하는 전쟁무기에 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동력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기계는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자들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기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과학은 이론의 실용화에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증기의 팽창력은 이론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그동안 연구되었던 과학적 지식을 실용적 기술로 변환시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국에서는 중상주의에 의한 화폐경제의 확장과 세계시장에서의 무역의 성공이 부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고 생산기술에 대한 의욕을 북돋우었다. 어떤 기술이든지 그것은 어떤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술이 기계에 적용되면 생산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1775년부터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29)는 이때까지 피스톤의 왕복운동에만 의존하던 증기기관을 개량하였다. 그는 행성치차(行星齒車)를 이용하여 증기의 힘을 회전운동력으로 바꾸는 원동기를 발명하였다. 와트의 원동기는 획기적으로 개량된 기계의 동력장치로서 양수기는 물론, 방적 및 직포 기계, 선박, 운수장비 등에도 활용되었다. 영국 산업혁명에서 한층 강력한 심장이 완성되어 기계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생산력을 엄청나게 개량한 새로운 기계의 발명은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석탄과 광물을 캐는 산업을 촉진했다. 이 모든 과학적 업적은 영국에서 성취되었으며, 유럽 대륙과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파급되었다.

 

4.4. 다음 세기를 위한 18세기 과학의 동향

 

다음 세기에서의 산업 동력은 증기기관에서 전기로 움직이는 기관으로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18세기말(1797)에 이르러 제너(Edward Jenner, 1749-1823)의 천연두에 대한 예방백신 실험 논문을 거부한 영국왕립협회의 오판에서 보듯이, 더 이상 영국에서는 발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기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미국에서 정치가이자 과학자로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790)이 벼락을 피하는 피뢰침을 연구하다가 번개로부터 나오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1752년에 명주실에 연을 매달아 띄워놓고, 전기가 명주실을 타고 번개에서 땅으로 흐르는 것을 실험했다. 1775년에는 이탈리아의 볼타(Alessandro Volta, 1745-1827)가 전기를 저장하는 방법을 발명하여 전기를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 통령 1799-1804, 재위 1804-1815)은 통령 시절인 1801년에 로마교황 비오7(Papa Pio VII)와 정교 협정을 맺고 이후 부속 법령을 만들어 교회의 권리를 탄압했다. 그는 황제 즉위식에서도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 면류관을 썼다. 그러나 그는 과학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과학자들을 후원했다. 그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자에게 상금을 주는 방식으로 과학을 장려했다. 이 덕분에 프랑스는 19세기에 들어 영국을 앞서 과학을 선도하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이때 파리는 세계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5. 결론

 

우리는 이제까지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이후 17세기와 18세기까지의 신학과 과학의 발전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나면서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상적 지배에 종언을 고했다.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전쟁을 겪은 이 시기의 사람들은 신학적인 싸움을 피해 일반적인 학문, 특히 수학과 과학에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유럽은 수학과 과학에서 장래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학의 성과에 의해 일어난 18세기 계몽주의는 유럽 대륙 국가들에서 신학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고, 단지 교회 또는 절대군주의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로마교황과 단절하여 독자적인 종교개혁을 성취하였고, 과학을 이용한 기술의 발전으로 산업혁명을 이룩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은 유럽을 넘어 세계에서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체제를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이것은 영국의 산업혁명이 과학이론을 적절하게 기술적으로 이용한 결과라는 사실은, 이때까지 과학을 이론적으로 탐구했던 여러 가지 동인(動因)에 부의 획득을 위한 목적이 가장 크고 확실하게 추가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때부터 과학은 종교와 관련성을 가지지 않고, 자체적인 목적을 가진 분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이때부터 과학은 산업화 또는 실용화에 더 큰 목적을 두는 응용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이 시기에 과학과 산업에서 독주했으나, 영국에서 추방된 청교도들이 세운 미합중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하면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칼빈주의에는 과학의 발전에 필수적 요소인 경험주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1905년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주장을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스피츠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시대를 서술한 그의 종교개혁사에서 과학은 새로운 종교적 사고방식을 낳게 한 아버지라기보다는 그의 자녀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책을 끝맺음하면서, 과학의 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과학은 한때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분야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또한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에는 종교적

신앙을 대체하기에는 매우 부적당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증명됨으로써 결국 현대

인류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스피츠는 서양 문화와 학문의 어머니였던 신학에서 한 아들로 출생한 과학이, 장성하면서는 어머니를 오히려 무시하는 현상을 이렇게 진술한 것이다. 이렇게 아들이 문제아로 성장하게 되는 것은 결국 어머니인 신학의 책임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기만 했지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피츠가 종교개혁사의 끝에 언급한 신학은 이렇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과학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아들에게 천덕꾸러기가 되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은 왜 어머니를 수치스러워하고 외면하면서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일까? 그들은 우주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물질적인 흔적이나 역사적인 증거로써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운다. 아들은 어머니가 고대의 선조들이 미개한 시대에 쓴 허구적인 신화를 사실로 믿고 있으면서 그의 주장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칼빈도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식은 유모가 아이들에게 하듯이 보통 사람이 이해하고 말하는 방식에 적응된 것이다. 맥그라스는 칼빈이 쓴 적응이라는 단어를 상황에 맞춰 필요와 그것을 이해할 만한 인간의 능력에 맞춰 조정하기 또는 개작하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 과학자들은 성경을 이렇게 적응의 관점으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는 성경적 견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진화론에 근거한 자연적 발생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대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진화론 또는 자연발생설은 입증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 과학자들의 진화론적 주장은 입증된 것이 아니고 단지 설명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화론에서 사용한 입증의 방법을 보면, 그것은 전혀 과학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신학자들이 과학의 진리는 수용하되, 증명되지 아니한 진화론적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말고, 과감히 논쟁에 참여할 필요성을 발견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종교를 대체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의 이론, 특히 진화론은 현대 인류, 특히 신학자들에게 하나의 문제로서 대두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신학자들이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비판함으로써 서로 이해하고 접점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은 신학에서 떠난 과학에 다시 다가가는 첫발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신학이 계속 과학을 외면한다면, 신학은 과학에 의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유배지로 밀려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역사에서 증명된다. 신학은 과학과 싸워서 이긴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신학이 자연의 진리를 해명하지 못했고 또한 받아들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면, 그가 창조하신 우주의 법칙도 진리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영국왕립학회의 역사를 쓴 토마스 스프랫(Thomas Sprat, 1635-1713)16세기의 상황에 대하여, 만약 누군가 싱싱한 공기를 숨 쉬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자연철학이 가장 적당한 과목이라고 하였다. 스프랫은 정치와 신학 논쟁에서 잘못하면 하루아침에 감옥에 가거나 처형되는 당시에 시대적 위험을 피하라는 충고를 우회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의도하지는 않았던 것이기는 하지만, ‘철학적 머리가 수학적 수족들과 결합하는과학적 인재들을 양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와는 다른 상황에서 신학적 입장에서 과학의 진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신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화론적 과학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일어날 산업주의에서는 과학에서 태어난 기술이, 버트란드 러셀이 지적했듯이,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계를 만들어 자연을 정복하기에 이른 기술에 의한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들은 전통적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던 신과 자연의 법칙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와 관련하여 논점을 확대하는 것은 개혁신학의 발전과 비교해서 과학의 발전을 살펴보는 이 논문의 목적이 아니므로 다른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다만 스피츠가 개혁신학이 과학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진술에 신학자들은 특히 유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결론적으로는 개혁신학의 후예들이 과학을 다시 어머니의 품 안으로 안아 들이지는 못할지라도 정당하게 논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과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필요하다는 필자의 주장을 제기해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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